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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전범 특별군사법정의 기록원-권덕원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6월25일 05시35분    조회:2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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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군사법정 옛터 진열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권덕원.

    조선족 이야기 백년사

    (흑룡강신문=하얼빈) "지금까지 취재하러 왔던 언론사가 50여개 되는 데요…" 권덕원(權德源)은 문서철에 보관한 신문 지상의 기사를 일행에게 하나하나 꺼내 보였다.

  2015년 한해만 해도 여섯 개의 신문사가 그들의 얼굴을 문서철에서 내밀고 있었다.

  권덕원은 랴오닝성(遼寧省) 소재지 선양(沈陽)의 도심에서 약간 떨어진 주택가에 살고 있었다. 이른 봄의 쌀쌀한 날씨 때문인지 권덕원을 찾는 기자는 아직 없었다. 뒷이야기이지만, 기자들이 꽃을 본 나비처럼 권덕원에게 날아드는 시기는 대개 '8.15'에 즈음한 여름과 가을이었다.

  "기자들은 모두 일본전범을 심판했던 60년 전의 그 군사법정을 알고 싶어 했지요."

  권덕원은 대륙의 제일 마지막 일본전범 특별군사법정의 기록원이다. 군사법정의 판사나 통역관은 물론 전범들이 모두 저 세상으로 사라지고 있는 현 주소에서 그는 또 한 번 그 역사의 충실한 '기록원'으로 재임하고 있는 것이다.

  권덕원은 선후로 중앙정법간부학교 심양분교, 중공 단둥시(丹東市) 당 학교, 랴오닝(遼寧)정법관리간부학교, 요녕 공안(公安)사법관리 간부학원 등 부문에서 근무했다. 그는 《형사죄행 도책(圖冊)》, 《노동법학 교수과정》 등의 주필을 맡았고 "노동분쟁 중재를 논함" 등 민법과 경제법 분야의 논문을 펴냈다고 《영재대전(英材大典)》이 기록하고 있다.

특별군사법정 옛터 진열관에 전시된 옛 기록수첩을 가리키고 있는 권덕원.

  사실상 기자들이 권덕원을 찾은 후 하나 같이 물어보는 이야기는 모두 이 《영재대전》의 기록을 비켜가고 있었다.

  "조선족인 제가 어떻게 특별군사법정의 일원으로 참석할 수 있었냐 하는 것이었지요."

  기자들의 이 의문은 허망 생긴 게 아니었다. 일본전범에게 심판을 내리기 위한 특별군사법정은 당시 법학계의 거두와 엘리트들이 집결한 장소였다. 그런데 20대 초반의 야릿야릿한 애송이가 법정에 버젓하게 앉아있었던 것이다.

  1. 기자들이 제일 많이 물어본 이야기

  여기서 잠깐 설명을 하고 건너가야 하겠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항복을 선고했다. 1946년 1월 19일 동맹국 점령군 사령관 아이젠하워는 특별공시를 발표하고 도쿄에 중국과 미국, 영국, 소련 등 11국의 판사와 검사로 구성된 극동 국제군사법정을 설립한다고 선포했다. 이와 함께 《극동국제군사법정헌장》을 공표, 국제군사법정은 평화를 파괴한 죄, 전쟁법규와 관례를 위반한 죄, 인도주의를 위반한 죄를 심리할 권한이 있다고 규정했다. 상기 3종의 죄를 저지른 것은 갑급 전범이었다.

  국제군사법정은 주로 갑급 전범을 심판했고, 을․병급 전범은 각 피해국 법정에서 단독 심리했다. 을․병급 전범의 죄장은 주요하게 제네바 적십자조약 등 국제공약을 위반했거나 전시 법규를 위반하고 살인, 성폭행 등 잔혹한 행위, 전쟁포로의 학대, 인원 구금 등 비인도적 행위에 직접적으로 종사, 지휘한 것을 망라한다.

