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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 창업주 구인회] ‘싸게’보다 ‘좋게’ 만들어라
조글로미디어(ZOGLO) 2015년9월15일 08시23분    조회: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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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인회
[조선 창조경영의 도전자들] 고객과 꾸준한 관계가 기업의 생명 ‘싸게’보다 ‘좋게’ 만들어라

LG 창업주 구인회는 한국 경제 발전의 근간이 된 ‘화학’과 ‘전자’ 두 산업을 개척해낸 선구자이다. 그는 광복을 맞아 락희화학·금성사·호남정유를 설립하며 산업근대화의 초석을 이루었다. 인재난에 시달렸던 산업화 초기에 주류를 이룬 ‘가족경영’을 가장 성공적으로 구현해냈으며, ‘동업으로 일궈 합작으로 키웠다’는 특유의 성장모델을 구축, 글로벌 LG의 토대를 닦았다. 특히 2005년 3월 불협화음 없이 이루어진 GS와 LS, LG 계열 분리는 한국 근대경영사상사에서 이상적인 결별로 두고두고 회자된다.
   
   “한번 사귄 사람과 헤어지지 말고, 헤어지더라도 적이 되지 말라.” 이 말은 후손들을 훈육하고 ‘인화(人和)’를 경영이념과 가훈으로 삼았던 구인회가 남긴 유산이라 하겠다. 그가 싹을 틔운 LG의 경영철학과 기업문화는 오랜 기간 쌓아온 사업 경험과 통찰력, 그리고 기업인으로서 자긍심이 한데 모여 축적된 결과물이다. 인화·신용·근검절약·정도경영·기술혁신·인재존중·국제화로 압축되는 구인회 회장의 경영철학은 2대 구자경과 3대 구본무로 계승되면서 변화·발전해 오늘날 ‘글로벌 LG’를 일구는 토대가 되고 있다.
   
   구인회는 1907년 8월 27일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산마을(현 진주시 지수면 승내리)에서, 홍문관 교리로 일한 할아버지 구연호의 외아들 구재서와 진양 하씨 사이의 맏이로 태어났다. 구인회는 13세 때인 1920년,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 허만식의 장녀 허을수와 혼례를 올린다. 이렇게 구씨와 허씨는 무려 8건의 겹사돈으로 맺어지며 끈끈한 관계를 이어갔다. 구인회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서 한학을 배운 뒤 1921년 지수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한다. 이병철 삼성 회장과 조홍제 효성 회장도 지수보통학교에 다녔다. 구인회는 세 살 아래 이병철과 함께 수업을 듣기도 했고, 한 살 위 조홍제와는 같이 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마을 간 축구시합을 하며 교우가 되었다.
   
   구인회는 20세에 이르러 새로운 세상에 크게 느낀 바 있어 서울 중앙고보 2년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는 사업을 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엄격한 유교 집안의 장손이 장사를 한다고 하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몹시 반대했지만 고집을 꺾지 못했다. 구인회는 먼저 승산리 협동조합 일을 맡았다. 이때 마을에는 무라카미라는 일본인이 잡화류와 문구류, 석유 따위를 독점하여 큰돈을 벌고 있었다. 구인회는 무라카미에 대응키 위해 1929년 지수협동조합을 세워 석유·비누·광목 등을 공동구매해 마을 주민들에게 팔았다. 이렇게 하면 일본인 가게에서 개별적으로 사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무라카미의 사업은 위축되고 구인회는 큰돈을 벌 수 있었다. 한편 구인회는 동아일보 진주 지국장을 맡았다. 여기엔 중외일보를 경영하던 손위 처남 허선구의 영향이 컸다. 그는 대중매체에 대한 식견을 넓혀 나갔다. 경성방송국이 라디오 방송을 시작한 때여서, 라디오를 열심히 들으며 변화하는 세계 정세를 파악하고 새로운 지식을 습득해 나갔다.
   
