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묘지에 묻혀있는 백년의 함성
연변의 항일운동은 언제 어디서 시작되는가
이 이야기는 한 시골노인의 어릴 때의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7,8살 때 소를 몰고 산을 오르내리던 소년은 늘 비탈의 무명의 무덤을 지났다. 아니, 이 무덤은 주인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을 뿐이지 실은 무명의 무덤이 아니었다.
방창화는 그로부터 약 70년 세월이 지난 1990년 비로소 이 무덤의 이름을 다시 기억에 떠올렸다.
“무덤을 말이지요, 마을 어른들은 ‘만세묘지’라고 불렀지요.”
이 기이한 무덤 이름은 현장을 찾았던 최근갑과 김규철, 박죽송에게 뇌성처럼 들리고 있었다. 그 당시 최근갑은 이직하고 용정시 대외경제문화교류협회 회장으로 있었고, 김규철과 박죽송은 연변 용정시 인민정치협상회의 문사(文史)위원회 요원이었다. 그들 셋은 70년 전 용정에서 발생한 “3.13” 반일운동의 순난자 묘소를 찾아 약 반년 동안 다섯 번에 걸쳐 30여명의 현지 노인들을 방문하고 있었다. 와중에 용정 동쪽의 합성리촌에서 박창화를 만나 이 이야기를 듣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만세묘지”는 방창화의 저택에서 불과 수십미터 상거하고 있었다. 비탈에는 두세 뼘 정도의 높이로 흙무지가 봉긋하게 솟아올라 봉분 자리임을 알렸다. 예전에는 앞쪽에 아홉 기의 봉분자리가 있었고 뒤에 다섯 기의 봉분자리가 있었다고 한다. 훗날 누군가 그 중 한 기를 이장하면서 봉분은 열세 기로 남았다는 것이다.
사실상 70년 전의 이 합동무덤을 찾기까지는 곡절적인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1919년 봄, 조선 회령으로 오가는 길손들이 순난자들에게 조의를 표하고 그들의 뜻을 기리라고 일부러 합성리의 길옆 공동묘지에 “3.13” 반일운동 순난자를 모셨다고 한다. 사건 당사자들이 남긴 옛 기록의 행간에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런데 합성리의 옛 공동묘지는 동, 서 두 곳에 각기 하나씩 있으며 용정과 회령을 오가는 옛길은 모두 이 두 곳의 공동묘지를 지나고 있었다. 와중에 서쪽의 공동묘지는 물도랑을 건너야 갈 수 있었다. 조의를 표하려는 길손들의 발품을 줄이는 무덤은 동쪽의 공동묘지이며, 따라서 “3.13” 반일운동 순난자의 무덤은 동쪽의 공동묘지에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가 된다.
“3.13” 반일운동은 일명 “3.13” 만세운동이라고 불린다. 그해 조선반도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인 “3.1” 만세운동을 성원하고 일제의 연변 침략을 반대한 운동이기 때문이다. “3.1”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파고다공원에서 일어난 비폭력적인 독립투쟁사건이었다. 일제 강점기의 조선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일으킨 이 독립운동은 인차 조선 전역에 파급되었다.
일찍부터 반일운동을 준비하고 있던 연변인민들은 조선의 “3.1” 만세운동의 소식을 접하자 즉각 용정에서 반일운동의 불길을 지펴 올렸던 것이다.
1919년 3월 13일, 용정에서는 연길, 화룡 등지의 민중 3만여 명이 모여 전례 없는 규모의 반일집회를 가졌고 기세 드높은 반일시위를 단행하였다. 중국과 일본 군경은 시위자들을 잔혹하게 탄압, 현장에서 10명이 숨지고 48명이 부상했으며 그 후 또 9명이 숨졌다.
뒷이야기이지만, 이중 14명이 합성리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고 그 외의 순난자는 친지에 의해 다른 곳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난세 속에서 14명 순난자의 합동무덤은 차츰 사람들의 집단기억에서 사라지고 미구에 이름 없는 황산의 무명의 무덤으로 되었다.
