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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의 명산과 명인-제8편] 땅의 자궁은 여행이 끝나는 그곳에 있었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11월29일 14시45분    조회: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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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김호림 특별기고
백년 고목과 멀리 보이는 오봉산.

 

  (흑룡강신문=하얼빈)그곳은 용정 시내의 한쪽 모퉁이에 있다. 여기를 지나 더 가면 끝머리에 오랑캐령을 만나게 된다. 오랑캐령은 옛날 이민들이 두만강을 건너 간도로 들어오던 경계물이다. 회령(會寧)을 지나 두만강을 건너고 삼합(三合)에서 이 산줄기를 넘으면 곧바로 ‘오랑캐’의 넓은 땅이 펼쳐진다.

  안내 표식물이 따로 없지만 진료소 역시 쉽게 찾을 수 있다. 시내를 벗어나면서 기사에게 한마디만 귀띔했다. “인제 차들이 여러 대나 길가에 주차하고 사람들이 줄레줄레 서있는 그곳인데요.”

  비술나무 아래의 ‘강덕(康德) 진료소’는 그렇게 우리의 시야에 불쑥 뛰어들고 있었다.

  ‘강덕(1934~1945)’은 괴뢰 만주국 부의(溥儀) 황제의 연호이다. 하필이면 용정 시내의 귀퉁이에 나타나는 이유가 있다. 그때 그 시절 강덕은 또 다리의 이름으로 팔도촌(八道村)에 이어졌던 것이다.

  팔도촌에서 오정묵(吳正默)은 오랜 시절을 보냈다. 미상불 강덕은 그의 옛 추억과 잇닿는 다리요, 고향의 문패를 밝히는 명호(名號)였다.

  마침내 병자들의 발길이 끊어졌을 때는 점심 무렵이었다. 대충 헤아려 보니 오전 한나절에 6,70명이 진료소의 문턱을 넘고 있었다. 많을 때는 거의 백 명의 병자가 다녀간다고 한다. 용정은 물론이고 산 너머 연길에서 오고 타성에서도 찾아온단다. 지어 사천(四川)과 운남(云南) 등 오지에서 소문을 듣고 오는 사람도 있었다. 자그마한 이 진료소는 마치 시내의 어느 종합병원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오봉산 어구의 비둘기산을 답사하고 있는 오정묵.

 

  오정묵은 흰 가운을 벗어놓은 후 진료소를 나섰다. 이때부터 그는 더는 병자를 보는 의사가 아니었다.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 그러했다. 그는 혹자는 작가들과 글을 담소하는 시인이 되고 혹자는 문화연구회 회장으로 토론장에 나서며 혹자는 시골의 논물에 발목을 적시는 농부가 된다.

  인터뷰를 나눈 곳은 문화연구회의 사무실이었다. 연구회의 전칭은 ‘연변천불지산생태문화연구회’, 오정묵이 주도하여 만든 사단법인이다. 천불지산과 천불지산에서 사는 사람들을 책으로 기획한 사람 역시 이 오정묵이다. 실은 책을 만들면서 인터뷰를 할 첫 대상자도 다름이 아닌 오정묵이여야 했다.

  손을 꼽아 보면 오정묵과 10여 년 전에 첫 만남을 가졌다. 그때부터 연변에서 답사와 탐방을 할 때마다 그를 찾게 되었다. 천불지산의 옛 성터 답사에 오정묵의 안내를 받은 적 있다. 그는 천불지산의 산 주인이었다. 천불지산 기슭의 어곡전(御谷田)을 탐방할 때도 오정묵의 안내를 받았다. 그는 이 어곡전의 새 주인이었다. 또 지명 조사를 하면서 오정묵의 안내를 여러 번 받았고 인물탐방을 하면서 그의 소개를 자주 받았다.

 

오씨네 팔남매의 옛 사진, 아래줄의 제일 오른쪽 사람이 오정묵이다.

 

  산의 동행자를 만나듯 오정묵을 거듭 만났다. 만날 때마다 그와 긴 대화를 나눴다. 이번 인터뷰는 그 이야기를 문자로 재확인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글을 적으면서 불현 듯 산에 오르는 건 기실 산의 ‘높이’를 오른다는 말이 떠올랐다.

  이 ‘산’의 이야기는 바로 두만강을 건넌 그곳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오씨 가족은 오랑캐령을 넘은 후 곧바로 산기슭의 부암동(富岩洞)에 행장을 풀었다. 그게 1923년에 있은 일이라고 오정묵은 가족의 이왕지사를 정리하면서 손을 꼽아 헤아렸다. 조부는 아내와 함께 맏아들과 여동생을 데리고 함경북도 명천에서 이국타향으로 이 여행을 떠났다. 산 저쪽의 고향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한 머나 먼 여행이었다.

 

나무다리의 강덕교는 콘크리트의 팔도교로 변신했다.

 

  산행을 하듯 오정묵은 부암동 근처를 자주 다녀왔다. 산과 마을을 찾아 선조의 발자취를 더듬었다.

