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김호림기획련재20] 국왕의 암살명부에 오른 신라의 고승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7월28일 08시54분    조회:3530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승려 무상(無相)이 신라 국왕의 암살명부에 오른 건 절대 우연이 아니다. 실은 그가 왕자 출신이라고 할 때부터 이 암살사건은 미리 예고되고 있었다. '신승전(神僧傳)'의 기록에 따르면 "스님의 동생이 (신라) 본국에서 새로 왕이 되었으며, (왕은) 그 자리가 위태로움을 두려워하여 자객을 보내 죽이고자 했다." '신승전'은 민간에서 유전되는 승려들의 사적을 기록한 명나라 때의 불교전적이다.

  다행히 국왕의 암살 시도는 미수에 그치고 있었다. 자객은 웬 일인지 천정에서 머리와 몸이 분리되어 무상이 좌선(坐禪)하던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이다.

  "무상 스님이 이인(異人)이라고 하니 그 무슨 신명(神明)이 스님을 지키고 있었을까요?" 솔직히 무상의 암살사건 이야기를 읽었다면 누구라도 머리에 떠올리게 되는 물음이다.

  실제로 무상은 중국불교에서 숭상하는 오백나한(五百羅漢)의 455번째 나한(羅漢)으로 모셔져 있다. 오백나한은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성취한 5백 명의 성자(聖者)이다. 선종(禪宗)의 초조(初祖)인 달마(達摩)가 307번째 나한이며, 육조 혜능(慧能)조차 오백나한에 포함되지 않는다.

오백나한의 한명인 무상 대사, 북경 벽운사의 나한당에 있다.

  정작 암살사건이 벌어졌던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의 정중사(淨衆寺)에서 무상은 무명의 승려로 되어 사찰의 명부에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만불사(萬佛寺)는 이름처럼 부처의 조각상으로 유명한 곳이지요." 사천박물관의 해설원은 이렇게 조각상만 일일이 열거하고 있었다.

  만불사는 정중사의 다른 이름으로서 일찍 동한(東漢) 시기에 세워졌다. 남조(南朝) 때 안포사(安浦寺)라고 했고 당(唐)나라 때 정중사라고 불렀으며 송(宋)나라 때 또 정인사(淨因寺)라고 개명했다. 명(明)나라 말, 병란으로 훼손될 때는 만불사라고 불리고 있었다.

  고찰은 19세기 말 성도의 만불교(萬佛橋) 근처에서 웬 농부의 호미에 묻어나와 마침내 볕을 보았다. 그날 농부는 신이 들렸는지 밭에서 무려 백여 존의 불상을 파냈다고 한다. 성도에서 일장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 후 만불교 근처에서 또 불상 등이 발견되는데, 1950년대 초에는 한꺼번에 200여 존의 불상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2009년, 사천박물관이 정식으로 개관하며 특별히 만불사 석각관(石刻館)을 따로 만들었다.

만불사 석각관에 있는 부처 조각상.

  "아육왕(阿育王) 조각상은 중국에 그리 많지 않은데요, 고고학적으로 발굴된 조각상은 우리 성도에서만 출토되었다고 합니다."

  석각관의 부처상, 보살상, 삼존불… 흙으로 빚고 금칠을 올린 조각상은 해설원의 입에서 줄을 이어 나온다. 아니, 해설원의 자랑거리는 또 하나 있었다. 세계의 첫 지폐인 교자(交子)는 북송(北宋) 시기 성도에서 탄생했는데, 바로 정중사에서 찍어냈다는 것이다. 당․송(唐․宋) 시기 정중사는 장경(藏經)을 조각, 인쇄하는 등 상당히 높은 인쇄술을 장악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무상은 석각관의 정중사에서 끝내 만나지 못했다. 정중사에서 20여 년을 수행하면서 중생을 교화했고 정중종(淨衆宗)의 개조(開祖)로 칭송되었던 무상은 기어이 석각관에 상(像)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혹여 무상은 아직도 정중사 옛터의 땅속 어디엔가 그의 형체를 감추고 있을까…

