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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이민사 구술력사 시리즈:'우리 가족만큼 이사를 빈번히 한 가족은 드물겁니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5월5일 09시25분    조회: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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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3일 우병희, 우승희, 우빈희 삼형제와 부인들 및 우정수 (큰형 우철희의 장남)가 우리 가문이 살던 료녕성 관전현 청산구를 찾아

 

구술자: 우빈희(禹宾熙, 1955-), 료녕성 청원만족자치현 현위서기 및 인대대표, 무순일보 당조서기 및 사장, 중국민족보 부사장, 민족출판사 당위서기 및 사장 겸 총편집 등 직을 력임.

취재일시: 2015년 6월 30일

취재지점: 북경시 법화사로 정협호텔

취재: 김창석 리정옥 전춘매

정리: 《중국조선족백년실록》취재팀

 

1.

저의 증조부 우병렬(禹炳烈, 단양우씨 제29세)은 1856년 6월 29일(음력)에 조선 황해도 평산군 룡산면 석탄리 명문가에서 출생하여 일찍부터 유학(儒学)공부에 힘써 대유학자로 성장하였습니다.

 

저의 증조부께서는 1876년에 무과시험에 급제하여 남수원 대장이 되였으며 1892년에는 조선왕조훈련원 판관직에 등용되여 1905년까지 30여년을 근무하다가 무능한 봉건통치배들을 위하여 근무하는것에 회의를 느껴 판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글방을 차렸다고 합니다. 1907년에 장남 우제경, 맏사위 리진룡과 함께 조선의 평산의병운동에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증조부 우병렬이 지휘하는 평산의병부대가 황해도일대를 거의 장악하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큰 타격을 안기자 일본군은 특별토벌대를 편성하여 의병토벌을 감행하는 만행을 꺼리낌없이 저질렀다고 합니다. 강한 적의 공세하에 렬세에 처한 의병들은 새로운 활로를 찾고저 1908년 음력 8월에 류린석의 “북변지계(北边之计)”에 의해 로씨야 울라지보스또크(해삼위)로 이동하였다고 합니다.

 

무사히 울라지보스또크로 이동은 했지만 그들의 정치활동이 로씨야 당국의 감시와 압제를 받게 되였지요. 그뒤 일제침략의 마수가 로씨야까지 뻗치였기에 로씨야에서의 조선인독립운동 또한 많은 어려움과 제한을 받았다고 합니다. 생활이 극도로 어렵게 되자 의병들은 산속으로 들어가 둔전(屯田)을 해야 했답니다.

 

1912년 울라지보스또크에서의 조선인인독립운동이 더는 지탱할수 없게 되고 의병들의 생활이 극도로 궁핍하게 되자 의암 류린석과 저의 중조할아버지 우병렬은 1914년에 대오를 거느리고 중국 관전현 청산구 자루골로 건너왔다고 합니다.

대유학자이고 무관이였던 증조부께서는 그때로부터 총과는 인연을 끊고 자루골에서 글방을 차리고 훈장이 되여 후학들에게 글을 배워주면서 반일의식을 고취하였다고 합니다.

 

저의 증조부는 맏사위 리진룡과 상의하여 당시 울라지보스또크로 이동하기직전에 가족과 친척 13가구를 조선 황해도 평산으로부터 관전현 청산구 자루골로 집단이주를 시켰다고 합니다. 그 간거한 임무를 당시 증조부는 차남인 우성중(원명 우제륜, 저의 조부)과 삼남인 우성숙에게 맡겨 실행했다고 합니다. 증조부는 가족이민도 중요하지만 그김에 아예 그곳에 청산구항일무장투쟁근거지 창설을 지휘하라고 지시하였다고 합니다.

저의 조부 우성중과 삼백부 우성숙은 증조부의 지시에 의해 조선 황해도에서 제1차로 의병가족 13가구를 관전현 청산구 자루골로 안전하게 이민시킨후 이어 조선 황해도에서 지속적으로 이민군단을 모집하여 청산구주변에 안착시키고 거처를 마련해주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곡식을 심어 자급자족하면서 후에는 물이 닿는 곳에다는 수전을 개간하는 등 의병운동에 수요되는 물질적인 자원의 토대를 닦는데도 전력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다보니 1911년말에는 관전현 청산구, 자루골, 소아하구, 석가구 등지에 조선이주민이 480여가구에 인구 2,000여명, 조선인부락 48개가 형성되였다고 합니다.

