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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동, 그곳에는 부처님이 없었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11월2일 12시50분    조회:1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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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흑룡강신문=하얼빈)마을의 이름은 시초에는 대성촌(大成村)이 아니었다. 큰 부처가 있는 대불동(大佛洞)이라고 했다. 대불동은 용정 시내에서 남쪽으로 10리 정도 떨어져 있다. 근교이지만 앞뒤가 산으로 꽉 막힌 골짜기이다.

  막상 마을에는 이름만 달랑 남았고 부처는 오간데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불동을 대성촌으로 개명한 건 아니라고 김춘화 씨가 거듭 말한다.

  "예전에 향에 가서 회의를 할 때면 우리 마을 사람들은 늘 놀림거리로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름을 바꿨다고 하는데요."

  대불동을 발음 그대로 해석하면 큰 불알의 골짜기이니, 대불동의 사람들은 골짜기에서 쭉 뽑혀 나온 불알이라는 것이다. 불알은 항간에서 고환을 이르는 속말이다. 자의든 타의든 축축한 음담패설은 그림자처럼 대불동 사람들의 뒤를 따르고 있은 것이다. 정말로 대불동에는 가진 것이라곤 불알 두 쪽밖에 없었을까…

  대불동은 논이 없고 밭만 있으며 옥수수와 조, 보리가 주식이다. 그밖에 돈벌이로 담배를 약간 심고 있었다. 설 같은 큰 명절이 아니면 흰 쌀밥을 밥공기에 담기조차 힘든 두메산골이었다.

70년대 말 80년대 초 시골동네 신부의 꽃가마는 트럭이었다, 신부의 바로 앞쪽에 앉은사람이 전분선 노인이다 .

 

  키 넘는 옥수수들은 골짜기에 들어선 일행의 시선을 내내 가리고 있었다.

  "그래도 우박이나 장마가 생긴 적 없고 가뭄이 든 적 없다고 하는데요. 우리 마을은 하늘이 종래로 배를 굶지 않게 한 곳이래요."

  김춘화 씨가 자랑조로 하는 말이다. 그녀의 가족은 워낙 골짜기 남쪽의 하오동에서 살았다. 하오동은 그녀가 탯줄을 끊은 곳이다. 잠깐, 하오동은 오후의 동네라는 의미가 아니다. 광서(光緖, 1875~1908) 초년, 오씨(吳氏) 성의 사람이 그 일대의 땅을 독차지 하고 있다고 해서 오씨 동네라는 의미의 오동(吳洞)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에 따라 위쪽 동네를 상오동(上吳洞), 아래쪽 동네를 하오동(下吳洞)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말로 지명을 기록하면서 성씨의 나라 오(吳)는 나중에 동음이의어의 부드러울 우(優)로 탈바꿈을 했다. 오씨 동네는 졸지에 좋고 넉넉한 동네라는 의미의 우동(優洞)으로 둔갑했다. 그럴지라도 이름처럼 좋고 넉넉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김춘화 씨의 가족은 종국적으로 윗동네의 대성촌에 이사했다.

  이삿짐을 내린 곳은 대성촌의 제일 안쪽 동네인 부암툰(富岩屯)이었다. 동쪽의 산비탈에 바위가 많다고 해서 부르는 이름이었다. 이민자들의 옛 고향 이름을 빌어서 회령(會寧)이라고 했지만 이때는 공식적으로 대성촌 1대(隊, 촌민소조)라고 불렸다.

이씨의 백년 초가가 남긴 유일한 사진, 정부 직원이 옛 가옥을 조사하고 있다.

  "이 동네에서 초급사(初給社)가 제일 먼저 나오면서 1대라고 정했답니다."

  초급사는 농업자료의 사유제(私有制)를 기초로 한 농민협력의 경제조직으로 1956년에 전국적으로 139만 여개의 최고봉을 이뤘다.

  김춘화 씨를 따라 밭 가운데 있는 웬 농가를 찾았다. 주인 전분선 노인은 대성촌의 일대기 그 자체라고 했다. 길에서 김춘화 씨가 잠깐 전한 이야기들은 실은 이 노인에게 시작되고 있었다. 대불동은 전분선 노인이 시집을 왔던 이듬해인 1948년에 대성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그 무렵 연변 지역에서 토지개혁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었다.

  아직 아궁이를 지피지 않았지만 이른 가을의 구들은 따뜻했다. 햇빛과 함께 거의 100년 세월이 창가에 내려앉고 있었다.

  전분선 노인은 1927년 정묘년 토끼띠라고 했다. 마을 이야기가 나오자 노인은 짚으로 이엉을 얹은 옛집을 다시 추억에 떠올리고 있었다. "(내가) 시집을 올 때 오두막 같은 초가가 올망졸망했어. 거기서 팔간집의 우리 집이 제일 좋았지."

