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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림기획련재14] 왕부(王府)의 옛터에 있었던 신라인의 숙박소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5월10일 09시28분    조회:2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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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옛날 옛적의 이야기이다. 해상 교통로를 따라 산동(山東)반도에 상륙한 신라인들은 다시 육상 교통로를 따라 내륙으로 향했다. 바닷가부터 두발로 날마다 백 리 지어 몇백 리를 이어지는 여로에서 신라인들은 행장을 어디에 잠깐씩 풀어놓았을까…

  신라인들의 숙박소 이야기는 대륙에서 그렇게 걸음을 떼고 있었다.

  그러나 숙박소라고 해서 신라인 누구라도 다 기거할 수 있은 게 아니었다. 당나라 때 관객(官客)과 서민을 상대한 숙박소는 관사官舍와 여인숙으로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역참은 관가에서 사절과 관원에게 숙박과 음식 그리고 교통도구를 제공하던 곳이었다. 법전 《당육전(唐六典)》에 따르면 당나라 때 역참은 30리마다 하나가 있었다고 한다. 또 교통도구는 제공하지 않고 관원과 관가의 손님만 초대하는 관사가 있었다. 여인숙은 대부분 개인이 경영하고 있었으며 내왕하는 서민 길손에게 숙박과 음식을 제공했다.

  관사나 여인숙은 나름대로 지명을 따거나 대상하는 손님에 따라 작명했다. 일본 승려 엔닌(圓仁, 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기록되고 있는 등주(登州) 성 남쪽거리의 동쪽의 신라관(新羅館)과 발해관(渤海館)은 바로 대상하는 손님에 따라 지은 관사 이름이다.

  이 신라관이나 발해관처럼 당나라 정부는 외국 사절단을 위해 여러 지역에 관사를 마련했다. 등주는 당나라 정부가 신라와 발해 사절단에 규정한 입국 항구였으며, 따라서 등주에는 특별히 그들만을 상대한 관사가 있었던 것이다.

  옛날 신라와 발해 양국의 사절단은 산동반도 북쪽의 등주(登州)에 상륙한 후 당나라의 역참운수 노선을 따라 장안으로 향했다. 신라관은 실은 당나라의 역참운수 계통에서 한 고리로 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숙박소에 들까?" 하는 고민은 적어도 우리 일행에게는 전혀 없었다. 바닷가의 위해(威海)에서 출발한 단 3시간 만에 목적지인 내륙의 청주(靑州)에 도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은 산과 들을 수없이 지나는 340㎞의 기나긴 행로였으나 시속 100㎞ 남짓이 달리는 고속철의 덕분으로 반나절에 완주가 가능했다.

  더구나 현성은 물론 작은 진(읍)까지 호텔이나 빈관, 여관 등 숙박소가 줄느런했다.

  당나라 때도 전문 신라인을 상대한 숙박소는 신라관 하나만 아니었다. 신라관이 아닌 신라원 역시 당나라 초부터 등장하고 있다. 이 무렵 반도부터 사절뿐만 아니라 승려, 상인, 유학생들이 대거 밀려들고 있었다.

  《불조통기(佛祖統紀)》에 따르면 정관(貞觀) 8년(634) 태조 이세민(李世民)은 산동반도 내주(萊州)의 상주문을 받는다. 그 내용인즉 고려 삼국(고구려, 신라, 백제를 지칭)의 승려가 중국에 와서 불법을 배우고자 하는데 그 허실이 뭔지 관망하고자 한다는 것. 이에 이세민은 그들을 막는 건 국익에 아무런 이익이 없다고 인정, 고려 삼국 구법승들의 진입을 허락하라는 조서를 내린다. 이때부터 당나라는 반도 구법승들에게 수용정책을 취하며 또 "번승(蕃僧)이라면 해마다 비단 25필을 주며 사계절 계절에 따른 복장을 주라"는 규정까지 짓는다.

  실제로 엔닌은 그들의 구법 여로에서 당나라 지방 주와 현 정부가 시사(施舍)한 쌀과 밀가루 등 생필품을 받았다고 그의 순례행기에 기록하고 있다. 엔닌 일행은 위해(威海)의 문등현(文登縣)과 등주에서 서행할 때 역시 이 지역의 역참운수 계통을 이용했으며 선후로 초현관(招賢館), 사산관(斜山館) 등 관사에 숙박했다. 그가 숙박했다고 하는 신라원(新羅院)은 이때 청주의 고찰에서 불쑥 나타나고 있다.

  엔닌이 순례행기에 기록한 내용에 따르면 청주 용흥사(龍興寺)의 전좌승(典座僧)이 그들 일행을 안내하여 신라원에 입주하게 했다. 전좌승은 사찰에서 음식과 상좌(床座) 등 일들을 관장하는 승직의 승려이다.

