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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19)-동부전선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11월1일 10시19분    조회:1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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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동적으로 타격하면서 토벌계획 혼란시켜, 서부전선 전투부담 경감 아군의 철수 엄호

동부전선의 반일부대

“경신년 반‘토벌’전은 동부와 서부 두 전선으로 진행되였습니다. 그런데 사학계에서는 서부전선인 청산리전역만 말하는 페단이 있습니다. 일제의 토벌에 의해 반일부대주력은 연길현과 화룡현의 서쪽으로 기타 부대는 훈춘현과 왕청현 동북부로 이동했습니다. 일제는 동부의 반일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상당한 병력을 투입시켰으며 반일부대도 유력한 저항으로 일제의 ‘토벌’에 맞섰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당시 동서 두 전선에 배치되였던 반일부대의 정황을 설명했다.

서부전선의 반일부대란 주로 홍범도부대, 안무가 지휘하는 국민회군, 훈춘한민회군 및 기타 부대와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주력군을 말한다. 동부전선인 훈춘과 왕청현 일대에는 훈춘한민회와 신민단군이 중로 변경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원 기지에서는 북로군정서군의 잔류부대와 각 단체 간부들이 잠복하여 활동하였고 왕청현 라자구와 로흑산 일대에는 독군부, 광복단, 의군단, 라자구의사부 등에 소속된 약 850명 가량의 부대원이 있었다.

 
국민회군 사령 안무 장군

김철수선생은 저서 《연변항일사적지연구》에서 홍범도련합부대와 북로군정서부대가 서진한 후 훈춘, 왕청, 연길현북부지대에서의 반일부대의 활동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1)훈춘한민회 군사부의 일부는 홍범도를 따라 서진하고 리명순과 최경천이 거느린 150여명의 부대는 훈춘현 동북부의 오도구, 륙도구, 초모정자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2)신민단의 일부는 중로변경과 훈춘동북지대에서 활동하고 김준극이 거느린 200여명 주력부대는 연길현 하마탕(지금은 왕청현 소속), 석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3)연길현 의란구에서 활동하던 의군부는 왕청현 배초구를 거쳐 라자구로 이동하였다.

(4)왕청현 대감자일대에서 활동하던 광복단 300여명은 리범윤과 김성극의 령솔 밑에 라자구로 이동하였다. 후에 주력부대는 김성극의 인솔 밑에 연길현 이도구일대(지금의 화룡시 서성진부근)로 이동하였다.

(5)최명록이 거느린 독군부 300여명 대오는 라자구로 이동하였다.

(6)북로군정서 주력부대가 서진한 후 서일 등은 부분 군관양성소의 졸업생을 골간으로 부근에서 조선인청장년을 모집한 후 300여명의 무장대오를 조직하고 서대파와 하마탕일대에서 활동하였다.

(7)로씨야경내에서 온 동도파견군 300여명은 서상렬의 인솔 밑에 하마탕일대에서 활동하다가 라자구와 동녕일대로 이동하였다.

(8)엄준이 거느린 공의단은 줄곧 왕청 소황구에서 활동하였는데 그 성원은 600명좌우였다. 그러나 강한 무력은 아니였다.

(9)라자구의사부 170여명의 무장인원은 라자구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0)국민회 중북부총회의 간부와 구춘선, 강구우 등은 의란구에서 활동하다가 하마탕일대로 옮긴 후 다시 라자구로 이동하였다.

박창욱선생은 동부전선이 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이라고 피력했다. 동부전선은 반일부대들의 원 근거지였기에 그 곳 민중들은 반일정서가 높고 또 조직화되여있었다. 동부전선은 중국과 로씨야의 변경지구이므로 반일단체들의 왕래가 쉬웠다. 당시 반일단체의 지도자들은 로씨야혁명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왜냐 하면 조선인반일무장대는 로씨야혁명파의 세력범위내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으며 그들과 배합작전하면서 일본군 및 백파와 싸우고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일부대는 일본군 ‘토벌’이 심할 때에는 능히 로령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동부전선은 또 반일부대들이 로령과 련계하여 무기를 구입할 수 있는 후방기지였다. 그러므로 일본침략군은 반일부대의 주력이 서부지구로 이동하였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부전선에 수많은 부대를 투입시켜 반일부대를 ‘토벌’하고 반일기지를 소각, 파괴하며 로령혁명파와 연변반일부대와의 련계를 단절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

일제의 대량 투병

1920년 10월 3일 훈춘사건을 계기로 일제는 우선 온성에 주둔하고 있는 73련대의 아베 소좌가 지휘하는 1개 중대, 1개 기관총소대를 훈춘에 침입시킨 후 얼마 후 1개 중대, 1개 기관총소대와 박격포 2문을 배속시켜 다시 침입시켰다. 이어 19사단 38려단장 이소바야시 소장이 지휘하는 75련대 제1, 3대대의 4개 중대, 2개 기관총소대, 특종포병대, 통신반, 위생반 그리고 제20사단39려단 78련대 우에사까 소좌가 지휘하는 1개 대대, 1개 기관총소대와 통신반, 위생반을 침입시킨 후 다시 기병 27련대 제3중대, 야포병 제25련대의 2개 중대, 공병 19대대의 1개 중대 등을 련이어 훈춘에 파견하여 이소바야시지대를 편성하였다.