  부암동은 오랑캐령과 이웃한 오봉산(五峰山)의 기슭에 있었다. 오봉산은 이름 그대로 다섯 봉우리가 있다고 해서 부르는 이름이다. 산에 바위가 많다고 해서 부암동이라는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비죽비죽한 바위들은 마을을 헤집고 다니는 강아지들을 방불케 하고 있었다.

  그래서 원래는 개똥바위산으로 불렸다고 오정묵이 말한다. 오봉산은 새로 고친 이름이라는 것이다.

 

102세의 오명숙 노인, 지신의 산 증인이다.

 

  산기슭의 부암동은 제일 흥성하던 1980년대 초에는 19가구의 80명이 살았다고 한다. 일찍 광서(光緖, 1875~1908) 말년에 생긴 촌락이라고 『용정현지명지(龍井縣地名志)』가 기록한다. 시초에는 웬일인지 마을에서 사람들이 자꾸 죽어나갔다. 언제인가 마을을 찾았던 노승이 그 영문을 밝혔다.

  “스님의 말씀하기를, 개똥바위산에 구렁이가 살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스님은 산에 암자를 지으면서 일부러 주봉을 수리봉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구렁이의 천적이 바로 독수리가 아닙니까?”

  들쑥날쑥한 다섯 봉우리의 산은 이때부터 오봉산이라고 달리 불렸다는 것이다. 정작 지명 ‘개똥바위산’은 버림을 받은 ‘개똥’처럼 남쪽의 산봉우리에 옮겨갔고 훗날에는 그 이름마저 바뀌어 개바위산으로 되었다.

  거짓인지 진짜인지 몰라도 8.15 광복 후 암자를 철거할 때 암자 밑에서 구새통 같은 큰 구렁이가 기어 나왔다고 한다.

  부암동은 구렁이가 웅크리고 있을 정도로 마을의 막바지에 있은 동네이다. 지신향(智新鄕, 현재 진으로 승격)의 제일 남쪽에 위치한다. 이민들은 산을 넘자마자 그대로 맥을 놓고 땅에 풀썩 주저앉은 듯하다. 함경북도 사람들만 두루두루 모여서는 공동체의 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이런 동네는 지신향 북쪽의 동네 명동(明東)이 제일 대표적이다. 1899년 함경북도 회령과 종성의 김씨의 문씨, 남씨 등 4세대 가족 20여 가구가 집단으로 지신 지역으로 이주하여 큰 이민부락을 형성한다. 이때 그들은 명동 주변에 규암재(圭岩齋), 소암재(素岩齋), 오룡재(烏龍齋) 등 구학서당을 세웠다. 이런 서당은 훗날의 명동학교의 모체로 된다. 명동학교는 1908년 연변의 첫 조선민족 중학교로 된다.

  그러나 이 지방에서 제일 먼저 이름 난 것은 학교가 아니라 아편이었다. 산과 들에 아편을 많이 재배했으며 이로 하여 대연촌(大煙村)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동씨 성의 중국인이 차지한 땅이라고 해서 동개지팡(董家地方)이라고도 했다. 명동이라는 마을은 김씨와 문씨가 동씨네 땅을 사들여 조선인 이민 마을로 된 후 지은 이름이다. 참고로 명동은 ‘동쪽의 조선을 밝게 하자’는 뜻이다.

  옛날부터 도박은 사람을 취하게 만드는 중독성 해악(害惡)이라고 했다. 아편의 고장에는 도박이 구렁이처럼 기어 나온다. 오정묵의 조부도 한때 지신에서 도박의 늪에 빠졌다. 조부의 막내 여동생 오명숙(吳明淑)이 실은 오빠의 도박 빚을 갚느라고 자의든 타의든 시집을 갔다고 한다. 오명숙 노인은 현재 102세(1917년 출생)의 나이로 용정의 시골 복지원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내친 김에 한마디 더 하면 오명숙 노인은 지신의 현존하는 최고령 장수 인물이다.

  오명숙 노인이 시집을 갔던 이웃의 그 마을은 성스런 가르침을 받는다는 성교촌(聖敎村)이었다. 이처럼 용정에 이주한 사람들 가운데는 기독교 신도들이 많았다. 초기 이민자들에게 성소(聖所)의 교회는 구심점이자 안식처로 되고 있었다. 그들이 대량 집거하던 1906년경 용정에는 크고 작은 교회당이 군립(群立)했다. 뒷이야기이지만, 오씨 가족이 나중에 정착한 마을도 기독교 신도들이 운집한 곳이다.

  오씨의 가계에 적힐 큰 사건은 하나 또 있었다. 작은 할머니가 시집을 갈 무렵 가문에는 큰 파문이 일어났다. 부암동에 정착한 명천의 이민 대오에는 다른 오씨 가족도 들어있었다. 그런데 이 두 오씨 가족에 갑자기 분쟁이 생겼다. 무슨 알력(軋轢) 때문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고 오정묵이 가족사의 수수께끼를 말한다.