 

저의 조부 우성중과 삼백부 우성숙은 의병가족들을 동원하여 깊은 골짜기에다 밀영을 축수했고 밀영에는 의병들이 기거하고 그 외각에는 의병가족들이 거주하게 하였답니다. 그리고 깊은 산정상에는 의병훈련장을 닦아놓고 의병훈련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게 하였답니다.

그 청산구 자루골에서 1912년에 증조부의 장손 우광선(禹光鲜)이 출생하였고 1917년에는 둘째손군인 우광한(禹光韩, 저의 부친)이 태여났습니다.

 

농업기계화를 위하여, 우광한 (앞줄 좌4). 1954년 5월26일.

 

2.

1920년 일제는 경신년대토벌을 감행하여 청산구항일무장투쟁근거지를 파괴하였습니다. 일제는 이때 동북군벌과 합동토벌을 감행하여 관전현 향로구와 청산구 아하구 일대에서 조선인 107명을 살해하고 117명을 체포했으며 총 77자루를 빼앗아갔고 집 99채, 학교 3곳, 병원 8채를 소각해버렸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청산구항일무장투쟁근거지가 완전히 파괴되였지요.

하여 의병가족들의 후방기지와 삶의 현장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지요. 삶의 터전을 잃은 의병가족들은 신분이 로출될 위험에 직면하였지요. 이 위기일발의 시각에 증조부는 과감하게 긴급대책을 세워 가족을 이끌고 청산구 자루골에서 탈출하기로 하였답니다.

 

1922년 초봄의 어느날 증조부는 일가족과 장인 채상설의 식구들 외에 따라 나선 이웃들 도합 15가구를 거느리고 한밤중에 쥐도 새도 모르게 청산구를 빠져나갔답니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극비에 부쳤기에 증조부 외에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였습니다. 수림속으로 가다가 날이 밝으면 산속에서 주먹밥을 먹고 쉬었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다시 걷군 하였답니다. 이렇게 10여일간 밤에만 강행군하였는데 짐을 풀어놓은 곳이 본계현 감창보진 화피구(本溪县碱厂堡镇桦皮沟)의 깊은 산골이였다고 합니다.

이 산골짜기는 한족, 만족, 조선이주민들 도합 30여가구가 모여 사는 오지마을이였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학교도 없고 평지도 수전도 없으며 땅을 독차지한 지주도 없고 일본놈도 볼수 없었다고 합니다. 누구나 산발을 타고 올라가 수림속이나 산등성이에다 황지를 개척하여 곡식을 심어놓으면 그 땅의 주인은 바로 그 사람이였다고 합니다. 증조부는 산등성이에다 초가집을 한채 지어 거처로 삼았다고 합니다.

 

대유학가로서 교육을 중시했던 증조부는 그곳에서도 자기 집에다 글방을 차려놓고 두 손자(광선과 광한)를 비롯한 산골 아이들에게 무료로 천자문과 붓글씨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정신을 집중하지 않거나 숙제를 해오지 않았거나 배운것을 암송하지 못하는 아이들에 대해서는 손자건 이웃집 아이이건 회초리로 종아리를 후려치면서 엄하게 훈육하였다고 합니다.

 

저의 조부 우성중은 이사 오자 이름을 우화은(禹华隐, 중화의 땅에서 은신하여 산다는 뜻임)으로 고치고 일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짐을 기꺼이 도맡았습니다. 그는 매일 할머니와 함께 산과 들에 나가 밭을 일구고 콩, 옥수수, 감자 등을 심었으며 도토리 같은 산열매를 따다 식량을 보탰답니다.

압박도 없고 착취도 없는 깊은 산속에서 농사일은 하는것만치 수확을 얻었고 그 수확 또한 자기들의 소유였으니 이거야말로 락원이 따로 없었던거겠지요. 그때 우리 우씨네는 온 가족이 똘똘 뭉쳐 신근한 로동으로 걷어 들인 감자, 콩, 옥수수 등 잡곡에다 나물을 넣어 죽을 쑤어 배불리 먹을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3년남짓이 무난히 살면서 가끔은 조선인들의 반일운동도 후원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조부의 막내딸 선희가 태여났지요.

