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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림기획련재15] 용문의 동굴에 신라인이 숨어 있었나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5월19일 07시53분    조회:2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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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옛말에 "잉어가 용문을 뛰어넘으면 용이 된다"고 했다. 그럼 인간이 용문을 건너면 뭐가 될까?…"그거야 두발로 건너보면 금방 알거 아니겠어요?"

  솔직히 그래서 옛날부터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했을지 모른다.

  용문은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의 도심에서 남쪽으로 20여리 상거한다. 기실 용문에 앞서 이궐(伊闕)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궐은 대문을 뜻하는 것으로 두 건물 사이에 공간이 있는 형국을 말한다. 낙양 남쪽을 흐르는 강 이하(伊河)의 동쪽과 서쪽 양쪽의 산이 마주하고 서있는 모양이 흡사 대궐과 같았던 것이다.

용문 서산의 전경.

  수양제(隋煬帝)는 등극한 얼마 후 이궐을 용문이라고 지칭하면서 이하의 바로 북쪽에 동도(東都) 낙양을 짓는다. 이궐은 이때부터 이름 그대로 용문 즉 낙양 남쪽의 천연적인 문호(門戶)로 되었다. 황성의 정남쪽 성문은 이궐을 향하고 있었으니, 용문을 건너면 곧바로 인간세계의 '용'이라고 일컫는 황제가 나타나고 있었다.

  옛말이 그른 데 없나 보다. 각도에 따라 보는 색채가 달라지 듯 용문의 남북에서 만나는 세계도 각각이다. 용문의 남쪽에는 황제의 궁실이 아닌 부처의 세계가 있다.

  일찍 북위(北魏) 때부터 용문에 석굴을 만들고 불상을 모셨다고 한다. 용문에 현존하는 굴과 감실은 2천 3백여 개이며 석상은 9만 7천존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와중에 제일 큰 불상은 높이가 17m, 제일 작은 불상은 불과 2㎝이라고 하니 그야말로 '거인'과 '소인'이 공존하는 대천세계(大千世界)였다.

벌집처럼 숭숭 뚫린 용문의 석굴.

  그러나 이 불국의 세계에서 신라인이 만든 불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안내소의 예쁘장한 도우미는 신라인 이름의 석굴을 모른다고 말한다.

  "예? 우리 용문에 그런 감실(龕室)이 있어요?"

  언제인가 책을 보다가 찾은 석굴 번지수를 말했더니 도우미는 폰으로 어딘가를 열심히 검색한다. 그런데 이번에도 역시 모른다는 궁색한 대답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그렇다면 신라인은 불국의 세계에 종적을 감추고 있는 걸까.

  안내소를 나서니 전동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었다. 전동차의 행렬 자체가 한 마리의 꿈틀거리는 '용'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전동차는 매표소에서 남쪽으로 3㎞ 상거한 용문의 입구에 연이어 관광객을 토해 놓는다.

  먼저 가게에 들려 안내 책자 한권을 샀다. 용문의 이모저모를 소개한 《용문백문(龍門百聞)》이었다. 안내소의 도우미가 방금 전에 이 책을 권장했던 것이다. 길가의 한적한 곳을 찾아 벽돌처럼 두툼한 책장을 한 장 두 장 번지기 시작했다.

  웬걸,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끔흘끔 돌아본다. 하긴 그럴 법한다. 용의 비늘처럼 다닥다닥한 굴과 감실을 구경하기에 눈 두개가 모자라는 판인데 엉뚱하게 책을 펼쳤으니 말이다. 이거야말로 구경꾼인지 아니면 독서광인지 도통 분간할 수 없다. 용문의 석굴에 본의 아니게 유별난 그림을 그리는 모양새가 되어버린 것이다.

  다행이 천 년 전 반도에서 도래(渡來)한 신라인은 책갈피에서 현신(現身)하고 있었다. 책의 소개에 따르면 용문에 외국인이 만든 감실은 2개뿐이라고 한다. 신라인이 만든 감실이 서산에 있었고 토화나(吐火羅) 즉 중아시아 옛 나라의 승려가 만든 불상은 동산에 있었다.

  신라감실의 표식물이나 다름없는 진주천(珍珠泉)은 용문 풍경구의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용문백문》에 따르면 진주천은 물밑의 돌구멍에서 기포가 구슬처럼 솟구쳐 오른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직 샘물이 나오지 않아서 하마터면 진주천을 근처에서 언뜻 스쳐 지날 뻔 했다.

