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42)—반‘민생단’투쟁 3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5월28일 13시31분    조회:540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가짜사건에 휘말려 수많은 원혼 통곡하고

사형장에서도 “공산당 만세!” 높이 웨쳐

억울한 원혼들

동만항일무장투쟁의 참가자 채광춘(蔡光春)은 반‘민생단’투쟁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금창(金仓)에서 총살당한 사람은 정필국, 정동식, 최학철, 서노톨, 오일파이다. 5명은 구위 서기거나 구위 이상의 간부들이였다. 이들을 모두 묶어 가지런히 땅에 꿇어앉히였다. 나는 처음으로 총살임무를 집행하다나니 속이 떨리여 세번째부터 제대로 맞히지 못하였다. 이때 반장은 ‘탄알이 귀중한데 랑비할수 없다’고 하면서 나의 사격을 저지하였다. 그리고 총창으로 나머지 사람들을 찔러죽였다...

우리가 잠을 자고 있는데 보초병의 고함소리가 우리를 깨웠다. 일어나보니 정필국이 살아서 왔던 것이다. 그는 ‘나에게 령도를 만나게 해 줄수 없는가? 나는 민생단이 아니고 공산당원이요. 죽기가 아쉬운데 나를 남겨주오.’하고 말하였다. 하지만 령도는 그의 애걸을 들어주지 않고 우리를 보고 그를 데리고 가서 총살하라고 하였다. 후에 내가 가보니 그의 온 얼굴은 피흔적과 상처투성이였다. 그가 만약 민생단이라면 무엇때문에 적들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고 다시 우리를 찾아와 두 번째로 총살당하겠는가?”

 

 

 

1932년 4월, 이케다대좌가 지휘하는 ‘간도파견대’가 룡정으로 침입하는 장면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4권)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고도라는 별명을 가진 화룡현의 반제동맹위원회 책임자는 재인강에 나가서 정치공작을 하다가 자위단원들에게 체포되여 30여명의 애국자들과 함께 사형장으로 끌려나갔다.

자위단원들은 그들을 한줄로 세워놓고 한사람한사람씩 목을 쳐서 죽이였다. 고도도 물론 그런 형벌을 면할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도의 목은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대신 목의 살과 가죽이 훌렁 벗겨져서 등에 가 붙고 온 몸이 피범벅이 되였다. 이것은 죽은 그 자체보다 더 고통스러운 치명상이였다. 고도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사이에 적들은 사형장을 떠나가버렸다. 밤중에 정신을 차리고 형장에서 가까스로 일어난 그는 이를 악물고 아픔을 참으면서 등에 가 붙은 살가죽을 목에 끌어다 붙이고 옷을 찢어 동여맨 다음 60여리의 험산준령을 배밀이로 기고 굴러서 마침내 어랑촌유격구로 무사히 돌아왔다.

그러나 고도의 상처가 완치되기도 전에 좌경분자들은 그를 군중심판장으로 끌어내였다. 그가 적의 주구로서 혁명대렬내에 깊숙이 잠복하려고 일부러 목에 상처를 내가지고 유격구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좌경분자들은 고도의 ‘죄행’을 장황하게 늘어놓았으나 심판장에 끌려나온 군중들은 그들의 판결을 한사람도 찬성하지 않았다. 심판의 조직자들은 고도를 살려두고 일정한 기간 검열을 통해 그의 정체를 밝힌다는 판결을 내리였으나 뒤에 돌아가서 그를 암살해버리였다.

연변 당사연구부문에서 1982년에 수집, 정리한 자료에 따르면 원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4퇀 전사 전흥문은 자신이 민생단으로 지목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인차 대오를 떠나 달아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쪽지를 남기였다고 한다. “나는 공산당원이지 민생단원이 아니다. 당신들이 나를 잡으려는 것은 백분의 백으로 틀린 것이다. 나는 산에서 내려가지만 절대 주구로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가지만 나의 총은 계속 혁명해야 한다. 나는 총을 큰 나무밑에 묻어놓았다.” 그의 말대로 과연 그 나무밑에서 총을 찾게 되였다. 1945년 ‘8.15’ 광복후 주보중은 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파견하여 전흥문을 찾게 하였으며 그를 인민해방군의 패장으로 배치하였다고 한다.

1930년 음력 4월, 중공훈춘현위 선전부장 김규봉이 민생단으로 체포되여 압송될 때 이런 일도 있었다. 주피구로 압송되는데 갑자기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압송하던 유, 최 등 사람들은 적들의 토벌대가 덮쳐오는 것으로 오인한 나머지 김규봉을 버리고 급급히 도망쳤다. 하지만 김규봉은 홀로 그들을 따라 20리를 쫓아갔다. 그들을 따라잡은 김규봉은 “당신들을 파견하여 나를 체포하라 하였는데 나를 데리고 가지 않으면 어떻게 교대하겠는가?”고 말하였다. 하지만 유, 최 등 사람들은 갈 길이 멀고 또 적들을 만나게 되면 위험하다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김규봉을 총살하여버렸다고 한다.