 

료녕성 인민대표 우광한(뒤줄 중간, 구술자 부친임). 1955년 2월 4일.

 

3.

그후 저의 증조부 일가족은 1925년 겨울에 본계현 화피구 오지마을에서 흥경현 위자욕 하협하 쌍하촌이라는 곳으로 이사하였다고 합니다. 쌍하촌은 전에 살던 오지마을보다 더 깊은 산골이였다고 합니다. 저의 일가족은 골짜기로 올라가는 산비탈에다 오막살이를 짓고 살았는데 밥그릇이 떨어지면 데굴데굴 산골짜기로 굴러가는 그런 가파로운 골이였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2년 남짓이 살다가 착초구로 이사가서 먼저 삼농사를 짓는 만족농민 조광우의 헛간을 세내여 살았는데 남성들은 삼을 베끼는 방에서 잤고 녀성들은 안방에서 류숙했다고 합니다. 따뜻한 봄이 오자 일가족들은 산비탈로 내려가 초가삼간을 짓고 오손도손 살았다고 합니다.

그때가 압록강을 건너온 조선이주민들이 대량으로 수전을 개간하기 시작한 때였다고 합니다. 저의 일가족도 자그마한 습지를 찾아 논밭을 일구었다고 합니다. 그때는 산종이라 벼와 함께 돌피가 무성하게 자라나서 두세벌 논김을 매도 돌피는 여전히 기세차게 자라나군 하였다고 합니다.

 

1928년 봄에 들어 저의 일가족은 또 다시 위자욕 전변자 소보로 이사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우리 일가족이 그렇게 빈번하게 이사를 다닌 주요원인은 일제의 감시를 벗어나기 위해서였다고도 하고 또한 물이 닿는 곳으로 이사하여 수전농사를 하면서 자식들을 정규학교에 입학시켜 공부시키려는 욕심에서였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그 당시 12살 난 저의 부친 우광한이 처음으로 위자욕소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게 되였답니다.

이곳에서 저의 증조부 일가족은 처음으로 이곳 한족지주의 땅 5무를 소작하여 수전농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1년 내내 온 가족이 달라붙어 농사를 지였지만 그해 가뭄이 들어 농사가 잘 되지 않아 대여섯 식구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고 합니다. 하여 이듬해 보리고개에 또 식량을 꾸어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다가 저의 조부 우화은은 이따금씩 독립군동지들과 가족들을 집으로 데려와서 주숙시키군 하였다고 합니다. 이 시기 독립군 조화선의 안해인 신정숙이 아들을 데리고 와 저의 증조부댁에서 1년이나 피신해 지냈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 우씨일가에는 늘 밥상손님으로 북적였답니다.

 

1928년 12살 난 부친 우광한이 할아버지의 분부대로 위자욕 전변자에서 사는 17세 난 성이숙과 결혼하였답니다. 그 이듬해 초여름에 한시름 놓았는지 증조부는 장손 우광선과 큰며느리 윤씨를 따라 조선 황해도 평산으로 귀국하였다가 얼마 안되여 음력 6월 29일에 황해도 평산에서 작고하였다고 합니다. 향년 73세였는데 그때 고래희를 넘긴 어르신은 대단히 장수한 로인으로 평가받았지요.

 

신빈현동광중학교 제1기 졸업기념. 우철희 (세번째줄 좌4). 1951년.

 

4.

