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근 (1875년-1907년), 녀, 자는 경웅이고 호는 감호녀협이며 절강 소흥사람이다. 우리 나라 근대 자산계급 혁명가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악비,문천상,화목란, 진량옥 등 민족영웅과 녀중호걸을 숭배하였고 봉건 례의와 법도를 멸시하였으며 남녀평등을 제창하였고 강렬한 애국사상으로 충만되고 혁명열정으로 불타는 많은 시편을 남겼다.
1904년 여름, 추근은 봉건가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비로 일본에 류학가서 구국구민의 진리를 모색하였다. 그녀는 일본류학 학생의 혁명활동에 적극 참가하였으며 그녀가 창작한 <자고천>은 나라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 바치겠다는 내심을 토로하였다.
1905년 추근은 귀국하여 광복회에 가입하였다. 같은 해 7월 그녀는 재차 일본 도꾜로 가 동맹회에 가입하여 평의부 평의원과 절강성 책임자로 추천되였다. 이듬해 귀국한 그녀는 상해에서 중국공학 창립에 참여하였다. 1907년 1월 그녀는 우리 나라 첫번째 녀성간행물인 <<중국녀보>>를 창간하고 녀성들에게 해방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할 것을 호소하였다. 1907년 2월 절강에 돌아온 그녀는 소흥의 대통학당의 관리를 이어받고 서석린과 함께 안휘,절강 두곳에서 무장봉기를 위한 준비를 진행하였다.
무장봉기의 력량을 효과적으로 조직하기 위해 추근은 광복회조직을 정돈하고 회당세력과 련락하여 ‘광복군’을 조직하였다. 그녀는 광복회 회원을 16개 급으로 나누고 ‘광복군 군제’를 비밀리에 작성하고 광복군 전군을 8개 군으로 나누었으며 ‘한족 광복,국권 회복’ 여덟 글자를 각기 각 군의 표지로 삼았다.
그녀는 서석린과 련계하여 ‘안경을 중점으로 하고 소흥을 중추로 하는’ 안휘, 절강 봉기계획을 제정하였다. 대통학당은 당시 절강혁명의 대본영으로 되였다. 1907년 7월 6일 안경봉기가 실패하고 7월 13일 청나라군이 대통학당을 포위하였으며 추근은 불행하게 체포되였다. 그녀는 굴하지 않았고 자기의 큰 뜻을 이루지 못해 슬퍼하고 한스러워하였다. 7월 15일, 추근은 <가을바람 가을비에 수심만 깊어지네!>란 절명시를 남기고 소흥 헌정구에서 처형당했다.
신해혁명 후 그녀가 희생된 곳에 추근렬사기념비를 세우고 렬사의 령구를 항주 서호 서령교 부근에 묻었다. 20세기 50년대 항주 계롱산 신해혁명렬사릉원에 이장하고 현재 서령교 부근에는 추근 렬사의 전신조각상이 세워져있으며 세인의 추모를 받고 있다. 1912년 12월 손중산은 항주에 가 제사를 지내주고 ‘녀성영웅’이란 만장을 썼고 1939년 주은래는 절강을 순시하고 소흥에서 감호녀협의 유풍을 잊지 말라는 제사를 쓰고 세인들에게 추근을 따라배울 것을 호소하였다. 신화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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