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서태후의 도자기: ‘대아재’ 자기 감상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4월19일 09시50분    조회:1063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민망 한국어판 4월 18일] ‘대아재(大雅齋)’ 자기는 자희태후(慈禧太后, 서태후)가 특별히 자신을 위해 디자인하고 만든 어용(御用) 자기다. ‘대아재’ 자기는 오랫동안 궁궐 깊숙한 곳에 소장되어 있었던 관계로 일반인들은 그 실제 모습을 보기 어려웠다.

농염하고 화려한 ‘대아재’ 자기는 청(淸)나라 말기 궁전의 풍습을 대표했고, 자희 개인의 심미 추구와 선호도를 나타냈다. 저물어가는 청나라 말기 도자기 제조업에 있어서 자희태후의 특별한 사치는 독특한 정취를 더했다. ‘대아재’ 자기는 청나라 말기 가장 유명한 어요(御窯) 자기로 불리고 있다.

♦ 자희에 관하여

‘대아재’ 자기를 언급하면 먼저 자희를 이해해야 한다.

색을 입힌 후 확대한 자희태후(慈禧太后, 서태후)의 사진 [베이징고궁박물원(北京故宮博物院) 소장]

자희는 엽혁나랍씨(葉赫那拉氏), 만족(滿族)으로 청 도광(道光) 15년(1835년)에 태어났다. 자희의 조부인 경서(景瑞), 부친인 혜정(惠征)은 모두 5품(品) 관원이었다. 청 함풍제(咸豐帝) 혁저(奕詝)가 등극한 후 함풍 원년(1851년) 2월 1차 팔기 수녀 선발에서 당시 16살의 엽혁나랍씨가 선발되었다. 함풍 6년(1865년) 3월에 재순(載淳)을 낳은 후 의귀비(懿貴妃)로 책봉되었다. 함풍제가 죽은 후 재순이 즉위하면서 의귀비는 황태후로 봉해졌다. 동치(同治) 원년(1861년) 4월 자희황태후로 휘호가 봉해졌다. 광서제(光緒帝)가 죽은 후 자희는 부의를 사황제(嗣皇帝)로 세우고, 자신은 태황태후로 봉하기로 했지만 다음 날 의란전(儀鸞殿)에서 사망했다. 향년 74세. 청 왕조 200여 년의 역사에서 자희는 함풍, 동치, 광서 세 왕조를 거치면서 중국의 반세기에 가까운 역사를 통치했다. 자희는 중국 근대사에서 한때 권세를 떨치며 심오한 영향을 끼친 중요한 역사 인물이다.

자희는 최고 통치권력을 가졌었지만 동시에 여인이기도 했다. 그녀의 일생 중 권력을 독차지하고 독재정치를 한 것을 제외하고 여성으로서의 많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녀는 꽃을 좋아했고, 경극(京劇)과 경치를 구경하는 것을 즐겼으며, 화려한 의상과 장신구를 좋아했고 정교한 도자기도 좋아했다.

♦ ‘대아재’의 유래

‘대아재(大雅齋)’ 분채하당노사문항(粉彩荷塘鷺鷥紋缸)

‘대아재’는 자희가 직접 지은 것으로 그녀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던 곳의 건물 이름이다.

학자의 고증에 따르면 ‘대아재’는 원명원(圓明園) 내 ‘구주청안(九州淸晏)’ 중의 ‘천지일가춘(天地一家春)’에 위치해 있었다. ‘대아재’ 자기는 이곳의 건축물을 위해 특별히 구운 자희 전용 자기다. 불행히도 제1차 아편전쟁 중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원명원을 불질렀을 때 ‘대아재’는 ‘천지일가춘’과 함께 전소돼 사라지고 말았다.

♦ 예술 풍격

‘대아재(大雅齋)’ 란지분채화조도반(藍地粉彩花鳥圖盤•1쌍)

‘대아재’ 자기는 청나라 말기에 구워 만들어졌다. 격동하는 사회 환경에서 자희는 자기의 혁신에 정력을 투자할 많은 시간을 낼 겨를이 없었다. 여러 가지 요인의 제한으로 ‘대아재’ 자기는 전 왕조의 양식과 예술풍격을 답습해 궁정의 화려한 미적 감각을 구현했다. 단지 양식에서 수려하고 정교한 것에 더 치우쳐 여성의 독특한 심미적 특징을 지녔다. 이런 특징의 형성은 자희태후와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어요 자기 자체는 군주의 심미관을 사물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시기의 다른 관요(官窯)나 민요(民窯) 기물들과 비교할 때 ‘대아재’는 광서 시대 어용 가마 자기의 최고 수준을 그대로 나타냈다. ‘대아재’ 자기의 예술 풍격은 유색이 신선하고, 문양이 정교하며, 자기의 형태가 다양하고, 낙관을 중요하게 생각한 것으로 귀납할 수 있다.

