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김호림기획련재21] 천태산의 신화로 전하는 신라사찰
조글로미디어(ZOGLO) 2016년8월15일 07시51분    조회:3280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헛갈리지 않도록 먼저 설명을 해둔다. 이 천태산(天台山)은 천태종이 일어난 그 천태산이 아니다. 대륙 남부의 녕파(寧波)가 아니라 동부의 일조(日照)에 있다. 일조는 일출의 첫 햇살이 제일 먼저 비춘다는 말에서 취한 지명이다. 이 지명은 천태산에 있는 동이(東夷)의 상고시절 태양숭배 신화로 인해 생긴 것이다.

  신화가 있는 이 태양의 산에는 한때 신라인들이 촌락을 이뤄 살고 있었다. 정말이지 천손(天孫)의 자식들은 태양부족의 이 옛 고향을 찾아 바다 저쪽에서 일부러 온 듯싶다.

부족장이 앉던 돌바위의자에 태양 문양이 음각되어 있다.

  "천태산의 신라촌에는 노비로 팔려온 신라인이 있었다고 합니다." 국지국(鞠志國, 일조시 태양문화연구회 부회장) 씨는 이렇게 그가 알고 있는 신라촌 옛 촌민의 신분을 밝혔다.

  산동성(山東省) 일조 시내에 있는 태양문화연구회의 사무실에서 국씨를 만났다. 근처의 기차역에서 오구작작 붐비는 인파가 실루엣처럼 창밖으로 하얗게 비쳐들고 있었다. 약 10년 전 국씨는 미국에서 공부할 때 우연하게 옛 비석을 만났으며, 나중에 이 신비한 비석의 출처를 찾아 천태산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천태산의 산봉우리마다 널려 있는 태양유적은 그를 경이로움과 감동의 경지에 빠지게 했다. 드디어 국씨는 천태산의 태양유적을 발굴, 연구하는 고고학자로 일대 변신을 한다.

  국씨의 말에 따르면 신라노비는 성이 이씨(李氏)이며 그 후예가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이씨의 이 후예가 조상의 옛 기억을 옮긴 글에서 지금까지 잘 몰랐던 신라촌의 많은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신라촌은 천태산의 산골짜기에 있었고 소금 말리기와 어로, 농사를 생계로 삼았다고 합니다."

  당(唐)나라 영태(永泰) 원년(765), 초대 치청평(淄靑平) 절도사 이정기(李正己)가 산동 일대를 점거하고 할거세력을 형성했다. 이정기는 고구려 유민의 후예이다. 그는 신라노비 교역을 방임했으며 이로 하여 한때 신라노비의 매매는 더구나 창궐했다. 819년, 당나라는 이정기의 할거세력을 평정한 후 823년과 828년에 걸쳐 두 번이나 칙령을 내리고 신라인을 노비로 사지 못하게 했으며 그들을 귀국하게 했다.

  대부분의 신라인들은 방면된 후 여전히 대륙에 남아있길 원했으며 연해 일대에 기거하면서 군락을 형성했다. 그들을 제외하고 대륙에 안착한 신라인들은 또 통역, 항해기술자, 학자, 승려, 심지어 바둑기사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신라인들의 군락은 신라방(新羅坊), 신라채(新羅寨), 신라보(新羅堡) 등 이름으로 불렸으며 산동성(山東省) 지어 남쪽의 복건성(福建省) 연해에도 나타나고 있었다.

  신라인들은 뛰어난 항해술을 바탕으로 아랍, 페르시아 상인들과도 교역했고, 일본과 신라 본국을 왕래하면서 해상무역을 주도했다. 그들은 당장 당나라에서 땅을 얻어 농사를 짓기보다는 즉시 돈이 되는 일, 즉 배 만들기, 소금 만들기, 숯 굽기 등을 하기도 했다.

