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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절자로 몰린 비운의 혁명가 리상묵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7월23일 09시23분    조회: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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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3일 저녁과 이튿날 14일 오전, 중국조선족녀성기업가협회 포럼에 초대되여 축사와 특강(‘중국혁명과 겨레위인들’)을 가지였다. 오후에는 월드옥타 상해지회에서 재차 특강을 가진 데 이어 밤에는 월드옥타 회장, 부회장 등 분들이 마련한 만찬이 열을 올리였다. 만찬 도중 녀성 분들 위주의 상으로 옮겨 권주술을 마시는데 웬 젊은 녀인이 내가 우리 력사와 씨름하는 사람이라고 리화순 렬사를 아는가고 물어왔다. 

“리화순 렬사요?”

“네!”

“당년 연길현 왕우구근거지에서 희생된 리화순 렬사를 말하지요?!”

“네!”

“리화순 렬사와는 어떤 관계인지요?”

“리화순 렬사면 우리 할아버지 친녀동생입니다!”

“그렇군요. 리화순 렬사 전기를 제가 정리했습니다.”

이렇게 되여 상해의 한 만찬에서 항일렬사 리화순의 친족을 만나게 되였다. 친족 녀성 분이면 월드옥타 상해지회 부회장이고 상해지회 차세대 위원장인 리춘화씨였다. 세상은 정말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하다 할가. 내 고향 연변도 아닌 멀리 타향 상해에서 30년 전에 정리한 리화순 렬사의 친족을 만나게 되였으니 정녕 꿈만 같다.

서로의 이야기 가운데서 리춘화씨의 아버지가 지금 상해에 계신다는 소식도 접하였다. 이튿날 오전에는 약속 대로 숙박지인 상해제경려치호텔(帝璟丽致大酒店) 306방에서 리춘화씨와 춘화씨 아버지 리철산(李铁山)씨와 만남의 기회를 가지였다. 리철산씨는 1946년생으로서 아버지 되는 리진묵은 리화순 렬사의 친오빠였다.

“가족은 무슨 리씨예요?”

“전주 리씨입니다.”

“패는요?”

“익조패입니다.”

“익조패군요. 우리 연변을 보면 전주 리씨에서 익조패가 가장 많은 것 같아요. 우리는 전주 리씨고 환조패예요.”

리씨에서도 본과 패(파)를 들먹이며 우리 이야기는 스스럼없이 쏟아졌다. 나는 인차 리상묵 혁명가를 떠올렸다. 리철산씨는 리상묵도 안다고 머리를 끄덕이며 리상묵은 아버지 리진묵의 바로 남동생이라고 대답하신다. 이제 본문에서 보여드리지만 리상묵은 지난 30년대 초반과 중반 시절 중공동만특위 조직부장으로서 이른바 변절자로 락인된 비운의 혁명가였다.

“그럼 아버지 항렬은 몇 남매가 되는지요?”

“9남매입니다. 제일 우인 맏아배는 이름을 모르겠고, 둘째 즉 남자로 맏이는 민간의사로 불리운 리현묵입니다. 그 아래로 차례로 아버지 리진묵, 리상묵, 리옥순, 리룡묵, 리내묵, 리화순, 리구진이지요. 리상묵은 항렬에서는 넷째이지만 남자 항렬에서는 셋째로 나타납니다.”

“아버지 항렬이 9남매라니까 항일혁명가는 모두 몇분으로 되여요?”

“맏아매는 일찍 출가하여 혁명에 직접 뛰여들지 않았습니다. 둘째 리현묵은 민간의사로서 혁명을 후원하였고 아버지 리진묵은 23살 때인가 살아보자고 금점을 하다가 금전굴이 무너져 척추도 상하고 앞가슴 갈비뼈가 여러대 끊어졌습니다. 흙에 묻힌 걸 파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지만 쌍지팽이를 짚고 살아야 하는 신세여서 혁명에 참가하지 못하였습니다. 나머지 여섯은 모두 항일에 나선 항일투사들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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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남매에서 리화순이 항일렬사 대우를 받는다면 다른 분들은요?”

“항일렬사 대우를 받은 분은 리화순 하나입니다.”

“리룡묵이와 리내묵도 항일렬사가 아닙니까?”

“사실은 그러하나 항일렬사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리상묵은 이른바 ‘변절자’로 그랬다손 치고 리룡묵, 리내묵은 왜 안되지요?!”

