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시 방향에 히드라 한 무리 착석. 바닥 청소 준비합시다." "케이크 살인마 왔네요. 진열대 사수하세요."
서울 성동구 한 대형 커피 매장에서 관리직으로 일했던 조모(30)씨는 신입 알바생이 오면 '손놈 목록' 먼저 교육했다. 제목을 보시라. '손님'이 아니라 '손놈'이다. 이 목록은 각종 '진상' 손님을 유형별로 나눠 별명과 특징을 적어 놓은 이 카페 비공식 블랙리스트. '히드라'는 대여섯 명이 함께 아메리카노 한 잔 시켜 놓고 2~3시간 버티는 고등학생을 가리킨다. 특징은 바닥에 침 뱉기.
'케이크살인마'는 케이크나 샌드위치를 들고 이리저리 뒤집어보며 내용물을 뭉개 놓는 손님 유형이다. 끝내 사지는 않는다. 조씨는 "하루 최소 200명 넘게 찾는 매장이다 보니 별의별 진상 단골이 다 있어 대처 방안으로 리스트를 만들었다"며 "진상 손님 앞에서도 항상 고개 숙일 수밖에 없는 처지를 웃음으로 달래기 위한 소심한 반항이었다"고 했다.
이 카페 단골 진상 유형은 이렇다. 커피에 시럽을 잔뜩 넣고 절반만 마신 뒤 너무 달아 맛이 이상하다며 새 걸로 달라는 '시럽성애자', 휴지 한가득 가져가 테이블 위에 갈가리 찢어놓는 '가위손', 허니브레드에 직접 가져온 슬라이스햄과 치즈 따위를 넣어 다시 만들어달라는 '메뉴 크리에이터(창작자)', 직원만 열 수 있는 냉장고 문을 굳이 자기가 열겠다며 실랑이하는 '(열려라)참깨'까지….
그중에서도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고래' 유형과 아무런 이유 없이 화내며 욕하는 '사이코패스' 유형을 조씨는 최악으로 꼽는다. "최악 중의 최악은 둘을 합친 '사이코 고래'예요. '아메리카노 뜨거운 거 먹을까?'라고 물어보기에 '뜨거운 아메리카노 드릴까요?'라고 답하면 '이 더운 날 뜨거운 걸 어떻게 먹느냐'며 다짜고짜 얼굴 붉히며 소리지르는 손님도 있었죠."
마음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조씨와 직원들이 암암리에 공유하는 노하우도 있다. 겉으로는 죄송한 척하면서 속으로는 분노를 쏟아내는 법이다. 먹고살기 위해 일단 죄송해야 하기에, 오늘도 진상 앞에서 입 뻥긋한다. "죄송합니다!" 속으로 이렇게 말하면서. '그런데 너 같은 또라이에게 사과해야 하는 나 자신에게!'
"왜 나만 안 돼!"… 진상도 공유한다
"제가 정말 진상인가요?"
지난달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익명의 글이 하나 올라왔다. 집 주변 빵집에서 대표 메뉴를 한 사람당 3개씩만 파는데, 임신부인 자신에게 2인분을 팔지 않아 직원과 한바탕 싸웠다는 내용이었다. 댓글에는 '그럼 버스 탈 때 임신부면 교통카드 두 번 찍느냐' '진상이 맞는다'는 등의 의견이 우세했지만, 글쓴이는 억울함을 항변했다. "지역 커뮤니티를 보니 다른 임신부는 배 속의 아기까지 포함해 6개를 샀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빵집 직원이 너무 단호하게 안 된다고 말하는 게 화가 났어요. 빵 개수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왜 저만 차별받아야 하죠?"
억울한 감정은 판단력을 흐린다. 전문가들은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진상 행위를 공유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차별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진상을 부리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김지호 경북대 심리학과 교수는 "진상 행위가 인터넷에 올라와 공유되면 사람들은 자신이 한 행동의 옳고 그름을 생각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받은 서비스에 집중한다"며 "결국 무리한 요구를 당당하게 하게 되고 통하지 않으면 자기가 차별받았다는 억울함에 폭발하는 이가 많다"고 했다.
진상은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알뜰함과 결합해 '현명한 소비 방법'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소비 정보 공유 커뮤니티에 종종 올라오는 '코스트코 쇼핑 노하우'가 대표적인 예. 핫도그 구매 고객을 위해 준비한 양파를 비닐봉지에 쓸어 담는 '양파 거지', 1kg짜리 체리를 카트에 담아 여러 개 빼먹은 후 몰래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는 '체리 거지', 푸드 코트에서 무한 리필 가능한 음료수를 페트병 여러 개 가져와 채워가는 '콜라 거지' 등 상상을 초월하는 각양각색 진상법이 인터넷으로 공유됐다. 한동안 코스트코는 '진상 집합소'라고 불렸다. 혼자 하기 어려운 진상도 인터넷을 통해 다른 사람이 한 것을 확인하면 정당성을 얻고, 마치 자신의 당연한 권리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컴플레인? 난 그런 건 모르겠고
익숙하지 않은 컴플레인 문화가 진상을 키운다는 분석도 있다. 문서로 서비스에 대한 불만을 남기는 절차를 걸쳐 적절한 보상을 얻는 서구권 컴플레인 문화와 달리, 한국은 현장에서 직원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데 더 익숙하다는 것이다. 실제 friday가 SM C&C 설문 조사 플랫폼 '틸리언프로(Tillion Pro)를 통해 전국 성인 남녀 80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8.3%가 '서비스에 대한 불만을 문서로 만들어 기업에 공식 항의한 경험이 한 번도 없다'고 답했다. 문서로 항의하기 꺼리는 이유로는 '과정이 복잡하고 익숙하지 않다'가 54.9%로 가장 많았고, '서비스를 제공한 종업원이 본사로부터 해를 입을까 두렵다'(18.2%), '즉석에서 종업원에게 따지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15.4%), '본사에서 제공하는 보상보다는 종업원의 사과를 원한다'(10.2%) 순이었다.