  중국은 전승국이자 일본침략의 피해국이다. '8.15' 광복 후 각기 대륙 남북의 여러 지역과 대만에 군사법정을 설립하고 중국침략 전쟁에서 엄중한 죄를 저지른 일본 을․병급 전범을 심판했다. 1945년 12월부터 1947년 말까지 중국 각 지역의 군사법정은 전범 안건 2,435건을 수리, 이 가운데서 110건이 사형으로 언도되었다.

  물론 권덕원이 기록원으로 참석한 군사법정은 국민당 정권 시절의 이 군사법정이 아니었다. 이때 권덕원은 고작 15살의 어린 나이었다. 그는 목단강(牡丹江) 고려제1소학교(지금의 목단강조선족제1소학교)를 마친 후 중학교에서 책을 들고 공부하고 있었다.

목단강고려제1소학교 졸업식 사진, 뒷줄 오른족 4번째 인물이 권덕원이다.

  "중학교 2학년 때 '모택동(毛澤東)청년단'에 가입했습니다. 그때까지 청년단은 비공개 조직이었습니다." 권덕원은 자랑스러운 어조로 이렇게 밝히고 있었다.

  '모택동청년단'은 그때 그 시절 중국공산당 하부조직인 공청단 조직의 이름이었다. 어린 권덕원이 이런 조직에 가입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그의 큰형은 공산당 산하의 민주연군에 입대했으며 둘째 형도 뒤미처 민주연군의 별칭인 해방군에 입대했다. 그들은 모두 국공내전 즉 국내 해방전쟁에서 희생되었다.

  미구에 권덕원은 북경정법대학의 학생으로 입학한다. 졸업할 때 권덕원은 중앙정법간부학교에 통일적으로 배치되는데, 총장은 훗날 북경시 시장으로 취임한 팽진(彭眞)이었고, 부총장은 훗날 국가 지도자로 있었던 동필무(董必武)였다. 이 무렵 중앙정법간부학교는 심양에 분교를 설립하고 기층 사법간부를 훈련시키고 있었다. 권덕원은 심양 분교에 내려갔다.

  "정법대학을 다닐 때 조선족이 3명 있었는데요, 한명은 북경에 남고 다른 한명은 내몽고에 갔지요."

  결국 중국정법대학 출신의 조선족 졸업생으로는 권덕원 단 한명이 심양에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야기가 다른 데로 흐른 것 같다. 실은 이와 같은 특이한 경력이 권덕원을 군사법정의 심판석에 앉게 했다는 후문이다.

  1956년 4월 25일, 모택동 주석은 명령서에 수표하고 중국에 수감되어 있는 제일 마지막 일본전범을 심판, 처리할 데 대한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의 결의를 선고한다. 이 결정을 집행하기 위해 잇따라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과 요녕성 심양 두 지역에 일본전범을 심판하기 위한 군사법정을 각기 설립한다.

  잠깐 설명을 한다면, 일본이 전패하여 항복한 후 일부 일본 군인은 염석산(閻錫山)의 부대 등 국민당 군대에 참가하여 국공내전에 참가했으며 나중에 인민해방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 부분의 일본전범이 도합 140명 되었으며, 태원 전범관리소에 구금되었다. 1950년 7월, 소련은 중국 동북에 출병했을 때 체포했던 일부 전범을 중국에 송환했는데, 이 부분의 전범이 도합 969명으로 요녕성 무순(撫順)의 전범관리소에 구금되고 있었다.

무순 전범관리소 일각 /사진제공 전정혁.

  특별군사법정에는 판사만 아니라 변호사, 기록원, 도우미 등 인원이 필수적이었다. 군사법정 근무인원을 선정할 데 대한 특별과업은 요녕성 공안청(公安廳)에 의해 정법간부학교 심양분교에도 떨어졌다. 심양의 유일한 중앙기관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법률을 전공하고 일본어를 숙지했으며 중공 당원이고 '열사군인' 가족인 권덕원은 유력한 후보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나중에 권덕원은 변호단 단장을 맡은 간부학교 왕씨 성의 총장과 변호사를 맡은 형법교학연구실 이씨 성의 교원과 더불어 특별군사법정에 파견되었다. 시초에 권덕원은 법정의 음성 녹음을 담당하고 녹음기록을 자료로 편성했으며 그 후 방청객 입장권의 수취, 현장질서의 유지 등 기타 작업을 함께 수행했다.

