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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림기획련재-11] 바닷길에 서있는 천년의 등대 신라초(新羅礁)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3월17일 15시37분    조회:2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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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산에는 '나무꾼과 선녀'의 설화가 있다. 옛날 옛적에 나무꾼이 사슴의 보은으로 선녀와 부부를 맺게 되었다고 하는 천상 연분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보타산(普陀山)의 산길에는 나무꾼이 없었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십중팔구 승려가 아니면 신도였다. 또 설화에 나오는 사슴이 없었고 선녀는 더구나 없었다. 흙과 풀, 나무의 냄새 그리고 청정한 햇빛이 있었다. 어디선가 물처럼 흘러나오는 불교음악은 마치 구름 위에서 들리는 천상의 소리인 듯 했다.

  정말이지 산과 바다, 인간이 땅위에 하나로 어우러진 세외도원의 그림이었다.

  비싼 입장료에 고깝던 마음이 다소 풀어지는 대목이다. 얼결에 "맙소사!" 하고 외마디 탄식을 하는데, 일행 중 누군가 데퉁스럽게 말을 던져온다.

  "불교의 명산에 와서 불호(佛號)를 외우지 않고 그게 뭐지?"

  그럴 법 한다. "산에 가면 산노래, 들에 가면 들노래"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굳이 이 속담이 아니더라도 옛날 놀라운 일이 생기면 사람들의 입에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 달달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보다 보타산은 다름 아닌 관음(觀音)의 도장이다. 또 관음보살의 연기(緣起) 설화가 있었다. 배로 해동에 모셔가려던 관음상이 보타산 부근의 암초에 걸려 갈 수 없게 되어 관음원(觀音院)을 짓고 머물게 되었다는 불연(佛緣)의 이야기이다.

  보타산(普陀山)은 보타산과 낙가산(洛伽山)의 준말이며 범문(梵文) 포타락카(Potalaka)의 음역이다. 관음보살의 주처(住處)와 설법 도장을 뜻한다. 절강성(浙江省) 영파(寧波)의 동쪽 바다에 있는 섬이다.

  불경에서 말하는 보타산은 원래 인도의 남쪽 바다에 있었다. 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동양(東洋)의 자죽림(紫竹林)에 가서 관음보살에게 불법을 구했다"고 전하며, 이 때문에 관음보살의 주처는 동양에 있다고 말한다. 선재동자는 범문으로는 수다나(Sudhana)이며 불도를 이룬 '구도보살'을 말한다. 출생할 때 재물(財物)이 아주 많은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불리는 이름이라고 전한다.

  기왕 말이 났으니 망정이지 다들 보타산에 도착한 후 관음보살에 앞서 선참으로 이 선재동자를 입에 올리지 않나 싶다.


어디로 갈까, 방향표시판 앞에서 잠깐 휴식을 취하고 있는 관광객.

  승객들은 배가 부두에 닿은 후에도 선착장에서 곧바로 나갈 수 없다. 보타산 입장권을 구매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가 최고급 풍경구라고 티켓 한 장의 가격이 140위안이나 된다. 배와 관광버스, 식사 등등의 비용을 주먹구구 하노라면 어느새 입이 떡 하니 벌어진다.

  뉘라 없이 저절로 기침처럼 내뱉는 외마디 말. "우리 방문객 모두를 선재동자로 알고 있지 않나?"

  그러든 말든 선착장에 들어서는 배마다 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음력설 같은 명절에는 보타산에 아예 발을 내디딜 틈도 없다고 한다. 관음보살에게 서원(誓願)을 올리면 감응이 없지 않다고 소문을 놓은 도장이니 그럴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보타산은 시초에 관음보살의 도장이 아니었다. 한(漢)나라 때 이 산은 인적이 드물었고 아주 황량했다. 도인 매복(梅福)이 산속에 암자를 짓고 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도인 매복의 성씨를 따고 또 봉우리 잠(岑)을 보태어 매잠산(梅岑山)이라고 불렸다.

  오대(五代) 후의 양(梁)나라 정명(貞明, 915~921) 연간 초기까지 매잠산은 별로 이름 없는 외로운 섬에 지나지 않았다. 고기잡이를 하는 어부 몇몇이 살고 있었을 따름이었다고 한다. 훗날 유명세를 타게 된 건 영험하다고 전하는 사찰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남대문 부근에 웅기중기 모여 있는 신도들.

