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조선족이민사 구술력사 시리즈:'우리 가족만큼 이사를 빈번히 한 가족은 드물겁니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5월5일 09시25분    조회:2139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2006년 10월 3일 우병희, 우승희, 우빈희 삼형제와 부인들 및 우정수 (큰형 우철희의 장남)가 우리 가문이 살던 료녕성 관전현 청산구를 찾아

 

구술자: 우빈희(禹宾熙, 1955-), 료녕성 청원만족자치현 현위서기 및 인대대표, 무순일보 당조서기 및 사장, 중국민족보 부사장, 민족출판사 당위서기 및 사장 겸 총편집 등 직을 력임.

취재일시: 2015년 6월 30일

취재지점: 북경시 법화사로 정협호텔

취재: 김창석 리정옥 전춘매

정리: 《중국조선족백년실록》취재팀

 

1.

저의 증조부 우병렬(禹炳烈, 단양우씨 제29세)은 1856년 6월 29일(음력)에 조선 황해도 평산군 룡산면 석탄리 명문가에서 출생하여 일찍부터 유학(儒学)공부에 힘써 대유학자로 성장하였습니다.

 

저의 증조부께서는 1876년에 무과시험에 급제하여 남수원 대장이 되였으며 1892년에는 조선왕조훈련원 판관직에 등용되여 1905년까지 30여년을 근무하다가 무능한 봉건통치배들을 위하여 근무하는것에 회의를 느껴 판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글방을 차렸다고 합니다. 1907년에 장남 우제경, 맏사위 리진룡과 함께 조선의 평산의병운동에 참여하였다고 합니다.

그때 증조부 우병렬이 지휘하는 평산의병부대가 황해도일대를 거의 장악하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큰 타격을 안기자 일본군은 특별토벌대를 편성하여 의병토벌을 감행하는 만행을 꺼리낌없이 저질렀다고 합니다. 강한 적의 공세하에 렬세에 처한 의병들은 새로운 활로를 찾고저 1908년 음력 8월에 류린석의 “북변지계(北边之计)”에 의해 로씨야 울라지보스또크(해삼위)로 이동하였다고 합니다.

 

무사히 울라지보스또크로 이동은 했지만 그들의 정치활동이 로씨야 당국의 감시와 압제를 받게 되였지요. 그뒤 일제침략의 마수가 로씨야까지 뻗치였기에 로씨야에서의 조선인독립운동 또한 많은 어려움과 제한을 받았다고 합니다. 생활이 극도로 어렵게 되자 의병들은 산속으로 들어가 둔전(屯田)을 해야 했답니다.

 

1912년 울라지보스또크에서의 조선인인독립운동이 더는 지탱할수 없게 되고 의병들의 생활이 극도로 궁핍하게 되자 의암 류린석과 저의 중조할아버지 우병렬은 1914년에 대오를 거느리고 중국 관전현 청산구 자루골로 건너왔다고 합니다.

대유학자이고 무관이였던 증조부께서는 그때로부터 총과는 인연을 끊고 자루골에서 글방을 차리고 훈장이 되여 후학들에게 글을 배워주면서 반일의식을 고취하였다고 합니다.

 

저의 증조부는 맏사위 리진룡과 상의하여 당시 울라지보스또크로 이동하기직전에 가족과 친척 13가구를 조선 황해도 평산으로부터 관전현 청산구 자루골로 집단이주를 시켰다고 합니다. 그 간거한 임무를 당시 증조부는 차남인 우성중(원명 우제륜, 저의 조부)과 삼남인 우성숙에게 맡겨 실행했다고 합니다. 증조부는 가족이민도 중요하지만 그김에 아예 그곳에 청산구항일무장투쟁근거지 창설을 지휘하라고 지시하였다고 합니다.

