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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뻐스12] 로씨야 연해주 항일유적지 답사길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6월4일 21시02분    조회:1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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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동맹” 기념비

“근대사에서 중조 인민의 항일투쟁은 안중근으로부터 시작되였다”고 주은래 총리께서 말씀한 바 있다.

중국조선족항일가요합창단에서는 최근 안중근의사의 주요 활동지였던 로씨야 연해주의 항일유적지에 대한 답사를 조직하여 단원들의 항일력사의식을 제고하는 데 훌륭한 기회를 마련하였다.

크라스끼노의 안중근 “단지동맹” 기념비

5월 8일, 훈춘장령자통상구를 거쳐 약 40분 간 차를 달려 당도한 곳은 “크라스끼노”라고 하는 작은 향진 마을이였다. 예로부터 “연추”라고 부르던 이 마을은 1936년 일본첩보부대와의 전투에서 “크라스낀”이라고 하는 쏘련군 중위가 전사하면서 그를 기리기 위해 마을지명을 “크라스끼노”라고 고쳐지었다고 한다.

바로 이 마을 외곽에 1909년 3월 5일(음력 2월 7일), 안중근을 비롯한 12명의 독립투사들이 조국독립에 헌신할 것을 다짐하며 왼손 무명지를 잘라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 혈서를 쓰고 하늘과 땅에 맹세한 “단지동맹” 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워낙 이곳은 1908년 4월 의병단체인 “동의회”가 결성된 곳으로서 국경을 넘어 조선 국내에 쳐들어가 일제를 몰아내는 진공작전을 전개하던 의병들의 근거지였다. “동의회”소속인 안중근은 “단지동맹”을 맺은 그 해 10월 26일 할빈역에 이르러 일제침략의 원흉 이또히로부미를 저격하였다.

흰구름 떠도는 푸른 하늘 아래 가없이 펼쳐진 넓은 들 한가운데 기념비가 호젓이 서있다. 길옆에 세워진 유지비에는 안중근의사를 비롯한 결사동지들이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단지동맹”을 맺었다고 밝혀쓰고 있다.

기념비 가까이에 다가서는 순간, 무명지가 잘려 나간 왼손 자국이 기념비우에 력력히 새겨져 있는 것이 한눈에 안겨왔다. 선혈이 흐르는 손을 들어 혈서를 쓰며 “독립 만세!”를 삼창하는 투사들의 형상이 눈앞에 선히 떠오르는듯 싶었다.

비장함이 느껴지는 단지동맹 기념비 앞에서 답사팀은 “할빈아리랑”을 우렁차게 부르며 독립과 자유와 평화를 향한 투사들의 의지를 높이 구가하였다.

울라지보스또크의 신한촌

답사팀은 크라스끼노에서 4시간 가량 차를 달려 울라지보스또크에 이르렀다. 이곳에 조선이주민들이 정착한 시기는 19세기 60년대 초로서 연변에로의 이주와 거의 시기를 같이 하고 있었다.

신한촌 옛터에서

1863년 조선 함경도의 13가구 농가가 처음 울라지보스또크의 바다가에 정착하면서 조선인들의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된다. 이주민들은 처음 바다가에 거처를 잡고 고기잡이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874년 경에 마을이 생겨났고 1890년 경에는 이주민 수가 900여명으로 늘어났으며 몇년 후 당국에서는 조선인 집단거주지역으로 지정하였다. 그 마을이 “개척리”였다.

그러나 마을에 전염병이 휩쓸자 당국에서는 또 조선인들을 울라지보스또크 서북 외곽으로 강제이주시켰다. 조선인들은 그곳에서 다시 어렵게 “신개척리”를 건설하였고 한인마을을 새롭게 건설한다는 뜻으로 “신한촌”(新韩村)이라 불렀다.

신한촌은 연해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조선인 거주지로 되였고 1905년 을사륵약후로 많은 항일지사들이 망명해 집결하면서 항일의 중심지로 떠오른다. 1911년 5월 신한촌에는  독립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독립군 양성과 정부 수립을 목표로 한 “권업회” 본부가 창설되며 초대 회장에 최재형, 부회장에 홍범도가 맡는다.그러나 일제세계대전을 계기로 일제와 제휴한 로씨야의 탄압을 받아 해체되고 만다. 1937년에는 변경의 소수민족들이 중앙아세아로 강제이주를 떠나면서 “신한촌”은 력사 속으로 사라진다.