  혹시 조부의 괴벽한 성미 때문일지 모른다. 조부는 술만 마시면 늘 이웃과 언쟁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술 때문에 동네 사람들에게 미움을 샀을지라도 고향 친지가 갑자기 오봉산이 낮다고 펄쩍 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먼 고향의 친인들인데요, 서로 어깨를 지대면서 살아야 할 분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분들은 아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신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기어이 적는 것은 그 가족에 모모한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진우(吳振宇)는 그의 부친을 따라 두만강을 건넜다고 한다. 오진우는 만주 땅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조선 혁명 1세대로서 훗날 조선 인민무력 부장을 역임, 인민군의 원수로 추대되었다.

  오진우가 오정묵의 가족과 어떤 인척 관계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오씨의 족보는 1950년대 초가의 한 장 두 장 찢어져 창호지로 붙여지면서 훼절되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족보의 고려종이는 돈을 팔지 않고도 비닐처럼 쓸 수 있는 바람막이의 좋은 대용물이었다. 각설하고, 군데군데 떨어진 추억의 조각을 퍼즐처럼 맞춰보면 혈연이 닿는 친척이라는 게 후설이다. 아무튼 오씨 가족의 가계는 두만강을 건넌 후 한때 다시 이어질 듯 했다. 명천군 화고면 안방리에 살고 있던 조부의 사촌과 편지연락이 오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 대륙에서 극좌운동인 ‘문화대혁명(1966~1976)’이 일어나면서 마치 폭파된 교량처럼 끊어지고 말았다.

  도박이요, 술이요, 알력이요 하는 등등 이런저런 풍파는 그칠 새 없었다. 오씨 가족에는 심심찮게 어둔 그림자가 드리웠다. 미구에 조부는 가족을 데리고 산 너머의 금곡(金谷)으로 이주했다. 금곡은 함풍(咸豊, 1851~1861) 초년에 생긴 조선인 마을인데, 금이 났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그러나 조부는 그냥 노다지를 만나지 못한 듯 했다. 얼마 후 또 북쪽으로 이사했고 이번에는 그 무슨 장사라도 하려는지 웬 상호(商號)로 이름을 지은 동성용(東盛涌)에 갔다. 그래도 생활의 풍족한 재미를 보지 못한 듯 했다. 종당에는 ‘노다지’를 찾아 멀리 북쪽의 팔도로 갔다.

  팔도는 여덟 번째 골짜기라는 뜻인데, 금곡처럼 금이 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금이 나는 금광(金鑛)이 부근에 있었다. 금광산에는 인부만 해도 한때 3만 명이나 있었고 한다. ‘금점꾼’이 무리로 있는데다가 또 북쪽의 왕청(汪淸)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어서 팔도는 언제나 도회지처럼 흥성했다. 시골치곤 희한하게 2층 건물이 있었고 또 기생집이 있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다들 2층 건물의 거리를 ‘기생거리’라고 불렀다.

  8.15 광복 후에도 ‘기생거리’는 팔도의 으뜸가는 명물이었다. 오정묵의 어린 기억에는 지금도 색다른 시골 풍경이 그려지고 있었다.

  “제가 어릴 때 ‘기생거리’는 장마당이었는데요. 제일 북쪽이 소장이었고 다음에는 돼지와 닭을 팔았습니다. 낫, 호미 따위의 농기구가 거리 양쪽을 메웠습니다.”

  장이 열리는 그날이면 팔도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름처럼 ‘팔도강산’에서 찾아오는 고장으로 되었다. 부근의 조양천(朝陽川)과 태양촌(太陽村)에서 인파가 몰렸고 산 너머 연집(煙集), 석인구(石人溝)에서도 장꾼들이 끼리끼리 건너왔다. 큰 도회지인 연길에서도 일부러 장마당을 찾아왔다.

  1950년대를 이어 1960년대 초반까지 팔도에 있었던 화려한 풍속도였다.

  그럴지라도 오씨 가족은 장마당을 바라고 이사를 한 건 아니었다. 조모의 친척이 팔도의 거부였다. 박씨 성의 이 거부는 농사도 짓고 목재 운수업도 운영하고 있었다. 오정묵의 부친은 박씨의 수하에서 트럭을 몰았다. 그때는 차 자체가 아주 드물었지만 박씨에게는 트럭이 세대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차들은 연료를 기름이나 가스가 아니라 장작을 태워서 달리는 차였다.

 

어곡전의 마당에서 열린 조선족농부절의 한 장면.

 

  뭐니 뭐니 해도 팔도에 이사 하나만은 잘 한 것 같았다. 마침내 ‘금광’을 캐게 된 것이다. 토지개혁 때 오정묵의 가족은 좋은 땅을 분여 받았다. 그 땅이 하도 욕심이 나서 누군가는 3만원을 주겠으니 땅을 팔라고 주문할 정도였다. 황소 한 마리의 가격이 겨우 3백원으로 호가할 때였다. 과수원도 있었다. 오씨는 마침내 오매불망 바라던 ‘지주’가 된 것이다.