  사실상 무상의 신라왕자 신분부터 미스터리한 부분이 있다. '신승전'은 "무상 스님은 본래 신라국의 사람이요, 그 땅 왕의 셋째 아들이라"고 전한다. 무상은 당(唐)나라 보응(寶應) 원년(762)에 79세를 일기로 원적했으니, 684년에 출생한 걸로 된다. 이에 따라 신라 신문왕(神文王, 재위 681~692)의 태자라고 추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신문왕은 셋째 태자가 없는 걸로 전하며 무상은 성덕왕(聖德王, ?~737)의 셋째 아들이라고 하는 설이 있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이니, 무상은 신문왕의 왕손이 되는 것이다. 어찌됐거나 선종(禪宗) 법통의 전승사(傳承史)로 일컫는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에도 "무상선사는 속성(俗姓)이 김씨이요, 신라왕의 족속이다"라는 기록이 있는 걸로 미루어 무상의 신라왕족 신분은 확실한 것 같다.

  시야비야를 떠나 무상의 행적은 신화 같은 이야기처럼 하나하나 모두 신비스럽다. 그의 이런 자취는 '송고승전(宋高僧傳)', '신승전' 등 불교전적의 행간에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다.

  무상은 개원(開元) 16년(728) 바다를 건너 입당(入唐)했다. 그가 44세 되는 해였다. 장안(長安)에 이른 후 현종(玄宗)을 알현했으며, 현종은 그를 장안의 선정사(禪定寺)에서 수행토록 하였다. 그 후 무상은 오지의 사천성(四川省)으로 옮겨가서 지선(智詵) 선사를 알현하며 고승 처적(處寂)의 문하에 들어간다.

  무상의 남다른 이적(異蹟)은 처적 선사에게서 제일 먼저 나타난다. 무상이 도착하기 전 처적 선사는 "내일 밤에 손님이 오니 너희는 마땅히 닦고 쓴 후 기다리라"고 주변에 귀띔을 한다. 그로부터 하루 사이에 과연 무상이 도착했다. 이때 처적 선사는 무상에게 가사袈裟와 더불어 무상이라는 이 법호를 내리는 것이다.

  무상은 처적 선사에게 구족계를 받은 후 혼자서 수행처(修行處)를 찾아 나섰다. 그곳은 성도에서 서북쪽으로 약 70㎞ 상거한 청성산(靑城山)이었다. 청성산은 상고시절 황제(黃帝)가 선인(仙人)으로부터 풍운을 다스리는 술수를 전수받아 수도(修道)했다고 전하는 곳이다.

  사실상 청성산은 도교가 발원한 산이며 또 도교 4대 명산의 으뜸이다.

  아무래도 여기서 설명을 하고 건너가야 할 것 같다. 청성산은 고대 신화에서 "청도(淸道), 자미(紫薇)로 천제의 거소(居所)"라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도교의 명산으로 이름난 것은 장릉(張陵)이 와서 전도를 하면서부터이다. 장릉은 본래 성도 부근의 학명산(鶴鳴山)에서 수도하면서 도교의 원류인 오두미교(五斗米敎)를 설립하였는데, 신자에게 다섯 말의 쌀을 바치게 한데서 이 명칭이 비롯되었다고 한다. 오두미교는 일명 천사도(天師道)라고 하며 노자(老子)를 교조(敎祖)로 삼고, '도덕경(道德經)'을 경전으로 삼는다.

  잠깐, 고구려의 28대왕 보장왕(寶藏王)이 이 도교를 신봉했다고 고사(古史)가 전한다. 그 무슨 운명의 작간인지 몰라도 보장왕은 나중에 고구려가 멸망한 후 도교가 일어난 성도 근처로 유배되는 것이다.