이훈 한양대 관광학부 교수는 "1980년대 국내 기업들이 선진국 수준에 맞는 서비스 기준에 급하게 맞추려다 보니 과도하게 고개를 숙이고 친절을 베풀게 되면서 '고객은 왕'이라고 받아들이게 됐다"고 했다. 이 교수는 "아직도 기업에서 고객이 본사에 항의하는 것을 서비스의 큰 실패로 생각하다 보니 현장에서 직원들이 자체적으로 고객의 불만을 해결하도록 하는 문화가 생겼다"며 "그 때문에 공식적인 컴플레인의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큰소리치며 따지지만, 정작 조용히 서면으로 항의하는 고객들보다 적절한 보상은 얻어내지 못한다는 얘기다.
호구가 진상 키운다
현장에 있는 서비스업 직원에게 모든 문제 해결을 떠넘기는 풍토도 문제로 지적된다. 지난달 사내 익명 커뮤니티 앱 '블라인드'에서는 '대한항공 치킨 카레'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사건의 경위는 기내식으로 치킨 카레를 주문한 고객에게 승무원이 실수로 카레를 접시에 담지 않고 햇반만 가져다줬다는 것. 승객은 현장에서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다가 대한항공 공식홈페이지 '고객의 소리'에 불만을 적어 본사에 접수했다. 대한항공은 카레를 준 승무원은 징계하고, 이 승무원을 책임진 팀장은 직책을 강등했다. 네티즌 사이에선 '현장에서 따지면 되는 걸 괜히 본사에 항의해 승무원의 경력을 망치냐'는 의견과 '카레 하나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징계를 내린 사측의 문제이지 컴플레인한 사람의 잘못은 없다'는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승무원으로 일하다 지난해 그만둔 이모(29)씨는 '고객의 소리'라면 진저리를 친다. 이씨는 "회사 간부들까지 보는 고객의 소리에 혹시라도 이름이 올라가는 날이면 사정 따지지도 않고 회사 생활 끝"이라며 "고객의 소리에 이름 적히지 않기 위해 손님 목소리가 커질수록 일단 '죄송하다'고 고개 숙이며 현장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했다"고 했다.
김지호 교수는 "대기업이 원칙을 지키며 절차대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서비스라며 갖은 진상 행동을 눈감아주다 보니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는 구시대적 논리가 아직 서비스업계에서 통한다"며 "서비스업 종사자라면 일단 고개 숙인다는 생각에 이를 감정의 배설구로 사용하는 진상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자신의 불안정한 지위를 자위(自慰)하려는 행위로 해석되기도 한다. 윤상철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는 "진상이라는 말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IMF 외환 위기가 터진 이후 대중 매체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며 "지위가 불안정한 사람들이 상대적 약자인 점원들에게 무례하게 굴어 대접받으면서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려는 심리"라고 했다.
'손님' 대접받으려면 인사부터
진상은 대개 사회적 약자 앞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취업포털 잡코리아와 알바몬이 알바생 2507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 따르면, 알바생 93%가 손님의 매너 없는 행동에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알바생들이 진상이라고 느낀 '비매너 유형'으로는 '반말로 명령하듯 말할 때'(54.2%·복수응답)가 가장 많이 꼽혔다. 이어 '돈이나 카드를 던지거나 뿌리듯 줄 때'(32.6%), '알바생 권한 밖의 일을 요구할 때'(28.2%), '자기가 실수해놓고 무조건 사과하라고 할 때'(24.7%), '트집 잡아 화풀이할 때'(15.6%) 순이었다.
물론 진상 손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손님의 매너 있는 행동에 감동한 적이 있다'는 응답도 84.9%였다. 감동을 준 손님의 행동으로는 '내가 건넨 인사를 상냥하게 받아줄 때'(47.4%), '나의 서비스에 감사함을 표할 때'(46.7%), '실수해도 이해해주고 기다려줄 때'(36.5%),'힘들지 않으냐고 걱정해줄 때'(15.5%), '손님이 있었던 자리가 깔끔할 때'(14.8%) 등을 꼽았다.
'손님'은 '다른 곳에서 찾아온 사람', '여관이나 음식점 따위의 영업하는 장소에 찾아온 사람'을 뜻하는 '손'의 높임말. 서울 성동구의 한 카페에서 일하며 '손놈 목록'을 만들었던 조모(30)씨는 "'어서 오세요'라고 웃으며 인사했을 때 '네, 안녕하세요'라고 답해주는 게 뜻밖에 가장 감동적인 말이었다"고 했다. 손님 대접받고 싶다면 진상 부리기보다 답 인사 한마디 건네는 게 더 확실한 방법이란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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