  여기에서 용흥사의 이야기를 하고 건너가야 하겠다. 용흥사 하면 당나라 고종(高宗) 이치(李治)를 떠올리게 된다. 용흥사는 남북조(南北朝, 420~589)시기에 생긴 고찰인데, 고종함형(咸亨) 원년(670)에 용흥사로 개칭했기 때문이다. 용흥은 용이 하늘로 솟구쳐 오른다는 뜻으로 왕조의 흥기를 비유하고 있다. 뒤미처 전국 각 지역에서 동명의 용흥사가 우후죽순처럼 등장하게 된다.

재건한 용흥사, 손님 없는 좌판이 한산한 분위기를 더한다.

  용흥사는 청주박물관에 소장된 북제(北齊) 무평(武平) 4년(573)의 《임회왕상비(臨淮王像碑)》의 기록에 따르면 "정동(正東)의 으뜸가는 사찰"이었다. 사찰은 여러 조대에 걸쳐 계속 별원을 세우는 등 덩치를 불렸다. 당송(唐宋) 시기, 용흥사에는 와불원(臥佛院), 천궁원(天宮院), 신라원(新羅院) 등 일여덟의 별원이 있었다고 현지 학자들이 역사문헌을 통해 밝히고 있었다.

  미구에 송(宋)나라와 금(金)나라가 지핀 전쟁의 불길은 고찰에도 옮겨 붙는다. "새우 싸움에 고래 등이 터진다"더니 이거야말로 "고래 싸움에 새우가 죽어나가는 것"이렷다. 사찰은 날을 따라 황폐하게 되었다. 명(明나라 초, 청주 관가에서 번왕(藩王)의 저택을 늘려 지으면서 사찰 옛터는 끝끝내 소실되었다.

우연일까, 신라원 옛터의 근처에 호텔이 섰다.

  그때로부터 800년 역사의 용흥사는 사람들의 시선과 기억에서 가뭇없이 사라졌다.

  1996년, 청주 시내 남쪽의 한 건축현장에서 문득 돌사람의 부러진 다리와 팔이 나타난다. 마침 시공현장의 바로 북쪽에 청주박물관이 있었으며, 유물의 발견 소식은 즉각 연구원들에게 전해졌다. 돌사람은 정체는 금방 밝혀졌다. 고대 불상이었다. 이틀 후 국가문물국의 지시로 10여명의 전문요원이 건축현장에 들어가 발굴 작업을 개시했다.

  "발굴 9일 동안 출토된 불상은 600여존이나 되는데요, 북위(北魏) 때부터 수(隋)나라, 당나라를 이어 송나라 때까지 500년에 걸친 유물입니다." 박물관 해설원의 말이다.

 미리 알고 지었는지 신라원 옛터의 바로 북쪽에 박물관이 서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용흥사 옛터의 발굴은 20세기 100대 고고학의 새로운 발견으로 되고 있단다. 영국학술원의 한 원사는 "동방의 미술사를 다시 쓰게 하는 중대한 발견"이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그때 그 시절 청주를 경유하던 구법승들은 용흥사에서 불교사의 이 기적을 몸으로 직접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기적을 남긴 이 사찰은 10년 전 시내 서남쪽의 타산(駝山) 기슭에 새로 재건되었다.

사찰 옛터에서 출토된 삼존불, 금박을 올린 천연색 석상이다.

  잠깐, 문등현에 설립된 적산(赤山) 법화원(法華院)은 신라인이 자체로 세워 해동(海東)의 구법승을 접대했다고 한다면 청주 용흥사의 신라원은 관가에서 외국 구법승을 수용하기 위해 특별히 세운 별원이다.

  이런 별원은 청주 서쪽으로 약 80㎞ 상거한 장백산(長白山) 기슭의 고찰 예천사(醴泉寺)에도 나타난다. 예천사 역시 용흥사처럼 남북조시기에 설립된 것인데, 당나라 때 사찰을 재건하면서 동산에 샘이 솟는다고 해서 중종(中宗)이 친히 하사한 이름이다. 고찰은 항일전쟁시기 팔로군의 병기공장과 후방병원으로 사용되다가 일본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10여 년 전에 재건되었다.

  순례행기의 기록에 따르면 엔닌 일행은 청주를 떠난 3일 만에 예천사에 도착하고 있었다. 그 무렵 예천사는 용흥사와 달리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엔닌은 "승려가 본디 100여명 있었으나 인연을 따라 흩어졌고 사찰에 남아 있는 자는 30명 남짓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럴지라도 예천사에는 별원이 그냥 있었고 전좌승은 엔닌 일행을 안내하여 그들을 신라원에 안치했다.

  현재로선 예천사 신라원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기실 예천사는 훗날 신라원보다 북송(北宋) 시기의 재상이었던 범중엄(范仲淹, 989~1052)으로 인해 유명세를 타고 있다. 범중엄은 지인의 인견으로 한때 예천사에서 책을 읽었다고 전한다. "먼저 천하의 걱정을 근심하고, 후에 천하의 즐거움을 누린다(先天下之而憂而憂,後天下之樂而樂)는 경구는 바로 그가 만든 것이다.