  당․송(唐․宋) 시기, 천태산의 부근 지역에는 염장(鹽場)이 있어 아주 번화했으며 신라촌의 인구도 다른 신라마을에 비해 훨씬 많았다고 한다.

  현재로선 천태산의 신라촌에 이씨의 선조처럼 노비 출신이 얼마 되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천태산에 신라사를 지은 것은 그들 촌민이 아니라 승려라고 옛 비기(碑記)가 기록하고 있다. 대만(臺灣)에서 발견된 '석봉사중수비기(石鳳寺重修碑記)'는 "당나라 초, 신라승려 지은(智隱)이 사원을 재건했으며 신라사(新羅寺)라고 했으니 불문이 재흥했다."고 명기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 사찰이 먼저 섰나요? 아니면 신라 마을이 먼저 섰나요?" 부지중 이런 물음이 흘러 나왔다.

  국씨는 잠깐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건 모르겠다고 하면서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천태산 답사길에 휴식을 취하고 있는 국지국 박사.

  신라인들은 촌락을 이룬 후 부근에 새로 사찰을 세우는 경우가 많았지만, 시기적으로 볼 때 천태산에는 신라마을보다 신라사가 먼저 생긴 것 같다는 지적이 나왔다. 분명한건 신라사가 천태산의 옛 사찰을 재건했다는 것. 남북조(南北朝, 420~589) 시기의 승려 혜심(慧深)이 일찍 천태민사(天臺憫寺)를 세웠다고 '석봉사중수비기'가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때 혜심은 산기슭에서 굶어죽은 사람의 시신을 보고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들었으며 무덤 옆에 사찰을 세우고 이름자에 불쌍히 여길 민(憫)을 넣어 사찰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북위(北魏, 386~557) 때 불교도들이 모반을 꾀한다고 하면서 모든 사원을 소각하게 했으며 승려와 비구니를 일률로 참했다. 이 시기 "불문이 불행을 입어 그 화가 민사(憫寺)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에 혜심은 "분개해서 출해(出海)"를 하며 "정토(淨土)를 찾고자" 바다를 건너 다른 대륙으로 건너갔다.

  재건한 신라사는 이 천태민사보다 훨씬 오랫동안 존립했다. 명(明)나라 홍무(洪武, 1368~1398) 연간까지 약 5백 년 동안 천태산에 줄곧 향불을 피워 올렸다. 신라촌도 여전히 천태산에 존립하고 있었으며 신라인 후예가 위주였고 촌장도 신라인 후예였다. 이씨의 옛 선조는 홍무 연간에 한시기 신라촌의 촌장으로 있었다고 전한다.

  당나라 이후 오대십국(五代十國)과 요(遼), 금(金), 원(元)의 여러 대의 왕조가 마치 동해의 일출처럼 나타났다가 또 일몰처럼 사라졌다. 대륙의 신라인들은 차츰 현지인들에게 동화되었으며 대부분의 마을에서 신라인과 중국인이 혼거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천태산에는 대륙의 여느 신라인 마을치고 아주 희소한 정경이 펼쳐지고 있은 것이다.

신라사원 옛터에서 발견된 불상 조각.

 

  정말로 그래서일지 모른다. 천태산의 신라촌에는 일대 희사가 생긴다. 고려 말기의 문신 정몽주(鄭夢周)가 신라촌을 찾아왔던 것이다. 정몽주는 무너지는 고려를 마지막까지 지키다가 숨진 충절의 인물이다. 그는 명나라를 사신으로 방문한 기간 일부러 일조의 천태산을 찾아와서 신라촌의 유민들을 만났던 것이다.

  이때 정몽주는 신라인의 뿌리를 찾고 맥을 잇기 위해 신라촌에서 젊은이들을 일부 선정하여 반도에 데려갔다고 전한다. 정몽주는 또 은자를 내어 신라사 부근에 신라서원(新羅書院)을 세웠다.