  구렁이의 저주는 뒤따라 팔도에도 내리고 있었다. 1960년대 초였다. 그날 오정묵은 문득 이상한 꿈을 만났다. 난데없는 돼지가 물에 둥둥 떠가고 있었다. 이튿날 눈을 뜨자마자 강가에 나갔더니 통나무로 만든 다리가 오간데 없었다.

  다리는 만주 시기에 생겼다. 그래서 강덕교라는 이름을 지었으며 또 그 이름을 우리말로 다리에 적었다고 한다.

  “팔도 하면 강덕교였고, 강덕교 하면 팔도였지요.”

  그러나 팔도를 휩쓴 큰물은 엄청난 구렁이처럼 강덕교를 한입에 삼켜버렸다. 팔도는 수십 년 만의 특대 홍수를 만났다.

  홍수는 마치 그 무슨 붉은 ‘신호탄’을 하늘에 쏘아 올린 것 같았다. 뒤미처 ‘문화대혁명’이 일어났다. 바야흐로 대륙에 검은 폭풍이 몰려오고 미증유의 재난이 터지고 있었다. 강덕교 부근까지 이어졌던 큰 장마당도 물처럼 점차 줄어들더니 미구에 자취를 감췄다.

  기실 재난은 이에 앞서 골물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대륙은 농업집체화와 대약진(大躍進)운동을 이어 1959년부터 1961년까지 일명 ‘3년 재해’의 경제난에 빠졌다. 전국적으로 식량과 부식물 위기가 발생하여 기근에 시달렸다. 집집마다 아낙네들은 아침에 끼니를 에우면 저녁에 지을 쌀을 근심하고 있었다. 오씨의 쌀뒤주에는 더구나 거미줄이 칠 지경이었다. 열을 넘는 식구가 올망졸망 초가를 채우고 있었다. 오정묵은 팔남매의 다섯째이다.

  오정묵은 늘 꿈같은 환상의 세계에서 주린 배를 채웠다. 하늘의 두둥실 피어난 구름이 찰떡으로 변해서 당금 입에 떨어질 듯 했고 주룩주룩 쏟아지는 비는 국수로 되어 눈앞에 알른거렸다.

  이때 조부는 예전의 이민을 단행하듯 또 한 번 이행(異行)을 저지른다. 홀로 야산에 올라 초막을 지었다. 그곳은 팔도의 북쪽 노동촌(勞動村) 근처에 있는 벙어리산이었다. 노동촌은 원래 조양하(朝陽河)의 강바닥이 용 모양이라고 해서 용수평(龍水坪)으로 불리던 곳이다. 그러다가 동명의 마을이 많다고 해서 개명했다. 옛날에 정말로 용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벙어리산에는 짐승이 수풀을 이루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며칠에 한 번씩 자루를 메고 오셨는데요, 자루는 꿩이 꽉 차있었습니다.”

  어린 오정묵에게 조부는 하늘처럼 거룩한 존재였다. 포수가 아닌데도 하늘의 새를 잡을 수 있었다. 솥에는 이따금 기름방울이 떠올랐고 초가에는 늘 웃음소리가 굴러다녔다.

  조부는 꿩을 잘 요리한 후 마당의 우물에 넣어 보관했다. 우물을 냉장고로 이용한 것이다. 그는 미처 산에 오르지 못할 때에는 마을 부근의 논과 밭에 덫을 놓았다.

  “차끼(덫의 방언)로 쥐를 잡았는데요, 내장을 버리고 통째로 삶았습니다. 컵 하나에 한 마리씩 넣었지요.”

  그 후 벼라 별 육붙이를 다 맛보았으나 삶은 쥐 고기는 별미로 오정묵의 기억에 남고 있었다. 꿩이 하늘에서 내린 복덩이라면 쥐는 땅에서 바친 은혜였다. 더는 사람마다 저주하는 흉물스런 구렁이가 아니었다.

  사실상 구렁이처럼 발로 차서 멀리 던져버리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아버지가 오랜 만에 신발을 하나 사줬는데요, 한발이나 컸습니다. 넙적한 고무줄을 넣어서 실로 겨우 잡아 꿰맸지요.”

  “이걸 어떻게 발에 신어요?”라고 부르튼 소리를 했다가 오정묵은 대뜸 넉가래 같은 손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았다. 그렇게 일생동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에게 매를 맞았다. 이 고무신은 소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내 구렁이처럼 징그럽게 그의 발을 동여맸다.

  그보다 어릴 때부터 온몸을 칭칭 감은 병마가 있었다. 오정묵은 인터뷰 도중에 얘기하다 말고 서글피 웃었다.

  “하늘에서 맷돌이 빙빙 돌면서 저의 몸을 때리던데요, 왜 다른 사람의 눈에는 좀치도 보이지 않지요?”