♦ 유색

‘대아재(大雅齋)’ 송석녹지분채선지수도도대함(松石綠地粉彩仙芝壽桃圖大缸•1쌍)

‘대아재’ 자기의 유색은 강렬한 정서화와 윤곽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색채의 대비 변화를 활용해 대자연 속 고유 물상의 미적 감각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대아재’ 자기는 같은 기물에 자주 네다섯 가지 색깔의 배합이 등장한다. 하지만 색과 색의 조화로운 배합은 독특한 운치를 자아낸다. 때로 상큼하고 우아한 문인의 기품이 느껴지기도 하고, 때로는 숙연하고 진중한 귀족의 기운이 느껴지기도 한다. ‘대아재’ 자기의 예술적인 운치다.

♦ 도안

‘대아재(大雅齋)’ 송석녹지분채등나화조도타원반(松石綠地粉彩藤蘿花鳥圖橢圓盤)

‘대아재’ 자기의 도안은 전통 관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재에서 벗어나 다양한 종류의 꽃, 새, 동물을 그려 넣어 아름답고 우아하면서도 신선한 경지가 느껴진다. 묘사해 낸 화려한 꽃들과 새가 울고 나비가 춤추는 자기의 화조 세계는 자연에 대한 자희태후의 아름다운 동경을 표현했다.

♦ 형태

‘대아재(大雅齋)’ 송석녹지분채등나화조도사두(松石綠地粉彩藤蘿花鳥圖渣斗)

‘대아재’ 자기는 형태적인 면에서 큰 그릇들을 많이 선택하지 않았다. 대부분이 수려하고 정교한 그릇들로 자희태후의 여성 전용 상징을 드러냈다. 요약하면 주로 다음 두 가지의 특징이 있다.

1. 종류가 풍부하고, 대부분이 일상 생활용 자기다.

2. 꽃을 기르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화분의 형태가 다양하다.

♦ 낙관

‘대아재(大雅齋)’ 황지묵채화조도완(黃地墨彩花鳥圖碗)

‘대아재’ 자기 입구의 연결되는 곳에 ‘대아재’ 세 글자로 가로로 찍혀 있고, 오른쪽에는 붉은색 도장으로 ‘천지일가춘’이 쓰여져 있다.

‘대아재’ 자기 대부분 그릇 바닥에는 붉은색으로 쓴 ‘영경장춘(永慶長春)’ 네 글자의 해서체 낙관이 찍혀 있다. 하지만 ‘영경장춘’ 낙관을 쓴 모든 자기에 ‘대아재’나 ‘천지일가춘’의 낙관이 찍힌 것은 아니다. ‘영경장춘’ 네 글자는 길언(吉言) 낙관으로 자희태우가 자신의 영원히 청춘을 간직하길 바라는 아름다운 소망을 담고 있다.

‘대아재(大雅齋)’ 녹지묵채화조문봉합(綠地墨彩花鳥紋捧盒)

‘대아재’ 자기는 당명관[堂名款•만들어진 자기에 자신의 당명(堂名), 재명(齋名) 혹은 연호를 새기거나 쓰는 것]이다. 이는 청대 여성 가운데 자희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동치 13년(1874년) 후 국가의 권력이 그녀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대아재’는 당호(堂號)인 동시에 자희 개인의 심미안과 취미의 상징이기도 했다. 조정의 일을 처리하고 남는 시간에 그녀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대아재’는 그녀의 이러한 ‘예술’ 추구에 꼭 들어맞았다. (번역: 이인숙)