  정몽주는 천태산에서 신라 유민을 만난 후 감개가 무량하여 시를 지었다. 시 '일조현(日照縣)'는 신라촌 동쪽의 봉황산(鳳凰山) 산마루에 있는 은행나무 아래에 비각으로 남는다.

  "海上孤城草樹荒바닷가의 외로운 성에는 초목이 황량한데

  最先迎日上扶桑제일 먼저 해를 맞아 부상에 오르네.

  我來東望仍搔首내가 온 동녘을 바라보노니 시름이 여전하네.

  波浪遙應接故鄕파도의 물결은 멀리 저 고향에 잇닿으리."

  정몽주는 이 시문에서 '산해경'에 나오는 전고(典故) "탕곡(湯谷)에 부상(扶桑) 나무가 있으니, 열개의 태양이 그곳에서 목욕을 했다.(湯谷上有扶桑,十日所浴)"를 빌어 바다 건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서술하고 있다. 정몽주는 또 시 "일조의 천태산(日照天臺山)", "천태산의 안기사(天臺山安期祠)"를 남기는데, 여와(女娲)가 하늘을 깁고 해상의 신산(神山)에서 "랑아(琅玡)의 천대(天臺)"에 옮겼다고 하는 고서 '죽서기년(竹書紀年)'의 전설 그리고 방선도(方仙道, 도교의 초기 파벌)의 시조인 안기(安期)가 천태산에서 두루미를 타고 신선계로 날아갔다는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다. 정몽주는 천태산의 태양문화 유적과 이야기들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방선도의 시조 안기의 이름자가 새겨진 천태산 산정의 바위.

   솔직히 정몽주는 물론이요, 승려 지은도 천태산의 신라촌을 찾아왔는지 아니면 신라촌의 천태산을 찾아왔는지 의문이 생기는 부분이다. 혹여 그들 모두 천태산에 배달족의 태양숭배와 잇닿는 혈연의 '족보'가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지 모른다.

  천태산의 산마루에서 해는 날마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떠오르고 있었지만, 신라인들의 흔적은 명나라 때에 이르러 고무지우개로 지우듯 가뭇없이 사라진다.

  명나라 건문(建文, 1399~1402) 연간, 연(燕)나라 왕 주체(朱棣)가 "정난지역(靖難之役)"을 발동했다. 전란은 4년 남짓이 지속되며 거주(莒州) 일대는 "백리 가도록 밥 짓는 연기가 없었다." 거주는 수․당(隋․唐) 시기의 행정지역으로, 천태산 북쪽의 지금의 거현(莒縣) 일대에 치소가 있었다. 천태산 사찰의 비각 비문도 "건문 연간 산불이 불시에 일어나서 경서와 사원이 하루아침에 훼손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신라촌 역시 이 무렵 전란과 산불로 인구가 분산되고 해체되었을 가능성이 십분 크다.

신라사원이 있던 천대산 기슭의 옛터, 부근의 채석장때문에 말끔히 훼손되었다.

  그 후 새로운 이주민들이 천태산 기슭에 끼리끼리 찾아온다. 진씨(秦氏)의 족보에 의하면 그들의 선조는 전란이 끝난 건문 4년 이후 동해 즉 연운항(連雲港)에서 천태산으로 이주를 했다. 진씨 종족(宗族)은 나중에 신라사의 옛터에 사찰을 중수하며 석봉사(石鳳寺)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신라사와 신라서원, 신라촌의 이름이 후세에 전해질 수 있은 것은 신라인들이 일부 천태산에 남아있었기 때문이 아닐지 한다. 어찌됐거나 이때부터 천태산에는 신라인에 대한 기록이 더는 나타나지 않는다.

  천태산의 고찰에 얽힌 악연은 천년의 윤회를 반복하고 있었다. 청(淸)나라 말, 일조에서 향민(鄕民)과 독일 천주교 교회 사이에 충돌이 생기며, 이를 진압하던 독일군이 천태산을 떠날 때 거국(莒國) 시조 제사비석과 정몽주의 시문비각 그리고 석봉사 재건비석 등 3점의 유물을 훔쳐갔던 것이다.