  청성산은 수․당(隋․唐)나라 시기 도교를 숭상하면서 또 '신선의 거소'로 존숭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청성산에는 도관이 수풀처럼 일떠섰고 도인들이 구름처럼 밀려들었다.

  중국 속담에는 '일산불용이호(一山不容二虎)' 즉 "산 하나에 호랑이 두 마리가 같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당나라 초, 불교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청성산에는 불교와 도교의 영역 다툼이 일어났다.

  나중에 종단의 이 소송사건은 현종에게 알려지게 된다. 황제의 칙령은 "도관은 도가에 돌리고, 사찰은 산밖에 의탁하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도관은 앞산인 전산(前山)에 있게 되었고, 사찰은 뒷산인 후산(後山)에 서게 되는 형국이 되었다. 그런데 조서에서 본명 '청성산(淸城山)'의 맑을 청(淸)에 물 삼수변이 없어지면서 푸를 청靑으로 되었고, 산 이름도 차츰 푸를 청(靑)을 쓴 '청성산(靑城山)'으로 전해진다.

관광객이 붐비는 청성산 입구.

  무상은 불교와 도교가 함께 만나는 청성산의 계곡에서 두타(頭陀)의 수행을 했다. 두타행은 출가인이 세속의 모든 욕망을 떨쳐버리기 위해 고행을 하는 수행법을 말한다. 어찌 보면 무상은 종단의 세속적인 논쟁의 복판에서 그 소용돌이를 몸으로 잠재우고 있는 듯 했다. 실제로 무상(無相)이라는 이 이름 자체가 바로 형상에 구애되지 않는 초연한 경지를 말한다.

  무상은 좌선을 시작하면 5일이 지나는 일이 많았다고 '신승전'이 기록하고 있다. 산에 머문 지 오래되자 옷은 해지고 머리칼은 길었다. 사냥꾼이 동물인 줄로 의심하여 활을 쏘려다가 다시 멈췄다고 한다.

  어느 날, 맹수 두 마리가 깊은 눈을 밟고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무상은 맹수에게 먹이로 자기의 몸을 보시하기를 원하고 맹수 앞에 흔연히 누웠다. 맹수는 무상의 머리에서 발까지 냄새를 킁킁 맡더니 가버렸다. 가끔 밤중에 바위의 아래로 호랑이의 머리털이 손에 잡히고 있었다.

  "이야기가 천 년 전의 실화라고 해도 신화로 들어야 하겠네." 일행 중 누군가 이렇게 농을 했다.

  하긴 청성산은 더는 청정한 수련장소가 아닌 세속의 관광명소로 되고 있었다. 평일인데도 관광객이 숲을 이뤘다. 산짐승이 있다면 지레 놀라서 천방지축 산 밖으로 달아날 것 같았다. 실제로 일행은 종일토록 청성산에서 네발 가진 짐승이라곤 다람쥐조차 만나지 못했다.

  마침내 무상은 두타행의 세계에서 나와 성도에 들어온다. 현령 양익(楊翌)은 그의 괴이함에 의심을 했다. 무상을 추적하는 방을 붙이고 무리 20여명에게 명하여 잡아오도록 했다. 무리는 무상의 몸 근처에 다가서자 모두 두려워서 벌벌 떨었으며 낯빛이 변했다. 갑자기 큰 바람이 일고 돌과 모래가 관청으로 날아들었다. 장막이 펄럭이고 책이 날아갔다. 양익은 머리를 조아리면서 감히 말조차 못했다. 사죄를 해서야 비로소 바람이 멎었다. 이에 무상을 옛 거소에 봉송(奉送)했으며 시주하는 사람들을 권유하여 정중사, 대자사(大慈寺), 보제사(菩提寺), 녕국사(寧國寺) 등 사찰을 짓게 했다. 바깥 마을에 지은 종탑 등속은 헤아릴 수 없었다.

