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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11기 독립정신답사단이 21일 중국 항저우(杭州)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저우 청사를 둘러보고 있다. / 사진 = 손지은 기자 @sson |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11기 독립정신답사단]
중국 내 임시정부 초기 발자취 찾아나선 2400km의 대장정
상하이-자싱-항저우-난징까지 이어진 4박5일의 기록
상하이·항저우·난징 / 아시아투데이 손지은 기자 = 1932년 4월 중국 상하이 홍커우(虹口區)공원에 스물다섯 나이의 윤봉길이 섰다. 스물다섯 청년의 품에는 물통 폭탄과 자폭용 도시락 폭탄, 그리고 독립을 향한 염원이 있었다. 그로부터 80여년이 지난 2015년 12월 홍커우공원의 윤봉길을 직접 만나러 또다른 스물다섯들이 길을 떠났다.
지난 19일 사단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회장 김자동)의 독립정신답사단이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찾아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했다. 군입대를 50일 남긴 스무살의 청년, 훗날 역사를 가르치게 될 역사교육과 학생 등 49명의 국내외 대학생들로 꾸려진 답사단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거쳐간 상하이(上海)-자싱(嘉興)-하이옌(海鹽)-항저우(杭州)-전장(진강)-난징(南京)을 잇는 2400km의 대장정이다.
이번 답사길에는 1919년 임시정부 외무총장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 일본의 한국침략을 규탄했던 우사(尤史) 김규식 선생의 손녀 김수옥(72·의사)씨도 함께했다. 세살 때 상하이를 떠났던 김씨는 4박5일간의 답사 기간 내내 학생들을 돌볼 의약품들을 꼭 쥐고 70년 전 할아버지가 걸었던 그 길을 뒤따랐다. 의병장 이강년 선생의 후손인 이순희(54·시인)씨도 이번 답사에 동행했다.
답사단의 첫 일정은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단행된 홍커우공원이었다. 지난 19일 오전 홍커우공원은 주말을 맞으러 나온 상하이 시민들로 북적댔다. 구성진 노랫가락을 뽐내는 상하이 시민들도 윤봉길 의사를 만나러 온 한국 사람들이 익숙한 눈치였다. 콘크리트 바닥에 글씨를 쓰는 거리의 예술가도 답사단을 보고는 또박또박 한글로 ‘영원히 기념, 당대 영웅, 윤봉길 의사’라는 글을 적어 환영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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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커우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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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중국 상하이 홍커우(虹口區) 공원에서 한 중국인 거리예술가가 독립정신답사단을 반기며 윤봉길 의사를 기리를 한글 문구를 쓰고 있다. / 사진 = 손지은 기자 @ss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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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한켠에는 윤봉길 의사를 추모하는 터가 마련돼있지만 실제 의거가 단행된 정확한 장소는 여전히 확인되지 않았다. 이번 답사단의 부단장을 맡은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그곳에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더라도 역사는 현장에서 확인해야 한다”며 “당시의 공사지적도를 찾아야하는데 아직 찾지 못한 상황이다. 이제는 연구 수준을 높여 그것을 찾는 것이 여러분이 할 일”이라며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를 설명했다.
홍커우공원을 떠나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로 향하는 길은 답사단의 눈을 의심해야할 정도로 휘황찬란했다. 청사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둔 건너편 상업지구는 세계 어느 유명 도시보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웠다. 남의 나라 유적지 때문에 금싸라기 땅을 묶어둬야하는 주민들의 한숨도 느껴졌다. 중국 정부의 특별한 배려와 우리 당국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금방이고 없어질 처지임이 분명했다.