  권덕원의 말을 빈다면 특별군사법정에서 그의 직무는 지금의 '법관(法官) 보조원'이었다.

  2. 군사법정의 제일 인상 깊던 이야기

  벨이 처음으로 울리자 입장권을 소지한 방청객들이 법정에 들어섰다. 각 계층의 유지인사와 중앙의 간부 등 전국 각 지역에서 선정된 인물들이었다. 두 번 째 벨이 울리자 공소인과 변호사, 피고, 증인, 번역인원이 입석했다. 공소인과 변호사는 1:1 비례였다. 이어 피고가 들어섰다. 병석에 있는 1명을 제외한 27명이었다. 세 번째 벨이 울리자 판사 2명이 심판장을 앞세우고 들어섰다…

  와중에 변호인은 짙은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검은 구두를 신었으며 옆구리에 검은 가방을 끼고 있었다. 당시 국내에는 거의 양복을 입은 사람이 없었으며 이로 하여 그들의 복색은 법정 내외에서 더구나 유표하게 눈에 띄고 있었다.

  피고석에 죄인으로 도열한 일본전범을 만나니 만감이 교차했다. 권덕원의 가족은 실은 반도에서 살판을 치는 일제의 만행을 참다못해 북만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때 일본 놈들은 장마당에 나온 조선인 노인이나 아줌마들이 흰옷을 입지 못하게 하느라고 일부러 그들의 옷에 페인트를 뿌렸지요."

  일본인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놋그릇을 죄다 몰수했다고 한다. 탄환을 만들기 위한 재료를 수집했던 것이다. 권덕원이 소학교 3학년을 다니던 때 그의 가족은 경상북도 회양군의 고향마을에서 부득불 이삿짐을 쌌다. 드디어 이역의 추운 고장인 목단강에 행장을 풀었지만 그렇다고 일제의 마수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때 익힌 일본말을 일본전범을 심판하는 법정에서 다시 듣게 되었다. 정말로 세상사가 하나의 요지경과 같았다.

  특별군사법정의 판결서는 주은래(周恩來) 총리가 직접 관리했다고 권덕원이 말한다. 주은래 총리는 판결서를 일개 사법문건이라기보다 외교문서 수준의 높은 요구를 하고 있었다.

  "문장부호 하나라도 틀린 게 있으면 국제적인 망신을 하는 거라고 말씀했지요."

  그래서 특별군사법정의 판결서는 60년 후에도 법률적으로는 아무런 하자가 없다고 권덕원은 인터뷰 도중에 여러 번 강조하고 있었다.

  실은 심양 특별군사법정 심판장도 공화국 주석이 직접 선정한 인선이었다. 당시 가잠은 최고법원 형사재판정 심판장을 맡고 있었다. 시초에 가잠은 특별군사법정의 책임이 막중한 걸 고려해서 다른 법률 전문인에게 맡길 것을 제기했다고 한다.

  "당신은 모(택동)주석이 재삼 고려한 인선이니 변경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대학 법률교육을 받았고 또 고등법원 사업경험을 갖고 있는데, 중국에서 법률 권위자입니다. 당신이 맡지 않으면 누가 맡을 수 있겠습니까."

  당시 주은래 총리가 가잠에게 했다는 이 말을 권덕원은 그 한마디 또 한마디를 마치 어제 생긴 일처럼 회억하고 곱씹고 있었다.

  특별군사법정의 인원 구성을 마친 후 가잠은 심판에 참석하는 모든 인원들은 직위의 높낮이를 막론하고 중국과 국제 법률문건을 재차 학습할 것을 거듭 요구했다고 한다. 법정 인원들은 피고인의 고소장에 열거된 범죄사실과 증인의 증언,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의 공소서 그리고 피고인의 공술 등 구체자료를 잘 숙지해야 했다.