시골소년의 기억에 쌓아올린 봉분은 마침내 그제 날의 함성을 다시 터뜨린 것이다.
“‘만세운동’의 순난자가 묻혔기 때문에 ‘만세묘지’로 불리게 된 거죠.” 일행을 “만세묘지”로 안내한 이광평씨가 이렇게 해석했다.
이광평씨는 현임 “3.13”기념사업회 회장으로, “3.13” 반일운동 순난자 무덤 발견 초기부터 지금까지의 활동에 빠짐없이 참석한 사진작가이다. 그의 말처럼 “만세묘지” 봉분의 이름과 봉분 숫자, 봉분의 생성 시기 등등은 톱니처럼 서로 맞물리고 있었다.
1990년 4월 10일, 연변의 사학자 그리고 용정시의 당사연구실과 박물관, 정치협상회의 문사위원회 연구원, 책임자들은 현지를 답사하고 “만세묘지”가 바로 “3.13” 순난자 묘지라는 것을 초보적으로 확인했으며 “3.13” 순난의사 추념준비위원회의 설립과 묘소 복구를 결정했다.
“3.13” 순난자의 무덤에 묻힌 비사는 단지 이뿐만 아니었다. 여기에는 훗날의 “3.13” 순난자 추모를 비롯한 일련의 행사에 굵직한 선을 그은 최근갑이 하나의 비석처럼 서있다.
최근갑(90세)은 “3.13” 순난자 무덤의 발견과 이에 뒤따른 3.13 기념활동의 전부의 과정을 몸으로 직접 겪은 인물이다. 그는 일행을 만나 옛 기억의 실타래에서 소설 같은 이왕지사를 올올이 풀어냈다.
중한수교 이전이었던 지난 세기 80년대 말 해외와의 접촉은 그리 쉽지 않았다. 최근갑은 일찍 1944년 용정 은진중학교를 졸업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은진중학교는 용정 최초의 4대 중학교의 하나로 연변뿐만 아니라 해외에 널리 알려진 학교이다. 이 때문에 최근갑은 해외에 있는 4대 중학교 동문과 남다른 인연을 갖고 있었으며 그들과 늘 만남의 기회를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최근갑은 1989년에 연변대학 사학자와 함께 용정을 찾은 한국 학자를 만나 “3.13” 운동 순난자의 무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 학자가 우리를 찾아온 자초지종을 듣고 보니 정말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최근갑 이 하는 말이다.
솔직히 그때 최근갑이 받은 감수는 충격 자체였다고 한다. 그 무렵 최근갑은 용정시건설위원회 주임의 직무에서 이직하고 대외경제문화교류협회 회장 직무를 담임하고 있었지만, 직업이나 환경 등 여건상 연변의 역사, 조선족의 역사와 접촉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고향에서 일어난 ‘3.13’운동 이야기를 알고 나니 정말 떳떳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3.13” 시위는 20세기 10년대 연변지역에서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반일운동이다. 이 운동은 연변에 이주한 조선인들은 물론 연변에 살고 있는 많은 중국인들을 반일운동에로 궐기시켰다.
훗날 연변의 사학자 안화춘과 김상국이 집필한 논문 “3.13 반일운동의 성격과 특점에 대한 연구”는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3월 13일 반일시위가 진행될 때 일부 한족학생들이 시위에 참가했으며 일부 한족 반일지사들은 조선족의 반일투쟁에 감동되어 조선족반일인사들을 보호했다…(중략)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1919년 10월 7일 자료에 의하면 일부 한족인민들도 조선족인민들의 반일투쟁에 참가하였다.
…(중략) 조선족인민들의 반일투쟁에서 힘을 얻은 동북의 여러 민족 인민들은 5.4 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 즉시 행동하여 조선족인민들과 함께 반일애국투쟁을 진행하여 여러 민족의 공동으로 되는 반일애국의 요구를 표현하였다..”
“5.4”운동은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그해인 1919년 5월 4일 북경에서 청년학생들을 위주로 시민과 상공계 인사 등 중하층 계층이 공동으로 참여하고 시위와 청원, 파업, 폭력 등으로 정부에 대항한 애국운동이다. 이 운동은 미구에 연변을 포함한 중국 전역에 파급되었던 것이다.