저의 조부 우성중과 삼백부 우성숙은 증조부의 지시에 의해 조선 황해도에서 제1차로 의병가족 13가구를 관전현 청산구 자루골로 안전하게 이민시킨후 이어 조선 황해도에서 지속적으로 이민군단을 모집하여 청산구주변에 안착시키고 거처를 마련해주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곡식을 심어 자급자족하면서 후에는 물이 닿는 곳에다는 수전을 개간하는 등 의병운동에 수요되는 물질적인 자원의 토대를 닦는데도 전력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다보니 1911년말에는 관전현 청산구, 자루골, 소아하구, 석가구 등지에 조선이주민이 480여가구에 인구 2,000여명, 조선인부락 48개가 형성되였다고 합니다.

 

저의 조부 우성중과 삼백부 우성숙은 의병가족들을 동원하여 깊은 골짜기에다 밀영을 축수했고 밀영에는 의병들이 기거하고 그 외각에는 의병가족들이 거주하게 하였답니다. 그리고 깊은 산정상에는 의병훈련장을 닦아놓고 의병훈련을 지속적으로 진행하게 하였답니다.

그 청산구 자루골에서 1912년에 증조부의 장손 우광선(禹光鲜)이 출생하였고 1917년에는 둘째손군인 우광한(禹光韩, 저의 부친)이 태여났습니다.

 

농업기계화를 위하여, 우광한 (앞줄 좌4). 1954년 5월26일.

 

2.

1920년 일제는 경신년대토벌을 감행하여 청산구항일무장투쟁근거지를 파괴하였습니다. 일제는 이때 동북군벌과 합동토벌을 감행하여 관전현 향로구와 청산구 아하구 일대에서 조선인 107명을 살해하고 117명을 체포했으며 총 77자루를 빼앗아갔고 집 99채, 학교 3곳, 병원 8채를 소각해버렸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청산구항일무장투쟁근거지가 완전히 파괴되였지요.

하여 의병가족들의 후방기지와 삶의 현장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지요. 삶의 터전을 잃은 의병가족들은 신분이 로출될 위험에 직면하였지요. 이 위기일발의 시각에 증조부는 과감하게 긴급대책을 세워 가족을 이끌고 청산구 자루골에서 탈출하기로 하였답니다.

 

1922년 초봄의 어느날 증조부는 일가족과 장인 채상설의 식구들 외에 따라 나선 이웃들 도합 15가구를 거느리고 한밤중에 쥐도 새도 모르게 청산구를 빠져나갔답니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 극비에 부쳤기에 증조부 외에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였습니다. 수림속으로 가다가 날이 밝으면 산속에서 주먹밥을 먹고 쉬었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다시 걷군 하였답니다. 이렇게 10여일간 밤에만 강행군하였는데 짐을 풀어놓은 곳이 본계현 감창보진 화피구(本溪县碱厂堡镇桦皮沟)의 깊은 산골이였다고 합니다.

이 산골짜기는 한족, 만족, 조선이주민들 도합 30여가구가 모여 사는 오지마을이였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학교도 없고 평지도 수전도 없으며 땅을 독차지한 지주도 없고 일본놈도 볼수 없었다고 합니다. 누구나 산발을 타고 올라가 수림속이나 산등성이에다 황지를 개척하여 곡식을 심어놓으면 그 땅의 주인은 바로 그 사람이였다고 합니다. 증조부는 산등성이에다 초가집을 한채 지어 거처로 삼았다고 합니다.

 

대유학가로서 교육을 중시했던 증조부는 그곳에서도 자기 집에다 글방을 차려놓고 두 손자(광선과 광한)를 비롯한 산골 아이들에게 무료로 천자문과 붓글씨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정신을 집중하지 않거나 숙제를 해오지 않았거나 배운것을 암송하지 못하는 아이들에 대해서는 손자건 이웃집 아이이건 회초리로 종아리를 후려치면서 엄하게 훈육하였다고 합니다.

 

저의 조부 우성중은 이사 오자 이름을 우화은(禹华隐, 중화의 땅에서 은신하여 산다는 뜻임)으로 고치고 일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짐을 기꺼이 도맡았습니다. 그는 매일 할머니와 함께 산과 들에 나가 밭을 일구고 콩, 옥수수, 감자 등을 심었으며 도토리 같은 산열매를 따다 식량을 보탰답니다.