서로의 이야기 가운데서 리화순과 리상묵의 친어머니도 항일을 지지성원하다가 일제놈들의 한차례 ‘토벌’중에서 쓰러졌음이 알려졌다. 알고 보니 일본놈들 토벌이 들이닥치던 날, 근거지 산막에서 항일유격대는 모두 전이하였지만 로인이라는 일루의 희망으로 혼자서 막에 남았다가 토벌대 놈들에게 피살되였었다. 막에 가둔 채로 불을 달았다는 간악한 일제놈들이다.

사실 리철산 아버지 항렬은 모두가 혁명에 투신한 혁명가들이 아니면 혁명을 지지성원하던 사람들이였다. 그런데 항일렬사 대우를 받는 사람은 리화순 렬사 혼자라니, 나는 겨레력사연구가로서의 책임감과 사명감을 전에 없이 깊이깊이 느끼였다.

우리 이야기에는 룡묵이와 내묵도 떠올랐는데 리철산씨는 이들 둘은 장가도 가지 못하고 쓰러졌다고 그토록 가슴 아파하였다. 지난 세기 70년대 초에 도문에서 생활할 때 당년 왕우구에서 룡묵이와 련애를 가졌다는 녀인 하나가 찾아왔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감동적이였다. 그때 리철산씨의 어머니와 그 녀인은 자기는 룡정 어디엔가 살고 있으며 아직도 마음속으로 룡묵이를 잊지 못한다고 속심을 터놓더란다.

리철산씨와의 이야기는 자연스레 리상묵 혁명가를 중심으로 나누어졌다. 이른바 ‘변절자’ 리상묵을 어떻게 생각하는가고 물으니 리상묵은 절대 변절자가 아니며 변절자나 이른바 ‘성명서’도 모두 일제놈들이 조작한 것이라고 단호히 모를 박았다. 아니라는 근거를 물으니 그는 리상묵의 안해에게서 듣고 이모저모로 많이 알아보았다고도 하였다. 그러면서 돈화감옥에서 출옥하지도 못하고 죽었는데 언제 일제 밀정으로 돌아다니며 활동할 수 있느냐며 탄식을 금치 못하였다.

“알겠습니다. 리상묵의 변절문제는 춘화 아버지한테서 처음 듣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난 80년대 중반과 후반에 리화순 렬사 전기를 정리하면서 연길 인평에 계시는 리구진 할머니를 방문하며 처음 듣게 되였고, 90년대 중반에도 다시 듣게 되였습니다. 저는 리상묵 사실을 80년대 후반에 이미 그 시절 조선족력사 권위로 받들리는 연변대학 박창욱 교수께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 리구진 막내 고모도 알고 박창욱 교수와도 통하였군요. 박창욱 교수는 우리 리씨하고 걸리는 관계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박창욱 교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박창욱 교수는 리상묵은 변절자가 아니라면서 쑈리가 중시를 돌리며 계속 파보라고 부탁주었습니다. 그런데 리상묵 문제는 일제측과 그 시절 동만특위측에서 투항이요, 변절자로 몰아부친데서 그 시절 일개 력사연구 초보자로서는 너무 힘에 부치였습니다. 그 후 세월 속에서 가담가담 떠올려보기도 하였지만 거의 잊고 살았습니다.

지금 리상묵 문제에 중시를 돌릴 분이 거의 없습니다. 제가 나서겠습니다. 인젠 나설 때도 됐지요. 저는 세월이 흐르면서 60대 중반으로 되였구 그제날 력사초보자로부터 력사를 아는 사람으로 커왔지요. 이제 위해로 돌아가면 리상묵 연구자료를 전면 검토하면서 리상묵 전기를 정리하겠습니다. 변절자 아닌 혁명가 리상묵을 말입니다.”

“고맙습니다!”

3

그러면서 리철산씨는 깊은 믿음을 보여주시였다. 그 믿음이 고마웠고 이야기는 리상묵의 안해와 그들 유복자로 이어졌다. 리상묵의 안해는 상묵이와 결혼한 지 얼마 안되는 녀인으로서 상묵이 사망될 때 임신한 몸이였다. 해산하니 리풍산이요, 그들 모자는 계속 남편의 가족분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리상묵의 산속 도망과 잠복, 체포와 사망에 대하여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리상묵의 유복자로 되는 리풍산씨는 지난 90년대 어느 해던가 사망되여 리상묵의 력사 문제는 이들 리씨가족에서 다 아는 문제로 남아있었다.

하다면 리상묵은 과연 어떤 사람이였을가? 견실한 항일혁명가였을가 아니면 너절한 변절자였을가? 아래 리상묵의 인생 발자취를 추적하면서 력사 속 진실한 리상묵을 찾아보기로 하자.