지금은 기념비만 옛터를 지키고 있는 그 자리에서 답사팀은 “룡정3.13기념사업회” 리광평 회장으로부터 “신한촌”과 연변 룡정과의 력사적 연원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1919년 3월 13일 룡정에서 일어난 반일대시위는 일제놈들의 피비린 탄압을 받는다. 반일독립투사들은 무장을 들어야만 일제침략자를 물리칠 수 있다는 교훈을 얻고 무장탈취투쟁에 궐기해 나섰으며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룡정 지역에서 “15만원 탈취사건”을 벌이게 된다.

1920년 1월 4일 6명의 청년들이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북간도 룡정지점으로 운송되는 15만원을 중도에서 탈취한다. 그중 넷은 와룡동을 거쳐 산발을 타고 울라지보스또크 신한촌에 이르렀다. 그 돈으로 무기를 구입해 들이지만 신한촌의 엄인섭이라는 반역자에 의해 윤준희, 림국정, 한상호 셋은 일제경찰들에 체포되고 최봉설 한사람만 탈출한다. 체포된 세사람은 서대문형무소에 이송되여 판결을 받고 하루 한시에 교살당하는 비극을 맞게 된다.

연해주는 예로부터 력사적으로나 지연적으로 연변과 하나로 이어져 많은 풍운을 함께 겪어왔다.

우스리스크의 “고려인 문화센터”

5월 10일, 답사팀은 울라지보스또크에서 우스리스크로 향하였다. 세시간도 넘게 차를 달려 정차한 곳은 연해주의 유일한 “고려인 문화센터”였다. 이국 땅 먼곳에서 처음 우리 글 간판을 보며 가슴들을 설레였다.

연해주 민족문화 자치회 교육센터 조엘레나 부장이 우리를 반겨주며 안내하였다. “러시아 한인 이주 140년 기념관”(2004년)으로 건설된 이 문화센터에는 “고려인 력사관”이 있어 연해주 고려인들의 150년 간의 삶을 료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문화센터 홀에서 부르는“고향의 봄”

고려인 력사관이 속해있는 우스리스크는 연해주의 제2도시이며 역시 독립운동근거지였다. 또한 1937년 17만명을 넘는 고려인들이 씨베리아 횡단렬차에 실려 중앙아시아 불모의 땅으로 강제이주를 떠난 력사의 현장이기도 하였다. 1993년 4월 고려인의 명예회복법이 통과되면서 3만명에 달하는 고려인들이 다시 연해주로 돌아와 살고 있었다.

당시 연해주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혼을 불태운 곳이다.

을사조약 체결로 나라의 외교권이 박탈되자 로씨야 상주 공사로 있던 리범진은 일본의 소환명령도 거부한 채 항일구국활동을 벌였다. 그는 1907년 아들 리위종을 헤이그 밀사로 파견하였고 연해주 항일의병조직인 “동의회” 결성에도 참여시켰다. 그러나 일제가 나라를 완전 강점하자 그는 목을 매 자결하는 것으로 대항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은 조직적 항일투쟁을 벌여 나라를 찾기 위해 “권업회”와 “대한인민국 씨베리아 지방총회”와 같은 항일조직들을 결성하였다. 교육구국운동 집념으로 지방회를 조직하여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교원을 양성하고 신문을 발행하면서 교육과 계몽에 앞장섰다. 당시 학교들에서는 근대학문과 민족주의교육을 하였으며 항일구국교양을 진행하였다.

연해주에서 출판된 아리랑 서적들

또한 중앙아시아에로의 강제이주로 막막한 사막에 버려진 비참한 환경속에서도 모진 학대와 고생을 이겨내며 살아남아 다시 반세기 후에 연해주 그 희망의 땅으로 돌아온 3만명에 이르는 고려인들, 그들은 오늘도 아리랑문화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연해주 그 땅에서 아리랑을 주제로 하는 음악 서적과 기타 다양한 종류의 서적들이 계속적으로 발간되였다. 아리랑은 노래이상의 의미와 가치와 삶과 력사로 고려인의 가슴 시린 삶을 위로하며 과거와 현재를 련결시켜왔다.