   1931년, 24세가 된 구인회는 기울어져 가는 가세를 일으키기 위해 본격적으로 자기 사업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그가 고향집을 떠나기 전날, 아버지 구재서는 2000원을 내주며 “세상을 절대 얕보지 말고 남하고 화목하게 지내라, 신용을 얻고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부친의 이 한마디는 오늘날 ‘인화단결’로 상징되는 LG그룹 경영이념으로 굳어졌다. 구인회는 동생 구철회와 함께 자본금 3800원을 만들어 경남 진주에서 포목상 ‘구인회상점’을 열었다. 그러나 사업은 생각처럼 쉽지 않아 첫해에 무려 500원의 손실을 보고 말았다. 이듬해 다시금 아버지를 설득하여, 고향마을 300석지기 논 문서를 담보로 8000원을 빌려 다시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늘은 구인회의 편이 아니었다. 그해 장마 때 억수로 큰비가 내려 가게의 물건들이 모조리 떠내려가고 말았다. 그러나 구인회는 이에 좌절하지 않았다. ‘장마가 든 해에는 풍년이 들어 살기가 좋아질 것이다.’ 그는 굳게 믿고 주위 사람들에게서 다시 거금 1만원을 빌려 포목사업을 벌였다. 그의 예측대로 그해 가을에 풍년이 들어 혼례 수요가 크게 늘자 포목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1937년부터는 경성방직에서 생산되는 태극성표 광목을 대량으로 취급했다. 손아래 처남인 허윤구가 경영하는 조선물산에도 투자해 서울과 만주를 오갔다. 구인회로서는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시기였다.
   
   이 무렵 구인회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저 포목을 파는 것만이 아니라 고객 취향에 맞춰 비단이나 인조견직물에 수를 놓거나 날염을 해서 파는 것이었다. 기존의 대량생산된 문양과 더불어 맞춤식으로 가공된 별도 문양을 제공함으로써 상품의 차별화를 꾀한 것이다. 구인회상점의 별색(別色) 맞춤형 문장은 소비자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 뒤 구인회는 청과물·수산물·식료품 도매에까지 발길을 넓힌다. 그는 직접 발품을 팔며 수집한 고객의 목소리를 제품에 반영했고 시장 상황을 예측해 고객이 원하는 것을 미리 제안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 끝에 구인회상점은 다른 포목점을 제치고 대단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구인회는 늘 강조했다.
   
   “싸게 만들기는 쉽지요. 그러나 제품이 성공하려면 좋게 만들어야 합니다. 좋은 상품은 잘 팔리는 법이에요. 또 제품이 잘 팔린다는 이유만으로 결코 값을 흐리지 말 것이며, 한때 잠깐 팔아치울 생각은 절대 금해야 합니다. 고객과의 꾸준한 관계만이 기업의 생명이지요.”
   

▲ 1954년 LG가 국내 최초로 만든 치약인 ‘럭키치약’.
그즈음 유림 사회에서 명망이 높았던 안희제와 구인회는 교분을 이룬다. 구인회보다 스물두 살 위인 안희제는 부산 중앙동에 포목을 거래하는 ‘백산상회’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런데 백산상회는 포목점 간판은 명목뿐이었고, 실제로는 중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자금 제공처였다. 김구가 광복을 맞은 조국에 돌아와서 먼저 안희제의 유가족 안부부터 물었다는 사실은 안희제의 역할이 얼마나 막중했던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런 안희제가 어느 날 구인회를 찾아와 독립운동자금으로 1만원을 요청했다. 쌀 한 가마에 2원50전 하던 시절이었다. 구인회는 두말없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돈 1만원을 만들어 안희제에게 내주었다. 그즈음 독립운동자금을 주고받는 일은 그야말로 목숨을 내놓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 구재서도 독립운동가 구여순을 통해 5000원이라는 큰돈을 임시정부의 김구에게 보낸 바 있다. 구인회는 청년 시절 구인회상점을 통해 경영자로 성장한 뒤 1941년 ‘주식회사 구인상회’를 발족하여 본격적인 사업가로서 운수 및 무역업에 뛰어든다. 그는 이어 광복을 맞아 1945년 9월 새 출발을 결심하고 귀환 동포와 미군 진주로 북적이는 부산으로 사업 터전을 옮긴다.
   
