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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36)-동만항일유격대(1)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4월24일 09시21분    조회: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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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적인 무장탈취투쟁 활발히 벌려

조선인 민중들 유격대건립에 앞장서

화룡현유격대

1931년 겨울부터 동만 각지에서는 항일유격대의 건립사업을 다그쳤다. 화룡현항일유격대의 건설사업도 1931년 ‘추수투쟁’과 1932년 ‘춘황투쟁’에서부터 시작되였다.

1930년 ‘붉은 5월 투쟁’후 중공 화룡현위와 각구의 당조직에서는 개산툰, 달라자, 평강, 삼도구 등 지에서는 유격대, 적위대, 돌격대 등 로동자, 농민 무장단체를 조직했다. 그들은 이러한 무장단체에 의거하여 적들의 무기를 탈취하는 투쟁을 지혜롭게 펼치기도 했다. 1932년 봄, 장락영 등 돌격대원들은 개산툰에서 친일지주인 차성남의 장원을 습격하여 보총, 권총, 양포 한자루씩 탈취했다. 6월에는 개산툰돌격대 대장 리동일이 돌격대원들을 이끌고 선구공안국을 습격하여 총을 빼앗았고 7월에는 개산툰적위대 대원들이 백룡평해관을 습격하여 권총을 빼앗았다. 무기가 장만되자 이들은 개산툰의 고석동에서 ‘개산툰권총대’를 건립, 채규진이 대장을 맡았다. 권총대는 계속하여 무기탈취투쟁을 벌려나가면서 대오를 확대했는데 7월말에는 20여명으로 늘어났다.

중공 화룡현위 달라자구위에서는 ‘붉은 5월 투쟁’속에서 건립된 적위대를 기초로 1932년 여름 ‘달라자장총대’를 건립, 김창섭이 대장을 맡았다. 20여명의 대원을 갖고 있는 장총대는 금곡, 룡암, 달라자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그해 가을 장총대는 달라자와 함보동길에서 괴뢰군집사대를 매복습격하여 세놈을 죽이고 보총 6자루를 빼앗았다. 그들은 금곡의 매바위산의 동굴에다 소형병기공장을 앉히고 자작폭탄을 만들기도 하고 장총대의 무기를 수리해주기도 했다.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기념비

평강구에서도 1932년 여름 적위대를 기초로 유격대를 건립, 김세가 대장을 맡았다. 20여명의 대원을 갖고 있는 평강유격대는 평강, 장인강, 투도구 일대에서 무기탈취투쟁을 전개했다. 가을에 유격대는 장인강과 투도구의 지주장원을 습격하여 보총, 권총, 사냥총 등 20여자루를 탈취하였다. 삼도구에도 10여명으로 조직된 유격대가 있었는데 그들은 우복동, 삼도구 등지에서 활약했다.

1932년 12월, 화룡현위의 지시에 따라 각구의 유격대는 어랑촌에 집결, 화룡현유격중대를 건립하였다. 김세가 중대장을 맡고 ‘김아줌마’(별호 본명 김병활)가 정위를 맡았다. 1933년 1월 15일(음력) 어랑촌유격중대 중대장 김세는 일본군으로 변장한 14명 유격대원을 거느리고 삼도구 합신촌 친일악질지주 장보림의 장원을 들이쳤다. 이날 유격대는 보총 16자루, 탄약 500여발과 기타 군사물자를 탈취했다.

화룡현유격중대는 중공화룡현위의 지도아래 적극적으로 무장탈취투쟁을 벌려 1933년 봄에는 여러가지 총 50여자루로 무장한 8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리하여 화룡현유격중대는 화룡현중한항일유격대대로 확대편성되였는데 대대장을 장승환이 맡고 정위를 차룡덕이 맡았다. 화룡중한항일유격대대는 아래에 3개 유격소대를 두고 평강, 삼도구, 달라자, 개산툰 등지에서 계속하여 활동하였다.

