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1일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일이다. 1918년 종전 당시 연합군을 주도했던 영국은 전쟁의 참극을 두고두고 기억하며 재발을 방지하라는 의미에서 11이 세 차례 겹치는 11월 11일 11시에 종전 시점으로 정했다.
[1차대전의 기억 여행] 시리즈 1회
100년 전 1918년 1차대전 종전
기억 쉽게 11월 11일 11시로
현재도 영연방국가 현충일로
인류 어리석음이 비극 부른
교훈 새겨 비극 막는 날 돼야
영국 작가 스미스, 돌직구 트윗
"인류는 대전에서 배운 게 없다"
지적대로 아직도 곳곳 분쟁
아직도 전쟁 유혹에 쉽게 빠져
시리아 내전, 예멘 내전 개입 등
국제사회, 외교적 해결에 무능
북핵도 이제야 협상 노력 시작
분쟁과 살상 반복에서 벗어나야
프랑스군 의장대가 지난 4일 동부 스트라스부르의 대성당 앞에서 제1차 세계대전 100주년 추념 군 행사를 벌인 뒤 도열해 있다. 스트라스부르가 포함된 알자스 지역은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하면서 독일 영토가 됐다가 1차 대전 이후 프랑스로 돌아왔다. [로이터=연합뉴스]
전승국인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프랑스에서 열리는 100주년 추념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 행 비행기에 올랐다. 영국의 테리사 메이 총리를 비롯한 과거 연합군의 지도자들도 파리로 몰리고 있다. 100주년을 맞아 유럽 여러 나라에선 사흘간의 추모 행사에 들어갔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프랑스 비미에서 독일 병사가 캐나다군 부상병을 옮기고 있다. 주변 상황으로 볼 때 독일군 병사는 막 포로가 된 것으로 보인다. [AP=연합뉴스]
1914년 7월 28일 시작해 1918년 11월 11일까지 4년 4개월간 진행된 1차대전은 인류가 겪은 가장 큰 참극의 하나로 기록된다.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군인만 약 972만(질병, 사고 포함) 명이 숨졌다. 민간인은 직접 사망자 약 95만, 전쟁으로 인한 전염병·굶주림 등으로 인한 간접사망자 약 590만을 포함해 모두 657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량학살이나 다름없는 엄청난 피해 규모다.
연합국에선 러시아가 군인과 민간인을 포함해 약 375만 명이 숨졌고 프랑스(약 170만), 대영제국(영국과 식민지를 포함해 약 122만), 이탈리아(122만)가 각각 10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다. 세르비아는 전 인구의 16%인 70만 명이 목숨을 잃는 대재앙을 당했다.
동맹군 측에선 터키가 인구의 13.7%에 해당하는 약 29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독일(약 247만), 오스트리아 헝가리(약 156만), 불가리아(약 19만) 등도 희생이 컸다. 산업혁명으로 고도의 기술 문명과 경제 발전, 국제화를 이룬 인류가 문명의 이기를 인간을 살상하는 데 동원한 비극이다. 장거리 야포, 비행기, 잠수함, 지뢰, 독가스 같은 과학기술 산물이 인류를 살상하는 데 대량 동원된 최초의 전쟁이 1차대전이었다.
제 1차 세계대전 당시인 1916년 동부 전선에 뱌치된 독일군이 러시아 비수아 강(현재는 폴란드) 주변의 참호에 중기관총을 배치하고 전투에 대비하고 있다. [AP=연합뉴스]
그래서 전쟁이 끝난 11월 11일은 영연방 국가 등 여러 지역에서 전몰자들을 추모하는 날로 삼고 있다. 다시는 비극적인 전쟁을 벌이지 말자고 다짐하는 날의 의미도 있다.
그런데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 인터넷판은 지난 6일 작가이자 사회운동가인 해리 레슬리 스미스(95)의 트윗을 게재했다. “포피(1차대전 전몰자 추념용 조화)를 2018년 현충일을 위해 달지 말고 인류가 (1차대전이 종전된) 1918년 이래 아무것도 배운 게 없음을 부끄럽게 여기기 위해 달자”는 내용이었다. 트윗은 스미스 자신을 “대공황 생존자. 제2차 세계대전 영국 공군 참전용사, 복지국가를 위한 활동가, (여러 책의) 작가”라고 소개하고 있다.
