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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제가 채소바구니를 짊어지고 날마다 홍구(虹口·훙커우) 방면으로 다니는 이유가 있습니다. 큰 뜻을 품고 천신만고 끝에 상해(上海·상하이)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입니다.…아무리 생각해도 죽을 자리를 구할 수 없으니 선생님께서….”
1932년 4월 1일 상하이 임시정부를 이끌던 백범 김구 선생(1876~1949)에게 한 청년이 찾아왔다. 충남 예산에 아내와 세 자녀(1녀2남)를 남겨둔채 혈혈단신 1931년 5월 상하이로 건너온 24살 청년 윤봉길(1908~1932)이었다. 청년은 피혁공장과 세탁소 등에서 일하다가 훙커우 시장에서 채소장사를 하고 있었다. 백범을 찾아온 용건은 “(이봉창 의사처럼) 나를 독립운동 자원으로 써달라”는 것이었다. 김구 선생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청년의 이모저모를 살펴본 끝에 ‘의로운 대장부’라는 결론을 내렸다.
윤봉길 의사와 백범 김구 선생이 거사직전에 맞바꾸었던 회중 시계. 왼쪽 사진은 윤봉길 의사가 “저는 새 시계가 필요없다”면서 백범에게 건네준 시계(등록문화재 제441호)이다. 오른쪽 시계는 윤봉길 의사가 신상시계를 건네주고 백범으로부터 받은 낡은 시계(보물 제568-2호)이다.“그래요. 뜻을 품으면 마침내 일을 이룬다(有志者 事竟成)는 말이 있지…. 사실 내가 요사이 연구하는 바가 있는데 마땅히 사람을 구하지 못해 번민하던 참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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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자리를 구하러 왔습니다.’
당시 상하이 임시정부 국무회의가 만든 단체가 있었다. ‘현단계에서 대대적인 군사작전은 어렵지만 테러공작, 즉 요인을 암살·파괴하는 공작을 펴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는 백범 김구의 제안에 따라 결성된 한인애국단이었다.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공작에 사용하는 자금과 인물의 출처 등 전권을 백범에게 위임했다.
한인애국단의 첫번째 임무는 이봉창 의사의 ‘일왕 저격 미수 사건’(1932년 1월8일)이었다. 물론 이 사건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일본의 신성불가침인 일왕의 저격을 꾀함으로써 세계만방에 한인이 일본에 결코 동화되지 않았음을 과시한 사건’으로 평가됐다. 중국 국민당 기관지 ‘국민일보’의 “한인 이봉창이 일왕을 저격했지만 ‘불행히 명중시키지 못했다(不幸不中)’”는 기사가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물통 및 도시락 폭탄을 제조한 까닭
그런데 백범이 윤봉길에게 말하며 떠올린 ‘요사이 연구하는 바가 있는 계획’이 무엇이었을까.
“왜놈들이 (1932년 1월 일으킨 상하이 사변에서) 승전했다는 위세를 업고 4월29일에 홍구공원에서 이른바 일왕의 천장절(생일) 경축식을 열 모양이오. 성대하게 거행해거사에 앞서 한인애국단 선서식을 치른 윤봉길 의사서 군사적 위세를 크게 과시할 것 같은데 윤군이 한번 일생의 대목적을 달성해봄이 어떻소?”(<백범일지>)
윤봉길의 답변은 시원시원했다.
“예. 이제 가슴에 한 점 번민이 없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때마침 일본 영사관은 ‘일일신문’을 통해 상하이 주재 일본인들에게 “식장에 참석하는 자는 물병 하나와 도시락, 일본 국기 하나씩 들고 오라”고 통보했다. 백범은 “이거야” 하고 무릎을 쳤다. 백범은 용의주도했다. 즉시 중국군 장교였던 김홍일(중국명 왕슝·王雄)과 상하이 병공창장인 송식표를 찾았다.
“어깨에 매는 물통과 도시락을 사서 보낼테니 3일 안에 그 속에 폭탄을 장치해서 보내주시오.”
폭탄제조를 맡은 중국인 기사 왕바이슈(王伯修) 등은 뇌관 20개를 실험해서 20개 모두 폭발성공을 마친 뒤에야 물통 및 도시락에 고성능 폭탄을 장착했다. 그것도 20개 모두 무료로 주었다. 이봉창 의사에게 건네주었던 폭탄의 능력이 미약해서 일왕을 폭살시키지 못했다는 미안함 때문이었다.
