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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산 중대장 진룡학 발자취(2)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4월13일 09시51분    조회:2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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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겨레홍군 장정 발자취 따라(3)

■ 리 함

2013년 8월 27일 오전, 영신현성을 떠난 택시는 룡원구다리를 거쳐 계속 삼만개편 현지로 달린다. 삼만개편 현지를 이룬 삼만촌은 영신현서부의 구롱산 북쪽(九陇山北麓), 영신-정강산-련화(莲花)-호남 차릉(茶陵 )4개 현, 시의 교차지에 위치하고있었다. 현성과의 거리가 39키로메터일 때 룡원구진과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 큰길 따라 나아가는 택시로는 한식경이면 달릴수 있는 거리였다.

삼만촌은 룡원진과 정강산회사 지점인 룡시(龙市)사이에 위치하면서 큰길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굽어드는 산간에 자리하고있었다. 삼만촌에 이르니 옛 삼만 전체가 홍색관광지로 꾸며져 삼만을 찾는이들을 맞이해주었다. 삼만에서 첫 발목을 잡은 유적지-관광지는 천지만엽을 자랑하며 소소리 솟아오른 세그루 거대한 옛 단풍나무라 하겠다.

삼만촌의 세그루 옛 단풍나무 유적지-풍수평(枫树坪), 모택동 반신 동상이 자리하고있다.

우산모양으로 펼쳐지는 세그루 옛 단풍나무 유적지를 “풍수평”(枫树坪)이라고 부른다.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된 단풍나무아래에는 모택동 반신동상이 자리하고 단풍나무 관광안내비에는 “1927년 10월 3일 이른 아침, 개편후의 부대는 여기에 모이여 모택동이 중요강화를 하고 행군기률을 선포, 다음 부대를 거느리고 정강산으로 진군.”이라고 소개되여있었다. 이는 또 황포생 진룡학도 단풍나무아래서 모택동의 중요강화를 들은 추수봉기 참가자중의 한 사람임을 알리고있었다.

세그루 옛 단풍나무 뒤산 언덕에는 붉은기를 떠인 삼만개편기념비가 안겨들었다. 좁은 평지를 이룬 풍수평 왼쪽은 “삼만개편기념관”이 일어서고 오른쪽 퇀부자리는 워낙 민국 초년에 지은 종씨종사-종가사(钟家祠)였는데 이들 종씨는 진씨(陈氏), 리씨 등 50여호로 이루어진 성씨중의 한갈래였다. 그러던 종가사를 추수봉기 부대가 거쳐간 자리라고 국민당부대가 1929년 8월에 불태워버렸다고 하니 지금 볼수 있는 옛집은 1967년에 지은 집으로서 집내부를 한창 정리하며 페인트칠을 하고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하다싶이 추수봉기 부대는 워낙 5000여명의 부대였다지만 영신현 삼만에 이르렀을 때는 1000명에도 이르지 못했다. 삼만개편을 거치면서 원래의 사는 한개 퇀으로 축소편성되고 퇀아래에 1영과 3영 두개 영을 두었다. 제1영은 1련, 2련, 3련 세개련, 제3영은 7련, 8련, 9련 세개련으로 무어졌다. 제1퇀은 또 산하에 특무련, 군관대, 위생대, 치중대(辎重队,즉 군수품대)를 더 설치하였다.

제1퇀을 다시 련으로 보면 군관대, 위생대, 치중대를 제외하고 특무련까지 모두 7개 련이다. 패로 말하면 21개 패라는 말이 되는데 진룡학은 이 21개 패가운데의 제1영 산하 제1련 1패로 나타난다. 지금으로 보아 패장이라 하면 급별이 낮아보이지만 그 시절 모택동의 로농혁명군 근 1000명중 퇀부 간부와 련부 간부 도합 29명이고 패장이 21명이라 할 때 이들 50명 장관들속에 끼이는 조선인 진룡학의 지위나 급별은 결코 낮다고 볼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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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만개편 시절의 진룡학은 바로 이같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제1퇀의 퇀부자리를 거니는것만 같다. 퇀부자리옆에는 삼만촌에 머무르는 5일 기간 전적위원회 서기 모택동이 혁명군장병들과 함께 우물을 수건하였다는 “홍쌍정”(红双井)이 보이는데 홍쌍정에서도 마을사람들과 함께 시원한 샘물을 마시는 진룡학이 보이는것만 같아 마음이 울렁인다.

