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에서 개그맨 표인봉씨 사회로 열린 '제1회 전국댄스대회'. 전국에서 춤으로 이름 꽤 날린다는 사람들이 다 모인 이 대회에서 대상은 조원상, 금상은 송정훈. 참가자 이름에는 장우혁이 있었다. 조씨는 훗날 '자자'라는 혼성그룹으로 데뷔해 '버스 안에서'라는 히트곡으로, 장씨는 한 시대를 지배했던 아이돌그룹 'HOT' 멤버로 기억되는 이름이다.
송씨도 많은 기획사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다. 그중에는 SM 그룹의 이수만 대표도 있었다. 그러나 송씨의 대답은 No. 기획사에 소속되면 댄스대회에 맘 편하게 출전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송씨는 1~2년을 자유롭게 춤추다 가수 데뷔를 위해 한 기획사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친한 매니저 형이 불렀다.
"정훈아. 난 네가 연예인이 될 것 같아. 그런데 가수는 아닌 것 같아. 난 네가 코미디언이 되면 성공할 것 같아."
충격이었다. 정훈의 '외모'에 대한 우회적 부정(否定). 그 길로 연습실을 나왔다. 홧김에 술집 웨이터로 취직했다. 아직 법적으로 미성년자인 정훈의 밤은 불안과 방황의 연속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정훈이는 어떻게 됐을까. 그는 발레리나와 결혼을 했고, 다섯 아이의 아버지다. 그리고 미국에서 연 수백억원대 매출을 올리는 사업가다. 제품은 컵밥. 미국 전역에 매장만 21개, 인도네시아에도 진출했다. 지금까지 판 컵밥 개수는 523만1970개. 지난 12일 서울 동작구 노량진 컵밥 거리에서 송 대표를 만났다.
실패한 춤꾼에서 컵밥 사업가로
가수의 꿈이 무너지고 방황하던 그에게 부모님이 미국 유학을 제안했다. 누나가 먼저 가서 공부하고 있던 미 유타주였다. 한 달 생활비가 10만원일 정도로 검소한 부모님이었지만, 미국에 가서 6개월만 살다 오라고 했다. "여기 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된다. 가서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눈으로 봐라."
친구도 없고 영어도 못해 단조로웠던 미국 유학 생활. 어느 날 현지 '아시안 페스티벌'에서 발레를 전공한 아내를 만났다. 끈질기게 쫓아다녔고 마침내 결혼까지. 아이도 태어났다. 새로운 꿈이 생겼다. '책임감 있는 가장, 남편, 아버지가 되고 싶다.'
누나와 매형에게 치기공 기술을 배워 3년을 꼬박 일했다. 태어나서 그렇게 오래 앉아 있던 것도 처음이었다. 근데 더 이상은 못하겠다는 느낌이 왔다. 아내에게 "그만두고 사업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때 아내가 말했다. "오빠가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 내가 도울게." 아내는 셋째를 임신 중이었다.
―치기공을 그만두고 한 첫 사업은?
"이것저것 다 했어요. 가정집 문 두들기며 귀걸이도 팔았고. 한 번은 아내와 4박5일 캘리포니아로 무작정 여행을 다녀왔어요. 가는 데 10시간, 오는 데 10시간 운전이었죠. 라스베이거스를 제외하곤 가는 내내 아무것도 없는 사막. 도로 위에서 저는 아내에게 이것저것 사업 아이템을 다 던져봤어요. 하나같이 고개를 흔들던 아내가 끄덕인 사업이 '고릴라 VIP 할인 쿠폰' 사업이에요. 카드만 보여주면 매장 할인이 되는 거였죠. 아내가 돈이 없으니깐 쿠폰을 모아 썼는데, 필요할 때면 늘 사라지고, 기간 만료되고 그랬거든요. 왜, 그 시절 영화 '엽기적인 그녀'를 보면 나이트클럽 들어갈 때 차태현하고 전지현이 주민등록증 딱 보여주고 들어가잖아요. 그걸 보고 비슷하게 보여주기만 하면 할인이 되는 카드를 만들어보자고 했죠. 한국에서 원가 120원짜리 카드를 사 와서 개당 4만원에 팔았어요. 그때 성공한 가맹점 숫자가 400개. 이 숫자를 따려면 2000개를 돌아다녀야 해요. 이 사업의 승부수는 얼마나 좋은 가맹점을 많이 따느냐였죠."
―5개 중 1개면 높은 확률인데요?
"안 된다고 해도 끈질기게 갔으니깐요. 그러니까 '너 그만 와, 내가 사인할게' 이런 사람들이 진짜 많았어요. 다른 쿠폰 회사도 많았는데, 그들이 잡지 못한 걸 제가 진짜 많이 성공했죠. 그러면 경쟁자들이 물어봐요. 그럼 제가 '스무 번 가봐' 이러죠. 전 초콜릿도 갖다 주고, 마술도 보여주고 그랬어요."
―거절당하는데도 다시 찾아갔던 비결은요.
"물론 저도 거절당하면 화도 나고 욕도 나요. 그때 아내가 셋째 임신한 몸으로 같이 다녀줬어요.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느라 내 아내가 이렇게 힘든데, 주저앉으면 안 되죠. 한 번은 식당 아주머니가 불쌍하다며 기름 값 하라고 50달러를 줬어요. 그 돈을 그대로 아내에게 줬는데, 매우 기뻐하더라고요. 오랜만에 생활비를 준 거였거든요. 제가 어떻게 번 돈인지 아니깐. 그 모습을 보니 너무 힘이 났어요. '50달러 갖다 줘도 이렇게 행복해해?' 원동력은 가족입니다."
―아내 분이 대단하시네요.