   구인회는 부산 서대신동에 일제가 남기고 간 적산가옥을 사들여 1945년 11월 ‘조선흥업사’를 설립한다. 조선흥업사는 미 군정청이 승인한 무역업 허가 제1호 업체였다. 그즈음 광복된 한국에서 당장 필요로 하는 것은 각종 생활필수품이고, 그것들을 외국이나 타 지방에서 교역을 통해 가져오는 일이 급선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46년 1월 구인회의 장인 허만식의 6촌인 허만정이, 자신의 셋째 아들 허준구(뒷날 LG 명예회장)를 데리고 부산으로 구인회를 찾아왔다. 허만정은 사업자금을 내놓으며 아들 허준구에게 경영을 가르쳐달라고 부탁했고 구인회 또한 도쿄 유학생 출신의 허준구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허준구는 그때 24세였는데, 이미 구인회의 동생 구철회의 맏사위였으므로 남도 아니었다. 이것이 LG의 두 집안 로열패밀리인 구씨·허씨 체제의 시발점이 된다.
   
   광복을 맞아 우후죽순으로 설립된 기업들 대다수는 일본인이 남기고 간 설비와 기술을 그대로 이용해 제품을 생산하는 수준이었다. 그런 탓에 원료가 부족하고 직공들이 숙련되지 못해 상품은 무척이나 조악했으며 그마저도 넘치는 수요와 부족한 공급으로 비싼 값에 팔려나갔다. 그러나 구인회는 달랐다. 제조업에 뛰어든 이래 설비와 기술을 하나하나 자력으로 마련해 가며 화장품에서 플라스틱으로, 이어서 전자산업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그즈음 구인회의 동생 구정회가 흥아화학공업사 화장품 기사 김준환을 알게 된다. 김준환은 그 무렵 화장품업계의 최고 기술자로 손꼽혔다. 그를 통해 구정회는 흥아화학이 도청 상공과 지정업체에 크림과 머릿기름 등 화장품을 공급한다는 정보를 얻게 된다. 구정회는 이 일을 구인회에게 알렸다. 이미 사업가로서 원숙기인 40대에 접어든 구인회는 화장품 사업의 성공을 확신했다. 그는 먼저 흥아화학과 손을 잡고 화장품을 받아 전국에 팔았다. 그런데 흥화화학에서 김준환이 퇴사하자 구인회는 그를 영입하여 아예 화장품 제조에도 뛰어든다. 자금 마련을 위해 고성 땅 300마지기는 물론 정성 들여 키워 온 구인상회도 과감히 정리했다.
   