압박도 없고 착취도 없는 깊은 산속에서 농사일은 하는것만치 수확을 얻었고 그 수확 또한 자기들의 소유였으니 이거야말로 락원이 따로 없었던거겠지요. 그때 우리 우씨네는 온 가족이 똘똘 뭉쳐 신근한 로동으로 걷어 들인 감자, 콩, 옥수수 등 잡곡에다 나물을 넣어 죽을 쑤어 배불리 먹을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3년남짓이 무난히 살면서 가끔은 조선인들의 반일운동도 후원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조부의 막내딸 선희가 태여났지요.

 

료녕성 인민대표 우광한(뒤줄 중간, 구술자 부친임). 1955년 2월 4일.

 

3.

그후 저의 증조부 일가족은 1925년 겨울에 본계현 화피구 오지마을에서 흥경현 위자욕 하협하 쌍하촌이라는 곳으로 이사하였다고 합니다. 쌍하촌은 전에 살던 오지마을보다 더 깊은 산골이였다고 합니다. 저의 일가족은 골짜기로 올라가는 산비탈에다 오막살이를 짓고 살았는데 밥그릇이 떨어지면 데굴데굴 산골짜기로 굴러가는 그런 가파로운 골이였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2년 남짓이 살다가 착초구로 이사가서 먼저 삼농사를 짓는 만족농민 조광우의 헛간을 세내여 살았는데 남성들은 삼을 베끼는 방에서 잤고 녀성들은 안방에서 류숙했다고 합니다. 따뜻한 봄이 오자 일가족들은 산비탈로 내려가 초가삼간을 짓고 오손도손 살았다고 합니다.

그때가 압록강을 건너온 조선이주민들이 대량으로 수전을 개간하기 시작한 때였다고 합니다. 저의 일가족도 자그마한 습지를 찾아 논밭을 일구었다고 합니다. 그때는 산종이라 벼와 함께 돌피가 무성하게 자라나서 두세벌 논김을 매도 돌피는 여전히 기세차게 자라나군 하였다고 합니다.

 

1928년 봄에 들어 저의 일가족은 또 다시 위자욕 전변자 소보로 이사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우리 일가족이 그렇게 빈번하게 이사를 다닌 주요원인은 일제의 감시를 벗어나기 위해서였다고도 하고 또한 물이 닿는 곳으로 이사하여 수전농사를 하면서 자식들을 정규학교에 입학시켜 공부시키려는 욕심에서였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그 당시 12살 난 저의 부친 우광한이 처음으로 위자욕소학교에 들어가 공부하게 되였답니다.

이곳에서 저의 증조부 일가족은 처음으로 이곳 한족지주의 땅 5무를 소작하여 수전농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1년 내내 온 가족이 달라붙어 농사를 지였지만 그해 가뭄이 들어 농사가 잘 되지 않아 대여섯 식구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고 합니다. 하여 이듬해 보리고개에 또 식량을 꾸어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다가 저의 조부 우화은은 이따금씩 독립군동지들과 가족들을 집으로 데려와서 주숙시키군 하였다고 합니다. 이 시기 독립군 조화선의 안해인 신정숙이 아들을 데리고 와 저의 증조부댁에서 1년이나 피신해 지냈다고 합니다. 이렇게 우리 우씨일가에는 늘 밥상손님으로 북적였답니다.

 

1928년 12살 난 부친 우광한이 할아버지의 분부대로 위자욕 전변자에서 사는 17세 난 성이숙과 결혼하였답니다. 그 이듬해 초여름에 한시름 놓았는지 증조부는 장손 우광선과 큰며느리 윤씨를 따라 조선 황해도 평산으로 귀국하였다가 얼마 안되여 음력 6월 29일에 황해도 평산에서 작고하였다고 합니다. 향년 73세였는데 그때 고래희를 넘긴 어르신은 대단히 장수한 로인으로 평가받았지요.