리상묵의 녀동생 리화순 항일렬사연구에 따르면 리상묵은 1905년에 함경북도 길주군 길성면 홍수동의 한 농가에서 태여났다. 남매 아홉에서 항렬 순위로 넷째였으니 앞에서와 같이 우로 일찍 시집간 큰누나와 리현묵, 리진묵 두 형에, 아래로 리옥순, 리룡묵, 리내묵, 리화순, 리구진 등 녀동생 셋과 남동생 둘이 있었다. 생활이 째지게 어려워 공부할 나이에 공부도 바로 하지 못하고 면에 내려가 남매들과 같이 길닦기 등 힘든 로동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절 멀리 두만강 너머 중국 북간도땅이 비옥하고 살기 좋다는 풍문이 파다했다. 리상묵의 아버지는 제법 젊은이로 성장한 자식들과 의논하고 그 시절 북간도행을 강단했다. 그때가 1926년이니 리상묵의 나이 22살 때이다. 이들 리씨가족 10여명은 그렇게 조상들의 뼈가 묻힌 정든 고향을 등져야 했으니 그로부터 10여년 후 길성면(吉城面)과 영북면(英北面)이 합병되여 길주읍을 이루었다.

리상묵네가 북으로 두만강을 건너 자리잡은 새 삶의 터전은 북동이라 불리는 연길현 의란구 구청자. 여기 의란구에서 ‘의란’(依兰)은 만주어로 세 골안(三岔)이란 뜻이였다. 이 지대는 일찍 만족들이 살던 지대로 알려진다. 의란구 북동으로 불리운 고성촌의 고성(古城) 옛 유적지가 말하다싶이 일찍 료금시대 이 지대는 녀진족들이 살았었다. 청나라 초기에 봉금이 실시되여 인적이 미치지 못하는 지대로 되였다가 다시 인적이 미치기 시작한 것은 광서 초년(光绪初年)의 일이였다.

청나라 광서황제(1871-1908)는 청나라의 제11대 황제이고 광서 원년은 1875년이니 광서 초년이면 1875년-1885년에 해당한다. 이는 청조에서 200여년이나 지속되던 봉금정책을 해제했던 1885년 그 전후 시절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 산동, 하북 등지의 한족 빈고농민들과 조선 북부의 이주민들이 선후하여 왕우구에 밀려드니 왕우구의 새 개척력사가 시작되였다. 그러니 의란구의 조선이주민 이주와 개척은 1880년대 그 시절의 일이였다.

내부자료로 된 <<룡정현지명지>>를 보면 왕우구의 한 마을을 이룬 구룡평마을이 일어서기 시작한 것은 광서 초년이고 룡암평, 상대흥촌, 명랑촌의 시작 역시 광서 초년으로 기록된다. 이 뿐이 아니라 태양촌, 춘흥촌, 련화촌, 고성촌, 합수, 류채촌, 명흥촌, 서흥촌, 남양툰 등 마을들도 마을의 건설 시작이 광서 초년으로 나타나고 있다.

 

4

지난 세기 10년대 후반 20년대 초반의 의란구는 개척 초기나 다름없은데서 토질이 비옥하고 수풀이 우거졌다. 거기에 황무지를 개간하면 3년간 조세(租税)를 바치지 않아도 먹고살 수가 있었다. 한데서 많은 애국지사들과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운 조선이주민들이 이곳에 모여들어 1000여호를 이루었다.

어떤 연구자료는 의란구의 호수는 급격히 3000여호로 늘어났는데 남동과 북동에만도 800여호나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인가들 거개가 조선이주민들과 그들의 후예로서 의란구는 반일운동을 벌리는 데 든든한 후원기지로, 중요한 거점으로 떠올랐다.

1920년 6월 봉오동전투를 전후로 당년의 의란구에는 국민회와 의군단이란 조선민족 반일무장단체가 활동하고 있었다. 국민회는 류채구(柳菜沟)와 구룡평 이하의 대부분 지역이고 의군단은 룡암평 서쪽의 남동(련화동 골안)과 북동(고성자 골안)의 여러 마을들에 널리였다. 1920년 경신년 대토벌 후 의란구의 반일투쟁은 기세를 이루지 못하였다. 대신 1920년대초 이후 로씨야 10월혁명의 사상 전파와 더불어 조선공산당 활동이 활발히 벌어진 양상을 보이였다.

리광인 연변일보 2018.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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