   1947년 1월 5일 락희화학공업사(樂喜化學工業社)를 창립함으로써 LG의 역사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화장품 이름도 상호와 같은 발음으로 ‘럭키(LUCKY)’라고 지었다. 구인회는 1949년 서울 장충동에 화장품 연구실을 차려 셋째 동생 구태회(LS전선 명예회장)와 넷째 동생 구평회(E1명예회장)에게 화장품 연구를 맡겼다. 뒤이어 초등학교 교사인 장남 구자경(LG그룹 명예회장)이 합류하여, 지방산에서 화장품 원료를 추출하는 방법과 화장크림이 부드럽게 잘 발라지는 방법을 개발하는 등 자체 연구로 난관을 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이때 자체 연구개발로 만들어낸 투명크림은 유명한 미국 여배우 ‘디아나 다빈’을 모델로 해 일반에 첫선을 보였다. 럭키크림은 그때 화장품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일제 메이쇼쿠크림을 시장에서 밀어내고 ‘해외에서 들여온 외제품’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큰 인기를 모았다. 경쟁 제품들이 1타스에 500원 남짓 할 때 럭키크림은 그 두 배인 1000원이었지만 물건이 없어 못 팔 정도였다. 여기에는 품질우선주의를 고집한 구인회의 확고한 경영철학이 밑바탕이 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구인회는 락희화학을 부산으로 옮겨 사업을 이어간다. 구인회는 구자경에게 혹독한 경영수업을 시켰다. 구자경은 근로자들과 같이 먹고 자며 밑바닥에서부터 일을 배웠다. 공장에서 숙직할 때면 판자벽 사이로 모래바람이 들어와 자고 나면 온몸이 모래투성이였다. 겨울에는 찬바람이 몰아쳐 침낭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자야 했다. 허름한 야전점퍼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기름을 묻힌 꼴이 영락없는 공장 근로자였다. 주위에서 후계자를 왜 그렇게 고생시키는지 묻자 구인회는 이렇게 말했다.
   
   “대장장이는 호미 한 자루 만드는 데에도 담금질을 되풀이해 무쇠를 단련하지요. 내 아들이 귀하니까 저렇게 일을 가르치는 것이오.”
   

▲ 1947년 LG가 국내 최초로 만든 화장품 ‘럭키크림’.

   덕분에 구자경은 현장에서는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의 전문가가 되었다. 그런데 곧 문제가 생겼다. 화장품 품질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운반 과정에서 용기 뚜껑이 부서지기 일쑤여서 소비자들의 불만과 반품이 날로 늘어났다. 구인회는 미군 PX에서 보았던 플라스틱 제품으로 눈을 돌렸다. 1951년 구인회는 플라스틱 가공산업에 새로운 도전장을 내밀었다. ‘깨지지 않는 화장품 용기 뚜껑’ 말고도, 일본·홍콩·마카오 등에서 밀수품으로 흘러들어 오는 칫솔·비눗갑·빗 등 생활용품을 국산화하겠다는 결심을 실천에 옮긴 것이다.
   
   그때는 6·25전쟁의 불길이 날로 격해지던 시기였다. 다른 기업들은 새로운 사업계획은커녕 일본으로 터를 옮겨야 하나 고민하던 때, 구인회는 가진 돈 3억원을 몽땅 털어 미국에서 최신형 플라스틱 사출성형기 두 대를 들여왔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일생일대의 모험이었다. 이듬해 4월에 부산 범일동 공장을, 11월에는 부전동 공장을 각각 세워 나갔다. 그해 9월부터는 ‘오리엔탈’이라는 상표로 플라스틱 가공제품인 빗·비눗갑·세숫대야·식기류 등을 생산하기 시작해 국내 시장에 본격적인 플라스틱 시대를 열어간다.
   
   이때 대한민국 정부는 부산으로 피란 와 있었다. 상공부 장관 이재형은 락희화학에서 국내 처음으로 개발 생산한 ‘플라스틱 빗’을 국무회의 때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여주었다. 국내 최초 생산 플라스틱 제품을 대통령에게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이재형이 보고했다.
   
   “각하, 이제 이런 제품을 한국에서도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이것이 한국에서 만든 것이오?” 이승만은 직접 빗을 하나 집어 하얀 백발머리를 빗었다. 그러고는 감격해 하면서 말을 이었다. “상공부 장관, 나 이거 하나 주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만한 일화이지만, 이처럼 락희화학의 플라스틱제품 생산은 한국 화학산업의 한 획을 긋는 쾌거였다. 제품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자, 구인회는 사출성형기 넉 대와 칫솔제조기를 더 들여왔다. 플라스틱 사출의 성공은 구인회가 산업 분야로 한발 더 힘차게 내딛는 계기가 되었다.
   