  현종은 이때 성도에서 또 한 번 무상을 만나고 있었다. 이맘때 현종은 '안사(安史)의 난'을 피해 성도에 있었다. '안사의 난'은 755년부터 763년까지 당나라의 절도사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이 일으킨 반란이다. 이 반란은 당나라를 쇠퇴하게 만든 전환점이다.

  거두절미하고, 무상은 구법을 하러 왔던 예전의 그 무상이 아니었다. 수행을 깊이 닦았고 신자들의 존숭을 받는 고승이었다. 이에 현종은 무상을 높은 예의로 대했으며 그들의 이 상봉은 가화(佳話)로 사책에 기록된다.

세계적으로 제일 오랜 수리시설 도강언을 구경하기 위한 관광객이 그칠 줄 모른다.

  그러나 또 있었을 법한 다른 만남은 전하지 않는다. 청성산 부근에는 세계적으로 제일 오랜 수리시설 도강언(都江堰)이 있다. 도강언은 2천 여 년 전에 강줄기를 나누기 위한 제방과 이에 딸린 수로이다. 청성산에 들어가는 길가에 있으며 청성산 못지않게 관광객이 붐비는 곳이다. 청성산에 드나드는 사람은 모두 한 사람처럼 이 도강언에 들린다.

  "무상 스님도 청성산에 가시면서 도강언을 경유하시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도강언의 입구에서 떡메의 먹임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두 사내가 가게 앞에서 떡메를 엇갈아 휘두르고 있었다. 아니, 대륙의 오지에도 찰떡을 쳐서 먹는 풍속이 있던가?…

도강언의 식품가게 앞에서 떡메질을 하는 직원.

  사실 떡판에 놓인 건 찰떡이 아니라 과자였다. 호두 씨를 엿에 버무리고 떡메로 쳐서 바삭바삭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한순간 좌중에는 웃음이 터졌다. "이거 참, 표상(表象)에 다들 눈이 싹 가려졌네요."

  그러고 보면 눈에 보고 있는 형상은 실상인지 가상인지 구분키 어려운 오묘한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다.