삼만개편기념관, 오른쪽 뒤켠으로 삼만개편기념비가 보인다.

마음이 보다 울렁거림은 삼만개편 유적지 답사를 마친후 “삼만개편기념관”에서였다. 2층으로 이루어진 기념관은 1층이 삼만개편 진렬실과 영상청, 휴식실, 2층은 하자진과 영신출신 장군 전시, 문물창고, 사무실로 나타났다. 1층 진렬실의 한 구간에 이르러 발길이 멈추어졌다. 여기 구간 벽에는 “로농혁명군 제1군 제1사 제1퇀 조직기구표”와 “삼만개편에 참가한 황포생 명단”이 전시되여있는데 상상외로 황포생 18명 명단에서 진룡학의 이름이 열두번째에 밝혀져있었다. 그러니 마음이 울렁일수 밖에 없는가부다.

조선인 진룡학이 중국혁명에 합류하여 황포군관학교 제4기생이 되고 1927년 추수봉기에 참가하고 중국인민해방군 건군사의 리정표로 되는 저명한 “삼만개편”에 참가하였다는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위대한 추수봉기에도 우리 조선인이 참가하였다는 말이 되니 그 느낌은 모택동과 주덕의 회사지점으로 되는 정강산시 룡시진에 이르러 보다 깊어진다.

정강산시 룡시진은 영신현성에서 서남으로 60키로메터, 정강산중심지 차평에서 서북으로 50키로메터 되는 곳에 위치하고있다. 원래는 녕강현(宁冈县)의 소재지로 되는 룡시진이였는데 2000년 5월에 정강산시와 합병하면서 룡시진은 현급시-정강산시 소속으로 넘게 되였다. 비록 현들 가운데서도 그닥 크지 않은 현이지만 필경은 현소재지이고 진의 규모나 경제력이 월등하다보니 2004년에 전국 82개 중점진의 하나로 치솟고 10년후 2014년 7월에 재차 전국중점진으로 선정되면서 정강산 3대 도시 진 가운데의 하나로 떠올랐다.

이같은 모습에다 당년 정강산 북부 상감변계(湘赣边界)의 라소산맥 중부에 위치한데서 오늘의 룡시땅에는 중외에 이름난 회사교(会师桥), 회사광장(会师广场), 회사기념비와 회사기념관, 홍군교도대 옛터, 홍4군군부 옛터, 모택동-주덕-진의 등 류숙지, 정강산근거지렬사릉원 등등 홍색관광지들이 많기도 하다.

룡시진에서 처음 현지답사를 시작한 곳은 룡시진 룡강하(龙江河) 강반에 위치하여 룡강하를 가로지른 회사교와 회사광장이다. 회사교는 워낙 나무로 된 목교였다가 해방후 돌다리로 바뀌였다고 한다. 1928년 4월 28일, 주덕-진의가 이끄는 상남기의(湘南起义)부대와 하룡이 이끄는 남창봉기 부분 부대가 모택동이 이끄는 추수봉기 부대와 이곳 다리를 거치며 서로 만났고 회사승리로 들끓었다고 전해진다. 그들속에는 우리 겨레 진룡학도 있었다.

회사교곁에는 정강산회사기념비와 부지면적이 만 8000평방메터에 달하는 널다란 회사광장이 펼쳐져있었다. 회사광장을 일명 홍4군건군광장이라고도 부른다. 광장의 중심부에는 모택동과 주덕이 서로 손을 잡은 주모회사(朱毛会师) 립체동상이 일떠서 숙연한 기분속에 잠기게 한다. 그 숙연함속에서 여기가 당년 주덕-진의 부대와 모택동의 부대가 회사한 정강산회사자리라는 강한 느낌을 받아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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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모회사(朱毛会师) 립체동상, 높이가 5.8메터이다.

관련자료에 따르면 1928년 5월 4일, 정강산근거지 군민 2만여명이 당년 룡강하반의 이곳에 모이여 주모부대 승리적 회사와 중국로농홍군 제4군 설립대회를 가졌다고 한다. 2008년 10월 7일 오후, 정강산시에서는 이곳에서 주모회사 80돐 기념대회와 신회사 광장락성식을 성대하게 가졌고 대형 주모립체동상이 그때 광장중심부에 모셔진것으로 알려진다. 주모립체동상은 무게가 5.4톤이고 높이가 5.8메터에 이르며 심양 로신미술학원 홍도(洪涛)교수가 설계, 제작하였다고 한다.