일제의 동북침략이 가속화됨으로 저의 부친 우광한 일가는 도탄속에서 생존하려면 생활의 새로운 출로를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부친은 1929년 봄에 전변자에서 평정산 삼목창 왕씨동네로 이주하였다고 합니다. 왕씨동네는 주로 만족이 살고 있고 조선인은 5,6가구밖에 안되였습니다. 부친은 왕씨동네 산기슭에다 두간짜리 초가를 짓고 살면서 만족지주의 논을 소작하여 농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가을걷이를 끝내면 일본놈 몰래 곡식을 지고 평정산까지 가서 팔아 겨우 생활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1932년 왕씨동네에서 장남 철희(哲熙), 다시 말하면 저의 큰형님이 태여났습니다. 큰형이 태여나던 해 우리 일가는 또다시 평정산 소전자 왕가위자로 이사하였는데 거기서 또 다시 한족지주의 땅을 소작하여 농사를 짓다가 1936년에 평정산거리에 있는 일제의 집단부락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일제는 평정산주위의 한족마을, 조선인마을, 만족마을을 죄다 불태워버리고 총칼을 마구 휘두르며 무고한 백성들을 평정산의 집단부락으로 강제이민시켰다고 합니다. 대학자인 부친은 이사할 때마다 《한국통사》,《조선독립운동사》,《3.1운동사》 등 책자만은 보따리에 싸가지고 다녔답니다.

집단부락으로 강제로 끌려온 우리 일가는 생활이 너무 어려워서 1936년 봄에 만족 왕보영과 함께 만선식당도 운영해보았고 1937년에는 한족, 만족들한테 엿 만드는 기술을 배워주면서 집단부락안에서 로점상을 차려놓고 엿장사도 해보았으며 전병도 팔아보았으나 온 가족이 겨우 입에 풀칠밖에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일제치하의 집단부락은 사람들을 짐승처럼 가두어놓은 “포로영”이나 다름없었다고 합니다.

 

어느날 한 한족이 저의 부친을 찾아와서 “조선사람은 수전농사기술이 있는데 왜 여기서 짐승처럼 갇혀 어렵게 살고 있소? 빨리 가만히 빠져나가 농사를 지으시오.”라고 권하는것이였습니다. 말만은 고마우나 그게 생각대로 되는게 아니였습니다. 하여튼 서로 다른 민족이지만 숙명으로 이어진 형제의 정만은 돈독해 부친도 그 권고에 가슴이 뭉클했노라고 늘 되뇌이군 하였습니다.

집단부락으로 이사 온 부친은 우선 성임필, 최천길, 성종원 등을 조선인의 툰장 리영록 주위에 묶어세워 평정산의 한족 애국인사 오수전, 맹길요, 왕무신, 진덕림, 진경신, 진경생, 진경순 등을 통하여 항일부대에 식량, 목천, 돼지고기, 양고기 등을 지원해주었고 정보를 제공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뒤로도 부친은 늘 항일후원사업을 지속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환인현 이호래마을앞 정경. 1930-1940년대에 부친 우광한이 자주 드나들면서 항일투사들과 접촉하였던 조선인 마을. 1942년에 조부께서 이 마을에서 객사했다.

 

5.

저의 일가는 1937년말 일제의 평정산집단부락에서 탈출하여 소전자로 이사하였답니다. 소전자마을은 평정산에서 10여리되는 자그마한 마을인데 만족, 한족, 조선인 등 80여가구가 사는 산좋고 물좋은 다민족마을이였습니다. 그중 만족이 반이상이고 조선인이 20여가구 되였습니다. 갓 이사 온 우리 일가는 한족 손유학네 삼간집 반을 세내여 정착했다고 합니다. 동쪽방은 주인네가 살았고 서쪽방은 우리 일가가 살았는데 두 집이 한 부엌을 썼다고 합니다. 봄에 손유학네가 서쪽편 집터를 내주어서 우리는 마을 조선인, 한족, 만족들의 도움을 받아 네간짜리 초가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 초가 4간은 우리 우씨가문이 중국으로 이사 와서 30여년을 분투하여 마련한 첫 초가집이였다고 합니다. 우씨네 가족의 행복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새 집으로 이사 온 첫해인 1938년에 둘째형 병희(禹秉熙)가 출생하였고 1941년에는 셋째형 승희(禹承熙)가 태여났으며 1944년에는 정희누님이 태여났습니다. 저는 막둥이로 1955년에 태여났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들려준 이야기는 저의 할아버지나 아버지, 어머니 입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아니 몇해전에 큰형님이 가족사를 정리해놓은것이 있어 그 얘기를 곧이곧대로 들려줬다고 표현해야 함이 더 준확할것입니다.

