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김호림기획련재-9] 인도의 '왕자'가 왜서 곤륜산에 나타났을까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2월18일 08시45분    조회:2369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솔직히 뭔가 빗나가는 것 같다. 산이 아니라 식탁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야채 가지(茄子)를 경상도에서 궁중에 진상하였다는 내용은 《춘관통고(春官通考)》(1788) 등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궁중 진상품이었던 이 가지는 훗날 중국 연변의 이민들에게 '조선가지'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반도의 몽톡한 '조선가지'는 확실히 대륙의 길쭉한 '중국가지'와는 다른 모양새를 보이고 있다.


연변에서 '조선가지'라고 불리는 야채, '신라가지'도 이런 모양일까.

  기실 반도에서 재배된 가지의 최초의 이름은 '조선가지'가 아니었다. 일찍부터 일명 '신라가지'라는 이름으로 대륙에 파다히 알려지고 있었다. 중국의 의서인 《본초연의(本草衍義)》(1116)에 따르면 "신라에는 1종의 가지가 나는데, 모양이 계란 비슷하고 엷은 자줏빛에 광택이 있으며 꼭지가 길고 맛이 달다. 이미 중국 (대륙의) 채소밭에 널리 퍼져 있다." 이에 앞서 '가지'를 "당(唐)나라 이전부터 곤륜자과(崑崙紫瓜)라고 했다"는 기록이 의서 《본초십유(本草拾遺)》(741)에 남아 있었다. 일설에 곤륜자과는 수양제(隋煬帝)가 야채 가지를 애용하면서 특별히 지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곤륜자과'는 '곤륜의 검은 오이라는 의미이니, '곤륜'을 거쳐서 유입된 채소라고 해서 불린 이름이 아닐까요?"

  이맘쯤이면 누구라도 물을 법한 '가지'의 이역 여행 이야기이다. 가지의 원산지가 인도요, 또 곤륜은 인도와 중국의 접경 지역에 있는 산이니, 정말이지 누군가 일부러 박아놓은 듯 아귀가 딱 들어맞는 것 같다.

  옛 곤륜은 '만산(萬山)의 조종(祖宗)'이요, '용맥(龍脈)의 조종(祖宗)'이며 중국의 명산대천에서 제일 신비한 곳이다. 이토록 신기한 곳은 당연히 여러 신들의 주처(住處)로 되고 있었다. 중국의 신화는 대체로 네 개의 축으로 이뤄지는데, 동방의 봉래(蓬萊) 신화와 남방의 초(楚) 신화, 중원의 신화 그리고 서왕모(西王母), 반고(盤古), 여와(女娲)를 대표로 하는 서방의 곤륜신화가 바로 그것이다. 와중에 서왕모는 모든 여신들의 수령이고 반고와 여와는 세상을 창조한 신이니, 서방의 곤륜신화는 단연 신화 중의 으뜸으로 되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곤륜산은 대륙 서쪽 청장고원 북부의 변두리에 동서로 길게 융기된 산맥을 지칭한다. 고대 육상 실크로드는 곤륜산 북쪽에 있는 타클리마칸 사막의 남북 가장자리를 지나고 있었다.

  정말이지 '곤륜자과'라는 이름의 유래에 머리가 갸우뚱하게 되는 부분이다. 가지를 곤륜과 한데 잇기에는 원산지는 물론 경유지 역시 동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곤륜'이 실은 지금의 말레이시아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하면서 가지가 인도로부터 말레이시아를 통해 대륙에 전파되었다고 하는 설이 나올 법 한다.

