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에르빈 슈뢰딩거(1887∼1961)는 과학 강연에서 놀랄 만한 주장을 펼친다. 나라는 존재가 서울에서 자전거를 타는 동시에 부산에서 바다를 구경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를 우주로 간주하면 서로 다른 우주가 발전할 수 있다. 슈뢰딩거의 얘기는 최근 천체물리학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다중우주론의 시초가 된다. 다중우주론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를 포함해 가능한 모든 우주들을 가정한다. 각각의 우주는 시공간과 물질, 에너지의 물리법칙을 갖고 있다.
슈뢰딩거는 자신의 방정식이 대안적 세계보다는 동시에 일어나는 여러 가능성들을 설명한다고 말했다. 그는 양자물리학을 방정식으로 정리하는 데 기여해 노벨상을 수상했다. 양자물리학이란 거시 세계와는 반대되는 미시 세계의 법칙을 밝힌다. ‘앤트맨’에서 주인공이 한없이 작아져 그 존재 자체가 없어지는 장면을 떠올리면 쉽다. 주인공은 그 어디에도 없고 그 어디에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어제 짜장면을 먹은 나는 후회하고 있다. 짬뽕을 선택하지 않아서다. 지금의 나는 어제의 내가 이어진 존재이다. 하지만 또 다른 내가 존재할 가능성은 없을까? 가지 않은 길, 즉 짬뽕을 선택했다면 발생하는 사건들은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 그 세계엔 후회하지 않는 내가 존재할지 모른다. 어제 짬뽕을 먹은 만족감으로 살고 있는 내가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연속적 결정이 개입한다. 하나의 결정은 다른 결정의 가능성들을 이미 내포한다. 물론 나는 짜장면과 짬뽕 둘 다 먹지 않았을 수도 있다. 결정은 시간을 토대로 하는데, 시간의 분지(分枝)는 무한하다. 바로 다중우주론이다. 다중우주론은 공상과학 소설가의 단골 소재이다. 특정 시점으로 돌아가 나의 결정을 되돌리면, 그 결정에 따라 새로운 내가 미래에 살아가고 있다.
최근 영국 왕립천문학회 월간 소식에 따르면, 표준 우주모형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우주의 냉점(콜드 스폿)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다중우주론이 더욱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이 제시됐다. 광활한 우주에 특이하게 차가운 곳은 현재의 천체물리학으론 설명하기 어렵다. 적당히 차갑거나 따뜻한 공간은 예상할 수 있지만 이 냉점은 매우 큰 위상을 차지한다. 냉점은 주변보다 0.00015도 편차로 차가운 공간이다.
과학자들은 그 이유를 엄청나게 큰 공간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일명 ‘슈퍼보이드(Supervoid)’다. 슈퍼보이드는 빛을 흡수해 에너지를 마련하는데, 빛이 느려지면서 온도가 낮아지고 냉점이 발생한다. 광활한 우주는 거대한 벽 내에 둘러싸여 있는 비누거품 모양인데, 그 안에 비어 있는 공간으로서 슈퍼보이드가 있다. 천문학자들이 우연히 알아낸 바로는 그렇다.
이 우주를 둘러싸고 있는 최대의 공간은 얼마나 될까? 빛이 달을 왕복하는 데 약 2.7초가 걸린다. 이 빛이 한시도 쉬지 않고 한쪽으로 18억 년 동안 가야 도달한다고 가정해보자. 그 먼 곳에서부터 우리 은하계를 양쪽으로 둘러싸고 있는 거대구조가 있다. 은하는 수천억 개의 별들로 채워진 천체의 무리다. 거대구조는 1만 개의 은하가 공간을 차지할 정도로 크다. 물론 대부분이 비어 있다. 이 공간은 다른 곳에 비해 물질(암흑물질이나 천체 등)이 20%나 덜 존재한다.
과학자들은 우주가 팽창함에 따라 지구에서 멀어지고 있는 광원을 분류했다. 7000개 은하의 적색 편이를 조사한 것이다. 연구 결과 표준 우주모형 내에서 냉점을 설명할 수 있는 슈퍼보이드는 없었다. 오히려 냉점은 은하들 틈에 둘러싸여 있는 작은 공간(보이드)들로 이뤄졌다고 과학자들은 주장한다. 연구진들은 표준 우주론에서 냉점이 무작위적 변화로 발생할 확률을 2%로 추정했다. 결국 냉점이 왜 발생하는지 설명이 불가능하다.
연구진들은 우리 우주와 다른 거품 우주의 충돌로 인해 냉점이 발생한 건 아닌지 가정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는 그 자체의 거품 안에 벽처럼 둘러싸여 존재한다. 이와 동시에 다른 가능성의 다중우주가 그 자체 거품 안에 존재하면서 우리의 우주와 부딪치는 것이다. 물론 이론일 뿐이다. 광활한 우주가 표준 우주모형으로 설명되지 않는다고 다중우주론이 설득력을 얻는 건 아니다. 다중우주론은 과학적으로 증명되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우주에 있을지 모르는 수많은 나를 상상하는 것만으로 즐거운 일이 아닌가.
김재호 과학평론가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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