  국씨가 미국에서 만났던 옛 비석은 바로 거국 시조의 제사비석이었다. 이 비석의 도난은 실은 나중의 참혹한 겁난(劫難)을 예고하고 있는 듯 했다. 20세기 60년대, '홍위병'들이 천태산에 올라와서 불상을 훼손하며 이어 70년대 촌민들이 대량으로 채석을 하면서 석봉사는 철저히 훼멸되는 것이다.

  기실 석봉사 자체도 불교와 태양숭배 문화의 응집체였다. 사찰은 부처님을 공양했지만, 벽화는 태양이 천태산에서 미역을 감고 후예(后羿)가 활을 쏘아 해를 떨어뜨리는 등 신화 이야기였다고 전한다.

  잠깐, 명나라 말기에 비로소 천태산에 나타난 진씨 종족은 어떻게 이 전설을 알게 되었을까? 그리고 천태산의 최초의 이주민이라고 일컫는 신라인들은 또 어떻게 이 전설을 알게 되었을까…

  "그러고 보면 신라의 지은 스님이 일부러 '태양 신화'를 찾아왔다고 해도 얘기가 되네요."

  배달족은 워낙 상고시절부터 태양을 숭배하던 족속이 아니던가. 신라의 승려 지은은 실은 이 이야기를 듣고 천태산을 찾아왔을 수 있다. 아니라면 이역의 승려가 천태산의 골짜기에 숨어있는 옛 사찰의 폐허를 미리 알고 왔다는 걸 해석하기 어렵다.

천태산의 태양토템탑, 홍위병들도 감히 건드리지 못했던 탑이다. 

  태양숭배 유적 역시 사찰처럼 신라인들의 하나의 구심점으로 되었을 수 있다. 신라마을이 천태산에 나타난 이유를 비로소 알 것 같다.

  그러나 한때 천태산에 살고 있었다고 하는 그들은 단지 옛 시, 글에서 간신히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촌락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상고시절의 신화는 천태산에 돌탑과 암석화, 석총으로 분명하게 남아있다.