오늘날 고려인들은 문화센터에서 우리 말과 글을 배우고 태권도며 춤노래, 민속풍습을 익히면서 민족문화를 전해가고 있었다. 이 센터에서는 또 신문사와 방송사도 운영하면서 연해주 고려인을 위한 문화중심으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었다.

답사팀이 력사관을 나와 보니  2층 활동실에서는 텔레비죤 앞에서 한국 19기 대통령 문재인의 현충원 도착을 두손 모아쥐고 간절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1층 무용실에서는 조선의 금강산노래 선률에 맞춰 춤연습에 땀을 흘리는 이들이 있었다. 대청홀에서는  <아리랑>이며  <고향의 봄> 노래가 구성지게 울려퍼지는데 답사팀과 고려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 어울리며 흥겨운 춤판을 벌렸다.

참으로 우리 민족은 춤노래만으로도 쉽게 통일되는 민족인 것을.

최재형의 저택과 리상설 유허비

조엘레나 부장의 안내로 우리 답사팀은 고려인 문화 센터를 나와 우스리스크의 유적지 답사길에 올랐다. 

20세기 10년대에 들어서면서 연해주에서 반일독립운동의 불길이 세차게 타번지자 일제는 조선인 마을에 대한 무차별 습격을 감행하고 무수한 사람들을 살상하였다.

1918년 민족자치와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전로한족중앙총회를 결성한 곳.

1920년 4월 4일과 5일 이틀 사이에 신한촌 한곳에서만도 300여명이 일제의 총칼에 살해되였다. 우스리스크의 대부자로서 항일독립운동에 대량의 경제지원을 안받침해주었고 할빈으로 떠나는 안중근에게도 직접 권총을 마련해 건네주었던 씨베리아 항일운동의 대부 최재형도 이 “4월 참변”에서 교살당하였다.

고려인 민족문화 자치회에서는 최재형이 일본헌병대에 의해 학살당하기 전까지 거처하던 집을 사서 원형복구사업을 펼치고 있었다. 하기에 우리 답사팀은 반일독립투사들의 숨결이 스며있는 최재형저택에서 연해주 항일운동에 관한 옛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민족문화 자치회 교육센터 조엘레나 부장이 최재형의 저택에서 당년의 연해주 항일민족독립운동에 대해 들려주고 있다.

답사팀은 또 순이푼강류역에 세워진 리상설 유허비를 답사하였다. 리상설은 교육구국의 리념을 해외에서 실현하기 위해 1906년 중국 룡정에다 연변의 첫 근대교육시설인 “서전서숙”을 창설하였고 그 이듬해 1907년 7월 광무황제의 밀지를 받고 리위종을 대동하여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가 조국독립을 주장하였다.

연해주로 돌아온 그는 “성명회”와 “권업회”를 창설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1917년 7월에 우스리스크에서 순직하였다. 그의 유언에 따라 유해를 순이푼강에 뿌렸던 것이다.

지금 유해는 없고 기념비만 있는 유허비앞에서  답사팀은 “항전별곡”의 비장한 선률을 웅글지게 부르며 투사의 령혼을 위로하였다.

장고봉전적지에 올라

귀가길에 오른 답사팀은 마지막 일정으로 크라스키노의 가장 높은 산 장고봉 전적지(로씨야측)에 톺아올랐다. 그 곳은 1937년 7월 말, 쏘련군이 극동지역으로부터 중앙아시아 나아가 유럽까지 삼키려는 야심으로 장고봉사건을 일으킨 일제침략자를 여지없이 까부시고 승리의 첩보를 올린 곳이다.

어쩌면 이곳은 전세계 반파쑈전쟁의 최후 승리를 취득하는 희망의 첫 승전고를 울린 곳이기도 하였다. 답사팀은 그 령마루에 올라 “우라! ”를 목청껏 웨쳤다. 3박 4일 답사길의 원만한 성공을 축하하며 또한 중국조선족항일가요 합창단의 연해주 항일유적지 답사를 위해 물심량면의 지지와 성원을 보내준 연변대신국제려행사에 고마움을 표하며 “우라!”를 웨치고 또 웨쳤다.

연변대신국제려행사에서는 이번 로씨야 연해주 항일유적지 답사길에서 새로운 인문가치를 발굴하고 정기적인 관광코스를 개발하여 정식 운행에 들어섰다.

길림신문 김청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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