  기실 곤륜산은 바닷길에 떠도는 배처럼 한곳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곤륜산은 대륙의 동북부 연해에도 나타난다. 곤륜산은 산동성(山東省) 동북부에서 제일 큰 산으로 장장 백여 리를 이어지고 있다. 북위(北魏) 시기의 사서 《16국 춘추(春秋)》는 곤륜산을 '해상 여러 산의 조종'이라고 칭했다. 곤륜산은 한․당(漢․唐) 시기부터 불교와 도교 수행자들의 수련의 도장으로 되고 있었다. 금․원(金․元) 시기에는 도교 전진파의 개산조사 왕중양(王重陽)이 전진교(全眞敎)를 설립한 '동천복지(洞天福地)'였다. '곤륜'이라는 산동성의 이 지명도 전진교 때문에 사서에 또 한 번 등장한다. "(왕중양의 수제자) 구처기(丘處機)는 등주(登州)의 서하(栖霞) 사람으로… 나이 19세 때 녕해(寧海)의 곤륜산에서 전진교를 수도했다"고 《원사(元史)》가 기록하고 있다.

  상기 기록에 나오는 지명들은 모두 산동성 동북부에 가지런히 모여 있는 것으로, 곤륜산이 바로 이 고장에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오히려 또 고여산(姑余山), 곤유산(崑兪山) 등 지명으로 불렸으며 곤륜산이라는 이름은 와전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현지인들도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유학 학파의 창시자인 공자도 이 곤륜산에 이름자를 내밀고 있다. 공자가문의 족보에 따르면 "장백산에서 날아온 두루미가 곤륜산에서 노닐던 암사슴과 만나니, 그 사이에서 나온 사람이 공자이다." 공자는 춘추(春秋) 시기 노(魯)나라 추읍(陬邑) 즉 지금의 곡부(曲阜)에서 출생했으니, 장백산은 물론 곤륜산의 위치를 산동성에 비정할 수 있다는 얘기이다. 실제로 산동성의 수부 제남(濟南) 부근에 장백산이 있으며 곤륜산과 동서로 고작 300여㎞ 상거한다. 두루미가 날개짓 한번으로 날아가거나 암사슴이 뜀박질 한달음에 달려가서 서로 만날 수 있는 위치. 족보에 나오는 장백산은 연변에 있는 동명의 장백산이 아니며, 곤륜산 역시 청장고원에 있는 동명의 곤륜산이 아니라는 것이다.

  '암사슴'이 노닐던 곤륜산은 반도와 대륙 최단 거리의 바다기슭에 위치한다. 수․당(隋․唐) 시기, 곤륜산 기슭의 적산포(赤山浦)라고 불렸던 석도(石島) 등에는 해상무역 항구가 있었다. 대륙 저쪽의 반도와 섬의 사절, 상인, 유학생, 승려들은 이 항구를 이용하여 산동반도 동북부에 상륙한 후 다시 육로를 통해 내륙의 오지에로 발길을 옮겼다.

  훗날의 이야기이지만, 명(明)나라 때에는 일명 '왜구(倭寇)'라고 불리는 일본 해적들이 이 일대에 자주 침노했다. 홍무(洪武) 31년(1398) 해상 방위시설을 세우고 "위엄이 동해를 진동한다"는 의미에서 지명을 따오니, 위해(威海)라는 이 대륙 동부의 항구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각설하고, 곤륜산은 바로 반도와 통하는 최단의 바닷길 한쪽 끝에 등탑처럼 서있다. 사실상 '곤륜자과'는 또 '신라가지'라는 이름과 함께 맞물려 바닷길을 통한 대륙의 유입 경로를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대륙과 반도를 잇는 바닷길에 있던 여타의 항구와 마찬가지로 옛날 곤륜산 기슭에는 신라인들이 웅기중기 모였으며 신라방(新羅坊), 신라촌(新羅村)을 형성하고 있었다. 수․당(隋․唐) 시기 성읍 중심을 방(坊)이라고 했다. 또 성읍의 여러 골목을 방이라고 통칭하기도 했다. 대체적으로 신라방은 도시에서 신라인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을 이르며 성읍의 바깥에 형성된 신라인의 집단 거주지는 신라촌이라고 불렸다. 이역에 와서 삶의 새 터를 잡은 신라인들에게 사찰은 일종의 구심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라인들이 집거한 곳에서는 거의 그림자처럼 신라사찰이 등장하고 있다. 신라사찰이 없는 경우에는 십상팔구 현지에서 아주 이름이 있는 사찰이 따로 있었다. 옛날 곤륜산 부근에도 명찰(名刹)이 있었다면 적산포에 살던 신라인들이 이 사찰에 가서 향불을 태웠을 법한 대목이다.