  천태산의 신라사는 더구나 비문에만 적혀있는 허망한 전설이었던가?…

  드디어 특기할 만한 사실이 발견된다. 몇 년 전, 산으로 통하는 길을 닦을 때 신라사의 옛 부처 조각상이 골짜기의 모퉁이에서 발굴되는 것. 신라사는 그 흔적을 분명하게 천태산에 묻고 있었던 것이다.천년의 전설은 허구가 아니라 진실한 실화였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72
  •    중국 전역을 종횡하는 철도망에는 ‘모택동호’, ‘주은래호’와 나란히 국내 3대 ‘위인호’ 대렬에 이름 올린, 할빈기무단에서 탄생한 ‘주덕호’기관차가 있다. 7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주덕호’기관차는 여전히 북경-할빈 려객운수 철도로선에서 달리고...
  • 2021-04-14
  • 연변 도문시에 위치한 마반촌산성유적이 지난 2월 25일 ‘2020년도 전국 10대 고고학 발견' 본선 명단에 진출한 데 이어 4월 13일 드디여 20개 본선지가운데서 투표방식으로 최종 평심을 통과하고 ‘2020년도 전국 10대 고고학 발견'에 선정됐다.     마반촌산성유적(자료사진) 이번 도문 마반...
  • 2021-04-13
  • 룡정에서 동남쪽으로 륙도하를 거슬러 5리가량 올라 가면 합성리마을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 동산 산기슭에는‘3.13 ' 반일 시위에서 수난 당한 14명 렬사들이 잠들어 있다. 1919년 3월 13일, 룡정에서 일어난 반일 군중운동은 조선족이 거주하는 지구에서 반일투쟁을 벌리기 위한 사상 및 조직적 기초를 닦아 놓았...
  • 2021-04-12
  • 청명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고 있지만 호남성 봉황현 알라영진의 동북적 조선족렬사 최호생의 묘지에는 지금까지 성묘를 다녀간 가족이 없다. 최호생 렬사의 가족의 행방이 최근 언론의 관심을 받고 있다. 봉황현 알라영진 천암촌의 산에 최호생 렬사의 묘비가 세워져있다. 비문에는 ‘최호생 렬사. 1929년 출생. 동북...
  • 2021-04-08
  • 청명날 렬사릉원에서 93세 로인을 우연히 만나 영웅 형님의 이야기를 듣다 올해의 청명은 무엇인가 통한 하루였다. 날씨도 통하고 인연도 통한 것 같다. 전날까지 으르렁대던 6, 7급 광풍은 언제 그랬냐 싶게 꼬리를 내리고 하늘을 덮었던&nb...
  • 2021-04-07
  • ‘산마다 진달래요, 촌마다 렬사기념비라네’ 35년 전, 저명한 시인 하경지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찾았을 때 감개무량해하면서 이러한 시구를 남겼다. 이 붉은색의 열토(热土) 우에 자리잡은 현성이 바로 왕청이다. 이른 봄의 산언덕에서 아른거리는 진달래꽃 꽃봉오리들은 마치 한 로인과 109개 렬사기념...
  • 2021-04-07
  •   안중근 순국 111주년 추모활동에서 안중근의사를 기리는 발언을 경청하고 있는 참석자들. 지난 3월 26일 대련안중근연구회에서 주최하고 대련조선족문학회, 대련금보신구조선족문화촉진회에서 협조한 항일투사 ‘안중근 순국 111주년 추모활동’이 료녕성 대련시에서 있었다. 대련안중근연구회, 조선족문...
  • 2021-03-31
  •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121 룡정시 덕신향 금곡촌 원 혁명렬사기념비. 2021년 1월 25일 안인학 촬영. 1 새해 2021년 1월 23일, 생면부지의 안인학씨로부터 위챗 가입 신청을 받았다. 연변일보에 련재중인 룡정시 금곡 촌출신 손원금 항일렬사 전기를 보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에 위챗 가입을 수락했더니 룡정시라지오텔...
  • 2021-02-20
  • 코로나19로 북경 조선족사회의 예정되였던 행사들이 취소된 가운데 재북경 조선족대학생력사동아리 학생들이 일전 '우리 력사를 기억하자'는 취지로 온라인행사를 진행했다.     조선족 이민사를 주제로 한 이번 행사는 중앙민족대학 리준걸의 '리씨조선 이민력사와 중국조선족 이민 배경과 과정...
  • 2021-02-05
  • [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5) ○ 김 동 수 초혼(初婚) 한락연은 1917년(19살)에 한마을 처녀 최신애와 결혼하였다. 당시 조혼이 류행이던 상황을 고려하면 19세면 결코 어리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2년 후인 1919년에 그들 사이에서 딸 인숙이가 태여났다. 피도 채 마르기전에 한락연이 그들 모녀를 떠났으니 장녀 ...