  예전에 이곳 골짜기에는 거개 집안 친척들끼리 한데 모여 살고 있었다고 한다. 회령이니 부암이니 뭐니 하는 이름을 앞서 광주 이씨가 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전분선 노인이 이씨 가문에 며느리로 들어올 때 14가구가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 후 박씨, 김씨 등이 가세하면서 동네는 약 40년 만에 한배나 늘어난 28가구로 되었다.

  큰 마을의 이름을 만들었던 대불동은 실은 크고 작은 부처가 둘이나 있었다고 한다.

  "큰 부처님은 서쪽의 산비탈에 있었어. 작은 부처님은 새타얀(흰) 샘물이 나던 사물개(샘물가) 저쪽에 있었다고 해. 옛날 절간(사찰)에 기와장이 남아있었어."

  8.15 광복이 나던 그 무렵 사찰이 없어졌다고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알려줬다. 언제인가 남편이 사찰 터에서 큰 기와장을 하나 주어왔다. 그게 사찰이 세간에 남긴 흔적의 전부였다. 기와는 헝겊을 두른 것 같은 천 무늬가 있었다. 요·금(遼․金) 시기의 전형적인 기와 문양이었다. 이 기와마저 나중에 대불동의 팔간집과 함께 감쪽같이 사라졌다.

  팔간집은 시꺼먼 대들보가 백년의 역사를 받들고 있었다. 정주와 방, 고방 그리고 곳간 등등 오장육부가 구전했다. 기와집을 짓던 1,2년 전에 철거했다면서 전분선 노인은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옛집이 사라지고 더불어 옛 기억이 차츰 소실되고 있었던 것이다.

  시조부가 지은 시골의 팔간집은 없어졌지만, 시고모할머니의 아들이 지은 '큰집'은 시내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옛 서당의 훈장과 서동들(자료사진), 훈장의 '팔각관' 모자가 유표하다.

  "맏아바이(큰아버지)는 허민보라고 하셨어. 큰 목수였는데 참 번듯하게 생겼지. 울 맏아바이가 바로 그 집을 지은 거야."

  전분선 노인이 말하는 그 집은 용정 중심가에 있는 간도 일본총영사관을 이른다. 시조부의 오누이는 모두 이 총영사관 서쪽의 용두레우물 근처에서 살았다고 한다. 용두레우물은 그들 가족이 두만강을 건넌 후 맨 처음 발을 붙인 곳이었다.

  그래서일까, 간도 총영사관의 '소가죽 한 장'의 이야기는 더구나 전분선 노인의 기억에 우물처럼 깊숙이 고여 있었다.

  어느 날 일본영사가 청나라 관원에게 영사관을 지을 땅을 달라고 간청했어. 그저 소가죽 한 장 만큼한 땅이면 된다고 한 거야. 소가죽 한 장 크기의 땅에 무슨 집인들 짓겠어? 청나라 관원은 시름을 놓고 간청을 들어주었지. 얼마 후 일본인들은 수백 평의 땅에 담을 쌓고 울안에 어마어마한 영사관 청사를 지은거야. 이에 놀란 청나라 관원은 잔뜩 화를 냈어. 이건 언약한대로가 아니야! 그러자 일본영사는 실처럼 올올이 찢은 쇠가죽을 내놓았어. 서약에 소가죽 한 장 만큼이라고 하였는데, 이 실을 모아놓으면 한 장이요, 펼쳐놓으면 영사관 둘레의 길이와 꼭 같을 터요. 어디 한번 재어보시오.

  ……

  간도 일본총영사관은 1909년 용정에 설치되었다. 10여년 후 화재로 소각, 음흉한 일본인의 이야기만 옛터에 남았다. 일본인들은 또 3년의 시간을 들여 1926년 옛터에 영사관 본관을 준공했다. 허민보가 목수로 되어 지었다는 영사관 청사는 이때의 축조물로 보인다.

  비록 시댁의 큰아버지가 참여한 건물이지만, 전분선 노인이 영사관 구경을 한 것은 광복이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그때 처음 갔댔어. 집(영사관 청사)이 대단했어! 정말 대단했거든."

  영사관 건물 못지않게 허민보의 집안도 아주 으리으리했다고 전한다. 광복 전에 벌써 세간에 드물게 안방에도 전화를 놓고 있었다고 한다. 또 그의 아들은 간도성의 모모한 관리로 있었다. 그러고 보면 허민보가 광복이 나자마자 급급히 가족을 데리고 두만강 저쪽으로 도망한 이유가 있었다. 이주한 얼마 후 그가 청진에서 사망했다고 뒤늦게 대불동에 소식을 보내왔다.