■최후의 조찬, 쇠고기 국밥
거사 사흘 전인 4월26일 윤봉길 의사는 한인 거류민단 사무실에서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식을 거행했다.
한인애국단 선서문.선서를 마친 윤 의사는 태극기 앞에서 임시정부 재무장인 김구 선생과 기념촬영을 했다. 윤 의사는 백범이 건네준 거사비용으로 거사장에 입고 들어갈 양복 한벌과 시계 등을 구입했다. 윤봉길은 날마다 훙커우 공원을 답사했다. 또 주된 타깃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상하이 주둔군사령관(대장)을 비롯한 폭살 목표 요인들의 사진을 구하고 일장기를 마련했다.
거사당일인 29일 새벽 윤 의사는 백범과 함께 교포 김해산의 집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백범은 김해산에게 미리 “쇠고기 국밥 좀 마련해달라”고 부탁해놓았다. 윤 의사의 마지막 식사 모습을 지켜보는 백범의 가슴은 찢어졌다. 당시 57살인 백범에게 이제 만 24살에 불과한 청년 윤봉길은 영락없는 아들뻘이었다.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어른들 때문에 이 앞길 창창한 청년을 사지로 보내야 하다니….
■맞바꾼 회중시계와 탈탈 털어준 돈
아침 7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자 윤봉길 의사는 품에 지니고 있던 ‘회중(懷中·품안에 넣는)시계를 꺼냈다.
“선생님, 이 시계, 선생님 것과 바꾸시죠.”
윤 의사의 시계는 백범이 건네준 거사자금 중 6원을 주고 산 신제품이었다.
“보아하니 선생님의 시계는 낡았네요. 저에게는 1시간 밖에 소용없습니다.”
백범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렇게 백범의 시계와 윤봉길 의사의 시계가 맞교환됐다.
이 뿐이 아니었다. 윤봉길 의사는 훙커우로 향하는 자동차를 타다말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선생님, 자동차 요금 주고도 남을 것 같습니다. 제겐 필요없는 돈이니 선생님이 갖고 계십시요.”
“무슨 소리? 그래도 돈은 좀 갖고 있어야지.”
1932년 4월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천장절 기념식. 일본 군대 1만명 등 모두 3만명에 이르는 일본인들이 대대적인 환영식을 열었다. 윤봉길 의사가 거사를 일으키기 직전의 단상 사진이다. 시라카와 요시노리 일본 상하이 주둔군사령관은 오른쪽에서 두번째에 서 있다.“아닙니다. 전 필요 없습니다.”
백범이 돈을 돌려줄 사이도 없이 자동차가 미끄러져 갔다. 백범은 허공으로 팔을 내저으며 몇 걸음 자동차 뒤를 쫓아갔다.
천장절 행사는 상상 이상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기갑 및 보병 기마부대가 상하이의 온 시가를 누볐고, 행사장을 에워쌌다. 공중에서는 수십대의 비행기가 무력시위를 벌였다. 윤봉길 의사는 어깨에 물통을 메고 양손에 도시락과 일장기를 들고 입장해서 일반관람객 속에 자리를 잡았다.
식장은 발디딜 틈도 없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일본의 공·상업 인사와 상하이 거주 일본인 남녀노소, 그리고 무력시위에 나선 일본군 1만명까지 총 3만명의 일본인이 자리를 메웠다.(‘시보’ ‘시대신보’ 4월30일자)
오전 9시가 되자 삼엄한 경비 속에 상하이 주둔군 사령관인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을 필두로 내·외빈이 입장했다. 단상에는 시라카와와,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기치사부로(野村吉三郞)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겐키치(植田謙吉) 윤봉길 의사가 지니고 있던 물통 폭탄과 도시락 폭탄. 윤의사는 투척한 것은 물통 폭탄이었다.중장과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 쿠라마쓰(村井倉松), 일본공사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와 일본 거류민 단장 가와바타 사다지(河端貞次), 거류민단 서기장 도모노 모리(友野盛) 등이 차례로 자리를 잡았다.