1920년 10월 20일에는 기무라 대좌가 지휘하는 제76련대의 제1, 3 대대 4개 중대와 2개 기관총소대 특종병대, 기병 27련대의 1개 소대, 거기에다 헌병과 경찰을 배속시켜 양수천자로부터 직접 왕청현 서대파와 십리평에 침입하였다. 10월 14일에는 반일부대의 북만철수를 저지하기 위해 북만파견군 53련대의 야스니시 소좌가 지휘하는 1개 대대, 1개 기관총소대와 1개 기병소대를 해림일대에 배치하였다.

일제는 또 중국과 로씨야의 변경지구에서 활동하는 반일부대를 토벌하며 반일부대와 로씨야혁명파간의 련계를 차단하기 위하여 울라지보스또크파견군 제13사단의 하네이리 대좌가 지휘하는 58련대의 1개 대대, 기병 17련대의 주력1개 산포병중대, 1개 공병중대를 동녕현 삼차구의 대안에 집결시켰다가 10월 21일 국경을 넘어 로흑산 라자구방면으로 남하하게 하였으며 10월 19일에는 제11사단의 히데시마 소좌가 지휘하는 1개 대대, 1개 기관총소대, 기병 1개 소대, 공병 2개 소대를 로령의 바라바시로부터 훈춘현 토문자로 파견하여 훈춘과 왕청현 동북변경을 ‘토벌’하게 하였다.

일제는 울라지보스또크파견군 제14사단 28려단 주력(4,000명)을 보세트에 상륙시켜 연해주의 연추로부터 훈춘에 보내 양수천자, 국자가, 룡정, 회령 등지를 경과하는 위협행군을 진행하면서 ‘토벌’을 감행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10월 18일 28려단 15련대의 제2대대는 훈춘에서 경비를 담당하고 제3대대의 2개 중대는 룡정에서 경비를, 3대대의 1개 중대는 회령의 19사단 사령부의 경비를 각기 담당하게 하였다.

이 밖에도 일제는 각 지대에 헌병과 경찰을 배속시켜 일본군의 토벌을 협조하게 하였고 따라서 경원수비대 병력과 헌병, 경찰을 포함한 50여명을 출동시켜 조선과 중국의 국경지대를 ‘토벌’하게 하였다. 이렇게 일제는 동부전선에 만여명의 침략군을 투입시켜 훈춘과 왕청을 4면으로 포위하고 ‘토벌’을 감행하였다.

 
반일부대 훈련장면

동부전선에서의 반‘토벌’전

동부전선에서 일본침략군은 만단의 준비를 갖춘 후 대대적인 ‘토벌’을 진행했다.

10월 14일부터 19일까지 이소바야시 려단장의 지휘하에 아베, 마끼, 쥬지 등 3개 토벌대는 훈춘현성의 동북쪽에 있는 훈춘하상류, 서북쪽에 있는 대황구를 중심으로 한 밀강 상류를 대거 ‘토벌’하였다.

10월 22일부터 11월 초순까지 상기 3개 ‘토벌대’는 11사단의 히데시마지대와 함께 훈춘현과 왕청현변경으로 북상하고 양수천자에서 도강한 기무라지대는 직접 서대파, 십리평, 대감자 등 지를 ‘토벌’ 한 기초 우에서 배초구로부터 북상하는 이와바시대대와 함께 대왕청, 소왕청 등지를 ‘토벌’ 하면서 동부전선과 서부전선간의 련계를 차단, 동녕현 삼차구로부터 남하하는 13사단 하네이리지대와 호응하여 로흑산 라자구일대를 남북으로 협공하였다. 11월 초순부터 1921년 봄까지 일본군은 훈춘과 왕청 등 현의 중요지점에 분산배치되여 부근 일대의 반일단체와 반일기지를 ‘토벌’, 파괴하였다.

그러나 동부전선의 부대들은 이미 기지를 떠나 다른 곳으로 철퇴하였기 때문에 일본군은 주로 반일기지의 파괴와 무고한 백성을 살해하는 것을 일삼았다. 전투는 다만 반일부대의 이동과정에 진행, 잔류 소부대간의 소규모적이고 분산적인 것이였다.