  762년 5월 19일, 무상은 성도의 정중사에서 가부좌를 한 채로 홀연히 입적했다. 이때 "해와 달은 빛을 잃었고 하늘과 땅은 백색으로 변했으며… 사람들은 희망을 잃어버리고 수행자들은 의지하던 곳이 끊어졌다"고 '역대법보기'가 통탄하고 있다. 하늘을 치솟는 무상의 위상을 알려주는 서술의 일부이다.정말이지 무상의 이름이 중국불교의 오백나한 명부에 들어간 그 이유를 이제는 잘 알 것 같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72
  • 4월 3일, 왕청현혁명렬사릉원에서 렬사들의 위훈을 기리고있는 왕청현교통관리국 민경들. 올 청명절전야 왕쳥현의 여러 기관과 사회가두의 공무원과 학교 학생 도합 3000여명이 혁명전통교양기지인 왕청현혁명렬사릉원에서 혁명선렬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대거 진행하였다. 추모제에서 왕청현새일대관심사업위원회 최금철부...
  • 2014-04-08
  • 4월 4일, 청명을 하루 앞두고 길림시조선족차세대관심위원회와 길림조중, 길림시조선족실험소학교의 조직하에 길림시조선족중소학교 사생 100여명이 화피창렬사릉원을 찾아 영령들을 추모했다. 오전 8시, 세대의 뻐스를 내세워 길림조중 학생처 고춘영주임이 인솔한 30여명 조중학생들과, 길림시조선족실험소학교의 전성민...
  • 2014-04-07
  •  당년 일본군의 또치까잔해물들. 훈춘시 춘화진 초평(草坪)촌 동쪽 이도관(二道关)산속에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이 남긴 매우 큰 규모의 군사요새지유적이 발견되였다. 초평촌의 촌민 마련파, 장본용 및 장고봉사건기념관 관장 류충지, 춘화변방파출소 류군부소장 등 인원들이 유적지를 답사하여 초보적으로 중국...
  • 2014-04-07
  • 고성마을 입구에 세워진 온특혁부성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세워진 비우성 비석.  훈춘시구역에서 서남으로 8킬로메터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삼가자향 고성촌, 지난 3월 4일 이곳을 찾았을 때 논에서 밭에서 봄을 맞으며 농사준비를 하는 농민들이 간간히 보였다. 력사적으로 고성촌은 19세기때 청정부가 이곳에 통상분국...
  • 2014-04-04
  •  4월 2일 청두(成都)시 고고연구소와 량산(凉山)주 박물관은 쓰촨(四川)성 량산주 진양(金陽)현 문물 관리소 측과 마이쭈샹무나거우(馬依足鄕木納溝)촌 주민이 집 건설 시 발견한 문물에 대해 감정을 진행한 결과, 발견된 문물 4개 중, 동단검 1개, 동칼집 1개가 전국시대 문물이고, 철삽은 한나라 시대 문물로 밝혀졌...
  • 2014-04-03
  • 간도특설대가 창립된 초기의 지휘부. (사진=서해문집 제공) ◈ 혼돈의 만주벌판…일본군, 조선청년 모아 독립군 토벌에 나서다 조선인 청년들이 일본군이 준 무기를 들고 조선 독립군에게 총을 쏘는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 소설 같은 장면이 1930~1940년대에 만주벌판에서 실제 펼쳐졌다. 1931년 만주를 점령한 일...
  • 2014-04-03
  • , 책자 발행식이 오늘 오전에 있었습니다.   170만자로 된 은 지난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자치주 제9기위원회 집정기간 종합실력이 가장 빨리 제고되고 도시와 농촌 면모가 일신됐으며 군중들이 실제혜택을 가장 많이 본 5년 력사를 담았습니다. 주당위당사연구실 주임 변군입니다. 《이 책은 우리 주에서 각항...
  • 2014-04-02
  • ▣ 경성의 새벽을 뒤흔든 격렬한 총격전 의열단원 김상옥(사진=생각정원 제공) "탕~탕~탕" 3.1운동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1923년 1월 27일 새벽. 조용한 삼판통(현 용산구 후암동) 주택가에서 총소리가 밤하늘을 갈랐다. 이 곳에 은신한 의열단원 김상옥은 20여명의 종로경찰서 무장경찰들이 포위하자 양손에 든 쌍권총을 ...
  • 2014-04-01
  • 남북 및 해외 녀성민간단체들 심양서 “일본군성노예문제해결을 위한 토론회” 개최   본사소식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조선민주녀성동맹 등 남과 북 및 해외의 20여개 녀성. 종교 단체가 3월 29일 심양 칠보산호텔에서 “일본군 성노예문제해결을 위한 토론회”를 열고 군위안부를 비롯한 일...
  • 2014-03-31