2시간 30분에 걸친 천장절 공식 행사와 열병식이 끝나자 일본의 주요기관 인사와 일본교민들만이 참여하는 관민결합대회가 열렸다. 이때가 11시 30분이었다. 윤봉길 의사가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바다가 된 사령대
일본 교민들이 부르던 기미가요(君が代)의 마지막 한 절이 끝나고 시간이 11시45~50분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윤봉길 의사가 일어나 사령대 쪽으로 물통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시게미쓰와 노무라 우측, 우에다 좌측에 떨어졌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자 시라카와와 우에다가 ‘폭탄이다’라 외치며 10여 발자국 물러섰다. 잠시 뒤 폭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신보’ ‘시보’ 4월30일자)
“가와바타는 내장이 모두 쏟아진채 경축단상에 꿇어앉아 ‘사람살리라’고 소리 질렀다. 시라카와는 왼뺨에 파편이 박혔다. 시게마쓰는 오른쪽 다리에 부상을 입고 졸도했고, 노무라는 왼쪽 눈알이 튀어나왔다. 사령대가 질퍽하도록 피로 물들었다.”(‘신보’ 4월30일)
폭탄이 터진 사령대 바닥판은 산산조각났다.
1932년 5월1일 일본 ‘오사카 아사히 신문’ 호외 1면에 실린 윤봉길 의사 채포장면. 현장에서 구타당해서 파투성이가 되었다는 보도가 많았지만 이 사진에서 보이는 윤의사의 얼굴과 옷은 깨끗하다. 이 때문에 사진의 주인공이 윤의사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보통의 수류탄이 아니다, 알루미늄제 군용보온병으로 위장된 특수폭탄이었다. 보온병 안에는 물대신 강력한 화약이 채워져 엄청난 위력을 보였다. 사령대 왼쪽 앞에는 직경이 1m 가까운 구덩이가 패였다. 화약을 담은 알루미늄통은 폭발과 함께 엄청난 파편이 되어 가공할 살상력을 보여주었다. 두께 2촌, 넓이 9촌 정도인 사령대 바닥판은 산산조각 났다.”(‘시보’ 4월30일)
윤봉길 의사에게는 아직 던지지 못한 도시락 폭탄이 남아있었다. 중국신문들은 “도시락 폭탄은 길이 8인치, 폭 3인치, 깊이 2인차 정도였고 안에는 폭약이 가득차 있었다”고 전했다.
■무차별 구타당한 윤봉길 의사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일본인들에게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구타당했다.
“일본인들은 마구 그를 구타했다. 얼굴은 보기 흉할 정도로 피투성이가 됐고, 헌병대에서 그를 압송했다. …군중에게 얻어맞아 얼굴이 피투성이인 상태로….”(‘신보’ 4월30일)
‘대만보’는 서양인이 본 윤봉길 의사의 체포장면을 전하고 있다.
“범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땅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군중은 그 사람의 옷을 찢고 발로 차며 얼굴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일본 헌병대가 끌어냈을 때는 얼굴부터 허리까지 선혈이 낭자한 모습이었다. 옷소매 사이로 연신 피가 흘러나왔다. 비록 중상을 입었지만 얼굴에는 냉소가 흘러나왔다.”(‘대만보’ 4월30일)
영자지인 ‘상하이 타임즈’도 “쓰러진 윤의사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고 차에 짐짝처럼 실려갔다”(4월30일같은 날짜인 5월1일자 오사카아사히 신문의 2면에는 피를 흘리는 윤봉길 의사의 사진이 실려있다. 아마도 격화된 반일감정에 불을 붙이지 않을까 두려워 한 일본 신문이 깨끗하게 처리한 1면 사진을 실은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자)고 전했다.
각 신문들의 보도를 보면 윤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구타를 당한 뒤 헌병대로 끌려갔음을 알 수 있다.
■윤봉길 체포사진은 조작되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알려진 ‘오사카 아사히 신문(大阪朝日新聞)’의 5월1일자 호외 1면 사진은 무엇인가. 그 사진을 보면 연행되는 윤봉길 의사의 얼굴과 옷이 깨끗하다. 이 때문에 이 사진의 주인공이 윤봉길 의사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하지만 윤봉길 의사의 얼굴과 옷이 깨끗한 사진은 이것 뿐이다.
같은 날짜 ‘오사카아사히 신문’의 호외 2면에는 ‘머리카락이 서있고, 얼굴에 핏자국이 보일 정도의 성처가 난 윤봉길 의사의 사진’이 실려있다. 즉 1면에는 깨끗한 사진을, 2면엔 피투성이 사진을 실은 것이다. 또한 중국에서 발행되는 영자지인 ‘노스 차이나 데일리뉴스’ 4월 30일자 사진을 봐도 얼굴이 시커멓고. 코트에 진흙 같은 것이 묻은채 헌병에 의해 끌려가는 윤봉길 의사의 모습이 보인다. 세 커트의 사진을 보면 주인공은 동일인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오사카아사히 신문’의 호외 1면 사진만 깨끗할까. 혹시 ‘오사카아사히 신문’이 사진원판에 손을 댄 것이 아닐까 의심이 간다. 1면에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내면서 핏자국이 서명한 윤의사의 얼굴사진을 그냥 싣는다면 상하이 사변 이후 격화된 반일감정에 불을 붙이는 격이 되지 않을까 우려했다는 것이다.