  가잠의 주재로 심양 특별군사법정은 1956년 7월 1일부터 7월까지 괴뢰정부인 만주국의 총무청 장관 다케베 로쿠조(武部六藏) 등 일본 전범 36명에 대한 심판을 진행했다. 에피소드가 있다. 이때 다케베 로쿠조는 심각한 마비증으로 인해 좌립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래서 변호인의 신청에 의해 가잠은 다케베 로쿠조가 병상 앞에서 심문을 받을 수 있다는 재정(裁定)을 내린다.

  가잠은 심양 특별군사법정에서 1호 인물이었고 또 권덕원의 기억에 제일 깊은 인상을 남긴 인물이었다.

  언제인가 권덕원은 가잠을 수행하여 심양 부근의 명소로 나들이를 갔다. 벼랑 틈에 생긴 작은 길을 지나는데, 가잠은 몸이 약간 비대해서 벼랑 틈을 빠지기 힘들었다. 이때 권덕원이 가잠의 옷을 들었으며 수행원이 뒤에 밀고 앞에서 당겨서 무를 뽑듯 했다고 한다. 법복(法服)을 벗고 민낯을 드러낸 가잠의 내밀한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가잠은 은퇴한 후 중국 법학회와 변호사협회 고문 등으로 있다가 1996년 93세를 일기로 북경에서 사망했다.

  증인석에 나선 대청국(大淸國)의 마지막 황제도 잊을 수 없는 모습으로 권덕원의 기억에 남고 있었다.

  "저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최대의 한간(漢奸)인 애신각나․부의(愛新覺羅․溥儀)입니다."

  부의가 증인석에 나서 한 첫마디의 말이었다. 1956년 7월 2일, 부의는 심양 특별군사법정에 처음으로 전범과 증인 2중 신분으로 등장했다

  3. 피고석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

  바람에 날려갈 듯 가냘프고 껑충한 키, 잡아당긴 듯한 긴 목, 검은 테의 안경… 귀로만 들었던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는 그렇게 만주 땅에 살던 옛 '신민(臣民)' 권덕원의 눈에 뛰어들고 있었다.

  "'황제'는 말을 잘 했고 또 알고 있는 것도 많았습니다…" 권덕원은 이렇게 '황제' 부의가 남긴 인상을 더듬고 있었다.

  부의는 도쿄 극동 국제군사법정에도 증인으로 참석했다고 한다. 그때 부의는 그가 일본 천황의 '괴뢰'였으며 '전범'이 아니라고 고집했다고 한다. 또 중국에 돌아가면 사형으로 판결될까 우려되어 기어이 일본에 남으려 했다는 것. 그러던 이 '황제'는 무순 전범관리소에서 6년 동안 교양을 받고 심양 특별군사법정이 설립되던 1956년에는 드디어 '인간 개조'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부의가 수감되어 있던 전범관리소 68번 방 /사진제공 전정혁.

  부의가 증언한 것은 만주국 총무청의 차장 후루미 타다요미(古海忠之)의 죄행이었다.

  "후루미 타다요미는 증언이 전부 '사실'이라면서 자기는 응당 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어요." 권덕원은 이렇게 그때의 정경을 회억했다.

  후루미 타다요미는 머리를 숙인 채 눈물을 흘렸고, 그를 신속히 판결하여 사형에 언도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7월 20일, 군사법정은 후루미 타다요미에게 18년 유기도형을 언도했다.

  심양과 태원의 특별군사법정은 6월부터 7월까지 종국적으로 45명의 일본전범을 심판했다. 당시 공화국 정부의 재판 원칙은 "죄는 일본 군국주의에만 있고, 일본의 인민에게는 없다"는 것이었다. 45명의 일본전범은 모두 20년 이하의 유기도형에 언도되었으며 형기는 1945년 전패 후 구금된 시일부터 시작했다. 일본전범 재판에서 한명도 사형하지 않은 용서와 관용을 베푼 것은 중국공산당뿐이다.