지난 9월 박근혜 대통령이 재개관식에 직접 참석했던 상하이 청사는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이후 1926년부터 1932년까지 가장 오래 사용된 임정 건물이다. 또 백범(白凡)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의 집필을 시작한 곳이자 한인애국단을 조직해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준비한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답사단의 맏형인 김성훈(29·회사원)씨는 “한국이었다면 이미 유적지를 파서 이동시키고도 남았을 텐데 중국 정부가 정책적으로 우리나라 유적지를 이렇게 보존해준다는 것이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많이 반성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2010년 대학생이던 당시 광복군의 흔적을 찾는 답사에 참여했던 인연으로 올해 겨울 휴가를 기꺼이 ‘답사단 후배’들과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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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피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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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중국 자싱(嘉興) ‘매만가 76호’. 백범 김구는 1932년 윤봉길의 홍커우 의거 이후 일제의 검거를 피해 자싱으로 피신했고, 운하로 이어진 집밖에는 늘 나룻배를 대기시켜 배를 타고 호수로 몸을 숨겼다. / 사진 = 손지은 기자 @ss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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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둘째날인 20일에는 자싱으로 이동해 김구피난처, 임정요인거주지 등을 둘러봤다. 백범이 일제를 피해 길을 떠났듯 답사단도 그의 흔적을 따라 자싱으로부터 50km 떨어진 하이옌의 재청별장도 찾았다. 당시 일제는 백범에게 60만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숫자의 현상금을 걸고 그의 뒤를 쫓고 있었다. 중국의 사회활동가인 저보성은 백범의 안전을 위해 며느리 주가예(朱佳藝)의 친정 별장인 재청별장에서 김구를 보호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우리 국가가 독립이 된다면 저 부인의 용감과 친절을 우리 자손이나 동포가 누가 공경하고 우러러 사모하지 않으랴. 활동사진은 찍어두지 못하나 글로라도 기록해 후세에 전하고자 이 글을 쓰는 것이다”며 출산한 지 얼마 안된 몸으로 자신에게 길을 안내하던 주가예에 대한 감사를 남겨두기도 했다.
상하이 청사의 임시정부는 또다시 일제의 탄압을 피해 항저우로 이전했다. 중국 국무원은 2013년 9월 항저우 청사 터를 ‘제1차 국가급 항일전쟁 기념시설·유적 명단’ 80곳에 포함시켰다. 항저우 전체를 통틀어 국가급 유적으로 지정된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답사단이 항저우 청사를 찾은 21일 청사 옥상에는 대한민국의 광복 70주년을 기념하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올해만 2만명의 한국인이 항저우 청사를 방문했다.
22일 답사단이 찾은 천녕사는 조선혁명간부학교가 있던 곳이다. 1930년 조선민족혁명당을 이끌었던 약산(若山) 김원봉은 1932년 7월 천녕사에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했다. 학교의 설립목표는 ‘한국의 절대독립’과 ‘만주국의 탈환’이었고 졸업생들은 요인들의 암살, 일본군에 대한 정보수집 등을 담당했다.
깊은 산 중턱에 폐허로 남아있는 학교 터는 현지인들도 가는 길을 모를 정도다. 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영화 ‘암살’에서 배우 조승우가 분했던 약산의 끓는 피는 그대로인듯 했다. 일제의 눈을 피해 깊은 산속에서 군사훈련을 받으며 조국에 남겨진 이들의 애통함을 매일 곱씹었을 그들의 일상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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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리지샹위안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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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독립정신답사단이 중국 난징(南京) 리지샹(利濟巷) 위안소 기념관을 향하고 있다. / 사진 = 손지은 기자@ss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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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인 23일에는 답사단에게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전날까지도 방문이 허락되지 않았던 난징 리지샹(利濟巷) 위안소 기념관을 둘러볼 수 있게된 것이다. 리지샹 기념관은 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로 운영됐던 위안소를 난징대학살 기념관의 분관 형태로 만들어 12월 초에 문을 열었다. 개관 이후 단체 관람을 한번도 허락하지 않은 터라 대한민국 독립기념관과 항저우 임정 청사 등 국내외 많은 기관의 협조를 얻었다.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눈물 방울들이 맺힌 건물 외벽과 고(故) 박영심 할머니의 만삭 사진을 빚어놓은 조각상에 모두가 말을 잃었다. “내가 증거인데 대체 뭐가 더 필요하냐”는 할머니들의 말처럼 기념관의 대부분은 생존자들의 증언과 삶으로 채워져있다. 한국 할머니들의 용기있는 증언은 위안소 3개동 중 1개동을 전부 채우고 있었다.
답사단은 이밖에도 임정요원들의 숙소로 쓰였던 영경방, 만국공묘, 한국독립당사무소터, 오복리 임정가족거주지, 중앙반점, 난징대학살기념관 등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구석구석 따라다녔다. 또 4박5일의 기간 동안 답사단은 이동 시간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임시정부 수립과정의 역사적 의의, 해방 후 임시정부 주요 세력의 궤적 등 조별로 주제를 정해 토론도 이어갔다.
답사단의 단장을 맡은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는 “지구상 나라의 80%가 식민지이던 시대에 카이로회담(1943년)에서 강대국들이 전쟁이 끝난 후 독립을 약속한 유일한 나라가 대한민국이었다”며 “그것이 우리 임시정부의 가장 큰 성과”라며 이번 답사의 의의를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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