 

신빈현동광중학교 제1기 졸업기념. 우철희 (세번째줄 좌4). 1951년.

 

4.

일제의 동북침략이 가속화됨으로 저의 부친 우광한 일가는 도탄속에서 생존하려면 생활의 새로운 출로를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부친은 1929년 봄에 전변자에서 평정산 삼목창 왕씨동네로 이주하였다고 합니다. 왕씨동네는 주로 만족이 살고 있고 조선인은 5,6가구밖에 안되였습니다. 부친은 왕씨동네 산기슭에다 두간짜리 초가를 짓고 살면서 만족지주의 논을 소작하여 농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가을걷이를 끝내면 일본놈 몰래 곡식을 지고 평정산까지 가서 팔아 겨우 생활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1932년 왕씨동네에서 장남 철희(哲熙), 다시 말하면 저의 큰형님이 태여났습니다. 큰형이 태여나던 해 우리 일가는 또다시 평정산 소전자 왕가위자로 이사하였는데 거기서 또 다시 한족지주의 땅을 소작하여 농사를 짓다가 1936년에 평정산거리에 있는 일제의 집단부락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일제는 평정산주위의 한족마을, 조선인마을, 만족마을을 죄다 불태워버리고 총칼을 마구 휘두르며 무고한 백성들을 평정산의 집단부락으로 강제이민시켰다고 합니다. 대학자인 부친은 이사할 때마다 《한국통사》,《조선독립운동사》,《3.1운동사》 등 책자만은 보따리에 싸가지고 다녔답니다.

집단부락으로 강제로 끌려온 우리 일가는 생활이 너무 어려워서 1936년 봄에 만족 왕보영과 함께 만선식당도 운영해보았고 1937년에는 한족, 만족들한테 엿 만드는 기술을 배워주면서 집단부락안에서 로점상을 차려놓고 엿장사도 해보았으며 전병도 팔아보았으나 온 가족이 겨우 입에 풀칠밖에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일제치하의 집단부락은 사람들을 짐승처럼 가두어놓은 “포로영”이나 다름없었다고 합니다.

 

어느날 한 한족이 저의 부친을 찾아와서 “조선사람은 수전농사기술이 있는데 왜 여기서 짐승처럼 갇혀 어렵게 살고 있소? 빨리 가만히 빠져나가 농사를 지으시오.”라고 권하는것이였습니다. 말만은 고마우나 그게 생각대로 되는게 아니였습니다. 하여튼 서로 다른 민족이지만 숙명으로 이어진 형제의 정만은 돈독해 부친도 그 권고에 가슴이 뭉클했노라고 늘 되뇌이군 하였습니다.

집단부락으로 이사 온 부친은 우선 성임필, 최천길, 성종원 등을 조선인의 툰장 리영록 주위에 묶어세워 평정산의 한족 애국인사 오수전, 맹길요, 왕무신, 진덕림, 진경신, 진경생, 진경순 등을 통하여 항일부대에 식량, 목천, 돼지고기, 양고기 등을 지원해주었고 정보를 제공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뒤로도 부친은 늘 항일후원사업을 지속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환인현 이호래마을앞 정경. 1930-1940년대에 부친 우광한이 자주 드나들면서 항일투사들과 접촉하였던 조선인 마을. 1942년에 조부께서 이 마을에서 객사했다.

 

5.