회사광장 부근 룡강로(龙江路) 북쪽구간에는 주모회사를 알리는 또 다른 하나의 회사원(会师园)이 있다. 회사원내에는 “정강산회사기념관”과 모택동-주덕 회견지-“룡강서원”(龙江书院) 등 기념건물들이 자리하여 다시 숙연한 기분에로 끌어간다.

룡강서원은 청 도광년간인 1840년에 지어진 옛 건물로서 상감변계 즉 강서, 호남 변계의 차릉(茶陵),령현(酃县), 녕강(宁冈) 3개 현의 유지인사들이 세운 당지 최고학부로 알려진다. 룡강서원 뒤면은 오호령으로, 앞면은 유유히 흐르는 룡강하라 지리풍수 또한 으뜸이다. 강남풍격의 서원은 당(堂)이요, 각(阁)이요, 재(斋)요 하는 9정(井) 18정(厅)으로 되여 각가지 칸이 100여칸, 현존하는 칸만 해도 40여칸으로 헤아려진다. 정강산에 진출한후 모택동은 룡강서원에 로농혁명군 제1기 군관교도대를 꾸리면서 소문이 났다. 1928년 4월 하순에는 모택동과 주덕의 두 부대 지도자들이 룡강서원의 문성각(文星阁)에서 친절한 회견을 가졌으니 룡강서원은 말그대로 “우리 군 군정학교의 요람”으로, “주모회사성지”로 널리 알려졌다.

모택동과 주덕의 회견지-룡강서원(龙江书院), “우리 군 군정학교의 요람”으로도 널리 알려졌다.

정강산시절 진룡학은 어떠했을가? 황포군관학교 4기생인 진룡학은 더 말치 않아도 제1기 군관교도대 교관으로 나섰을테고 모택동의 수하장관으로 활동하면서 룡강서원을 들락했을 것이다. 룡강서원 이모저모를 답사하면서 진룡학을 그리노라니 정강산 패장, 정강산 중대장으로 활약한 진룡학의 형상이 우렷이 떠오른다.

정강산시 룡시진을 계기로 8월 27일 현지답사는 순조로이 풀렸다. 영신현성, 룡원구, 삼만개편, 정강산회사 등지 답사는 반날밖에 걸리지 않았다. 택시가 아니면 여러날 걸려야 하는 현지답사를 마치니 가슴이 후련하다. 정강산시에 이어 류숙지는 정강산의 중심을 이루는 차평, 룡시진과 차평과의 거리는 50키로메터란다.

룡시진을 떠난 택시는 룡시와 차평 사이 늘찬 산길에 들어섰다. 라소산맥의 한 산령을 이룬 산길은 굽이굽이 돌며 산령으로 산령으로 치달아오른다. 지지리 늘찬 근 100리 산길은 한 구간에 이르러 왼쪽 산아래가 확 틔여온다. 망망림해가 눈앞에 펼쳐진다. 택시에서 내리니 어딜 보나 정강산의 특유한 대나무림으로 설레인다. 택시운전사는 차평으로 이어진 늘찬 산길에서 이 구간 대나무림이 최대가관이라며 황양계를 이룬 산령 정상부가 멀지 않다고 동을 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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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는 미구하여 황양계 정상아래에 이른다. 다시 택시에서 내리니 정상아래 산과 산사이를 이룬 좁은 지대로 신작로가 빠지며 웅장한 “U”자를 이루어 그야말로 장관이다. 머리 들면 황양계 정상이 바로 눈앞이다. 300리 길을 달리며 여러곳을 거친 현지답사길 반나절 피로가 일시에 가뭇없이 사라진다.

황양계 현지답사는 래일의 몫, 택시는 잠간사이에 17키로메터 산길을 내렸다. 산길이 끝나는 곳은 정강산의 중심지 차평. 차평은 해발이 800메터가 넘는 산우 산속의 도시라 그지없이 아름다웠다. 도시 중심부에는 무릉도원인가 아름다운 호수-읍취호(挹翠湖)가 펼쳐지고 모든 건물들은 수림속에 일어서 이채를 풍기고있었다. 황홀경이 펼쳐지고있었다.

