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5일, 대련시 금주조선족로인협회에서는 항일렬사가족이며 박씨 일가의 백년이민사 《두만강변에 서린 애환》을 쓴 박남권선생을 모시고 밀양 박씨 일가의 백년 중국이민사와 가족들의 항일투쟁 이야기를 청취했다.
1909년 박남권선생의 증조할아버지 박의도 세대에 살 길을 찾아 조선 함경북도로부터 중국 훈춘 경신으로 이주했다.
박남권의 증조할아버지 박의도와 부인 고씨는 5남 1녀를 두었는데 박남권선생의 할아버지 박창일은 박의도와 부인 고씨의 둘째 아들이였다. 박창일과 부인 박송녀는 4남 2녀가 있었는데 맏아들 박지영, 큰딸 귀인, 둘째아들 박근영, 셋째 아들 박상영, 넷째 박우영, 막내딸 분옥이 였다. 셋째 부처간은 병으로 일찍 사망하고 넷째 아들 박우영이 박남권선생의 부친이다.
박창일의 맏아들 박지영은 중국에 까지 쳐들어온 왜놈들의 만행을 보고 항일투쟁에 참가했다. 키골이 장대하고 지용이 무쌍한 박지영은 항일유격대 경신중대 중대장으로 임명되였고 그후 중국공산당 훈춘현위 군사부장을 맡았으며 경신일대의 친일주구, 토비, 지주 등을 처단하는 활동을 했다.
어느 하루 정보수집하러 갔다가 왜놈 앞잡이의 밀고로 옥천동 경찰서에 갖힌 박지영은 십여명 항일투사들이 감금된 것을 알게 되였다. 박지영은 투옥된 지 보름되는 1932년 3월 3일 탈옥하기로 김양엽과 합의했다.
항일용사들은 박지영의 지휘하에 무기창고에 들어가 손에 잡히는 총가목으로 놈들의 머리를 치고 가시철망을 뚫고 수림속으로 사라졌다. 옥천동탈옥투쟁에서 항일용사들은 1명이 희생되고 1명이 체포되였으며 2명은 족쇠에 묶이여 탈옥에 참가하지 못했다.
탈옥에 성공한 7명 용사들은 금당촌의 3명 당원들과 함께 쏘련 경내에 들어갔다. 박지영은 중국, 쏘련, 조선 3개 나라를 넘나들며 일제와의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쏘련홍군 후근부대에서 반파쑈 투쟁을 하다 43세 나이에 목숨을 바쳤다.
박남권의 둘째 백부 박근영은 항일전사가 되였는데 1933년 10월 7일 훈춘 유격대가 대황구에 이를었다. 그런데 변절자의 밀고로 유격대는 대황구에서 일본 수비대와 밀강무장자위단 결사 ‘토벌대’에 의해 포위되였다.
반포위전에서 박근영은 적탄 네발을 맞고도 적들의 총창을 빼앗아 들고 놈들과 싸웠다. 이 치렬한 전투에서 용사들은 끝내 포위망을 뚫고 나갔다. 이 사건이 바로 유명한‘대황구13렬사’사건이다. 1962년 훈춘현인민정부는 원 묘지자리에다 ‘대황구13렬사기념비’를 세웠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박근영은 1935년 가을 홀몸으로 비밀사업 임무를 맡고 외출했다가 왜놈 앞잡이들에게 체포당해 하다문 일본경찰서에 호송되였다. 갖은 고문에도 아무런 선색을 얻어내지 못한 왜놈들은 무덤을 파놓고 박근영을 사형장으로 끌고 갔다.
왜놈들이 박근영의 포승을 풀려고 할 찰나에 박근영은 힘을 콱 주어 두팔에 매여있던 포승끈을 한꺼번에 끊어버리고 산등성이를 타고 갈지자형으로 냅다 뛰였다. 눈 먼 총알이 박근영의 등뒤에서 우박처럼 떨어졌지만 바근영은 또한번 죽음에서 벗어나 중쏘변경 쪽으로 줄달음쳐 갔다. 쏘련으로 건너 간 박근영은 다시 중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78세를 일기로 1984년 11월 7일에 우즈베끼스딴 쁘라우다에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박남권의 큰 집 백부 박관영도 1941년 일본놈들에게 처형당했다.
박남권의 할아버지 박창일은 1944년 1월 왜놈들의 고문과 혹형에 견뎌내지 못하고 59세에 세상을 떠나갔다. 할머니 박송녀는 항일유격근거지에서 후근사업을 하다 1934년 5월에 희생되였다.
박남권은 오랜 시간의 끈질긴 자료수집을 거쳐 2년 시간을 들여 2013년 4월 박씨 일가의 백년이민사를 펴냈다.
박남권이 쓴 《두만강변에 서린 애환》은 박씨 가족의 출생년도, 거주지, 학력, 직업, 자녀상황, 사망년도, 묘지위치 등을 밝혔고 1500여명에 달하는 ‘밀양 박씨 만령공파 – 지신후손 중국편’족보를 펴냈다.
길림신문 / 최금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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