윤봉길 의사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 구타를 당했지만 의연했다. 범인임을 숨기지도 않았고 혹독한 고민 속에서도 너무도 태연자약했다.
“체포 후에도 윤봉길은 전혀 긴장하거나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태연자약했다.”(‘대만보’ 4월30일)
“다급해진 일본헌병은 윤봉길의 입을 열게 하려고 온갖 가혹한 방법을 다 동원했다. 윤봉길은 만신창이가 됐다. 사람들은 밤낮으로 이어지는 고문에 윤봉길이 이미 사망한 것으로 믿고 있다.”(‘시사신보’ 5월3일)
■다리를 절단한 미래의 외무대신
그렇다면 사령대(식단) 위의 일본인들은 어떻게 됐을까.
5월7일 중간수사발표와 함께 용의자의 사진을 게재한 ‘오사카 아사히 신문’. 5월1일자 호외 1면에 썼던 사진을 얼굴만 따서 다시 게재했다. 만약 윤봉길 의사가 아니었다면 잘못된 사진을 중간수사발표 이후에도 재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다.일본인 거류민단장인 가와바타 사다지는 폭발 직후 내장에 쏟아져 나올 정도의 중상을 입었다. 급히 후송되었지만 다음날 새벽(4월30일) 사망했다. ��
“내장이 쏟아져 나온 가와바타는 새벽에 두 차례나 피를 토하고 거품을 뿜으며 기침을 그치지 않다가 결국 새벽 3시10분 사망했다.”(‘대만보’ 4월30일)
일본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온몸에 64곳이나 파편이 박힌채 혼수상태로 이송됐다. 결국 일주일만에 오른쪽 다리를 절단했다. 중국 신문들은 시게미쓰의 수술소식을 고소하다는 듯 선정적인 필치로 전했다.
“수술용 톱으로 다리를 잘라낼 때 선혈이 사방으로 튀는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잘라낸 다리 부위의 살과 근육이 한동안 꿈틀대는 모습도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시보’ ‘시사신보’ 5월6일)
한쪽 다리를 잃은 시게미쓰는 훗날 일본의 외무대신이 됐고 1945년 9월2일 미국의 미주리 함상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역할을 맡은 인물이었다.
폭발 직후 눈에 파편이 박힌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은 결국 실명하고 말았다. 제9사단장인 우에다 중장은 발가락 4개가 완전히 부러지는 상처를 입었고, 상하이 총영사인 무라이와 거류민단 서기장인 도모노도 경상을 입었다.
■술까지 마시다 사망한 사령관 시라카와
그러나 관심의 초점은 역시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이자 육군대장인 시라카와였다.
윤봉길 의사의 타격목표가 바로 시라카와였기 때문이었다. 시라카와는 1925년 대장으로 승진한 이후 육사교장, 시베리아 파견군 사령관, 육군성 차관, 관동군 사령관 등을 거쳐 육군 대신을 지낸 일본 육군의 대표적인 지휘관이었다. 1928년 퇴직했지만 1932년 1월 29일 상하이 사변이 발발하자 다시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으로 복직됐다. 시라카와는 한마디로 일본군의 상하이 침공을 상징하는 핵심인물이었다. 그랬으니 중국신문들도 시라카와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윤봉길 의사의 타깃이었던 시라카와 상하이 주둔군 사령관이 식장에 들어서는 모습. 윤의사의 폭탄을 맞은 지 27일만인 5월26일 사망했다. 일본은 일왕까지 나서 작위와 어주까지 내리고 욱일훈장까지 주는 등 쾌유를 빌었으나 결국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그가 죽자 중국인들은 축포를 터뜨리며 환호했다.사실 의거 직후 시라카와의 용태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왼쪽 뺨 7~8곳의 파편을 맞았고, 어깨와 복부 및 다리에 30여곳의 상처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출혈이 심하지 않아 4주 정도면 완치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됐다.(‘시보’ 5월1일) 병세가 나날이 호전되어 병상에서 술을 마실 정도였다.