  《용문백문》에는 진주천 남쪽 15m 되는 곳에 '신라감실'이 있다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다. "웬 일이지?"하고 잠깐 우두커니 서있었다. 산체에 벌집처럼 숭숭 뚫린 석굴들이 저마다 눈을 크게 뜨고 혼돈세계에서 오락가락하는 이 속인을 비웃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모른다"는 말은 이곳에서 염불이 되고 있는 게 아닐지 한다. 진주천 바로 남쪽 기념품가게의 점원들도 또 "몰라요"를 연발하고 있었다. 그들의 호감을 얻으려고 일부러 기념품까지 샀으니 손님의 물음이 귀찮아서 짐짓 우엉을 까는 얘기가 아니렷다.

  "제494호 석굴이라니요? 여기에는 석굴 번지수를 표기한 게 없어요."

  "신라인이 만든 감실이라구요? 그런 걸 몰라요."

  "…"

  기념품가게의 옆쪽으로 10여m 가량의 돌층계가 있었다. 머리의 바로 위로 석굴이 걸려 있었다. 신라인이 만든 감실이 정말로 진주천 남쪽에 있다면 이 석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돌층계에는 '관광객 출입금지'라는 금속물의 패쪽이 세워져 있었다.

가게 옆 돌층계 끝머리에 신라불상 감실이 있지만, 다들 모르고 이곳을 스쳐 지난다. 

  그러고 보면 이 패쪽 때문이 아닐지 모른다. 관객들은 기념품가게를 지나고 또 돌층계를 지나면서도 위쪽으로는 눈 한 번 주지 않고 있었다. 그들을 탓할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돌층계 위의 석굴은 나무에 반쯤 가려 있었고 또 홀로 떨어져 있어서 유표하지 않았다. 특별한 관심이 없다면 신라상감은 그냥 무심히 지나치기 십상이었다.

  관람허가를 받고자 관리인을 찾으려다가 그만두었다. 공연히 긁어서 부스럼을 만들 것 같았다. 도둑놈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몇 발자국 뛰어서 냉큼 올라갔다. 사람의 키 높이의 작은 석굴 앞에 서기까지는 불과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결국 석굴에서 내릴 때 그만 관리인에게 들켜서 눈알이 쑥 빠지도록 한바탕 꾸중을 들어야 했다.

  이야기의 장면이 또 바뀐 것 같다. 다시 석굴이야기로 돌아가자. 눈앞에는 눈동자가 없는 확처럼 우묵한 석굴이 불쑥 나타나고 있었다. 높이 약 2m, 너비 1.7m, 깊이가 1.7m라고 안내책자가 설명하고 있었다. 석굴의 발치에 '제484호 굴, 신라상감(新羅像龕)'이라고 적은 석판이 있지 않았던들 신라인이 만든 감실이라고 판정을 내리기 힘들었다. 여느 감실과 구조가 엇비슷했고 또 그 무슨 석상이라곤 없었다.

  그럴지라도 경탄은 이하의 샘처럼 저절로 흘러나왔다. 천 년 전 신라인이 벌써 이곳에 와서 석굴을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기만 했다.

 
신라인이 만든 용문 484호 감실.

  신라상감은 용문의 석굴에서 신라인이 만든 유일한 감실이다. 감실의 문미(門楣) 위쪽에 '신라상감'이라는 예서체의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고 하는데, 책에 나오는 탁본이 아니라면 그런 글자가 있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얼기설기 패인 석벽에는 글자의 획이라곤 알리지 않았다. 잔존한 흔적으로 미뤄 감실에는 석상이 7존 있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었다. 부처 석상 하나와 제자 석상 둘, 보살 둘, 역사 둘이었다. 이런 석상은 움직일 수 있는 석상이었으며 따라서 다른 석상보다 더 쉽게 잃어진 것 같다.

감실의 문미에 적힌 글자 '신라감실'의 탁본.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하나 있었다. 용문 석굴에서 많은 석상은 민국(民國, 1912~1949) 시기에 유실되었으며 정작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혁명적'인 학생과 군중들의 보호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때 대륙의 첫 사찰이라고 하는 낙양의 백마사(白馬寺)의 유적도 일부 훼손되었지만 용문 석굴은 이 전대미문의 겁난(劫難)을 피할 수 있었다.

  현재 해외에 유실된 문물 가운데서 70여점의 행방을 찾았지만 신라감실의 석상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다고 전한다. 와중에 누군가는 "혹여 신라인이 만든 불상은 일본에 유실된 건 아닐까?"하는 의문을 제기한다고 한다. 하긴 신라상감 남쪽의 고양동(古陽洞)의 예불도(禮佛圖) 조각은 물론이요, 근처의 빈양동(賓陽洞) 보살의 두상(頭像)도 모두 일본에 가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니 말이다. 더구나 용문의 문물을 가져간 나라들 가운데서 신라의 석상에 특별히 욕심을 부릴 나라를 찾는다면 아무래도 일본이 첫손에 꼽힌다.