   구인회는 초기 성공을 계기로 새로운 아이템으로 사업을 확장하고자 했다. 휴전이 이루어진 이듬해인 1954년 10월에는 본격적인 플라스틱 사업을 위해 부산 연지동에 10만㎡(3만평) 대단위 공장을 건설했다. 이듬해인 1955년부터 연지동 공장이 본격 가동되어 비닐원단과 플라스틱 제품이 대거 생산된다. 구인회는 국산 치약을 개발하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미국과 독일 등지에서 배합기, 충전기와 튜브제조기를 들여오고, 동생 구평회를 미국에 보내어 제조기술을 배워 오게 했다. 구평회는 콜게이트사는 물론 듀폰·다우케미컬·허큘리스 등 대형 화학회사들을 8개월 넘게 수없이 드나들며 정확한 배합 기술을 알아냈다. 락희화학 개발진은 그 자료를 바탕으로 일 년 가까이 실험하여 콜게이트 치약과 거의 똑같은 치약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구인회는 고개를 저었다.
   
   “버터 먹는 미국 사람 치약과, 김치 먹는 한국 사람이 같은 치약을 쓸 수 있겠소? 한국 국민의 입맛과 취향에 맞춰야 하오.”
   
   락희화학 개발진은 여러 향료회사들과 접촉하여, 마침내 한국 사람 입맛에 맞게 톡 쏘는 맛과 은은한 맛의 중간 맛을 내는 치약을 만들어낸다. 처음에는 외국 치약에 밀려 지지부진했으나, 국군부대에 납품하게 되면서 비로소 숨통이 트인다. 군복무 중에 럭키치약을 썼던 사람들은 전역 뒤에도 버릇처럼 럭키치약을 쓰게 되었다. 마침내 럭키치약은 출시 3년 만에 콜게이트 치약을 몰아내고 국내 시장을 석권, LG화학 간판상품으로서 소비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럭키치약이 시장을 독점하자 임직원들은 값을 올리거나 값싼 원료를 써서 이윤을 늘리자는 말도 있었다. 그러자 구인회는 호통을 쳤다.
   
   “소비자들이 잘 사준다고 값을 올려 받자는 거요? 몇 푼 안 남아도 좋으니 봉사하는 자세를 지켜나가면, 럭키의 신용이 소비자의 머릿속에 남게 되고 결국 그것이 진실로 돈을 버는 길이 되는 것이오.”
   
   구인회는 창업 초기부터 형제와 친척 중심의 경영체제를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인재를 구할 때에는 철저히 지연과 학연에서 벗어나 기업을 키울 대목을 찾는 데 노력했다. 1956년 락희화학은 서울대 공과대와 법대에 우수 졸업생 추천을 의뢰하여, 필기와 면접을 거쳐 3명을 채용했다. 이듬해 봄에는 공개채용 신문광고를 낸 뒤 구름처럼 몰려든 응시자 가운데에서 7명을 뽑았다. 구인회는 합격자들을 서울과 부산에 골고루 배치해 밑바닥부터 일을 익히도록 했다. 사전 전문지식이 있건 없건 일선에서 어려움에 부딪히며 배워야 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구인회는 함께 회사를 일궈나간 직원들을 부를 때는 ‘한 형, 박 형’ 하며 존칭을 사용했다. 그는 직원들을 가족처럼 생각했으며, 특히 그때 전무로 일하던 구자경에게는 ‘장남으로서 책임을 잊지 말 것’을 당부하곤 했다.
   
   <다음 호에 하편 계속>
   
고정일
   
   1940년 서울 출생. 성균관대 국문과 졸업. 2000년 소설 ‘청계천’으로 ‘자유문학’ 수상. 1956년~현재 동서문화사 발행인. 1977~1987년 동인문학상운영위집행위원장. 저서 ‘한국출판 100년을 찾아서’ ‘장진호’ ‘이중섭’ ‘매혹된 혼 최승희’ ‘폭풍 속에서’ ‘대하소설 불굴혼 박정희’. 한국출판학술상 수상, 한국출판문화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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