  정말로 곤륜산에는 천년 전의 유명한 고찰이 하나 있었다. 그러나 안내를 맡은 왕씨 성의 기사는 현재로선 옛터뿐이라고 하면서 사찰 행을 접으라고 권고하는 것이었다. "무염사(無染寺)도 성경산(聖經山)처럼 풍경구에 있지만 거기에는 구경거리라곤 바위밖에 없어요."

  성경산은 전진교가 흥성한 곤륜산의 지맥으로, 도교의 경전인 《도덕경(道德經)》을 성물로 추앙하여 지은 이름이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불교와 도교는 이곳에서도 함께 만나고 있었다. 무염사는 성경산과 서로 이웃, 불과 15㎞를 상거하고 있었다.


곤륜산의 지맥인 성경산에 도교의 창시자 노자가 좌정하고 있다.

  왕씨의 권고를 귀담아 들어야 했을지 모른다. 무염사는 결국 풍경구의 입구에 간판으로 적힌 이름밖에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관리소 직원은 겨울 산행이 위험하다면서 기어이 일행의 진입 자체를 가로막았던 것이다.

  무염사는 동한(東漢) 때 설립되었는데 이 지역의 제일 오랜 사찰로 한때 아주 흥성했다고 전한다. 《녕해주지(寧海州志)》의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 거주하는 자는 육근이(六根)이 청정(淸淨)하고 큰 해탈을 얻는다"고 하는 의미에서 '무염사'라고 불렸다고 한다. 제(齊)나라 왕과 왕후의 무덤도 부근에 있었다고 하니 과연 소문난 곳이렷다.


차단봉이 내린 무염사 입구.


무염사의 바위에 있는 감실,어느 관광객이 블로그에 남긴 사진이다.

 

  이런저런 아쉬움을 길가에 털어내기도 전에 우리가 탑승한 차량은 벌써 산을 내렸고 또 현성을 지나 위해시 해변의 옛 적산포로 달리고 있었다.

  '적산'은 석도(石島)의 바위가 적색을 나타낸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이 지명은 일본 승려 엔닌(圓仁)의 기행문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의 기록에 아주 자세하게 기록된다. 엔닌은 또 이 기행문에서 적산에 사찰이 있으니 그 이름을 '적산 법화원'이라고 부른다고 적고 있다.

  적산포에 신라인들의 사찰이 설립된 건 당나라 문종(文宗, 827~840) 연간이었다. 그 무렵 신라인 장보고(張保皐, ~846) 출자하여 사찰을 세우는데, 천태종(天台宗)을 신봉했기 때문에 '법화원(法華院)'이라고 작명했다고 한다. 장보고는 통일신라 후기에 활약했던 무장이자 무역상이었다.

  법화원은 본국인 신라와 연락하는 거점이었으며 또 산동반도를 통하는 신라와 일본의 구법승들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했다. 승려 엔닌이 법화원에 들리고 여기에 8개월 동안이나 머물게 된 것도 이 같은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잠깐, 민간 내왕에 대한 기록은 고대 문헌에서 아주 적게 출현한다. 옛 바닷길에 대한 상황은 상당 부분 승려들의 구법기록에 의거할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적산포의 장보고에 대한 기록을 포함, 신라인의 대륙 생활에 대한 기록은 또 중국이나 한국보다 일본측 문헌에 적지 않게 남아있다.