스미스의 지적대로 인류는 현재 1차대전 못지않은 대량 살상극을 멈추지 않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영국 런던의 왕립 첼시 보훈병원에서 빨간색 전통 군복을 입고 은퇴 생활을 하는 퇴역 군인들이 지난달 16일 제1차 세계대전을 추념하는 행사를 벌이고 있다. 퇴역 군인 앞에는 철근으로 1차대전 당시 영국군 철모를 쓴 군인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AP=연합뉴스]
인류의 수치 시리아 내전 사우디 예멘 내전 개입
대표적인 것이 2011년 3월부터 계속되고 있는 시리아 내전과 2015년 4월 시작된 사우디아라비아 주도의 예멘 내전 개입이다. 피해 규모부터 어마어마하다.
BBC방송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인권단체인 ‘시리아 인권 관측기구’의 자료를 인용해 올해 8월까지 시리아 내전으로 11만613명의 민간인을 포함해 모두 36만4371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장기 행방불명으로 사망으로 추정되는 15만6900명은 제외한 수치다. 이 단체는 여기에 더해 보고나 관측되지 않은 10만 명 정도의 사망자가 더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7년 8개월에 걸친 내전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총격·포격·폭격 등으로 ‘도살’되고 있음에도 국제사회는 아무런 해결 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현재 러시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정부군은 전국의 62.2%를 장악해 사실상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다. 미국이 간접 지원하는 소수민족 쿠르드족 등이 27.3%를, 사우디아라비아가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반군이 9.7%를 각각 차지하고 있다. 극단주의 테러단체인 이슬람국가(IS)가 1% 미만의 작은 지역에서 버티는 중이다. 2011년 내전의 발단이 된 알아사드 정권 퇴진도, 민주화도, 심지어 평화도 요원한 상황이다. 종전 100주년을 맞는 올해까지 인류는 1차대전의 참극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결코 과장된 이야기가 아님을 보여준다.
영양실조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예멘 소년이 10월 30일 타이즈라는 도시의 병원에 누워 있다. 유엔은 예멘 이 사우디아라비아의 봉쇄로 지난 100년 이래 최악의 기아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했다. 인류가 1차대전이 끝난 지 100년이 되는 지금까지 전쟁의 비극에서 배운 게 없다는 개탄의 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AFP=연합뉴스]
사우디아라비아는 2015년 4월부터 국경을 맞댄 예멘의 내전에 개입하고 있다. 이슬람 수니파인 예멘의 압둘라 만수르 하디 대통령이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후티 반군에 밀리자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는 아랍에미리트(UAE)·이집트·쿠웨이트 등과 함께 연합군을 조직해 내전에 뛰어들었다.
문제는 내전 개입이 분쟁으로 끝나지 않고 인도주의적 재앙으로 번지고 있다는 점이다. 영국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지난 10월 15일 예멘 내전에서 폭격과 전투 등으로 민간인을 포함해 1만 명 정도가 숨지고 수백만 명이 집을 잃었으며 840만~1300만 명이 아사 위기에 처했다고 보도했다. 유엔은 예멘이 지난 100년 이래 인류가 처한 최악의 기근을 겪고 있다고 개탄했다. 1차대전이 끝나고 100년이 된 지금 다시 그 시절의 대량살상과 기아 참극이 재현되고 있는 세이다. 인디펜던트는 사우디가 예멘을 봉쇄하면서 기아 위협을 전술의 하나로 활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미국 일간지 시카고 트리뷴은 이미 2017년 11월 사우디의 예멘 봉쇄로 식량과 의약품을 포함한 물자 공급이 막혀 2017년 한해만 5만 명의 어린이가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모니터링 그룹을 인용해 보도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도 같은 시기 유엔 소식통을 인용해 사우디가 봉쇄를 풀지 않으면 수천 명이 추가로 숨질 것으로 우려했다. 미국의 후버 연구소는 2015년 12월 사우디가 하루 2억 달러의 전비를 지출하고 있다고 추산했다.
이뿐이 아니라 리비아와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내전이나 무장 충돌로 인명이 희생되고 있다. 중동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동부에선 우크라이나 정부군과 러시아가 지원하는 분리주의자 사이에 ‘돈바스 전쟁’이 한창이다. 미국도, 유럽연합(EU)도 이 살상극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남중국해에선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한창이다. 양국은 대규모 무역분쟁도 벌이고 있다. 감정의 골은 날로 깊어만 간다. 1차대전 종전 100년을 맞는 올해 인류는 여전히 분쟁 중이다.
