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신화통신] 청명절을 전후하여 거의 만명에 달하는 간부와 군중들이 자발적으로 사천성 의빈현렬사릉원기념당에 와서 기념활동을 거행하였다. 초기 중국로동운동의 걸출한 지도자이며 ‘5.30운동’시기 유명한 렬사인 류화의 영웅사적이 그 가운데에 진렬되여있다.
류화의 원명은 류치영이고 자는 검화이며 사천성 의빈현 니계진 진차타(지금의 신니촌)사람으로서 1899년 9월 10일 태여났다. 1923년 8월, 류화는 상해대학 부속중학교에 들어가 학비를 벌기 위해 일하면서 공부했다. 당시 상해대학 설립에 중국공산당이 참여하였다. 재학기간 류화는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마시듯 새로운 사상, 새로운 지식을 학습하고 맑스-레닌주의 진리를 탐색하였다. 등중하, 구추백 등 사람들의 교육과 인도로 그해 11월 류화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25년 2월 9일, 상해 일본방직공장의 40여명 로동자를 해고하고 4명의 로동자대표를 체포한 만행에 항의하여 상해 4만여명 로동자들이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제1차 반제국주의 기치를 높이 들고 중외를 들썽한 ‘2월파업’을 발동하였다. 류화가 이번 파업의 최전방 총지휘중의 한 사람이며 그는 로동자들과 같이 먹고 같이 자면서 표어를 쓰고 전단지를 인쇄하였으며 의연금을 모으고 선전연설을 조직하고 로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하도록 선동하였다. 전국 각 계층의 성원으로 최종 기세등등하던 일본 자본가는 로동자들과 담판하고 계약에 서명하였으며 파업운동은 승리를 거두었다.
‘2월파업’의 승리는 상해로동자들의 전투능력을 단련시켰을 뿐만 아니라 류화의 명성도 널리 알려지게 하였다. 잇달아 그는 로동자들의 추대로 상해 일본방직공장 공회 위원장으로 되였다. 5월 1일, 광주에서 열린 제2차 전국로동대회에서 류화는 중화전국총공회 집행위원으로 선거되였다.
1925년 3월과 4월 사이, 일본상인방직공장 자본가들이 ‘2월파업’생산회복협의를 파괴하는 사건이 빈번히 발생했다. 5월 15일, 고정홍이 로동자들의 합법적 권익을 수호하고 일본상인들의 공장페쇄 음모를 반대하여 로동자들을 거느리고 일본상인방직공장을 찾아갔다. 하지만 일본 자본가들은 총을 쏘아 로동자들을 살해하여 ‘고정홍참안’을 빚어냈다. 고정홍의 희생도 ‘5.30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으로 되였다. 5월 30일, 상해 2000여명 청년학생, 로동자 및 농민 대회는 조계내에서 전단지를 뿌리고 연설을 발표하였으며 ‘제국주의를 타도하자’ 등 구호를 높이 불렀는데 영국순경들의 총사격을 당해 중국동포들이 사망하고 상해 중외를 뒤흔든 ‘5.30참안’을 빚어냈다.
‘5.30참안’이 발생한 날 저녁, 중공중앙은 상해에서 회의를 열고 행동위원회를 조직하고 각 계급 반제국주의 통일전선을 구축하여 전 상해에서 상인들과 로동자들의 동맹파업, 학생들의 동맹휴교를 발동하기로 결정하였다. 동시에 상해총공회조직을 공개하고 류화를 부위원장 겸 제4판사처 주임으로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대파업은 상해에서 3개월 남짓 이어졌으며 참가자는 산업로동자만 해도 22만명을 넘어섰다. 류화는 상해로동자들을 조직, 령도하기 위하여 ‘침식을 잊어가며 일했고 과로로 몸에 병이 들어 거의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페병이 갈수록 위중해졌다.
같은 해 9월, 제국주의와 북양군벌정부가 련합하여 ‘5.30운동’을 다그쳐 진압하였다. 11월 29일, 상황이 위태롭게 되자 류화는 병든 몸임에도 불구하고 남시공공체육장에 가 군중대회에 참가하다 체포되였다. 사후 당조직은 여러 면으로 구출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성사하지 못했다. 12월 17일, 적들은 류화를 비밀리에 총살하고 시체를 멸한 후 공개하지 않았다. 희생될 때 나이는 26살이다.
류화가 희생된 세번째 날, 상해총공회는 전국에 전보를 보내 전국 로동자들이 ‘우리의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용감한 령수’를 추모하고 ‘우리 령수의 피를 밟고 계속 분투하자!’는 요구를 발표하였다. 12월 31일, 중공중앙 기관보 《길잡이》주간보는 톱기사에 <류화 동지를 애도>라는 눈에 띄는 제목의 글을 게재하여 “류화 동지 및 기타 적극적으로 분투한 전사들은 전 중국의 로동군중을 령도하여 제국주의와 군벌들에게 시위하면서 반년간 기세 드높은 5.30운동을 조성하였다.”고 절찬하고 류화는 ‘진정한 공산당원’이라고 하였다.
류화 렬사가 희생된 지 어언 90여년이 된다. 하지만 그의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정신은 숭고한 리상를 실현하기 위해 힘써 분투하도록 중화의 아들딸들을 격려하고 있다. 류화의 고향 니계진은 오늘날 풍경이 그림같이 아름답고 백성들은 부유하고 유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으며 의빈현 민강남새산업단지의 핵심구역의 하나로 부상하였다. 2017년말, 전 진 GDP는 4억 3000만원에 달하고 공업부가가치는 5828만원을 실현하였으며 농민들의 인당 년순수입은 1만 4700원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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