  여섯 살 나던 어느 날 밤이었다. 오정묵은 소스라쳐 꿈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얼이 나간 것처럼 비명을 질렀고 갈팡질팡 뛰어다녔다. 온 식구가 놀라서 깨어났고 온 집이 금방 부산해졌다. 오정묵은 갑자기 눈앞에 안개가 낀 듯 희미했고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영양부족 때문이라고 했다. 그럴 법도 했다. 마침 삶은 쥐 고기를 별미처럼 먹었던 ‘3년 재해’ 때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짐승의 온갖 내장을 약처럼 식용했지만 끝내 눈 하나를 열지 못했고 귀 하나를 잃고 말았다.

  “그게 하늘의 뜻이겠지요. 아직은 세상을 다 보고 들으려 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오정묵은 누군가를 위안하듯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무렵 시름시름 앓고 있던 아버지는 몇 년 후 불치의 간암으로 진단을 받았다. 조부는 아들을 앞세울 수 없다고 하면서 단식을 했다. 조부가 절명한 꼭 30일 후 아버지가 그를 뒤따라갔다.

  온 세상이 갑자기 먹장구름에 뒤덮이는 듯 했다. 더는 세상을 눈으로 보기 싫었고 귀로 듣기 싫었다.

  날마다 마을에 울리던 종소리도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끊어지고 있었다. 이 종소리는 예전에는 교회당의 종루에서 아침마다 울렸다. 팔도의 최초의 이민은 거의 다 교인이었다. 오씨 가족이 천입했던 1930년대경 팔도는 이민의 초창기를 지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이때 교인 역시 북간도에서 지역별로 제일 많은 고장으로 알려진다. 북간도 선교의 중심지이었던 연길은 그 즈음 교인이 3천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문화대혁명’이 발발하면서 교인들은 부득불 교회당의 예배활동을 중단했다. 와중에 팔도 교회당은 한동안 예배행사를 지속했다. 연변에서 제일 마지막까지 교단을 고수한 것이다.

  오정묵은 교인이 아니었지만 끝끝내 ‘홍위병(紅衛兵)’ 완장을 팔에 걸지 못했다. 연길현 8중 일명 팔도중학교에서 유일하게 홍위병이 아닌 학생이었다. 홍위병은 ‘문화대혁명’의 극좌적 영향으로 산생, 중학생과 대학생 등 청소년을 주체로 삼은 군중조직이다.

  “마당에 심은 채소를 선생님에게 한 아름 드렸다가… 엉뚱한 모자를 쓰게 되었어요.”

  교원 천씨(千氏)가 급작스레 팔도에 하방(下放)했는데, 당금 밥상에 올릴 채소라곤 배추 한포기도 없었다. ‘된장에 손가락을 찍어 먹을 정도’였다고 오정묵이 말한다. 하방은 간부와 지식분자가 공장이나 농촌에 내려가서 기층의 사업과 생활을 하는 것을 이르는 중국말 어휘이다.

  그때 그 시절 많은 사람이 본의 아니게 팔도에 출현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은 본이든 타의든 막론하고 오지로 하방되고 있었던 것이다.

  천씨 성의 교원은 원래 시내 학교에서 물리학을 강의했다고 한다. 그는 ‘모든 사람은 결함과 우점이 있으니, 2분법으로 사람을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하느님 같은 존재였던 모택동(毛澤東) 주석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언감 입을 놀렸다가 ‘우파(右派)’의 덤터기를 쓰게 되었다. ‘우파’는 당시 ‘오류분자(五流分子)’의 일원으로 무산계급의 독재를 받는 범위에 속하고 있었다. ‘오류분자’는 ‘문화대혁명’ 시기의 정치신분으로 지주, 부농, 반혁명, 나쁜 분자, 우파를 가리킨다.

  아름으로 가져갔던 채소는 급기야 큰 맷돌로 되어 오정묵을 지지눌렀다. ‘오류분자’를 감히 돕는 그의 행적을 발견하고 누군가 상부에 고발했던 것이다. 그때 밖으로 나가면 눈총이 뒤를 졸졸 따르는 것 같았다고 오정묵이 말한다.

  “난생 처음 비판이라는 걸 받았는데요, 세상 사람들을 다 피하고 싶었습니다.”

  ‘뱀에 물린 사람은 새끼줄을 보고도 놀란다.’ 대인 기피증이 생길 정도였다. 그때부터 정치라고 하면 아예 먼발치부터 피하였다. 담임교원의 거듭되는 권유로 마지못해 ‘홍위병’ 가입신청을 했다. 그러나 그날을 마지막으로 중학교를 마치면서 ‘홍위병’과는 끝끝내 인연을 접고 말았다.

  제일 인연을 맺고 싶은 것은 진작부터 따로 있었다. 오정묵의 꿈이었다.

  “농사를 연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어릴 때의 배고픈 고생이 내내 머리에 남아서요. 언제나 풍년을 만들어서 배를 곯지 않고 싶었습니다.”

  오정묵은 촌 생산대의 사원(社員)으로 된 후 농업과학기술소조 조원을 일임했다. 아직 ‘문화대혁명’이 끝나기 전인 1970년대 초반이었다. 세간의 정치운동은 벽지의 시골에도 발을 들여놓고 기어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마치 해마다 논에 얄밉게 생겨나는 극성스런 돌피를 방불케 했다. 이 때문에 오정묵은 약방에 몸을 담게 되지만, 종국적으로 논과 밭에 다시 발을 들여놓게 된다.