우리 우씨네가 소전자로 이사왔을 때 소전자주변에는 습지가 많았지만 수전이 없었다고 합니다. 넓은 습지가 잠자고 있는것을 본 부친은 일찍 농사일을 해본적이 있고 또 평정산 서쪽에서 수전을 개간하던 본새대로 크게 수전을 개간할 웅심을 품고 현 관계부문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면서 끝내 인가를 받아냈다고 합니다.

 

부친은 한족, 만족 일꾼을 고용하여 돼지를 잡고 쌀밥을 해서 대접한 후 이튿날부터 수전공사를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 조선에 계시는 형 우광선도 국경을 넘어 왔다갔다하면서 많이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오래동안 잠자고 있던 소전자의 넓은 습지가 얼마 안가서 바둑판같은 수전으로 변신했습니다. 수전이 개간되자 조선인들을 비롯하여 한족, 만족들이 모여들어 벼농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때 벼농사를 한 사람들이 쌀밥먹기는 하늘의 별따기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소처럼 억척스레 벼농사를 지었지만 수확하여 지주에게 소작료를 바치고 나머지는 일본놈한테 공량을 바쳐야 했기때문에 항상 쌀밥은 먹지 못하고 쌀로 잡곡을 바꾸어 잡곡으로 풀죽을 쑤어먹어야 했답니다. 생존을 위해 우리 일가족은 양봉도 해보았고 엿장사도 해보았지만 항상 굶주림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이 시기 우리네 가족들의 주식은 감자와 옥수수였다고 합니다. 큰형 철희는 그때마다 산으로 올라가 산열매를 따먹었고 때로는 들로 나가 어른들 몰래 풋콩, 풋옥수수를 구어 먹고 나서 맑은 강물로 뛰여들어 미역을 감고는 집으로 돌아왔답니다.

우리 우씨네 일가의 이민정착이야기는 사실 소설로 써도 대하소설 몇 세트는 잘 될겁니다. 어찌 보면 우리 가족만큼 이사를 빈번하게 한 가족도 드물겁니다!▣

(출처:《중국민족》조선문판  글/ 김창석 리정옥 전춘매  편집/ 서정옥  조판/ 한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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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흑룡강신문=하얼빈) 윤운걸 길림성특파원=지난 5월22일 기자는 관광코스차로 미·일 혈투의 전적지였던 미 연방 북마리아나군도 사이판 제2차세계대전시기의 일본군최후사령부와 자살바위를 관광했다.   현지에 가보니 일본군이 저항하다 남은 포,전차 등 무기들이 지저분하게 널려 있었지만...
  • 2016-06-25
  • 특별군사법정 옛터 진열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권덕원.          조선족 이야기 백년사          (흑룡강신문=하얼빈) "지금까지 취재하러 왔던 언론사가 50여개 되는 데요…" 권덕원(權德源)은 문서철에 보관한 신문 지상의 기사를 일행에...
  • 2016-06-25
  • 1. “외삼촌의 행적을 알아봐 줄 수 있을까요?”   문득 딩동 하고 벨이 짧게 울렸다. 짧은 메시지가 폰의 화면에 뜨고 있었다. 군인이었던 외삼촌 행적을 함께 알아봐 줄 수 없겠는가 하는 문의 내용이었다. 메시지를 보낸 주인은 북경의 박씨 성의 지인이었다. 취재차로 대륙의 조선인 노병(老兵)을 만나...
  • 2016-06-20
  •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결론부터 쓴다면 양산(梁山)에는 무덤 귀신만 있었다. 양산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무덤이었다. 그러나 양산에 도착하면서 눈앞에 언뜻 떠오른 것은 웬 풍만한 여인이었다. 택시기사가 말하는 산의 이름은 그대로 여인을 연상...
  • 2016-06-17
  •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땅의 이름은 무심코 생긴 게 아니다. 설화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고 나침반처럼 위치를 나타내며 또 거울처럼 모양을 흉내 낸다.한양(漢陽)은 "놈을 기르다"는 뜻의 한양(漢養)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실은 한강(漢江)의 북쪽에...
  • 2016-06-03
  •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옛말에 "잉어가 용문을 뛰어넘으면 용이 된다"고 했다. 그럼 인간이 용문을 건너면 뭐가 될까?…"그거야 두발로 건너보면 금방 알거 아니겠어요?"   솔직히 그래서 옛날부터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했을지 모...
  • 2016-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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