  어찌됐거나 장보고와 적산의 남다른 인연 때문에 훗날 신라에는 2개의 '적산원(赤山院)'이 나타나며, 승려 엔닌도 귀국한 후 교토에 '적산선원(赤山禪院)'을 세우고 적산 명신(明神)을 만든다. 장보고로 추정되는 이 적산 명신은 현재 적산의 서쪽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좌정하여 현지인들과 신도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적산 법화원은 당나라와 신라, 일본 교류 역사의 옛 바닷길을 견증하는 유적으로 되고 있는 것이다.

  법화원은 당나라 무종(武宗, 840~846)이 도교를 숭상하고 멸불(滅佛) 정책을 실행하던 시기에 훼손되었으며, 그로부터 천년 후인 1990년 옛터에서 새로운 '적산 법화원'으로 거듭났고 현지의 일대 명소로 되고 있다.

  법화원에 부랴부랴 도착했을 때는 서녘하늘이 벌써 노을로 붉게 물들고 있었다. 휑뎅그렁한 마당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매표구의 예쁘장한 도우미는 곧 폐관한다면서 인제 입장한들 별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아닐세라, 사진촬영을 하면서 보려니 관리원들이 벌써 하나 둘씩 퇴장을 하고 있었다.


법화원의 폐관시간이 박두, 나오는 사람만 보인다.

  정작 이날 저녁의 식탁에 오른 화젯거리는 이게 아니었다. 하얀 접시에 담겨 '진상'된 파릇파릇한 상추가 겨울의 한기와 서운함을 함께 몰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상추는 고어(古語) 그대로 '부루'라고 하는데, 연변의 방언으로는 '불기'라고 부른다. 원산지가 지중해 연안과 서아시아라고 하는 상추는 일찍 고려에서 전래되었다고 청나라의 문헌 《천록지여(天祿識餘)》가 기록한다. 그때 고려에서 들여오는 상추(종자)가 너무 비싸서 '천금채(千金菜)'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또 같은 내용을 기록한 조선시대의 역사서 《해동역사(海東歷史)》 등의 글귀를 빌어 이 고려가 실은 삼국 시대의 '고구려'의 약칭이라고 해석한다.


적산에 좌정한 명신, 성경산에 좌정한 도교의 창시자 노자를 방불케 한다.

  이러니저러니 상추 역시 가지처럼 먼저 서토(西土)에서 반도로 유입된 후 다시 대륙으로 전래했던 것이다. 다만 그때 그 시절 가지처럼 바닷길을 따라 왔는지 아니면 육로를 걸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을 뿐이다. 상추쌈은 우리말에 "복을 싸서 먹는다"고 일컫는다. 사실상 상추쌈에는 이처럼 천년이 넘는 '실크로드'의 천금 같은 역사가 담겨있다.