저의 일가는 1937년말 일제의 평정산집단부락에서 탈출하여 소전자로 이사하였답니다. 소전자마을은 평정산에서 10여리되는 자그마한 마을인데 만족, 한족, 조선인 등 80여가구가 사는 산좋고 물좋은 다민족마을이였습니다. 그중 만족이 반이상이고 조선인이 20여가구 되였습니다. 갓 이사 온 우리 일가는 한족 손유학네 삼간집 반을 세내여 정착했다고 합니다. 동쪽방은 주인네가 살았고 서쪽방은 우리 일가가 살았는데 두 집이 한 부엌을 썼다고 합니다. 봄에 손유학네가 서쪽편 집터를 내주어서 우리는 마을 조선인, 한족, 만족들의 도움을 받아 네간짜리 초가집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 초가 4간은 우리 우씨가문이 중국으로 이사 와서 30여년을 분투하여 마련한 첫 초가집이였다고 합니다. 우씨네 가족의 행복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새 집으로 이사 온 첫해인 1938년에 둘째형 병희(禹秉熙)가 출생하였고 1941년에는 셋째형 승희(禹承熙)가 태여났으며 1944년에는 정희누님이 태여났습니다. 저는 막둥이로 1955년에 태여났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들려준 이야기는 저의 할아버지나 아버지, 어머니 입을 통해 들었던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아니 몇해전에 큰형님이 가족사를 정리해놓은것이 있어 그 얘기를 곧이곧대로 들려줬다고 표현해야 함이 더 준확할것입니다.

우리 우씨네가 소전자로 이사왔을 때 소전자주변에는 습지가 많았지만 수전이 없었다고 합니다. 넓은 습지가 잠자고 있는것을 본 부친은 일찍 농사일을 해본적이 있고 또 평정산 서쪽에서 수전을 개간하던 본새대로 크게 수전을 개간할 웅심을 품고 현 관계부문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면서 끝내 인가를 받아냈다고 합니다.

 

부친은 한족, 만족 일꾼을 고용하여 돼지를 잡고 쌀밥을 해서 대접한 후 이튿날부터 수전공사를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 조선에 계시는 형 우광선도 국경을 넘어 왔다갔다하면서 많이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오래동안 잠자고 있던 소전자의 넓은 습지가 얼마 안가서 바둑판같은 수전으로 변신했습니다. 수전이 개간되자 조선인들을 비롯하여 한족, 만족들이 모여들어 벼농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때 벼농사를 한 사람들이 쌀밥먹기는 하늘의 별따기였다고 합니다. 그들은 소처럼 억척스레 벼농사를 지었지만 수확하여 지주에게 소작료를 바치고 나머지는 일본놈한테 공량을 바쳐야 했기때문에 항상 쌀밥은 먹지 못하고 쌀로 잡곡을 바꾸어 잡곡으로 풀죽을 쑤어먹어야 했답니다. 생존을 위해 우리 일가족은 양봉도 해보았고 엿장사도 해보았지만 항상 굶주림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이 시기 우리네 가족들의 주식은 감자와 옥수수였다고 합니다. 큰형 철희는 그때마다 산으로 올라가 산열매를 따먹었고 때로는 들로 나가 어른들 몰래 풋콩, 풋옥수수를 구어 먹고 나서 맑은 강물로 뛰여들어 미역을 감고는 집으로 돌아왔답니다.

우리 우씨네 일가의 이민정착이야기는 사실 소설로 써도 대하소설 몇 세트는 잘 될겁니다. 어찌 보면 우리 가족만큼 이사를 빈번하게 한 가족도 드물겁니다!▣