1934년 3월, 화룡현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2퇀으로 편성되였다.

왕청현유격대

중공 왕청현위에서는 1932년초에 군사부장 김명균에게 유격대를 건립할 과업을 맡겼다. 김명균은 2월초에 현당위련석회를 열고 적의 무장을 탈취하여 자신을 무장하기로 했다. 2월 20일 김철은 유격대의 건립을 앞두고 대감자공안분주소를 불의에 들이쳐 보총 7자루를 탈취하였다. 뒤이어 석현 장동에서 자위단을 매복습격하여 보총 3자루를 로획했다.

반일유격대 창건의 기미를 알아차린 일제는 ‘대토벌’을 감행했다. 4월초 일제는 조선주둔 제19사단의 75련대 이께다대좌를 대장으로 하는 ‘간도파견대’를 조직하여 대토벌을 감행했다. 일제는 보병, 기병, 포병을 포함한 1600여명의 무력에 비행기까지 출동시켜 대감자와 대두천, 덕원리, 동일촌을 소탕하여 재더미로 만들었다. 이에 극도로 분노한 군중들은 항일에 떨쳐나섰다.

왕청현 열혈청년들은 소왕청 최창호네 방아간에 모여 10여명으로 구성된 왕청현로농반일유격대의 건립을 선포하였다. 김철이 대장을 맡았다. 회의에서는 또 리광 등 9명을 구국군에 파견하여 통일전선을 강화하기로 결정하고 리광을 대장으로 하는 별동대를 조직하였다. 유격대는 뒤골짜기의 사시나무숲속에 귀틀집을 짓고 유격대대부를 설치하였다.

유격대가 건립되였다는 소식을 들은 혁명군중들은 돈이 있으면 돈을 내고 량식이 있으면 량식을 내고 렵총이 있으면 렵총을 내놓았고 앞다투어 남편과 자식들을 유격대에 보냈다. 라자구 태평촌당지부의 최호연은 밤중에 태평의 지주 호가네 집과 상함의 지주 문가네 집을 습격하여 보총 2자루를 탈취하여 유격대에 보냈다. 군중들은 며칠사이에 렵총 18자루를 유격대에 보냈다. 무기가 있고 대오가 늘어나자 유격대는 적의 무기를 탈취하는 한편 유격전을 벌리기 시작했다.

항일투쟁시기의 김일성, 최현, 안길(왼쪽으로부터)

5월부터 김명균과 리광은 유격대와 별동대를 거느리고 하마탕 전하툰에서 지주의 집을 습격, 보총 7자루를 탈취, 남하마탕 교두에서 위만군수송대를 습격, 적 한개 패를 소멸하고 보총 33자루, 탄약 10상자, 량식 수십마대를 포획하였다. 같은 시기 리원섭이 거느린 유격대는 길청령에서 일제의 군용자동차를 매복습격하여 보총 1자루와 많은 탄알을 로획하였다.

유격대의 타격을 받은 일제는 피비린 탄압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상하진에 둥지를 틀고있던 일본군은 위만군과 함께 6월 22일, 룡수동에서 무고한 백성 24명을 학살하였다. 유격대는 룡수동적위대와 함께 대북구어구에 배복해있다가 놈들에게 복수의 불벼락을 안겨 일본군관 2명을 포함한 20여명의 적을 격살하고 보총 20자루와 탄알 수천발을 로획하였다. 짧디짧은 2개월사이에 유격대는 신속히 발전하여 유격중대로 편성되였다. 김철이 중대장으로 임명되였다.

8월에 유격중대는 별동대와 협동작전하여 마록구에서 위만구수송대를 습격, 적 10여명을 격살하고 13자루의 보총과 많은 탄알을 로획하였다. 그후 유격대는 하마탕 위만군병영을 습격하였고 로송령에서 철도경비대 40여명을 무장해제하였으며 목단지교두에서 위만군수송대를 습격하였고 천교령, 묘령, 황가령 등지를 습격하였다. 유격대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무려 30여차의 련속작전을 벌려 적 150여명을 소멸하고 수십자루의 무기와 수천발의 탄알 및 기타 군수품을 로획하였다.