  매잠산의 이 최초의 사찰에는 일본 승려가 등장하고 있다. 남송(南宋) 때의 문헌 《불조통기(佛祖統紀)》(1269)의 기술에 따르면 당(唐)나라 때인 859년, 일본의 승려 에가쿠(慧鍔)가 오대산(五臺山)에서 관음상을 일본에 가져가려고 매잠산을 경유하게 되었다. 도중에 배는 매잠산 부근에서 암초에 걸려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이에 에가쿠는 "만일 보살님이 해동에 아직 인연이 무르익지 않으셨다면 이 산에 모시도록 하소서"하고 기도한다. 신기하게도 이 말이 끝나자 배가 즉각 물에 떠서 움직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에가쿠 일행은 관음상을 해상의 바위에 모시고 봉안식을 했다.


관음보살이 가려 하지 않았다고 해서 섰다는 불긍거관음원.

  이때부터 여러 문헌의 기술은 약간씩 다르지만, 관음상은 약 916년경 조음동 부근에 지은 사찰에 공양되었다고 전한다. 이 사찰은 고사(古事)의 '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아 '불긍거관음원(不肯去觀音院)'이라고 불렸다는 것이다.

  송(宋)나라 원풍(元豊) 3년(1080), 신종(神宗)이 사절단을 반도에 보내는데 배가 갑자기 풍랑을 만났다. 이때 상서로운 금빛이 매잠산의 조음동(潮音洞)으로부터 일어났으며 잇따라 배가 평안하게 떠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 기이한 소문을 들은 신종은 매잠산의 사찰에 액자 '보타(寶陀)'를 하사하는데, 나중에 이와 비슷한 음의 '보타(普陀)'라는 산 이름이 정식으로 매잠산을 대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각설하고, 송나라의 사절로 고려에 다녀갔던 서긍(徐兢)이 남긴 책 《고려도경(高麗圖經)》(1124)은 다른 판본의 관음 설화를 전하고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보타섬에는… 영험한 관음상이 있다. 옛날 신라 상인이 오대산에서 불상을 새겨갖고 귀국하려다가 바다에 암초가 나타나서 갈 수 없었다. 이에 불상을… 보타원전(普陀院殿)에 봉안한 후 선박의 왕래가 가능해졌다."


신라초 부근의 산비탈에 세운 비석.

  누가 배의 주인이었든지 막론하고 관음상을 실은 배가 부딪친 암초는 '신라초(新羅礁)'라고 전한다. 명나라 만력(萬曆, 1573~1620) 연간에 저술된 《보타산지(普陀山志)》가 일본 승려 에가쿠와 보타산에 얽힌 고사를 기록하면서 이와 같이 전하고 있다. 이 문헌에 따르면 신라초는 신우(神牛) 항구의 바다에 있으며 보타산의 제일 서쪽 끝에 위치한다.

  보타산 서쪽의 바다에는 정말로 큰 삿갓처럼 생긴 암초가 물위에 솟아있는데, 현지 사람들은 항비초(缸飛礁)라고 부른다. '항아리가 날아갈 듯한 암초'라는 의미로, 갈매기가 앉아서 쉬었다가 날아가는 암초라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바다 가운데 있는 신라초.

  천여 년 전 신라의 상선은 보타산의 이 신라초를 지나 명주에 들어갔다. 절강성 동부 연해에서 해동의 반도와 일본 등으로 통한 해상 항로는 이때 벌써 형성되어 있었다.

  그때 그 시절 선박들은 바다에서 큰 파도나 무서운 해적을 만나면 해상의 등대 같은 보타산을 찾았다. 이에 따라 보타산은 안전한 도피지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선박이 부두에 이른 후이면 선원(船員)과 탑승객들은 보타산에 올라 사찰에 참배를 하고 관음보살의 영력(靈力)에 서원을 올리거나 감사를 표했다.

  이 바닷길은 훗날 '동아시아의 해상 실크로드'라고 불렸다. 신라초는 바로 이 해상 '실크로드'를 견증하는 살아있는 지명이다.

  신라초는 물론 반도의 신라국과 한데 연결되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그때 신라인들은 대륙 연해 일대에서 거주하면서 '신라' 이름자의 지명을 많은 곳에 남기고 있었다. 해상 요충지에 위치한 절강 동부 연해에는 더구나 신라인들이 운집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신라'라는 이름을 곳곳에 찍어놓고 있다. 당․송(唐․宋) 시기 보타산 남쪽 일대의 황암(黃岩)에 신라방(新羅坊), 신라교(新羅橋)가 있었고 상산(象山)에 신라오(촌)(新羅嶴)가 있었으며 임해(臨海)에 신라초, 신라서(섬)(新羅嶼), 신라산(新羅山)이 있었다. 와중에 신라초나 신라섬은 항로의 표지로 되고 있었고 신라방, 신라촌은 거주지, 신라산은 시신을 묻는 자연적인 장지(葬地)로 되고 있었다. 또 일부 지명은 신라초처럼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반도로 건너뛰게 된다. 보타산에 일본의 승려 혜악보다 장장 백오십년을 앞질러 신라의 승려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는 '신라'의 지명처럼 보타산에 이름을 남기지 않았지만, 관음상이 아닌 사찰을 통째로 배에 실어가면서 보타산에 족적을 또렷하게 찍고 있다.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洛山寺)는 보타산의 '불긍거관음원'과 비슷한 구조인데, 의상(義湘, 625~702) 대사가 낙산 동쪽의 바닷가 굴속에서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을 보고 지었다고 하는 사찰이다. 의상 대사는 신라의 왕족 출신으로 불교 화엄종을 처음으로 반도에 도입한 고승이다. 이때 의상 대사가 관음보살을 만난 관음굴은 지금의 홍련암(紅蓮庵)으로 바닷물이 굴속으로 들어왔다가 나가면서 신비스런 분위기를 연출한다. 보타산 '불긍거관음원'의 앞에 있는 조음동을 그대로 닮은 듯하다.