  그러고 보면 반도와 대륙을 잇던 옛 실크로드는 야채의 상긋한 내음을 타고 동화 속의 '왕자'처럼 하나의 전설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72
  • 4월 3일, 왕청현혁명렬사릉원에서 렬사들의 위훈을 기리고있는 왕청현교통관리국 민경들. 올 청명절전야 왕쳥현의 여러 기관과 사회가두의 공무원과 학교 학생 도합 3000여명이 혁명전통교양기지인 왕청현혁명렬사릉원에서 혁명선렬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대거 진행하였다. 추모제에서 왕청현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 최금철부...
  • 2014-04-08
  • 4월 4일, 청명을 하루 앞두고 길림시조선족차세대관심위원회와 길림조중, 길림시조선족실험소학교의 조직하에 길림시조선족중소학교 사생 100여명이 화피창렬사릉원을 찾아 영령들을 추모했다. 오전 8시, 세대의 뻐스를 내세워 길림조중 학생처 고춘영주임이 인솔한 30여명 조중학생들과, 길림시조선족실험소학교의 전성민...
  • 2014-04-07
  •  당년 일본군의 또치까잔해물들. 훈춘시 춘화진 초평(草坪)촌 동쪽 이도관(二道关)산속에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이 남긴 매우 큰 규모의 군사요새지유적이 발견되였다. 초평촌의 촌민 마련파, 장본용 및 장고봉사건기념관 관장 류충지, 춘화변방파출소 류군부소장 등 인원들이 유적지를 답사하여 초보적으로 중국...
  • 2014-04-07
  • 고성마을 입구에 세워진 온특혁부성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진 비우성 비석.  훈춘시구역에서 서남으로 8킬로메터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삼가자향 고성촌, 지난 3월 4일 이곳을 찾았을 때 논에서 밭에서 봄을 맞으며 농사준비를 하는 농민들이 간간히 보였다. 력사적으로 고성촌은 19세기때 청정부가 이곳에 통상분국...
  • 2014-04-04
  •  4월 2일 청두(成都)시 고고연구소와 량산(凉山)주 박물관은 쓰촨(四川)성 량산주 진양(金陽)현 문물 관리소 측과 마이쭈샹무나거우(馬依足鄕木納溝)촌 주민이 집 건설 시 발견한 문물에 대해 감정을 진행한 결과, 발견된 문물 4개 중, 동단검 1개, 동칼집 1개가 전국시대 문물이고, 철삽은 한나라 시대 문물로 밝혀졌...
  • 2014-04-03
  • 간도특설대가 창립된 초기의 지휘부. (사진=서해문집 제공) ◈ 혼돈의 만주벌판…일본군, 조선청년 모아 독립군 토벌에 나서다 조선인 청년들이 일본군이 준 무기를 들고 조선 독립군에게 총을 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 소설 같은 장면이 1930~1940년대에 만주벌판에서 실제 펼쳐졌다. 1931년 만주를 점령한 일...
  • 2014-04-03
  • , 책자 발행식이 오늘 오전에 있었습니다.   170만자로 된 은 지난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자치주 제9기위원회 집정기간 종합실력이 가장 빨리 제고되고 도시와 농촌 면모가 일신됐으며 군중들이 실제혜택을 가장 많이 본 5년 력사를 담았습니다. 주당위당사연구실 주임 변군입니다. 《이 책은 우리 주에서 각항...
  • 2014-04-02
  • ▣ 경성의 새벽을 뒤흔든 격렬한 총격전 의열단원 김상옥(사진=생각정원 제공) "탕~탕~탕" 3.1운동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1923년 1월 27일 새벽. 조용한 삼판통(현 용산구 후암동) 주택가에서 총소리가 밤하늘을 갈랐다. 이 곳에 은신한 의열단원 김상옥은 20여명의 종로경찰서 무장경찰들이 포위하자 양손에 든 쌍권총을 ...
  • 2014-04-01
  • 남북 및 해외 녀성민간단체들 심양서 “일본군성노예문제해결을 위한 토론회” 개최   본사소식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조선민주녀성동맹 등 남과 북 및 해외의 20여개 녀성. 종교 단체가 3월 29일 심양 칠보산호텔에서 “일본군 성노예문제해결을 위한 토론회”를 열고 군위안부를 비롯한 일...
  • 2014-03-31
  • ◈ 경찰서를 빠져나와 감쪽같이 사라진 거물급 공산주의자 '이재유' 일제가 만주를 석권한 1934년 4월 13일 밤. 조용하던 서대문경찰서에 한가닥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이어 "이재유가 달아났다"는 고함소리와 함께 당직경찰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경성과 경기도 경찰부 모든 병력이 총동원되어 시내를 뒤졌...