원문 출처: 인민망(人民網)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89
  •     최근 성도문화재고고학연구원이 국가문화재국의 비준을 거쳐 수년째 고고학 발굴작업을 진행하여 풍성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선포하였다. 2015년 3월부터 현재로 고고학 실무팀은 신석기 말기의 주거 유적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6000여개 고분 발굴작업을 완성하였다.        사진 클릭...
  • 2020-05-18
  • 그러면 무정이 홍군특과학교에 앞서 홍군학교 포병과 주임이였다는 자료적 근거는 어디에 있을가? 필자는 그 자료적 근거를 그 시절 홍군학교 사무장을 맡은 조선인 최정무의 회고록에서 먼저 찾아보았다. 본문은 이미 무정의 상해조선인지부 시절 최정무와의 관계에서 최정무를 대체로 소개하였기에 같은 내용을 중복하지...
  • 2020-05-15
  • 양림의 발자취를 추적하면 홍1군단 참모장 등으로 홍군의 고위장령으로 지내던 양림은 홍군대학 군사총교관으로 전근하면서 홍군대오에서의 급별이 뚝 떨어지며 다시 휘황기를 맞지 못한다. 준의회의 전까지는 장정길 중앙군위 간부퇀에 편입되나 간부퇀에서의 구체적 직무가 보이지 않는다. 준의회의 직후에야 간부퇀 참모...
  • 2020-05-09
  • 국가문물국에서 입수한 데 의하면 2019년도 전국 10대 고고학 새 발견이 5일 발표되였다고 한다. 신종코로나페염 전염병상황의 영향으로 전국 10대 고고학 새 발견 최종평의회는 최초로 인터넷회의의 형식으로 개최되였으며 뉴미디어클라이언트에서 생방송되였다. 최종 입선한 10대 항목은 섬서성 정개흘동굴(郑疥疙洞) 구...
  • 2020-05-07
  •   기록편 《우리는 탄탄대로에서》 (15) 제15집 우리는 모두 꿈을 쫓는 사람들   력사의 긴 흐름 속에는 늘 별처럼 빛나는 장면들이 있다. 인민대회당은 일찍 공화국 력사상 그 무수했던 중요한 시각들을 맞이했다. 2017년 10월, 중국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가 개막되면서 북경은 전세계의 눈길을 끌었다....
  • 2020-01-05
  •   기록편 《우리는 탄탄대로에서》(17) 제17집 개혁개방의 새 장을 열어나가다 18기 3차 전원회의 〈개혁을 전면적으로 심화할 데 관한 약간의 중대문제에 관한 중공중앙의 결정〉통과, 개혁을 전면적으로 심화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놓아 중국의 개혁개방을 새 천지에로 이끌었다 심수의 련화산공원 산정상 광장에는...
  • 2019-12-30
  • 기록편 《우리는 탄탄대로에서16》 쇠를 벼리려면 메가 단단해야 부패관원을 단호히 조사 처리하는 것은 부패를 단호히 징벌하려는 당중앙의 선명한 태도와 확고한 결심을 보여주었다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는 개혁개방이래 당의 모든 리론과 실천의 주제이며 당과 인민이 천신만고 끝에 거대한 대가를 치르면서 이룩한...
  • 2019-12-30
  • 기록편 《우리는 탄탄대로에서》 (14) 제14집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2005년 12월 29일, 〈중화인민공화국 농업세 조례〉 페지, 농업세 취소 북경, 전국농업전시관 1층 4호 전시청에는 한 평범한 농민이 주조한 청동대정(青铜大鼎)―지세고별정(告别田赋鼎)이 진렬되여있다. 2006년 1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농업세 조...
  • 2019-12-10
  • 기록편 《우리는 탄탄대로에서》(13) 제13집 《신주의 비약》 유인우주비행의 성공은 중화민족의 지혜롭고 혁신정신과 창조력 보여주어 2008 년 8 월 8 일 , 제 29 회 올림픽경기대회가 국가체육장 ‘새둥지’에서 개막되여 전 세계의 눈길을 끌었다. 지금으로부터 111년전인 1908 년에 《천진청년》 잡지는 전국...
  • 2019-12-05
  • 기록편 《우리는 탄탄대로에서》(12) 제12집 세계에 융합되다 --2001년 11월 10일, 중국 세계무역기구 가입, 회원국들과 동등한 대우 권리 향수   중국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한 후 각항 승낙을 전면적으로 리행 예전의 양산항은 모든 게 ‘제로'였다. 그렇게 발걸음을 떼기 시작해 황페하기만 하던 섬에...