황재룡 등 4명의 유격대원은 남하마탕에서 친척방문을 오는 국자가의 위만군 영장 손가의 아들을 인질로 보총 13자루, 탄알 1300발을 얻었다. 같은 해 10월초에 왕청현유격대는 자신의 력량을 확대하기 위하여 츠얼거우에 대피하고 있는 삼림대-관대장부대를 쟁취할 목적으로 정치지도원 김은식을 위수로 한 5명의 유격대을 삼림대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관가의 배신행위로 김은식, 장포수 등 4명이 살해당하고 1명이 부상당하였다. 이에 분노한 유격대는 일제에게 투항하러 가는 삼림대를 추격하여 10여명을 살상, 보총 5자루와 말 두필을 로획하였다.

1932년 봄, 순시원으로 파견을 받은 김일성은 안도현에서 군중을 발동하여 항일무장대오를 건립하였다. 김일성은 안도현 소사하토기점에서 군사훈련반을 꾸려 항일청년들을 양성한 후 구국군의 별동대를 조직, 1932년 4월, 안도현별동대는 남만지구의 조선혁명군을 쟁취하려고 남만원정을 하였다. 그들은 남만을 순시하고 북상하여 녕안현에 도착하였다. 그때 녕안현에서는 김근의 지도하에 녕안현유격대를 건립하였다. 1933년 녕안에 도착한 김일성의 별동대는 녕안현유격대와 함께 왕청현에 전이하여 왕청현유격대와 합류, 왕청현유격대로 확대편성, 량성룡이 대대장으로, 김일성이 정치지도원으로 임명되였다.

유격대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던 일제는 1933년 벽두에 수비대와 위만군, 자위단, 경찰 등 700여명을 동원하여 사수평쪽으로부터 쳐들어왔다. 대대장 량성룡은 1,2중대를 거느리고 유리한 지형물을 리용하면서 적을 매복습격하여 30여명을 격살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대장 최명산은 적 20여명을 쓰러눕힌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적들은 할수 없이 시체를 끌고 가야하쪽으로 꽁무니를 뺐다.

유격대는 일제의 앞잡이와 악질지주 및 적대분자들을 숙청하였으며 토비무장을 해제하고 일제의 간첩 10여명을 처단하기도 했다. 유격대는 쟈피거우 청립에서 전선대를 운반하는 일제수송대를 습격, 적 10여명을 소멸하고 보총 9자루를 로획했으며 가야하 상동에서 일제의 소금수송대를 습격하여 보총 3자루를 로획하였다. 김만삼 등 유격대원들은 동신향 얼차즈에 피신해있는 북만로농의용군 10여명과 구국군 수명을 설복하여 유격대에 받아들였다.

사수평의 ‘토벌’에서 실패한 일제는 대병력을 동원하여 항일유격근거지 소왕청에 대한 ‘춘기토벌’을 발동하였다. 1933년 4월 17일부터 3일간에 거쳐 일제는 15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소왕청, 대왕청, 쟈피거우 등 세개 골짜기를 포위하였다. 이때 3중대는 다홍왜에서, 4중대는 요영구에서 각기 보위임무를 집행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근거지에서는 두개 중대가 수십명의 적위대의 지원을 받으며 열배도 훨씬 넘는 적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되였다. 유격대는 유리한 지형물을 리용하면서 기동령활한 유격전술로 3일동안에 적 400여명을 살상하여 유격근거지의 보위전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유격대는 박격포 4문, 보총 253자루와 많은 군수품을 로획하였다. 소왕청 근거지보위전의 승리는 군사정치면에서 일제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고 혁명적 항일민중들을 크게 고무하였다.

1934년 3월, 왕청현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3퇀으로 개편되여 항일투쟁의 새로운 로정에 올랐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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