  • 2021-02-03
  • [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4) ○ 김 동 수 ‘3.13’에서 날개를 1919년은 다사다난한 해였다. 1919년 3월 1일 조선반도에서 ‘3.1’운동이 노도와 같이 폭발하였고 뒤이어 중국땅 룡정에서 ‘3.13’반일시위가 봄우뢰와 같이 울려퍼졌으며 북경에서는 ‘5.4’운동이 폭풍우...
  • 2021-02-03
  •   도문시 마반촌산성유적지가 ‘2020년도 전국 10대 고고학 발견’ 예선에 입선됐다. 지난 11일, ‘2020년도 전국 10대 고고학 발견’ 평의활동이 가동됐다. 전국적으로 도합 31개 유적지가 이번 예선에 입선된 가운데 20개 유적지가 본선에 진출하게 된다. 본선 진출은 중국문물신문사 전국십대...
  • 2021-01-22
  • [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3) ○ 김동수   한락연사진(한락연의 딸 한건립 제공) 2. 동란의 년대 동북의 겨울철은 춥기가 장난이 아니다. 박달나무 윙윙 소리내 울고 얼음장이 쩡쩡 갈라터지고 살을 에이는듯한 북풍은 눈보라를 휘몰아 마을과 올망졸망 들어앉은 초가집들을 덮친다. 그 속에서도 사람들은 부단...
  • 2021-01-19
  • 1908년 룡정 전경,멀리 비암산이 보인다.(차광범 제공) 1. 뿌리깊은 룡정 우리가 동북아의 끝없이 망망한 푸른림해와 높고 낮은 산발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젖줄기처럼 뻗고 뻗은 크고 작은 강들과 무연히 펼쳐진 일망무제한 평야와 옹기종기 들어앉은 촌락들과 도시들을 바라보노라면 부지중 대자연의 거대한 위력과 ...
  • 2021-01-18
  • 룡정시가지 해란강과 륙도하의 합수목에 세워진 락연공원 ○ 김동수 프롤로그 불사조(不死鸟)는 애급 신화에 나오는 령조(灵鸟)로서 상서로운 새이다. 그리스어로 피닉스(phoenix)라고 해서 고대 애급의 상상의 신조(神鸟)였다. 우리말로는 영원히 죽지 않는 새를 상징한다. 혁명가, 예술가, ‘비단의 길’ 문화...
  • 2021-01-07
  • 한락연의 유화작품 〈태양신〉키질석굴 벽화를 모사한 그림(53.5cm × 70.5cm, 1947년) 60년대초, 주은래 총리는 염보항 어르신에게 “《한락연전기》를 쓸 생각을 가져라”고 말씀하셨다. 염보항 어르신이 말씀하시길, “락연의 전기를 쓰는 것은 우리 로일대들에게는 그리움이고 그대들에게는 기념으...
  • 2020-12-29
  • 1924년 1월 25일, 한국 《동아일보》는 〈미술계의 두 수재〉라는 제목으로 한락연이 우수한 성적으로 상해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소식을 게재했다. ▨ 최룡수 (1) 5월은 백화가 만발하는 계절이라 북경의 곳곳에는 꽃향기가 가득하였다. 수도공항 대기청은 봄기운이 완연하고 사람들로 북적인다. 5월 12일 오후, 일본 항공...
  • 2020-12-25
  •   2014년 민정부에서 한락연에게 발급한 렬사증명서.   ▨ 륙기청 성세재의 철막이 신강을 떠나면서 신강은 중국의 자유구역으로 다시 설정되였고 문화인들도 점차 이 새로운 부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중 화가들중에서 제일 먼저 해당 부락으로 들어간 것은 한락연으로부터 시작되였다. 하여 신강미술을 읽...
  • 2020-12-15
  • ‘중공 동만특위 기념관’설립 준비판공실에 따르면 연변주 및 연길시에서 련합으로 기획건설중인 ‘중공 동만특위 기념관’(잠정 명칭)이 전사회를 대상으로 관련 혁명 문사자료, 항전 유물, 민속 옛 물건들을 모집하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우리 나라에서 이름있는 로혁명근거지인바 동...
  • 2020-12-09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77](김춘선편6) 우리 조선족사거나 연변지방사를 보면 하나의 독특한 특색이 있다. 누구나 다 알고 정부에서도 승인하는 것인 데 그것이 바로 1980년대 문화부 부장이며 시인인 하경지가 연변을 시찰하고 남긴 유명한 시구이다. 즉 “산마...
  • 2020-12-06
‹처음  이전 1 2 3 4 5 6 7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