(출처:《중국민족》조선문판  글/ 김창석 리정옥 전춘매  편집/ 서정옥  조판/ 한동준)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72
  • '하나의 역사관 vs 다양한 역사관' 지난 12일 교육부는 한국사 국정 교과서 추진 계획을 확정·발표했다. 11월 중 집필진을 구성하고 2017년 3월 일선 학교에 국정 교과서를 보급한다는 계획이다. 논란은 거세다. ‘균형 잡히고 통일된 역사관에 입각한 국정 교과서가 필요하다는 입장’과 &lsquo...
  • 2015-10-21
  •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실크로드'는 약 기원전 2세기부터 고대 중국에서 시작되어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을 연결한 옛 상업무역 노선으로 16세기까지 계속 보류, 사용되면서 동방과 서방의 경제와 정치, 문화...
  • 2015-10-16
  • 추석전날 연변인민방송 애청자협회 30명 애청자대표들은 주덕해동지기념비를 찾아 추모제를 올렸다.  해마다 선조들을 기리는 청명과 추석이면 이들은 어김없이 찾아가군 한다. 9년째 이렇게 찾아온 로인뢰봉반 맹인반장 김봉숙로인은 주덕해로주장에게 제술을 부어 올리면서 《로주장님 뵈러 찾아왔습...
  • 2015-09-29
  • 취궈홍 주한 중국대사 등 16일 개막식 참석   새까맣게 탄 중국군 시체를 바라보고 있는 일본군(천안=연합뉴스) 김용윤 기자= 독립기념관이 16일부터 10월말까지 중국 난징대학살 특별기획전을 진행한다. 사진은 불에 타 죽은 중국군 사체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일본군. 2015.9.15 난징으로 입성하는 일제(천안=연합뉴...
  • 2015-09-16
  • 1979년에 국무원으로부터 로혁명근거지로 확정된 도문시가 항일전쟁 및 세계반파쇼전쟁승리 70돐을 맞이해 “로혁명근거지-도문”기념비를 세운 가운데 기념비 락성식이 2일, 도문시 수원광장에서 있었다. 료해에 따르면 1930년 3월 중공 동만특별지부는 하석광을 파견, 월청 석건평에 도문의 첫 당지부를 ...
  • 2015-09-08
  •  항일전쟁 승리 70주년(9월3일)을 앞두고 발표한 '항일영웅렬사' 명단에 일제시기 한국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항일전에 참가했던 조선족 항일투사들도 일부 포함됐다.  국무원 비준을 거쳐 지난 25일 발표한 '저명한 항일영웅렬사 600명' 명단에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해 일제와 처절하게 싸왔던 박...
  • 2015-08-27
  • 중국인민항일전생 및 세계반파쑈전쟁 승리 70주년을 성대하게 기념하기 위해 국무원이 당중앙과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제2진 국가급 항일전쟁 기념시설, 유적지 100곳 명록과 제2진 유명 항일영웅렬사, 영웅군체 600명 명록을 공포했다. 1931년 9.18사변과 함께 항일 국지전쟁이 서막을 열어서부터 1945년 전면 승리를 거두...
  • 2015-08-26
  • 독립운동가 윤낙세에 대한 고찰 (흑룡강신문=하얼빈) 윤낙세(1877 ~ 1929)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1910년대와 1920년대에 간도와 로씨야를 무대로 반일투쟁에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이다. 1910년대초에는 권업회, 기독교우회 등 단체를 통해 군자금 모집 및 반일선전활동을 하였고 1910년대말에는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신민...
  • 2015-08-17
  • 중국 문인 징메이주가 1941년 한국광복군 기관지에 기고한 '의사행' 1~3편 징메이주, 1941년 한국광복군 기관지에 한인애국단 헌시 기고 (서울=연합뉴스) 고은지 기자 = "의사는 아무 일 없는 듯 폭탄을 가슴에 안고 인파 사이를 헤쳐 나가/…/의사는 손을 들어 폭탄을 투척하네/…/중화의 건아들아 부...
  • 2015-08-10
  • 본사소식 7월 31일, 주심양한국총령사관 대련출장소에서 주최하고 대련시한국인(상)회, (한)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대련지회에서 협찬한 "안중근의사 유해 발굴을 위한 방안 모색" 세미나가 중한 량국의 교수, 대련 소재 부분 기업인들과 대련국제학교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련부려화호텔에서 진행됐다.   ...
