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구밖에서 바라본 북대하조선족마을의 풍경.
지난 7월중순,기자는 월드옥타 삼하조선족경제인들의 애심활동을 동행취재하면서 일행과 함께 장성이남의 유일한 조선족마을로 불리우는 하북성 진황도 북대하신구 조선족마을을 다녀오는 꿈같은 행운을 지니게 되였다.
비록 마을에 체류한 시간은 5시간에 불과한 매우 짧은 시간이였지만 오늘까지 깊은 인상을 지울수가 없다.
북대하신구 조선족마을은 무연한 들판에 푸른 벼파도 넘실거리는 논에 둘러싸여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였다.
북대하조선족촌 마을의 일각.
길게 뻗은 콩크리트 길을 따라 마을중심에 들어서니 시골집들의 모습이 한눈에 안겨오면서 어딘가 연변의 전통 농촌마을의 모습을 많이 닮았다는 인상이 들었다.
특히 촌사무실 건물밖벽에 한어와 조선어 두가지 언어로 된 “조선족마을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라는 거폭의 표어는 무척 친근감을 더해주었다.
삼하조선족경제인들이 북대하조선족촌에서 촌지도부 성원들과 기념사진을 남기고 있다.
촌사무실에 도착하니 정영철 촌당지부 서기와 박시우촌장이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정영철 서기에 따르면 북대하조선족마을은 1952년 당시, 량식이 필요한 시점에서 당지 정부가 벼농사를 위해 연변과 흑룡강성에서 조선족기술자들을 인입하면서 세워졌다고 한다.
북대하조선족촌 정영철서기(오른쪽)와 박시우촌장.
최초 박씨와 최씨성을 가진 조선족 농업기술자와 기타 조선족농민들이 함께 14호로 조성된 마을을 건설하였다.
후에 북대하지구에서 벼농사가 활기를 띄기 시작하면서 조선족 인구가 점차 성장하면서 인구가 가장 많을때에는 480여명에 달하기도 하였다.
북대하조선족마을은 건립되여서부터 조선족농민들의 주도하에 당지 주민과 함께 수많은 늪과 진펄의 고인물을 빼고 강물을 다스리면서 진황도 북대하지구에서 벼농사를 보급되는데 기여하였다.
당시 입쌀생산량을 늘여 국가의 생산과 건설을 대폭 지원한 공로로 북대하조선족촌은 여러차례나 정부의 표창과 장려를 받는 마을로 되였다고 한다.
개혁개방후 북대하조선족마을도 조선족 기타 산재지구와 마찬가지로 변화와 격변기를 맞이하였다.
주민들은 수입을 위해 한명,두명 해외와 대도시로 빠지기 시작하더니 마을인구가 급격히 감소되여 현재 주민은 로인과 로약자를 포함해 100여명에 달하고 있는 상황이다.
조선족전통명절 청명절을 즐겁게 쇠고 있는 마을주민들.
인구가 적어지니 여러가지 위기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북대하조선족마을은 벼농사를 위주로 하는 마을인데 로동력 부족으로 농사를 짓는데 큰 영향을 받았다.
그렇다고 무작정 조선족농민들의 삶의 터전인 땅을 팔면 앞으로 마을주민들이 귀향시 생존이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받을것이 뻔하였다.
당시 촌 지도부와 마을년장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원견성있는 지혜와 책임감으로 하나의 촌규칙을 내왔다고 한다.
바로 “그 누구를 물론하고 마을을 떠나는 사람은 땅과 집을 임대는 줄수 있되 절대 팔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처음 규칙을 발표했을때 일부 촌민들은 리해하지 못했다. 마을을 떠나면서 다시는 뒤도 돌아보지 않을 것처럼 헐값에 땅과 집을 팔아 항공권이라도 마련해보려는 단순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촌지도부와 마을 년장자들의 흔들림없는 견지에 그들도 어쩔수 없이 두손을 들수밖에 없었다.
근년래 국가의 정책이 나날이 좋아 지고 집값과 땅값이 올라감에 따라 해내외로 떠난 촌민들은 지금에 와서 당시 촌지도부의 결정이 얼마나 정확하고 필요했는지를 마음속 깊이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마을에 로년인구가 많고 로동력이 없는 상황에서 촌지도부에서는 농민수입증가를 위해 땅을 집중해 관리하는 농장화 방식으로 외지인력을 인입해 농사를 짓고 있다.
그러다보니 땅을 부치지 않는 농민이라도 해마다 수입을 보장받게 되고 평생 땅의 혜택으로 보장이 뒤따르게 된다.
박시우 촌장에 따르면 마을 주민중에 누구라도 언제든지 마을에 돌아오면 함께 농장화경영에 참가할 수 도 있고 스스로 땅을 관리하고 경영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진다고 한다.
“촌민들은 마을에 자신들의 땅과 집 등 재산이 그대로 있으니 매년마다 수시로 마을을 오가고 있고 마을에 대한 애정을 버리지 못하지요.”박시우촌장의 말이다.
그러면서 현재 농촌사업에 관한 국가의 정책이나 촌의 행사 등 여러가지 일이 있으면 위챗채팅방으로 묶어여 있으니 통지도 매우 편리하게 전할 수 있고 서로의 소통도 어렵지 않게 할수 있어 넘 좋다고 한다.
정영철서기는 “외국에 나가 힘들게 일해서 다 잘 사는것이 아닙니다.지금은 당의 정책이 좋고 지방경제도 활성화되여 현지에서도 열심히 일한다면 얼마든지 돈을 많이 벌 수 있습니다.”고 언급하면서 주위에서 외국에 나가 병을 얻고 돌아와서 치료비로 번 돈을 다 밀어놓고 세상을 떠나는 분들을 보면서 마음이 매우 안타깝다고 한다.
촌의 발전과 마을사람들을 념려하는 정영철 촌서기와 박시우 촌장은 어쩌보면 촌을 지켜가는 망부석과도 같은 존재감이 들었다.
장성이남의 유일한 조선족마을, 진황도 북대하신구 조선족촌을 다녀온지도 거의 한달이 되여가고 있지만 지금도 나의 머리속에는 푸르른 벼파도 출렁이고 아담한 가옥들이 줄지어 자리잡은 촌마을의 아름다운 전경이 눈앞에 무한히 펼쳐지며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는다.
/길림신문 강동춘 특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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