  대불동에서 이씨는 여러 조대를 걸쳐 백년의 한 세월을 살았다. 이씨가 왜서 그토록 대불동을 애착하였는지 전분선 노인은 아직도 잘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어쩌면 마을을 크고 작은 부처가 함께 지척에서 수호하고 있는 고장이라고 해서 그랬을까. 대불동은 그때 용정 부근에서 제일 잘 사는 동네라고 했다.

  시조부 이재범은 대불동 서당의 훈장이었다. 팔간집의 윗방은 그때 대불동의 서당으로 꾸리고 있었다.

간도 일본 총영사관을 두른 옛 붉은 담, 양철지붕의 옛 건물이 아직 남아있다.

  "시할아버지는 구학(舊學) 선생님이셨어, 팔각관(八角冠)을 쓰고 계셨다고 해. 옛날 대불동의 사람들은 거개 그분에게 글을 배웠다고 하거든."

  전분선 노인이 말하는 팔각관은 옛날 서당의 훈장이 쓰던 정자관(程子冠)을 이른다. 이 정자관은 사각형의 내관(內冠)이 있고 바깥에 '산(山)' 모양의 2단, 3단으로 덧붙여 처리한다. 여덟 번을 접은 관이라는 뜻으로 '팔각관'이라고 제멋대로 불린 것이다.

  그때 시조부가 거동을 하면 동네 농부들은 감히 앉지도 못했다고 한다. 시조부의 학식과 위세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겠다. 나중에 손자 이규방은 아홉 개 나라의 언어를 장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남편은 중국말은 물론이고 일어와 영어, 독일어, 불란서(프랑스)어도 알고 있었어. 어떻게 배웠는지는 나도 몰라."

  남편은 그런 박학(博學)에도 불구하고 시골에서 일개 농부로 일생을 보냈다. 결혼 전에 강 저쪽의 조상 묏자리에 갔다가 산탈(山頉)을 입었으며, 그 때문에 몸이 이상했다고 전분선 노인이 그 비밀을 밝힌다.

  와중에 에피소드가 있었다. 이규방은 시내의 어느 교원인가 웬 한자(漢字)를 몰라서 묻자 금방 옥편(玉篇)의 어느 페이지에 나오는 무슨 글자라고 대답했다. 훗날 교원이 미심쩍어 옥편을 펼치니 그 페이지에서 문제의 한자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옥편은 한자 글자의 뜻과 음을 풀이하고 부수와 획에 따라 배열한 책이다.

  이규방은 날마다 밭일이 끝난 저녁이면 물 대야에 발을 담구고 책을 읽었다. 그처럼 책을 산더미처럼 읽고도 대학에 가지 못한 게 이규방의 제일 큰 유감이었다고 한다. 풀과 나무만 보이는 산골을 떠나 빌딩이 산처럼 우중충한 큰 도시로 가고 싶었다. 옛말에도 '말을 기르려면 제주도로 보내고, 자식을 기르면 서울로 보내야 한다'고 이르지 않았던가.

김춘화의 출생지 오동의 일각, 많은 농가는 이미 폐가로 되었다.

  그런데 전분선 노인은 기어이 이 시골을 떠나려 하지 않고 있었다. 자식들이 그녀를 시내에 모시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시할아버지는 손자며느리(전분선 노인)를 새앙쥐(생쥐)의 팔자라고 말씀하셨어. 방앗간에 가둬놓은 쥐의 모양새라는 거야. 이 대불동을 떠날 수 없어."

  정작 대불동은 오래 전에 벌써 그 이름을 잃었다. 개명한 대성촌도 종국적으로 지신진(智新鎭) 신화촌(新華村) 6대로 통합되었다. 날마다 밤이 되면 골짜기에는 빨간 불이 띄엄띄엄 드물게 켜진다. 인적이 있는 농가는 한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는 정도. 인제 마을의 토박이는 전분선 노인 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90세의 이 노인은 마을의 둘도 없는 역사요, 또 마을의 마지막 지킴이었다.

  시내로 돌아오는 길에서 김춘화 씨는 대불동의 이름을 다시 화제에 떠올렸다. 대불동의 옛 승려를 꿈에서 환각처럼 문득 만났다는 것이다.

  "나이가 지숙한 스님이었는데요, 걸망을 메고 길을 걷다가 잠깐 멈춰서요. 나뭇잎과 풀을 따서 그분의 걸망에 챙겨 넣으시는 거예요."

  길가의 둥근 나뭇잎과 긴 풀은 승려가 인연으로 만났던 세간의 이왕지사였던가. 이윽고 승려는 대불동의 옛 사찰 쪽으로 스적스적 걸어갔다. 그는 마치 나무에서 떨어지는 잎사귀처럼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사실상 사찰의 부처가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졌고 마을의 사람도 구름처럼 표연히 멀어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향불처럼 그윽하던 화려한 이야기는 그야말로 한밤의 일장일몽(一場一夢)을 방불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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