"엄청난 미인이에요. 그런데 '싸가지'가 있어요. 제가 한 번 물어본 적이 있어요. '너 나랑 왜 결혼했니? 난 공부도 못했고, 반듯한 직업도 없었는데.' 그랬더니 아내가 그래요. '난 오빠의 그릇이 굉장히 커질 거라고 봤어. 난 오빠의 미래를 보고 오빠를 선택했어.'"
―푸드트럭 사업은 어떻게 시작했나요.
"어느 날 유타에서 열린 음식 컨벤션 행사에 가게 됐어요. 베트남 음식부터 아프리카 음식까지 다 있는데 한국 음식만 없는 거예요. 서운하고 자존심 상했죠. 그때 같이 일하던 친구가 대학교 주변에 푸드트럭이 많다며 쿠폰 사업 가맹점으로 영입하자는 거예요. 그래서 그날로 가장 인기가 좋은 푸드트럭 3대와 계약을 맺었는데, 그 사업을 직접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대형 경기장 입점 비결은요?
"컵밥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경기장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먼저 축구장 리오틴토를 운영하는 외식기업 담당자를 찾아가 5분만 이야기를 하자고 한 후 사무실 내 30명에게 음식을 대접했어요. '한 명이라도 맛이 없거나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 우리랑 일 안 해도 된다'고. 결국 성공했죠. 구장 내 매출 1위를 하자, 이후 농구 경기장 입점으로 이어졌어요."
―인도네시아 진출은요?
"푸드 트럭 한 대 몰고 다니던 초창기에 저희를 따라다니던 인도네시아 친구들이 있었어요. 늘 마시듯 빨리 먹기에 배가 많이 고픈가 보다 하고 밥을 듬뿍 추가로 줬는데, 1년쯤 지났을 때 묻더라고요. '인도네시아에 프랜차이즈를 내면 안 될까?' 제가 장난처럼 '1년 더 날 따라다니면 생각해볼게'라고 했더니 진짜 따라다녀요. 알고 보니 이 친구가 잡지 포브스도 소개했던 인도네시아 대기업 카완 라마 집안의 자녀인 거예요. 저희에게 파트너십을 제안한 사람이 그 대기업 회장이었지요."
순금 귀걸이 사준 어머니
고릴라라는 별명과는 달리 송 대표가 어렸을 땐 왜소했다. 빈혈·알레르기도 심했다. 부모의 바람은 '오직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구슬치기, 딱지치기, 지우개 따먹기 등은 동네 1등이었다. 그래도 평생 술·담배는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뭐라셔요.
"제게 한 번도 '이놈 새끼야'란 말을 안 하셨어요. 대신 '난 널 믿는다'고 하셨어요. 학창 시절 전 레게파마하고 허리 40인치 넘는 바지 입고 농구 선수 샤킬 오닐이 신던 큰 신발 끌고 다녔단 말이에요. 그러면 주변 친구 부모님들은 '쟤랑 놀지 마라'고 해요. 그런데 저희 부모님은 제가 자존심 상할까 봐 한 번도 혼내지 않으셨어요. 한 번은 제가 귀를 뚫고 오니까 '꼭 귀걸이를 해야겠니?'라고 하셔요. 그래서 제가 '어쩔 수 없어요. 이미 뚫었어요'라고 대꾸했어요. 그런데 자고 일어나니 책상 위에 진짜 금귀걸이가 두 짝 있더라고요. '꼭 원한다면 금으로 끼워라'는 쪽지와 함께. 제 힙합바지가 빨주노초 색깔별로 다 있었거든요. 당연히 어머니는 싫어하셨겠지요. 그래도 표현은 안 하셨었어요. 그런데 군대를 갔다 왔더니 바지 물이 다 빠져 있더라고요. 나중에 누나가 말해줬어요. 제가 보고 싶으실 때마다 그걸 빠신 거예요. 어떻게 보면 제일 싫었을 바지인데, 그게 아들이라고 생각하신 거죠."
―부모가 되니 그 마음을 이해하나요?
"그게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는 걸 아이를 키우면서 더 느낍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것과 아이를 믿는다는 건 다른 차원의 인내심이란 걸 깨달아요. 제가 그렇게 공부를 안 했으면서 아이들에게 '공부해라'라고 잔소리도 했다니까요. 지금은 절대 안 해요. 이젠 아이들이 '뭘 좋아하고 잘하지?'를 고민해요. 대신 아이들에게 돈에 대한 가치는 가르치고 싶어요. 저희 집에는 아이들이 필요하거나 갖고 싶은 것들을 미리 사놓은 '미니 가게'가 있어요. 아이들이 착한 일을 하면 포인트를 주고, 나쁜 일을 하면 포인트를 뺏어요. 아이들은 포인트를 모아서 그 가게에서 물건을 살 수 있어요."
―아이들이 어떤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나요?
"'싸가지'가 있는 아이로 컸으면 좋겠어요. 전 1978년생들이 치른 전국 모의고사에서 제 밑으로는 100명밖에 없을 정도로 공부를 못했어요. 하지만 단 한 번도 '싸가지 없는 놈'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어요. 그건 제가 생각하는 가장 큰 욕이에요. 제가 생각하는 '싸가지'는 먼저 예의가 발라야 해요. 그리고 눈치가 있어야 해요. 전 사업을 하는 젊은 친구들도 '싸가지'를 먼저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른 건 실패하면서 천천히 배우면 돼요."
―앞으로의 계획은요?
"'컵밥으로 우주 정복'요(웃음). 한국 사람들이 다른 나라로 여행 갔을 때 어디서나 '저기 컵밥 있네?'라는 말을 했으면 좋겠어요. 개인적으로는 좋은 아빠가 돼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우는 것요. 지금도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계속 나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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