  • 2014-03-31
  • 심양 3월 28일발 인민넷: 이번에 한국측에서 중국에 귀환한 항미원조지원군렬사 유해의 안장지는 심양항미원조렬사릉원으로서 중한 량국이 2월에 북경에서 진행된 사업회의에서 토론하여 결정한것이다. 료해한데 의하면 이번의 렬사 유해들을 심양항미원조렬사릉원 부근의 따로 건설한 묘지에 안장할것이라고 했다. 3...
  • 2014-03-31
  • 비공식 협의 병행, 규모도 확대…20일 결과 발표 북한과 일본이 19일 오후 중국 랴오닝성 선양(瀋陽)에서 적십자 실무회담과 외무성 과장 간 비공식 협의를 재개했다. 수석대표인 리호림 북한 조선적십자회 중앙위원회 서기장과 다사카 오사무(田坂治) 일본적십자사 국제부장 등 양측 대표단은 이날 정오(현지시간)께...
  • 2014-03-20
  •  항일의사 안중근 순국 104주년(3월 26일)을 맞으며 안중근사적 보고 및 사진전시회가 지난 주말 심양시조선족문화예술관에서 있었다.   료녕성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와 중국조선족사학회서 공동 주최하고 료녕성조선족로인련의회에서 주관, 중국조선족기업가협회회장단, 료녕성조선족기업가협회, 료녕성조선족애심...
  • 2014-03-19
  • 남경시문화광전신문출판국은 남경 리제항(利濟巷)에 위치한 10년 가까이 방치되였던 중국침략 일본군위안소 유적지를 “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할 방침이라고 전했다. 전문가는 이곳이 위안부들이 지목한 아시아 현존 최대 규모의 일본군 “위안소” 유적지라며 현재 7동의 건물이 남아있다고 소개했다...
  • 2014-03-18
  • 중국침략 일본군 731부대 죄증진렬관에서 입수한데 따르면 할빈시는 3.2억원을 투자해 731유적지핵심구 및 731전쟁유적지공원건설용지내의 여러개 비문물건축물을 허물고 환경을 다스리는 사업을 본격적으로 벌리고 있다.   731유적지는 전국 중점문물보호단위이며 전국 애국주의교육시범기지, 전국 홍색관광풍경구 및 국...
  • 2014-03-17
  • 3월 14일 오전, 룡정시《3.13기념사업회》에서는 사업회 회장단과 룡정시통신협회 회원들 그리고 룡정로인대학 등산대 성원들이 참가한 3.13반일집회 유적지답사활동을 조직하였다. 이날 참가자들은 《3.13》반일집회장소였던 제1유치원에서 시작하여 반일시위행진로선을 따라 류혈사건발생지(번영로와 건설가 교차 십자거...
  • 2014-03-17
  •         (흑룡강신문=하얼빈) 윤운걸 길림성특파원 = 일본이 침략력사를 왜곡하고 있는 오늘, “룡정3.13반일운동 95주년 추모제”가 룡정3.13기념사업회, 룡정시노인대학,해란강합창단,연변력사연구회,룡정시정부 등 15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룡정 3.13반일의사릉에서 있었다.   이번 추모제...
  • 2014-03-14
  • 안중근의사가 순국전인 1910년 3월 려순감옥에서 쓴 글씨가 경매에 나온다. 미술품 경매사 서울옥션은 안중근의사 순국일(3월 26일) 다음날인 오는 27일 오후 5시, 평창동 서울옥션스페이스에서 제131회 경매를 열고 안중근의사 유묵 《경천》(敬天)을 비롯한 157점을 출품한다고 10일 밝혔다. 《경천》은 하늘의 리치...
  • 2014-03-13
  • 2월 26일, 진시황릉 박물관 측은 발굴학자들이 진시황 병마용 1호갱에서 3차 발굴을 진행하던 중 비교적 완전한 형태의 활과 화살이 출토되었다고 밝혔다. 이는 진시황 병마용 발굴작업에서 최초로 발견된 비교적 완전한 형태의 활과 화살이며, 2009년부터 시작된 진시황 병마용 1호갱 3차 발굴작업에서는 고고학적 성과가 ...
  • 2014-02-27
  • 1945년 9월 9일, 허잉친(何應欽, 좌측)은 난징에서 중국 정부 대표로 중국침략 일본군 고바야시 센사부로(小林淺三郞) 총참모장이 제출한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 중국침략 일본군 사령관의 항목문서를 받았다.   1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회 제7차 회의는 25일 오후에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의 중국인민 ...
  • 2014-02-26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