  범중엄은 신라원과 무슨 전세의 인연을 맺고 있는지 청주 용흥사의 부근에도 나타나고 있었다.

용흥사 옛터와 이웃한 삼현사, 범중엄이 여기에 있었다고 한다.
 
범중엄이 책을 읽은 곳이라는 예천사, 사찰을 장백산이 품에 안고 있다.

  각설하고, 공양을 든 후 엔닌은 사원을 순례하고 전내에 안치한 남조(南朝)의 신승(神僧) 지공(誌公)의 영상을 참배하며 사찰 이름의 근원인 예천(醴泉)을 구경한다. 그가 한무제(漢武帝)의 봉선(封禪) 제사를 올렸던 장백산에 올랐는지는 모른다. 순례행기에 기록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장백산은 태산(泰山)의 부악(附岳)으로서 장수한 도인 백토공(白兎公)이 이곳에 은거하고 있었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기왕 말이 났으니 망정이지 이 장백산은 두만강 기슭의 동명의 장백산보다 약 1천년을 앞서 작명되었던 명산이다.

  동명의 신라원은 곳곳에 산재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구법승들이 선택할 수 있는 주처(住處)는 신라원만 아니었다.

  엔닌의 기재에 따르면 그의 일행은 신라인들의 촌락에 숙박을 잡기도 한다. 신라인들은 자체적인 대륙의 교통망과 통신망을 구축하고 있었고 또 출중한 교섭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실제로 엔닌 일행의 통역은 신라 승려 도현(道玄)이 맡고 있었으며, 또 관가의 일부 수속은 촌락의 신라인들이 일행을 대행하고 있었다.

  당나라 때 엔닌이 상륙한 산동성 연해지역에는 등주, 래주, 밀주(密州)를 포함, 적지 않은 신라인 촌락이 있었다. 등주는 산동반도의 제일 동쪽 끝머리에 위치, 당나라와 신라가 바다로 제일 근접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신라인들의 활동이 빈번했으며 신라인들과 촌락이 적지 않았다고 엔닌이 기록하고 있다.

  사실상 당나라 경내의 신라인과 신라인 촌락에 대한 대륙과 반도의 문헌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상당한 부분은 거개 엔닌의 여행기 《입당구법순례행기》의 기재에 의거하고 있는 현 주소이다.

  이 기재에 따르면 산동반도 연해에는 신라인 촌락이 적지 않았다. 엔닌 일행은 유산포(乳山浦)를 떠나 해상에서 10여일 항행한 후 문등현의 적산촌(赤山村)에 정박하고 신라인 장보고(張保皐)가 세운 적산 법화원에 입주한다. 이때 법화원에는 승려 30여명이 있었는데, 사찰의 경전 강설 등의 예의규범은 신라 풍속을 따르고 있었다. 또 집회에 오는 사람은 도속(道俗), 노소, 존비(尊卑)를 막론하고 모두 신라인이었다. 개성(開成) 5년(840) 정월 열닷새 날, 법화원은 큰 법회를 열었다. 엔닌의 관찰에 따르면 "어제는 250명이 왔고 오늘은 200여명이 왔다… 공양 후 모두 흩어졌다." 이 기록에 따르면 부근의 촌락에 최소 수백 명의 신라인이 살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대중(大中) 원년(847) 6월, 엔닌은 초주(楚州) 즉 지금의 회안(淮安)에서 신라인 선주(船主)의 서한을 받는다. 그들의 선박이 산동반도 북쪽의 노산(嶗山)에 집결한 후 일본으로 향발한다는 것이었다. 엔닌은 그들과 함께 귀국하기 위해 이튿날 곧장 노산으로 달려간다. 이에 따르면 노산에는 신라인들의 항해 기지가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 주변에 신라인 촌락이 있을 수 있다. 엔닌은 또 밀주(密州) 즉 지금의 제성(諸城)에서 목탄을 싣고 나오는 신라인 선대를 두 번이나 목격한다. 산동의 중부 일대에서 적지 않은 신라인들이 목탄업과 수상 운수업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저런 자료들을 정리하다가 부지중 탄성을 한마디 뽑았다. "이것 봐요, 엔닌이 가보지 못했거나 기재하지 못한 신라인 촌락도 수두룩하겠네요."

  산동을 포함한 대륙의 많은 지역에서 신라 승려는 물론 사절이나 상인들은 모두 낯익은 고향의 얼굴과 귀에 익은 고향의 목소리를 무시로 들을 수 있었다. 꼭 마치 옛 이야기가 아니라 시시때때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경인 것 같다.홀연히 그 무슨 착각이 구름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정말이지 천 년 전의 반도의 신라인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현세에 등장했을까, 아니면 오늘의 대륙의 조선족들이 시침을 거꾸로 돌려서 과거로 돌아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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