‘시사신보’는 “평소 술을 좋아한 시라카와가 브랜디를 찾고 있으며 문병 온 지인들과도 환담을 나눴다”(5월4일)고 전했다. 그러나 5월21일이 되자 시라카와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다.
“그동안 별다른 증상을 보이지 않았던 시라카와가 내장출혈로 인한 혈변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시사신보’ 5월21일)
23일 새벽 시라카와가 완전히 의식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지자 일본 본토에서 일왕까지 나서 난리를 피웠다.
히로히토(裕仁) 일왕은 시라카와에게 ‘사주(賜酒·임금이 공을 세운 신하에게 내리는 술)’와 함께 욱일 대훈장과 남작의 작위까지 내렸다. 5월24일 혼수상태에 빠진 시라카와의 병상에서 의식을 펼쳤다. 먼저 일왕의 칙어를 봉독하고 남작의 작위를 내렸다는 사실을 알란 뒤 사주인 백포도주를 시라카와의 입술에 적셔주었다.
시라카와가 일본에게 얼마나 대단한 존재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일왕까지 나서 쾌유를 빌고 별의별 수단을 썼지만 시라카와는 회복하지 못했다. 위장과 대장을 절제하는 대수술을 감행했지만 5월26일 오전 11시 40분 사망했다.
■축포를 터뜨린 중국인들
시라카와가 사경을 헤맬 때부터 ‘이미 사망했다’는 소문까지 미리 파다하게 퍼졌고, 중국인들은 축포를 터뜨리며 환호했다.
“전쟁통에 노무라와 우에다가 다치고 시라카와의 사망소식이 들려오자 상하이의 모든 시민은 폭죽을 터뜨리며 환호했다.”(<상해보> 1932년 5월25일)
시라카와가 사경을 헤매고 있을 무렵인 5월25일 윤봉길 의사는 상하이 파견 일본군 고등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윤봉길의 훙커우 의거는 엄청난 후폭풍을 안겼다. 만보산 사건 이후 비등했던 중국내 반한 감정이 말끔히 해소됐다. 한술 더떠 중국과의 반일연합전선을 형성할 수 있는 중대 계기를 마련했다. 충격에 빠진 일본군은 확전을 단념하고 긴급히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주석은 “100만 중국군이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격찬했다. 이후 중국 군관학교에 100여명의 한인 청년들이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들은 조선 의용대 및 한국광복군의 근간이 되었다. 임시정부 또한 침체기에서 벗어나는 결정적인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국내외 동포의 재정적, 정신적인 지원까지 재개되면서 임시정부는 부흥의 전기를 마련했다.
카이로 회담에서 장제스로 하여금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명문화시킨 공적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1949년 6월26일 오후 2시36분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진 백범 김구 선생의 유품은 모두 18점이었다.
그 중 10점은 피묻은 선생의 옷이었고, 5점은 도장이었다. 3점은 선생이 쓴 유묵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1점은 바로 윤봉길 의사와 맞바꾼 회중시계(등록문화재 441호)였다. 그렇다면 백범이 윤봉길 의사에게 준 시계도 있을 것이 아닌가. 물론 있다. 윤봉길 의사가 간직하고 있던 백범의 시계는 지금 보물(제568-2호)이다.
지금도 24살 윤봉길이 아버지뻘인 56살 백범과 주고받은 말이 귀에 쟁쟁하다.
“선생님 저에게는 새 시계가 필요없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행 자동차를 타면서 백범에게 주섬주섬 호주머니를 뒤져 남은 돈을 건네면서 했다는 말도….
“선생님 저에겐 돈이 필요없어요. 선생님이 쓰세요.”
달리기 시작하는 자동차를 따라 쫓아가던 백범이 했다는 말도 어떤가.
“윤군! 윤동지! 지하에서 봅시다.”
윤봉길 의사가 두 아들에게 남긴 유언 또한 가슴 먹먹한 여운을 남긴다.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흐르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마라.”
돌이켜보면 참 못난 조국이다. 24살 앞날이 창창한 젊은 가장을 사지로 몰아넣었으니 말이다. 그뿐인가. 윤의사는 어리디 어린 젖먹이 두 아들에게까지 ‘강보에 싸인 두 병정’이라 하면서 “조국을 위한 용감한 투사가 되라”고 독려했다. 다시는 그런 못난 조국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스치듯 흘려보낸 며칠전 4월29일의 역사를 다시 소환해보는 이유다.
<참고자료>
한시준,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에 대한 중국신문의 보도’,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2권 32호,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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