  • ◈ 경찰서를 빠져나와 감쪽같이 사라진 거물급 공산주의자 '이재유' 일제가 만주를 석권한 1934년 4월 13일 밤. 조용하던 서대문경찰서에 한가닥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이어 "이재유가 달아났다"는 고함소리와 함께 당직경찰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경성과 경기도 경찰부 모든 병력이 총동원되어 시내를 뒤졌...
  • 2014-03-31
  • 심양 3월 28일발 인민넷: 이번에 한국측에서 중국에 귀환한 항미원조지원군렬사 유해의 안장지는 심양항미원조렬사릉원으로서 중한 량국이 2월에 북경에서 진행된 사업회의에서 토론하여 결정한것이다. 료해한데 의하면 이번의 렬사 유해들을 심양항미원조렬사릉원 부근의 따로 건설한 묘지에 안장할것이라고 했다. 3...
  • 2014-03-31
  • 비공식 협의 병행, 규모도 확대…20일 결과 발표 북한과 일본이 19일 오후 중국 랴오닝성 선양(瀋陽)에서 적십자 실무회담과 외무성 과장 간 비공식 협의를 재개했다. 수석대표인 리호림 북한 조선적십자회 중앙위원회 서기장과 다사카 오사무(田坂治) 일본적십자사 국제부장 등 양측 대표단은 이날 정오(현지시간)께...
  • 2014-03-20
  •  항일의사 안중근 순국 104주년(3월 26일)을 맞으며 안중근사적 보고 및 사진전시회가 지난 주말 심양시조선족문화예술관에서 있었다.   료녕성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와 중국조선족사학회서 공동 주최하고 료녕성조선족로인련의회에서 주관, 중국조선족기업가협회회장단, 료녕성조선족기업가협회, 료녕성조선족애심...
  • 2014-03-19
  • 남경시문화광전신문출판국은 남경 리제항(利濟巷)에 위치한 10년 가까이 방치되였던 중국침략 일본군위안소 유적지를 “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할 방침이라고 전했다. 전문가는 이곳이 위안부들이 지목한 아시아 현존 최대 규모의 일본군 “위안소” 유적지라며 현재 7동의 건물이 남아있다고 소개했다...
  • 2014-03-18
  • 중국침략 일본군 731부대 죄증진렬관에서 입수한데 따르면 할빈시는 3.2억원을 투자해 731유적지핵심구 및 731전쟁유적지공원건설용지내의 여러개 비문물건축물을 허물고 환경을 다스리는 사업을 본격적으로 벌리고 있다.   731유적지는 전국 중점문물보호단위이며 전국 애국주의교육시범기지, 전국 홍색관광풍경구 및 국...
  • 2014-03-17
  • 3월 14일 오전, 룡정시《3.13기념사업회》에서는 사업회 회장단과 룡정시통신협회 회원들 그리고 룡정로인대학 등산대 성원들이 참가한 3.13반일집회 유적지답사활동을 조직하였다. 이날 참가자들은 《3.13》반일집회장소였던 제1유치원에서 시작하여 반일시위행진로선을 따라 류혈사건발생지(번영로와 건설가 교차 십자거...
  • 2014-03-17
  •         (흑룡강신문=하얼빈) 윤운걸 길림성특파원 = 일본이 침략력사를 왜곡하고 있는 오늘, “룡정3.13반일운동 95주년 추모제”가 룡정3.13기념사업회, 룡정시노인대학,해란강합창단,연변력사연구회,룡정시정부 등 15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룡정 3.13반일의사릉에서 있었다.   이번 추모제...
  • 2014-03-14
  • 안중근의사가 순국전인 1910년 3월 려순감옥에서 쓴 글씨가 경매에 나온다. 미술품 경매사 서울옥션은 안중근의사 순국일(3월 26일) 다음날인 오는 27일 오후 5시, 평창동 서울옥션스페이스에서 제131회 경매를 열고 안중근의사 유묵 《경천》(敬天)을 비롯한 157점을 출품한다고 10일 밝혔다. 《경천》은 하늘의 리치...
  • 2014-03-13
  • 2월 26일, 진시황릉 박물관 측은 발굴학자들이 진시황 병마용 1호갱에서 3차 발굴을 진행하던 중 비교적 완전한 형태의 활과 화살이 출토되었다고 밝혔다. 이는 진시황 병마용 발굴작업에서 최초로 발견된 비교적 완전한 형태의 활과 화살이며, 2009년부터 시작된 진시황 병마용 1호갱 3차 발굴작업에서는 고고학적 성과가 ...
  • 2014-02-27
  • 1945년 9월 9일, 허잉친(何應欽, 좌측)은 난징에서 중국 정부 대표로 중국침략 일본군 고바야시 센사부로(小林淺三郞) 총참모장이 제출한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 중국침략 일본군 사령관의 항목문서를 받았다.   1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회 제7차 회의는 25일 오후에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의 중국인민 ...
  • 2014-02-26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