일본침략군의 대규모적인 포위 ‘토벌’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반일단체들은 10월 17일부터 13일 사이에 단독 혹은 단체 대표들의 련속회의를 소집, 반‘토벌’전에 대응한 전략방침을 토의결정하였다. 우선 적이 강하고 아군이 약한 형세하에서 맹동, 급진 정서를 극복하고 분산, 은페의 방법으로 전투를 피하면서 반일력량을 보존하며 적을 공격하려면 심산 속에 유인하여 기동령활한 유격전으로 돌연습격하고 신속히 은페하기로 했다. 이들은 또 반일력량을 보존하기 위해 될수 있는 한 적들의 포위권에서 탈출하며 근거지의 백성과 간부, 일체 물자, 무기탄약 등을 잘 피난시키거나 깊이 감추어놓아 반일기지의 손실을 최소한으로 경감시킬 방침을 결정하였다.

서부전선의 반일부대보다 력량이 박약한 동부전선의 각 부대들은 일본침략군의 ‘토벌’ 제1단계 때 이미 왕청현 라자구, 동녕현 로흑산 또는 훈춘현 동북부로 대부분 철수하였다. 제2계단에 들어서도 일본군이 라자구를 중점‘토벌’ 하자 반일부대는 동녕현 이북으로 철수하였거나 일본군의 후방에 분산 은페하여있다가 이들을 습격하였다.

10월 23일 북로군정서 잔류부대는 십리평에서 일본군 이소바야시지대로부터 기무라지대에 편입된 아시다, 다까다 두 중위가 인솔하는 부대를 습격하였다. 이날 일본군은 반일군철퇴를 막을 타산으로 금화골 산중에서 수색하면서 전진하였다. 매복해있던 반일군은 적들이 가까이 오자 맹공격을 들이댔다. 전투는 약 30분가량 진행되였는데 일제의 기록에 따르면 저들의 군대가 1명 죽고 2명이 부상입었다.

10월 27일 라자구의사부군의 150여명 장병들은 로무주하골에서 다요기병소대, 아베대대의 1개 소대, 히데시마대대의 1개 중대, 1개 기관총소대 등과 약 2시간가량 격렬한 전투를 벌렸다. 이날 오후 3시, 소바야시지대 소속 아베대대의 다시로기병소위가 거느린 일본군 소부대 30여명은 로무주하골 어구부근에서 라자구의사회의 최정국이 거느린 150여명의 반일전사들의 습격을 당했다. 당시 아베대대주력은 라자구 태평구에서 ‘토벌’하고 있었다. 어베는 부하가 반일부대의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1개 소대의 병력을 파견하여 지원하게 하였다. 금방 라자구에 도착한 일본군 제13사단의 하네이리지대 산하의 보병 1개 중대와 기관총 1개 소대가 전투에 참가하여 약 2시간동안의 격렬한 전투를 거쳐 소부대를 소멸하려던 반일부대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북으로 철퇴하였다.

10월 28일 일본군 76련대 이와오소 소좌가 지휘하는 부대가 라자구에서 대황구로 돌아오는 것을 발견한 반일소부대는 왕청현 장가구에서 련속2차례나 습격했다.

11월 4일 훈춘한민회군 30여명이 훈춘현 삼도구 북쪽 39리 상거한 지점에서 일본군 제78련대 우에사까대대를 습격, 전투는 약 1시간가량 진행되였는데 일본군 5명을 살상하였다.

11월 9일 훈춘한민회의 김운서가 지휘하는 30명의 결사대는 일본군 제75련대 쥬지 중좌가 지휘하는 2개 중대를 훈춘현 우두산 남쪽에서 습격, 1시간가량의 교전을 벌리였다.

12월 5일 일본군 시마다 소위가 지휘하는 30여명은 하마탕 서북쪽 산곡에 있는 반일부대의 숙소를 포위공격,쌍방이 교전하였다.

“보시다 싶이 10월 5일 전투 이외에는 모두다 분산은페하였다가 주동적으로 적을 공격한 전투였습니다. 반일부대는 기동령활한 전법으로 적을 타격하면서 ‘토벌’계획을 혼란시켰습니다. 일본군들이 동부전선에서 비록 반일기지를 파괴하고 무고한 백성들을 수많이 학살하였으나 반일부대를 소탕하지는 못했습니다. 도리여 반일부대의 습격을 받아 한시도 안심할 수 없어 항상 비상사태를 취했습니다. 동부전선의 의의는 아주 큰바 적의 병력을 견제하여 반일부대들의 철수와 간부들의 잠복을 엄호하였으며 서부전선 반일부대들의 전투부담을 경감시켜주었습니다. 일본군은 동부전선의 소부대들의 빈번한 습격전 때문에 북상하는 반일부대들을 추격할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서부전선 주력부대가 밀산 등지로 철수하는 것을 엄호하였습니다.”

박창욱교수는 동부전선이 갖고 있는 의의를 결코 경시해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길림신문/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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