정강산 중심지 차평에 펼쳐진 아름다운 호수ㅡ읍취호(挹翠湖)

관련자료를 들추니 마음의 의혹이 와르르 풀렸다. 라소산맥의 중부에 위치한 차평은 워낙 정강산시의 소재지였다. 력사를 헤아리면 1950년에 정강산특별구가 설립되고 1959년에 성에 귀속되는 정강산관리국이 설립되였었다. 1981년에 관리국을 철소하고 현을 설립했다가 3년후 1984년에는 시로 탈바꿈한다. 그러다가 2000년 5월에 이르러 원 정강산시와 원 녕강현이 합병하여 새로운 정강산시를 이룬다. 2005년 4월이후 새로운 정강산 시위와 시정부 그리고 행정부문들이 새 구역인 산아래 하평(厦坪)진으로 옮겨가면서 대부분 사무청사들은 접대장소로 변하고 호텔, 려관, 판점 등 관광시설들이 보다 구전해졌다.

정강산 시위와 시정부가 옮겨가자 이해 2005년 7월에 정강산관리국이 고고성을 터치였다. 정강산관리국은 지구급시인 길안시위와 시정부의 파출기구로서 급별이 현급시 정강산시를 초월하는 부청급으로 부상하고 관리국의 기관들이 차평을 소재지로 하였다. 차평은 말그대로 정강산의 중심을 이루는 국가급 풍경명승지로 거듭났다. 그러니 차평은 보다 아름답고 보다 발전한 황홀경을 이룬다. 이같은 산우 산속의 차평에 조선인 진룡학이 겨레의 첫발을 들여놓았으니 감개가 무량하기만 하다.

그런 진룡학을 “정강산혁명박물관”에서 찾을순 없을가? 무릉도원을 방불케 하는 그림같은 호수가의 한 음식점에서 늦은 점심을 치르고 곧추 찾은 곳은 산과 호수사이에 앉은, 정강산의 웅장함을 그대로 비껴담은 “정강산혁명박물관”. 그러나 정강산혁명박물관의 구석구석에서도 진룡학의 흔적을 찾아볼수가 없었다. 모택동을 따라 정강산에 오른, 정강산투쟁에 나선 그 시절 유일한 외국인인데 진룡학은 어디에서도 나타나주질 않는다.

차평은 정강산혁명유적지가 가장 집중된 곳으로 알려진다. 1927년 10월 하순, 모택동이 이끄는 추수봉기부대가 정강산 차평에 이르면서 첫 농촌혁명근거지가 건립되였다. 근거지에는 상감변계 당 전적위원회, 특위 상감변계로농병정부, 방무위원회, 중국로농혁명군 제4군군부, 군관교도대, 군계처 등 근거지 당, 정, 군의 지도기관과 후방기관들이 자리하면서 명실공히 정강산혁명근거지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이같은 차평이다보니 차평의 혁명유적지 군체와 차평 모택동의 옛집은 읍취호너머 동산자락에 자리하고있었다. 동산자락에서 멀지 않은 곳 산중턱에는 정강산혁명렬사릉원이 있어 차평 전경을 한눈에 굽어볼수 있었다. 정강산투쟁시기 4.8만에 달하는 혁명지사들이 희생되였다고 하는데 그중 만 5744명의 렬사들이 명부가 렬사릉원내 추모대청에 새겨져있었다.

유감스럽게도 그 어디에서도 진룡학의 이름 세글자를 보아내지 못했다. 혹여 무명렬사로 3만여명 무명렬사들속에 섞였을가, 아니면 정강산 희생자가 아니여서 정강산 렬사명부에 속하지 못하였을가? 정강산 중대장 진룡학의 발자취를 따라 정강산 현지답사길에 오른 필자로는 마음이 서운하기만 하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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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77](김춘선편6) 우리 조선족사거나 연변지방사를 보면 하나의 독특한 특색이 있다. 누구나 다 알고 정부에서도 승인하는 것인 데 그것이 바로 1980년대 문화부 부장이며 시인인 하경지가 연변을 시찰하고 남긴 유명한 시구이다. 즉 “산마...
  • 2020-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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