  1956년, 공화국 정부는 또 죄질이 경하고 죄를 뉘우치는 표현이 좋은 1017명 전범의 기소를 면하고 전부 석방하여 귀국시켰다. 심양과 태원에서 판결을 받은 일본전범도 1964년 3월 전부 석방했다. (공화국 정부가 수감한 일본전범은 도합 1,109명이지만, 수감 기간 47명이 사망했으며 이들은 석방자 명단에서 제외된다.)

  심양 특별군사법정의 심판이 끝난 후 권덕원은 부분적 일본전범의 귀국을 위한 무순-심양-천진(天津)행에서 안전보위, 생활 봉원, 통역 등을 겸한 요원으로 있었다.

  그때 일본전범을 수감하고 있던 무순 전범관리소는 세계적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전범 수감소로 되고 있다. 전범관리소 소장은 조선족 군인 김원(金源)이었다. 김원은 전범관리소 소장으로 25년간 근무했으며 2002년 사망했다. 김원 소장이 일본전범 석방 의식에서 유창한 일어로 연설하던 장면은 한 장의 그림처럼 권덕원의 머리에 남아있었다.

  "그때 석방증을 받은 적지 않은 전범은 벌써 백발이 되고 있었는데요, 졸업장을 받은 학생들처럼 기뻐하고 감격하고 있었습니다."

  무순 전범관리소는 대문밖에 전사 1명이 보초를 서고 있었고, 뜰에는 보초가 없는 평화로운 경상이었다고 권덕원이 회억하고 있었다. 말이 전범관리소이지 광장과 화원이 있었고 도서관이 있었으며 열람실이 있었고 이발소와 의료소, 식당, 주방 등 오장육부가 구전했다. '문화대혁명' 때 전범관리소에 들이닥쳤던 '홍위병(紅衛兵)'들이 "이게 '요양소'이지 감옥이 맞느냐" 하고 화를 버럭 냈다는 이야기가 이상스럽지 않다.

  이와는 달리 권덕원은 전범관리소를 '특수한 농장'으로 비유하고 있었다. "봄에 심고 여름에 길러서 마침내 풍작을 거둔 거지요."

  석방증서를 발급한 후 담당자가 전범의 가슴에 부착한 '전범명찰'을 뜯어냈다. 이때부터 그들은 일본전범이 아닌 외국 손님으로 변했고 그날 저녁 전범관리소가 아닌 호텔에 가서 국제 우호인사의 대우를 받았다.

  '일본전범'이 중국을 떠날 때 정부는 인민폐로 수십 원 되는 탄자 그리고 새 의복과 구두, 모자를 발급했고 또 가방에는 치분과 치약, 화장지를 넣어주었다. 생활의 구석까지 염려하는 이런 배려는 석방자들의 마음을 뜨겁게 흔들어놓았다.

  그러나 석방자들은 일본에 귀국한 후 금세 마음이 싸늘해졌다. '중공에 의해 세뇌당한 인간'으로 일본 사회에 배척되었던 것이다. 이런 험악한 환경에서 석방자들은 이듬해 도쿄에서 '중국귀환자연락회'를 설립하고 그들의 결집을 단행했다. 장정 제2조항은 연락회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중국침략에 참가하여 여러 가지 죄행을 저지른 사람들이 인도주의적 반성의 입장에 서서 침략전쟁을 반대하고 평화와 일중 우호에 기여하기 위한 취지"라고 명시한다. 1950년부터 1964년에 이르는 이 14년 동안 중국을 침략했던 1천여 명의 전범은 마침내 인성을 저버린 '귀신'으로부터 인간으로 재귀한 것이다. 정부의 용서와 전범 개인의 참회를 통해 처음으로 국제 전범을 성공적으로 개조한 기적이었다.

  잠깐, 기자들이 두 번 째로 많이 묻는 물음이 있다고 권덕원이 말한다. 그는 인터뷰가 끝나도록 이 물음을 묻지 않는 우리 일행이 다소 의아한 듯 했다. 나중에 권덕원이 기자를 대신하여 그 물음을 꺼내고 있었다.

  "다들 묻던데요, 근간에 일본의 우경화가 아주 심한데, 그때 전범을 관대하게 처리한 게 잘 되었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거였죠."

