박칠성(1979년생), 박성남(1983년생)형제의 고향은 화룡시 동성진 흥성촌이다. 그곳에서 형제가 연길로‘상경’한 해는 2000년이였다. 정책적 지원이나 기타 경제여건이 좋지 않았던 시기, 형제가 할 수 있는 선택은‘상경’말고는 별로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연길에서의 상황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찾을 수 있는 일자리는 매일 주문서를 들고 슈퍼마켓을 돌면서 주문을 받는 식품도매업체의 영업원자리 정도였다. 그렇게 형제는 서로 다른 회사지만 같은 일을 했다. 오래도 했다. 창업하기 전까지 묵묵히 구석구석에 있는 슈퍼를 돌면서 주문서를 받아왔다.
그러던 형제는 어머님이 뇌졸증으로 쓰러지면서 치료비용을 댈 수 없는 자신들에게 너무 돈이 없음을 깨달았다. 주문량에 따라 월급이 오르고 내리는 상황에서 미래까지는 몰라도 어머님의 치료비용지출이라도 가능 하였으면 변화가 없었을지도 몰랐다. 형제는 좀 더 나은 미래를 희망했다. 적어도 고정된 월급보다는 낫기를 원했다. 어머님의 치료비용이 제일 큰 문제였다.
형제는 그 동안의 자신들이 그동안 겪어온 경험을 생각해봤다. 그러나 생각해 낼 수 있는 일은 그 동안 했던 일인 류통 밖에 없었다. 형제는 2009년 7월 청원식품류통이라는 상호로 자신들의 창업을 시작했다.
말이 듣기 좋은 창업이지 이곳 저곳에서 꾸어온 3만원이 전부였다. 다른 상품의 도매는 이미 큰 손들이 거의 독점하고 있는 터라 상대적으로 경쟁이 적은 한국조미료도매를 시작했다. 적은 자본금에 류통과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때라 들여오는 가격이 비싸고 마진이 적었다. 주문을 받는 일도 배달을 하는 일도 형제의 몫이었다. 비 오는 날, 눈 오는 날 오토바이로 배달하다 아찔하게 사고 날뻔한 적도 여러 차례 있었으나 비용을 줄이고 마진을 남기기 위하여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힘들지만 돈은 조금씩 벌어졌다. 하지만 빈약한 시작 때문에 품목을 늘리고 주문수를 늘리는데 더 많은 돈이 필요할 뿐이었다. 지금은 직원도 여러명 두게 되었다. 취급품목도 200가지 가까이 되었고 한달 결제액도 50만원 가까이 되었다. 하지만 자금이 문제여서 주문은 들어오는데 물건을 들여올 수가 없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어쩌면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나 상업에서 무엇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신용도 형제는 잘 지켰다. 그것이 지속되다 보니 이제는 후불로 물건을 주는 상위도매업자도 꽤 있다고 한다.
거기에 형제는 지금도 주문을 받고 물건을 직접 배달한다. 그렇다고 직원을 믿지 못해서는 아니라고 한다. 본인들의 장사이기 때문에 그래도 본인들이 직접 두 발로 뛰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렇게 주문하고 배달하고를 반복하면서 시장판 상인들과 실없는 우스갯소리도 던질 정도로 친하다고 한다. 이제 시장판 상인들도“같은 물건이면 박씨형제 물건을 팔아줘야지”라고 얘기할 정도라고 한다.
그런 요즘을 형 박칠성 씨는“힘은 들지만 형제가 같이 일하고 있는 지금이 제일 좋은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생 박성남씨는“전화통에 불이 날 정도로 주문이 밀려 들어오면 신이 난다”고 한다. 형제는 그렇게 조금은 다르게 현재를 평가한다.
최근에는 주문과 함께 사평시, 길림시, 흑룡강성 쪽에 더 큰 시장이 있을 것이라는 조언이 들어온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형제는 더 조심스러워 진다. 마음이 급하다고 되는 일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올해부터 형제는 자신들이 추진하는‘청원’상표의 식재료판매에 중점을 둘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수줍은 얘기도 한다. “이제 장가도 가야하는데……”
연변읿 글·사진 정은봉 기자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