  약방에는 형이 주선해서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책만 만나면 골방에 들어박혀 있는 오정묵을 두고 형은 ‘약쟁이’ 같다고 놀렸다. ‘약쟁이’는 마약 중독자를 이르는 말이다. 어린 오정묵은 책에 아편처럼 중독된 애송이 ‘약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소설을 쓰는 작가로 되고 싶었지만 넘을 벽은 너무 높았다. 무엇보다 자주 입을 다물고 손에 족쇄를 달아야 했다. 그 시절에는 ‘금지구역’이 아주 많았던 것이다. 그때마다 학교를 다니면서 덤터기를 쓰던 일이 자꾸 발목에 걸렸다. 그가 시인으로 출마한 것은 썩 훗날에야 있은 이야기이다.

  작가보다 독자의 눈이 더 밝았다. 형은 소설을 들자마자 벌써 결말을 읽고 있었다. “넌 책을 볼라치면 끝을 보는 성미인데… 의학공부를 하는 게 너의 직성에 맞는 것 같구나.”

  마침 대대위생소(大隊衛生所, 촌 보건소)의 소장 이씨가 형의 친구였다. 오정묵은 위생소에 입사하여 약제사로 되었다. 이씨가 만드는 처방전에 따라 약을 찾아 병자에게 넘겨주는 것이었다. 거개 서약 처방이라서 약리(藥理)를 조금 알고 중국 글을 조금 읽으면 눈 감고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시골의 병원은 수술실, X선 촬영실 같은 시설이 없었다. 응급실이자 곧 주사실이었다. 병리분석실, 화학검사실 같은 시설이 없이 약방이 전부였다. 당연히 사진이나 검사 비용이 없었고 처치 비용이나 약값 비용도 없었다.

  “사원은 촌 병원의 1회 등록비용이 5전이었습니다. 따로 비용이 있다면 회원처럼 해마다 병원에 인당 5원을 회부한 거지요.”

  병자는 곧 사원이었다. 의사도 실은 사원이었다. 병자를 사랑하면 의사가 된다. 아니, 병자를 사랑해야 의사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오정묵의 의사공부는 오래 전에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오정묵 본인이 어릴 때부터 병자였고 부친은 병으로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병자인 아들을 앞세우지 않고자 조부가 삶을 더 잇기를 거부하지 않았던가. 병자에 대한 오정묵의 사랑은 누구보다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늘은 땅에 맷돌만을 팽개친 게 아닌 듯 했다. 그때 그 시절 팔도에는 명의가 특별히 많았다. 본의 아니게 오지의 시골에 ‘하방’한 의사들이었다. ‘우파’의 덤터기를 썼던 천씨 교원과 대개 비슷한 경우였다. 그러나 시골에서 명의를 무더기로 만난 병자들에게는 하늘이 내린 은혜였다. 적어도 의학공부를 전념하고 있는 오정묵에게는 천상에서 내린 복음이었다.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의사도 있었는데요, 김수길(金秀吉)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분은 연변의학원 원장으로 계신 분입니다. 그리고 최영(崔英)이라고 부르는 분은 원래 도문중의원 원장으로 계셨습니다.”

  오정묵의 마음에 꽃처럼 심겨 있는 스승의 이름이다. 와중에 김성필(金聖赫), 나인근(羅仁根) 등 연변에 익히 알려진 노중의가 있었고 또 새로 등극하고 있는 명의 최필현(崔弼弦)이 있었다. 조씨(趙氏) 등 위생학교의 교원도 있었다. 그야말로 말세에는 피난처가 있다더니 팔도에는 팔도의 명의가 운집하고 있었다.

  이때 오정묵은 의학을 기초부터 체계적으로 확실하게 닦게 되었다. 해부학을 배웠으며 약리학을 답습하고 침구를 수련했다. 솔직히 어느 대학을 다닌들 명의(名醫), 명사(名師)의 이런 귀인들을 한꺼번에 만날 수 있을까.

  비가 내리는 하늘에 오색 무지개가 피어날 듯 했다. 1975년 팔도촌위생소에 연변의학원의 학생모집 정원(定員) 하나가 내려왔다. 현을 거쳐 향의 위생원(보건원)에 내려온 모집 정원은 특별히 오정묵을 지명하고 있었다. 시골 젊은이의 불타는 의학 열을 신변에서 지켜보았던 김수길 원장의 속뜻이었다. 이 소식을 알게 된 촌 위생소의 이씨가 오정묵의 모집 정원을 남몰래 가로챘다.

  무지개는커녕 뜻하지 않는 맷돌이 떨어져 내린 것 같았다. 결국 오정묵이 팔도를 떠나기로 작심한다. 뒷이야기이지만, 이 일은 오히려 그가 세상을 더 많이 알고 더 멀리 뛰게 된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다들 저를 말렸습니다. 고생을 사서 공사장으로 간다고 말입니다. 제가 공사(公社, 향) 전문대의 위생원으로 자청을 한 거죠.”