  미상불 권덕원은 수십 번이나 동일한 질문을 받았고 또 수십 번이나 동일한 대답을 한 것 같았다.

  역사는 필경 기록이다. 권덕원은 60여 년 전 발생되었던 그 사건의 기록원이다. 어느 시점부터 그는 더는 단순한 기록원만 아닌 역사의 산 '화석'으로 되어 사람들에게 판독되고 있는 것이다.
        
        북경 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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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7-21
  •            조선족 항일로전사 리민 '푸틴훈장' 수여받아       "중러인민이 희생으로 바꾼 승리 후대들은 잊지말아야"   (흑룡강신문=하얼빈) "2013년 12월 21일 러시아 대통령 푸틴의 명령에 따라 '1941년-1945년 위대한 위국전쟁...
  • 2015-06-10
  • 만세묘지에 묻혀있는 백년의 함성 연변의 항일운동은 언제 어디서 시작되는가   이 이야기는 한 시골노인의 어릴 때의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7,8살 때 소를 몰고 산을 오르내리던 소년은 늘 비탈의 무명의 무덤을 지났다. 아니, 이 무덤은 주인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을 뿐이지 실은 무명의 무덤이 아니었다. 방창화...
  • 2015-06-01
  • 중국조선민족사학회 연변지역 리사확대회의 연변대학서   더 많은 이들이 우리 조선민족의 력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게 하고 조선족의 력사를 발굴, 선양하기 위해 중국조선민족사학회(회장 정신철)에서는 5월 22일, 연변대학에서 리사확대회의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우리 민족 력사연구분야의 관계자 십여명이 참...
  • 2015-05-22
  • [원제목]'애족장' 수훈자 윤낙세 후손, '2015 호국영령 위패봉안식'에 참가 항일 독립유공자 중국에서의 활동 재조명 계기 마련   ▲ 독립유공자 수훈 애족장 윤낙세 후손인 윤운걸(흑룡강신문 길림성 특파원)씨와 그의 부인 박진숙씨 [서울=동북아신문]'2015년 제2회 한국 호국영령 합동 위패봉안...
  • 2015-05-21
  • [항일전쟁은 몇년인가?] 노구교의 돌사자에 깃든 옛 이야기   원상대로 보존되여 있는 노구교  옛 다리바닥부분 기실 노구교(盧溝橋)의 이 이야기는 황당한 일로부터 시작된다. 노구교의 저쪽에서 일본군이 훈련을 마치고 귀영하던 도중 병사 한명이 뒤를 보러 가면서 그만 낙오를 했다. 나중에 일본군은 이 병사...
  • 2015-04-09
  • 료녕신문소식: 항일의사 안중근 순국 105주년 도편순회전시회가 3월 31일 신빈만족자치현 조선족중학교에서 열렸다. 료녕성 동북항일련군 항일전쟁사연구회, 료녕동북아 경제문화추진회, 심양시9.18력사박물관, 한중교류문화원, 심양시조선족 제1중학교, 료녕대학 동북아연구중심에서 주최하고 료녕성 조선족로인촬영가협회...
  • 2015-04-02
  • 《3.13》반일집회 유적지에서 열심히 필기하고있는 룡정중학교 학생들. 3월 14일 오전, 룡정《3.13》기념사업회는 《3.13》반일운동 96주년,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룡정시조선족녀성민족무용협회 회원 30여명과 룡정중학교 사생 30명이 참가한 《3.13》반일시위 유적지와 로정 답사활동을 조직하였다....
  • 2015-03-16
  • 룡정《3.13》기념사업회 리광평회장에 따르면 룡정시에서는 《3.13반일운동》 96주년을 맞으며 추모제, 기념좌담회, 《3.13》반일운동유적지답사 등 기념계렬활동을 조직하게 된다. 3월 13일 오전 10시부터 룡정시 《3.13》반일의사릉에서 진행되는 추모제 행사에는 룡정시 당위와 정부, 심양한국총령사관, 룡정《3.13》기...
  • 2015-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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