각설하고, 이때 문사(文史) 요원 김규철, 박죽송 등과 더불어 “3.13”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최근갑이 초대 회장을 맡았다. “3.13” 순난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일련의 행사는 그때부터 장장 25년을 하루같이 이어오고 있었다.
사실상 연변의 반일투쟁은 “3.13” 시위를 앞서 오래전부터 벌어지고 있었다. 1906년, 조선의 애국지사 이상설(李相卨) 등이 용정촌에 설립한 서전서숙(瑞甸書塾)은 역사와 지리, 수학, 정치학, 국제법 등 신학문을 가르치면서 특히 항일민족교육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이 서전서숙은 이듬해 문을 닫지만 훗날 용정 평야의 대명사인 ‘서전벌(瑞甸大野)’라는 지명으로 그 이름을 남긴다.
거두절미하고, 1907년 8월 용정에 설립된 조선통감부(統監府) 간도임시파출소에서 원인불명의 화재가 일어나며 또 1911년 “재간도 일본제국 총영사관” 부근의 일본인 거주지역에서 연속 3차의 대형 화재가 일어나는 등 연변에서는 일찍부터 항쟁의 불씨가 지펴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연변의 항일운동은 38년 항일운동사이며 1907년부터 계산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하고 있다.
와중에 “3.13” 시위는 연변의 항일운동사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운동은 일제를 타도하려면 여러 민족 인민이 공동전선을 이루어 무장투쟁을 해야 한다는 경험과 교훈을 얻게 했다. 이 무렵부터 연변의 반일운동은 반일무장투쟁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연변의 사학자 최성춘은 그의 저서 《연변인민항일투쟁사》(2005.05)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더라도 1916년 12월 연변 4개 현에는 도합 157개의 조선족 사립학교가 있었으며 학생 3,879명이 공부하였다고 한다. 이런 학교들은 학생들에게 각종 문화지식을 강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반일민족교육도 진행하였고 후에는 반일활동과 결부하여 보편적으로 군사체육 과정을 설치하였다. 여러 학교에서는 반일민족해방투쟁을 위한 골간인재를 대량으로 길러냈다.”
뒤미처 1920년 새해 벽두에 용정에서 대서특필할 획기적인 사건이 터진다.
1920년 1월 4일, 당시 조선인 청년들로 구성된 항일운동단체인 “철혈광복단” 단원들이 함경북도 회령의 은행에서 용정으로 운송되는 철도부설 자금 15만원을 탈취했다. 15만원은 당시 시세로 1만 5천 자루의 총을 살 수 있는 거금이었다고 한다. 단원들은 무기를 사기 위해 연해주까지 갔다가 밀정에 의해 일본영사관에 고발되며, 거의 다 체포되어 나중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등 “15만원 탈취사건”은 종국적으로 실패한다.
20세기 20년대 연변지역에는 또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가 일어나며 항전의 불길은 30년대를 이어 40년대의 “8.15” 해방까지 지속된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민족자치구”가 성립되며 1955년 “연변조선족자치주”로 변경된다. 이때부터 중국 땅에 살고 있는 우리 겨레는 “조선민족”의 “민”자가 생략된 “조선족”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세상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길림성 해당 부문의 통계(2012년)에 의하면 항일열사 3,418명을 포함, 연변의 조선족 열사는 무려 17,733명으로 전국 56개 민족가운데서 인구비례로 따지면 단연 첫자리를 차지한다. 이 중에서 용정의 항일열사는 987명에 달한다.
“이게 우리 고향이고,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당당한 성원입니다.” 최근갑은 “3.13” 기념행사 등을 통해 연변 조선족의 항일역사를 밝히고 싶었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건 역사의 사명이고 민족에 대한 사랑이지요. 이 땅에 사는 우리의 이 역사를 잘 발굴해서 후대에 전수해야 합니다.”*
김호림기자
<<중국민족>> 3호/중앙인민방송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