불국의 구멍가게 그리고 음식을 맛나게 들고 있는 외국인.

  관음 신앙의 두 사찰이 대륙과 반도에 쌍둥이처럼 나란히 출현하는 것은 결코 우연하지 않다. 미상불 의상 대사는 당나라에서 구법할 때 보타산의 사찰을 순례하고 보타산의 지형과 비슷한 곳을 반도의 동해안에서 찾아 그곳에 사찰 건물을 지었던 것이다.

  의상 대사를 비롯한 반도의 구법승들의 대륙 유학, 보타산의 그림자가 비낀 낙산사 그리고 보타산과 그 주변에 남긴 신라인들의 흔적은 은연중 보타산과 이은 신라인들의 불연(佛緣)을 암시하고 있다.

  정말이지 '불긍거관음원'은 신라인들 때문에 생겼다는데 한결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옛날 선단(船團)이 보타산에 이른 후 신라인들은 섬에 올라 사찰에 가서 향불을 피웠다. 신라 선박이 머문 부두를 '고려도두(高麗道頭)'라고 불렀다고 한다. '도두(道頭)'는 옛날 배에 오르는 곳을 이르던 말로 부두라는 의미를 가진다. 에가쿠 일행이 뭍에 올라 머문 곳도 바로 이 '고려도두'였다고 전한다.

  '고려도두'는 보제사(普齊寺)의 옛길과 한데 연접된다고 남송 때의 문헌이 밝히고 있다. 보제사는 그 무렵에 본전(本殿)을 세운 보타산의 최대의 사찰이다. 일각에서는 또 고려에서 매년 공물을 바치러 송나라에 올 때 반드시 이 부두를 거쳐야 했으며 그래서 고려라는 관명(冠名)을 이 부두에 붙여 '고려도두'라고 불렸다고 주장한다.

  하여튼 이 '고려도두'는 현재 전부 육지로 변했으며 유적조차 없다. 지난 천여 년 동안 수위가 많이 내려갔고 또 사람들이 바다를 메우고 밭을 만든 결과이다.


단풍이냐 물고기이냐.

  여타를 막론하고 보타산에서 일행이 제일 놀랜 곳은 보제사의 앞에 있는 해인지(海印池)였다. 해인(海印)은 모든 법을 비춰보는 것이 마치 바다에 만상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는 말로, 우주의 일체를 깨달아서 아는 부처의 지혜를 가리킨다. 해인지는 원래 신도들이 방생하던 곳이었는데 훗날 연꽃을 심었다고 해서 '연화지(蓮花池)'라고 불리고 있었다.

  마치 '해인'의 의미를 하늘 아래에 그림으로 현시하는 듯 했다. 못에 잠긴 울긋불긋한 단풍잎이 비단물결처럼 바람 따라 물 따라 하느작이고 있었다. 실은 착시현상이었다. 이 단풍잎은 신도들이 방생한 금붕어이었다. 물고기가 하도 많아서 못가의 단풍잎이 수북이 떨어진 듯한 양상을 연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와 '너'와 함께 못가에서 금붕어와 더불어 노니는데 한겨울의 못에서 홀연히 하얀 연꽃이 피어오르는 듯한 환영幻影이 떠오른다.

  "저것 봐요, 바다에서 보살님이 보여요!"

  누군가 외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무아몽중의 세계에서 깨어났다. 보타산의 앞바다에 연꽃처럼 떠있는 낙가산이 시야에 뛰어들 듯 달려오고 있었다. 옛날부터 낙가산을 '와불(臥佛)'이라고 부른다고 하더니 말 그른데 없었다. 낙가산은 흡사 물위에 누워있는 부처의 형상으로 머리와 목, 가슴, 배, 발 등 모양이 아주 또렷하게 보이고 있었다.

  '신라' 이름의 암초는 바로 천년의 '해상 불국(佛國)'으로 통하는 그 바닷길에 침몰되지 않는 등대처럼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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