  • 2015-08-06
  • 동북항일련군 박물관 기본 전시로 “항전 14년-동북항일련군 력사진렬”이 다년간의 준비단계를 거쳐 8월 1일 공식 개방되였다. 전시는 9.18사변 폭발로부터 구쏘련 홍군의 동북 진입기간까지 동북항일련군 전사들이 중국공산당의 령도아래 침략군과 생사박투를 벌이고 민족 울타리를 지켜낸 력사적 증거물들이다...
  • 2015-08-03
  • (선양=연합뉴스) 홍창진 특파원 = 조선족의 파란만장한 중국 이민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올해 안에 완간된다. 명말청초인 17세기 초 중국에 정착하기 시작한 조선족은 1952년 연변자치주 설립까지 400년에 걸쳐 험난한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역사를 갖고 있다. 항일무장독립투쟁과 국공내전 과정에서는...
  • 2015-07-21
  •            조선족 항일로전사 리민 '푸틴훈장' 수여받아       "중러인민이 희생으로 바꾼 승리 후대들은 잊지말아야"   (흑룡강신문=하얼빈) "2013년 12월 21일 러시아 대통령 푸틴의 명령에 따라 '1941년-1945년 위대한 위국전쟁...
  • 2015-06-10
  • 만세묘지에 묻혀있는 백년의 함성 연변의 항일운동은 언제 어디서 시작되는가   이 이야기는 한 시골노인의 어릴 때의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7,8살 때 소를 몰고 산을 오르내리던 소년은 늘 비탈의 무명의 무덤을 지났다. 아니, 이 무덤은 주인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을 뿐이지 실은 무명의 무덤이 아니었다. 방창화...
  • 2015-06-01
  • 중국조선민족사학회 연변지역 리사확대회의 연변대학서   더 많은 이들이 우리 조선민족의 력사와 문화에 관심을 갖게 하고 조선족의 력사를 발굴, 선양하기 위해 중국조선민족사학회(회장 정신철)에서는 5월 22일, 연변대학에서 리사확대회의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우리 민족 력사연구분야의 관계자 십여명이 참...
  • 2015-05-22
  • [원제목]'애족장' 수훈자 윤낙세 후손, '2015 호국영령 위패봉안식'에 참가 항일 독립유공자 중국에서의 활동 재조명 계기 마련   ▲ 독립유공자 수훈 애족장 윤낙세 후손인 윤운걸(흑룡강신문 길림성 특파원)씨와 그의 부인 박진숙씨 [서울=동북아신문]'2015년 제2회 한국 호국영령 합동 위패봉안...
  • 2015-05-21
  • [항일전쟁은 몇년인가?] 노구교의 돌사자에 깃든 옛 이야기   원상대로 보존되여 있는 노구교  옛 다리바닥부분 기실 노구교(盧溝橋)의 이 이야기는 황당한 일로부터 시작된다. 노구교의 저쪽에서 일본군이 훈련을 마치고 귀영하던 도중 병사 한명이 뒤를 보러 가면서 그만 낙오를 했다. 나중에 일본군은 이 병사...
  • 2015-04-09
  • 료녕신문소식: 항일의사 안중근 순국 105주년 도편순회전시회가 3월 31일 신빈만족자치현 조선족중학교에서 열렸다. 료녕성 동북항일련군 항일전쟁사연구회, 료녕동북아 경제문화추진회, 심양시9.18력사박물관, 한중교류문화원, 심양시조선족 제1중학교, 료녕대학 동북아연구중심에서 주최하고 료녕성 조선족로인촬영가협회...
  • 2015-04-02
  • 《3.13》반일집회 유적지에서 열심히 필기하고있는 룡정중학교 학생들. 3월 14일 오전, 룡정《3.13》기념사업회는 《3.13》반일운동 96주년,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룡정시조선족녀성민족무용협회 회원 30여명과 룡정중학교 사생 30명이 참가한 《3.13》반일시위 유적지와 로정 답사활동을 조직하였다....
  • 2015-03-16
  • 룡정《3.13》기념사업회 리광평회장에 따르면 룡정시에서는 《3.13반일운동》 96주년을 맞으며 추모제, 기념좌담회, 《3.13》반일운동유적지답사 등 기념계렬활동을 조직하게 된다. 3월 13일 오전 10시부터 룡정시 《3.13》반일의사릉에서 진행되는 추모제 행사에는 룡정시 당위와 정부, 심양한국총령사관, 룡정《3.13》기...
  • 2015-03-11
‹처음  이전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