목 떨어진 불상이 있는 감실, 신라인이 만든 감실에도 이런 활동불상이 있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신라상감의 석상은 언제 잃어졌는지 그 시기마저 불명한 것으로 《용문백문》에 기록되고 있었다.

  아쉬운 일은 그뿐만 아니었다. 토화나의 감실은 "경운(景云) 원년(710) 승려 보륭(寶隆)이 만들었다"고 명명백백하게 문자로 기록되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상감을 만든 주인공은 감실의 소실된 석상처럼 형체를 그리기 힘들었다.

  당시 신라와 당나라의 교류는 아주 활발했으며 양국을 오가는 인원은 아주 많았다. 신라 사절과 승려, 상인, 유학생이 줄을 이었다. 이에 따라 대륙에 전문 신라인을 상대한 숙박소인 신라관(新羅館), 신라원(新羅院) 그리고 신라인들의 집거지인 신라촌(新羅村)과 신라방(新羅坊)이 출현했던 것이다.

  낙양과 장안은 대륙의 중심이었으며 이에 따라 신라인들의 발길이 잦았다. 낙양 용문 석굴의 신라상감은 그들의 중원에 남긴 흔적이었으며 여느 석굴처럼 불교 교리를 선전하고 수행, 예불을 하던 도장이었다.

  일각에서는 용문의 많은 석굴이 당나라 때 생겼다는 데 주목, 이 시기 무측천(武側天, 624~705)의 요청에 응해 경전번역 작업을 했던 고승 원측(圓測, 613~696)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원측은 신라의 왕손으로 15세에 당나라에 와서 낙양과 장안(長安)에 머물면서 불법을 배웠다. 그의 부도탑(浮屠塔)은 장안의 흥교사(興敎寺)에 있지만 입적했을 때 다비(茶毘)된 장소는 용문 석굴의 맞은쪽에 있는 향산사(香山寺) 부근의 계곡이다. 신라의 국사(國師)가 된 고승 무염(無染, 801~888)도 신라상감의 주인공으로 지목되고 있다. 그 역시 신라 왕손 출신이며 낙양에 와서 불법을 수행했다. 고승 무상(無相, 684~726)도 한때 중원을 다녀갔으며 당현종(唐玄宗)까지 알현한바 있다. 화엄종(華嚴宗)의 창시자인 신라의 고승 의상(義湘, 625~702)도 중원지역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군계일학(群鷄一鶴)의 이런 명승을 제외하고 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신라 승려들이 중원에 머물렀거나 다녀갔다. 그리하여 일본 승려 엔닌(圓仁, 794~864)은 그가 장안에서 만났던 호승(胡僧)을 출신국에 따라 '00국승(國僧)'으로 표기한데 반해 신라 승려만은 '제사(諸寺)'의 신라 승려라고 한데 묶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라 승려가 용문의 감실을 만들었다고 콕 집어서 얘기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이역에서 생활하고 있던 신라인들에게 부처는 둘도 없는 구심점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 대륙의 신라 촌락마다 해와 달처럼 어김없이 출현했던 사찰이 바로 이를 견증한다.

  용문의 산체에 출현하는 석상에는 북위부터 여러 조대를 거치는 4백년의 연륜이 조각되어 있었고 이하의 수면에 그림자로 비껴 있었다. 석굴을 만들던 석공들과 석굴에서 수행하던 승려 그리고 석굴에 와서 예불하던 신도들은 모두 이 강물을 길어먹었다. 또 승려들과 신자 그리고 문인들은 이 수로를 따라 용문 석굴에 와서 예불하고 노닐었다.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지인인 승려 불광(佛光)과 함께 일엽편주를 타고 석굴의 사찰에 와서 차를 마시고 시를 읊었던 것이다.

  산기슭을 따라 단 한 시간 만에 용문의 4백년 세월을 주파했다. 용문을 건너 다시 낙양 시내로 들어가는데 문득 시가 아닌 옛 노래가 머리에 떠올라 가락을 젓고 있었다.

  낙양성 십리 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일순간 반도의 낯익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노래처럼 홀연히 다가오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 속에서 신라인 석굴의 주인공이 세월의 물결을 헤가르고 당금이라도 눈앞에 떠오를 듯 했다.

  실은 구름처럼 물위에 비낀 천년의 환영(幻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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