  정치사상으로 심신의 무장을 하고 있던 시대였다. 오정묵은 웃통을 벗어던지고 공사 현장에 뛰어들었다. 쪽지게에 무거운 짐을 메고 톱날 같은 바위로 톺아 올랐다. 뱀이 늘 길을 막았고 가끔 머리에 나뭇가지처럼 떨어져 내렸다. 발에서 자주 피가 흘렀고 어깨에 멍이 졌다. 지옥에 들어가서 악마의 고문을 받는 듯 했다. 어느 날인가 굴러 떨어지는 바위에 끝내 몸을 다치고 말았다. 그때 끊어진 오른쪽 팔은 지금도 감각이 무디고 힘이 풀린다.

  나무는 꽃을 잃으면 열매를 얻는다. 불꽃이 튕기는 공사장은 강인한 의지력을 낳았다.

  “뭐나 한다하면 손을 놓지 않아요. 무슨 저애를 받게 되면 그걸 꼭 이겨내고 맙니다.”

  그때부터 오정묵의 의학공부는 10년을 줄곧 하루같이 이었다. 연길현 여명(黎明)농업대학의 의사반, 연변위생학교의 의사반, 연변의학원 연수… 등등. 의학의 길은 미구에 바다 건너 태평양 저쪽의 미국까지 닿는다.

  산골의 애솔나무는 나날이 무성하게 자랐다. 어느덧 여기저기 가지가 뻗은 울창한 나무로 거듭났다. 나무에는 햇빛을 가리는 그늘이 생겼고 서늘한 그늘을 찾아 사람들이 웅기중기 모여왔다.

  오정묵은 ‘반농반의(半農半醫)’의 시골 맨발의사(赤脚醫生)로부터 팔도임장(林場) 위생소의 의사, 연길현 노투구진(老頭溝鎭) 중심위생원의 의사, 중한합작의 용정시 지역병원 분원 의사를 거쳐 용정시간부요양원 의사, 원장으로 되었다.

  팔도는 더는 전부가 아니었다. 강산은 팔도보다 훨씬 더 컸다. 그곳에는 ‘황제’가 나타났고 ‘부처’가 현신하고 있었다.

  팔도를 떠난 후 팔도 밖의 강산을 주름 잡고 다녔다. 발에 닿는 세상을 만나고 눈에 보이는 세상을 읽었다. 팔도강산의 유람기에는 산이 있었고 밭이 있었으며 나무가 자라고 곡식이 자랐다. 마을의 사람이 있었고 땅의 귀신이 있었으며 하늘의 신이 있었다.

  의도(醫道)는 나름의 인간 수련이었고 비방은 수련에서 터득한 나름의 깨달음이었다.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정진이 거듭되었다. 세상은 눈만큼 컸고 마음만큼 커지고 있었다.

  팔도의 고향마을은 오정묵의 기억에 어느덧 옛 초가로 허물어지고 있었다. “우리 7대(隊, 촌민소조)가 팔도에서는 제일 부유했댔는데요, 한때 팔도를 떠나지 않고 팔도를 매달리는 구실이 된 거지요.”

  팔도 13개 촌민소조에서 제7촌민소조는 남부러운 동네였다. 다른 촌민소조에서 1공(수)에 30전이나 40전 할 때 2원씩 했다. 공수는 인력이나 시간 단위로 계산한 가치이다. 동네는 부근 공소사의 부업을 맡아하면서 ‘노다지’를 캐고 있었다. 그 무렵 돼지고기 한 근의 가격이 1원 70~1원 90전 정도, 비누 한 개의 가격이 50전 정도였다.

  “동네 사람들은 웬만해서는 팔도를 떠나려 하지 않았지요. 여길 떠나면 더는 팔도만큼 잘 살 것 같지 못한 거지요.”

  벽지에도 도시바람이 불고 서울나들이가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이야기이다.

  오정묵은 짬만 생기면 용정 부근의 산과 마을을 답사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만났던 노인들을 다시 산과 마을에서 만났다. 산과 마을의 전설을 들었고 전설의 산과 마을을 보았다. 어곡전은 그렇게 만났다. 어곡전은 두만강 기슭의 천평(泉坪) 벌에 있었다.

  어곡전이 있는 천평 벌은 일찍 발해 때 벌써 벼로 이름나고 있었다. 『신당․발해전(新唐․渤海傳)』의 기록에 따르면 노성(盧城)의 벼가 유명. 노성이 속한 노주(盧州)는 바로 천평 일대로 비정된다.

  “만주의 강덕 황제에게 쌀을 진상한 곳이 바로 여기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땅을 기어이 살 작정을 했지요.”

  어곡전의 원래의 주인은 함경도 길주의 최씨 성의 이민이었다. 그는 ‘유지 온상 육모법’을 고안, 콩기름을 바른 크라프토지를 모상판 위에 덮어주어 모판의 온도를 높이고 이로써 벼가 빨리 자라게 했다. 최씨의 논에서 자란 벼는 소출이 높았고 또 땅이 기름져서 밥맛이 좋았다. 나중에 만주는 최씨에게 부의 황제의 수라상에 올리는 ‘어곡미’의 생산을 위임했다.