  • 2019-12-05
  • 기록편 《우리는 탄탄대로에서》(11) 제11집 통일대업 중영 〈향항문제에 관한 련합성명〉 체결, 중국정부 1997년 7월 1일 향항에 대한 주권 행사 회복 확정 우리는 중화민족의 백년치욕의 력사가 어느 때로부터 시작되였는가를 잊어서는 안된다. 1840년 6월, 영국은 중국침략전쟁을 발동하였다. 8월 29일, 청정부와 ...
  • 2019-12-04
  • 기록편 《우리는 탄탄대로에서》 제10집 첩첩 난관을 돌파 ―1990년 4월 18일에 정식 가동된 포동 개발개방, 국가 중대 전략으로 1991년 1월 1일 《인민일보》의 신년사에 이런 한 단락이 있다. “우리는 오늘날 여직 겪어보지 못한 엄중한 문제에 봉착했다. 가장 뚜렷한 문제는 경제생활중에 통화 팽창, 물가 인상 폭...
  • 2019-12-01
  • 기록편 《우리는 탄탄대로에서》 제9집 개혁의 봄물결 1978년 12월의 한 겨울밤, 봉양(凤阳)현 소강(小岗)촌 18가구의 농민들은 이런 계약에 서명했다. “우리는 경작지를 가구마다에 나누어주는데 호주가 서명하고 도장을 찍는다. 앞으로 알뜰히 경작하면 가구마다 전년의 공량(公粮) 상납 임무를 완성하고 더는 나라...
  • 2019-11-26
  • 기록편 《우리는 탄탄대로에서》 제8집 대전환 1976년은 중국의 룡띠해이며 또한 중국사람들의 기억에 깊이 남을 한해였다. 이해 10월 6일 당중앙은 과단한 조치로 ‘4인방’을 일거에 분쇄하고 10년 동란을 결속하여 온 국민이 환호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통쾌하게 하였다. 〈축배가〉 작사 한위는 천진가무극원...
  • 2019-11-25
  • 기록편 《우리는 탄탄대로에서》 제7집 간난신고의 탐색 1955년 11월 1일, 모택동은 북경을 떠나 여러 지역에 내려가 고찰을 했다. 천진, 덕주, 제남 등 16개 도시를 거치며 모택동은 가는 곳마다에서 현지 주요 책임자들과 담화를 하고 생산건설 정황을 조사했다. 외지 고찰을 끝내고 북경에 돌아온 모택동은 선...
  • 2019-11-25
  • 기록편 《우리는 탄탄대로에서》 제6집 격정으로 불타오르는 세월 인민대회당은 천안문광장의 지표 건축물로 1959년 새 중국 창립 10돐 전야에 준공되였다. 60년이 지났지만 이 건축물은 여전히 정중하고 우아하며 주위의 건축과 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하여 천안문광장과 혼연일체의 드넓은 기운을 구성하고 있다. 1958 년...
  • 2019-11-22
  • 기록편 《우리는 탄탄대로에서》 제5집 원대한 포부 핵공업 북경 지질연구원에는 개업지석(开业之石)이라는 우라늄광석 표본이 소장되여있다. 우라늄은 핵분렬 반응을 실현하는 기본 물질이다. 1954년 가을, 중국 지질부는 광서에서 우라늄광석을 발견했다. 지질대원들이 채집한 우라늄광석은 즉시 중남해 모택동의 사무책...
  • 2019-11-20
  • 기록편 《우리는 탄탄대로에서》(4) 제4집 웅대한 계획을 세우다 기차가 무한장강대교 철도다리를 지나고 있다. 성황을 이룬 무한장강대교 통차식 1956년 5월 31일, 모택동은 선상에서 무한장강대교 공정건설에 관한 회보를 청취하였다. 이는 새 중국 창립 후 장강에 건설하는 첫 도로철도 량용 대교이다. 그날은 날씨가 화...
  • 2019-11-19
  • 기록편 《우리는 탄탄대로에서》 제3집 대업 위해 기초 다지다 1950년 6월 6일부터 9일까지 당중앙 7기 3차 전원회의가 북경에서 소집됐다. 이번 회의는 경제문제를 중심의제로 했다. 이는 전 당의 사업중심을 혁명전쟁에서 경제건설에로 전환했음을 표지한다. 그 해 새 중국의 대량의 군인들이 군복을 벗고 경제건설에 뛰...
  • 2019-11-19
  • 기록편[우리는 탄탄대로에서-2]제2회 일월을 휘여잡아 새 천지 개척 상해 등 도시들에서는 ‘은화전쟁', ‘쌀솜전쟁'을 벌려 불법 투기 자본을 타격하고 관료자본을 몰수했으며 중국에서의 외국의 경제특권을 페지했다. 토지개혁을 진행하고 봉건토지소유제를 페지하면서 농민들이 처음으로 이 땅의...
  • 2019-11-15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