이런 불안하고 위태로운 상황은 1차대전이 발발하던 당시와 큰 차이가 없다. 세 가지 점에서 그렇다. 첫째가 무력사용 유혹에 쉽게 빠지는 국제사회다. 지루하고 힘든 외교적 대화와 설득, 타협과 양보의 과정을 거치는 대신 우세한 무력을 사용해 상대를 간단히 제압하고 싶은 유혹이다. 1차대전 발발 과정을 살펴보면 이런 특성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대전의 도화선은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사라예보에서 암살된 사건이다. 오스만튀르크 영토이던 보스니아를 1908년 오스트리아가 병합하자 세르비아인과 보스니아 인구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던 세르비아계 주민은 이를 세르비아에 합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을 세르비아 민족주의라고 불렀다. 암살범인 19세의 세르비아계 보스니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도 그런 생각을 했다. 현재 이탈리아, 헝가리, 터키를 비롯한 세계 각국에선 민족주의와 과격한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1차대전을 촉발한 당시와 갈수록 닮아가고 있다.
프랑스 서북부 샤를빌메티에르의 뒤칼 성에서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년 행사를 위해 당시 사용하던 르노 17 경전차가 전시되고 있다. 1차대전에선 전차와 비행기, 잠수함 등 다양한 살상무기가 실전에 동원됐다. [데거 실전에 배치된 전쟁처음 등장했다. [AFP=연합뉴스]
둘째는 효과적인 외교의 부재다. 사라예보 암살보다 사건 해결을 둘러싼 외교의 실패가 대전의 더욱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암살 1주일 뒤 오스트리아는 동맹국인 독일에 '세르비아를 공격할 경우 그들의 동맹국인 러시아가 나설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를 지원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동맹인 독일은 지원을 약속했다. 오스트리아는 힘든 외교보다 손쉽게 보인 무력을 택한 것이다. 그 결과는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공중분해였다. 독일 제국은 호엔촐레른 왕조가 물러나고 영토 일부를 잃는 데 그쳤지만 다민족 국가였던 오스트리아는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 영토는 현재 10개국으로 나뉘어 있다.
그 뒤 한 달 가까운 기간 동안 유럽 각국은 전쟁을 막기 위해 외교 노력을 벌였으나 지지부진했다. 심지어 영국과 독일, 러시아 왕실은 혈연관계였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러시아를 믿은 세르비아는 자존심을 앞세웠다. 독일을 믿었던 오스트리아는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다.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워 슬라브 종주국을 자처하던 러시아는 남슬라브족인 세르비아를 돕겠다며 즉시 병력 동원령을 내렸다. 사흘 뒤 독일은 러시아에 동원 중지를 요청했으나 ‘병력 동원은 오로지 오스트리아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답을 보냈다. 다음날인 8월 1일 독일은 동맹을 위해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 이틀 뒤엔 3일 러시아와 동맹국인 프랑스에 선전포고하고 그 중간에 있는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했다. 그러자 영국은 벨기에의 중립을 훼손했다며 4일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이틀 뒤 고민하던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에 선전포고하면서 전쟁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게 됐다. 무력사용의 유혹에 빠져 외교보다 힘에 의존한 것은 유럽의 모든 강대국이 마찬가지였다. 이는 끔찍한 비극으로 이어졌다. 외교 실패는 수천만 명의 인명 살상으로 이어졌다.
당시와 비교하면 지금도 효과적인 외교적 해결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시리아 내전도, 사우디의 예멘 내전 개입도, 돈바스 전쟁도 외교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의 핵 도발도 외교를 통한 해결 시도를 시작만 한 상태가 아닌가.
셋째는 동맹의 한계다. 군사공동체인 동맹만으론 결코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동맹 때문에 연쇄 참전으로 이어진 것이 1차대전의 특징이었다. 특히 외교 노력을 수반하지 못한 동맹은 더욱 효율이 떨어진다는 교훈을 준다. 북미와 서유럽의 다자 동맹인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는 물론 심지어 한미동맹도 무조건 맹신할 순 없는 상황이다. 무조건적인 동맹 의존도, 공허한 이념이나 이상 추구도, 한쪽 편들기도, 민족주의 맹신도 모두 극복의 대상이다. 우리의 실력을 기르고, 우리 국민의 국익을 위한 외교를 펼칠 필요가 있다. 1차대전 종전 100년을 맞아 냉정하게 살펴보는 동아시아와 한반도 상황이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출처: 중앙일보] "1차대전 종전 100년…인류는 전쟁의 비극에서 배운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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