  기이한 운명이었다. 오지의 팔도에서 만났던 ‘강덕’을 두만강 기슭에서 재회하고 있었다. 못 다한 인연을 숙명을 통해 만나고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의사인 오정묵은 이때부터 농부 오정묵으로 변신한다. 미구에 어곡미가 산출되었고 어곡주가 만들어졌다. 오정묵은 어곡전을 개발하고 조선족 농경문화의 브랜드를 창출하면서 ‘조선족 농부절’을 발굴하기에 이른다. 2009년, ‘조선족 농부절’은 성급 무형문화재로 등록되며 오정묵은 이 문화재의 전승인(傳承人)으로 되었다. ‘조선족 농부절’은 미구에 계열행사로 발전하며 용정의 연도별 큰 문화축제로 등극한다.

  어릴 때 자나 깨나 쌀 근심을 했던 농부의 아들은 마침내 하늘처럼 높은 쌀뒤주에 덩실하니 올라앉았다. 정말이지 축제의 끝에 굿판이라도 벌려 살풀이의 장단으로 춤판을 벌이고 싶었다. 운명에서 어쩔 수 없이 만났던 살(煞)을 끝끝내 쌀의 마당에서 확 풀어버린 것 같았다.

  천불지산의 자락에는 곡미가 쏟아지고 곡주가 흐르고 있었다. 황궁과 잇닿은 어곡전만 있는 게 아니었다. 연변 조선족 교육의 선구자 김약연(金躍淵), 카프문학의 대표작가 최서해(崔曙海), 영화 ‘아리랑’의 작가 나운규(羅雲奎) 등등 유명인이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 오정묵은 시인인 독립운동가 송몽규(宋夢奎)의 명동(明洞) 옛집을 발굴, 보수한다. 천불지산은 백두산에서 동쪽으로 3백여 리 상거, 조선족의 역사와 문화가 유구한 명산이다. 천불지산의 역사를 연구하고 천불지산의 문화를 계승하고자 오정묵은 2008년 천불지산생태문화연구회를 설립하였다.

  마치 도인이 산속의 암자를 찾듯 오정묵은 천불지산을 자주 찾고 있었다. 천불(天佛)이 점지한 그 산은 산을 찾는 사람에게 또 다른 세계를 펼쳐주고 있었다.

  송(宋)나라의 문인 소동파(蘇東坡) 산을 유람하면서 남긴 시 한 수가 노상 그의 머리에 떠오른다고 한다. 『제서림벽(題西林壁)』, 이 시를 읽을 때마다 오정묵은 그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에 매혹된다.

  橫看成嶺側成峰이리 보면 고개요 저리 보면 봉우리라

  遠近高低各不同원근고저 보이는 건 모두가 다르구나.

  不識廬山眞面目여산의 참모습은 알기가 어려워라

  只緣身在此山中내 몸이 이 산중에 들어 있기 때문이리.

  인간이 본래 갖고 있는 진실한 모습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산 속에 갇혀 있으면 산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없듯 아상(我相)에 묻혀 있으면 나의 본래의 모습을 볼 수 없다. 내 마음 속에 있는 부처를 볼 수 없다.

  “병은 기실 병이 아닙니다. 인간을 가르치러 오는 거지요. 몸의 주인은 의사가 아니라 본인인데요, 많은 사람들은 이걸 까마득하게 잊어버립니다.”

  몸과 마음으로 떼지 못하는 인간의 병은 고칠 수 없다는 것. 병에 대한 깨달음도 그렇지만 인체의 장기(臟器)에도 오정묵은 나름대로 그의 일가견을 밝히고 있었다.

  “통상 오장육부(五臟六腑)라고 말하지만, 저는 기어이 육장육부(六臟六腑)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오장은 정, 기, 신, 혈, 혼, 백의 저장소라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이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는 머리(뇌)를 간, 심, 비, 폐, 신의 오장 장기에 더 넣어야 하겠죠.”

  한의학의 장부는 해부학적인 장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장기가 체표에 나타내는 기능현상을 망라한 개념이다. 이에 따르면 인체 전신의 조직과 정신활동을 주재, 지배하는 머리도 빠뜨릴 수 없다는 것이다.

  오정묵은 그가 보고 깨달은 참모습을 세상 모두와 함께 하고 싶었다. 얼마 전 그는 의사공부 반백년을 정성껏 수집, 정리한 비방을 책으로 묶어 20부 인쇄, 전부 지인과 의사들에게 배포했다. 세상을 함께 나누고 함께 걷고 싶단다.

  여행이 끝나는 그곳에는 바로 그가 오매불망 바라는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사에 시든 몸과 마음을 편안히 내려놓을 수 있는 안식처였다.

  “모든 걸 안아줄 수 있고 또 모든 걸 낳을 수 있어요. 바로 땅의 자궁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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