원 중공화룡현위 서기 김일환이 살해된 경우는 더욱 억울하다. 처창즈의 당지부서기 리억만(변절자)은 경상적으로 약담배를 피우며 일을 하지 않았기때문에 김일환은 의견을 제기하였다. 이에 리억만은 앙심을 품고 보복하려 하면서 김일환을 민생단 혐의분자라고 거짓 고발하였다. 1934년 11월의 어느날 리억만은 군중대회를 열고 김일환을 즉시로 총살할 것을 선포하였다. 이때 구국군의 한사람이 대표로 나서더니 “김일환은 진정으로 항일하는 좋은 사람이다. 우리는 일년 남아 같이 있었는데 그를 잘 알고 있다.”고 말하였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구국군의 모든 병사들이 총알을 재워들고 “누가 만약 김일환을 총살하면 우리는 곧 그 자의 머리를 박살내겠다.”고 웨쳐댔고 회의장의 기분은 매우 긴장되였다.

결국 리억만이가 밤중에 한무리의 사람들을 데리고 김일환을 암살했다.

그날밤 총살을 집행한 사람의 말에 따르면 김일환은 사형될 때 “공산당 만세!”, “동지들은 혁명을 끝까지 하라!” 등의 구호를 웨쳤다 한다.

어찌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김일환뿐이랴? 가짜사건에 휘말려 죽음을 당한 수많은 억울한 원혼들이 울고 있다.

반‘민생단’투쟁 종결

1935년에 이르러 “동만에 지금 있는 고려동지들은 누구나 모두 민생단이라는 공술이 있다. 만약 민생단의 공술이 없는 고려동지를 찾으려면 찾을수 없게 되였다.”고 지적한 위증민의 말은 추호도 과장이 아니였다. 하여 반‘민생단’투쟁을 주도하여오던 중공동만특위 령도자들도 누가 민생단이고 누가 공산당인지 똑똑히 분간할 수 없게 되였다. 결국은 무지막지한 의심과 야만적인 핍박공술로 거의 모든 조선인항일혁명간부들에게 민생단협의를 들씌워놓은 셈이였다. 조선인간부들도 며칠이 지나지 않으면 곧 민생단이라는 공술이 있었으니 동만특위의 한족간부들은 큰 곤혹과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자기 신변의 “고려동지 간부들에 대하여 일부의 무서움까지 느끼게 되였다.” 하지만 동만항일근거지와 공산당, 공청단 조직내에서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던 한족령도간부들은 결코 조직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조선족 모두를 공술과 의심 그대로 배척하거나 체포할 수는 없었다.

동만의 모든 항일유격구가 기본상 조선인들로 이루어져있고 인민혁명군의 기본대오와 골간들도 대부분이 조선인들이였다. 때문에 조선인들에 대한 전체적인 배척과 탄압은 바로 동만항일혁명의 포기거나 자멸과 거의 같은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하여 민생단협의가 있는 거의 모든 조선인들을 아무리 믿기 어렵고 의심스럽다 하지만 그들과의 공존은 불가피한 사정이였고 그들과는 공동투쟁 역시 불가피한 선택이였다. 하여 반‘민생단’투쟁에 대하여 재고하지 않을 수 없었고 피비린 투쟁방법만이라도 완화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민생단공술과 혐의가 있으면서도 혁명대오내에서 주요한 간부로 있은 조선인들로는 인민혁명군 제1퇀 퇀장 방성괴, 정치위원 림수산, 제2퇀 참모장 류란환, 김일성, 동만특위 부녀위원 황선일 등이 있었다.

당시 동만항일유격근거지 군중의 95%는 조선인이였다. 일제의 삼광정책의 잔혹한 유린속에서도 유격근거지 인민과 군인들은 완강하게 유격근거지보위에 목숨을 내걸고 나섰다. 대다수가 민생단이라면 무엇때문에 항일무장투쟁에서 그처럼 생사를 무릅쓰고 용감하게 싸우겠는가? 이러한 형세하에 중공만주성위 길동순시원 오평은 중공동만특위에 편지를 보내여 “만약 유격구내의 절대다수 군중이 민생단이라면 이런 유격구역은 일찍 일본군에게 소멸되였을 것이다.”고 지적하면서 종자운을 비판하였다. 위중민도 만주성위에 보내는 편지에서 “과거 인민혁명군은 완전히 민생단의 령도아래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정치상의 매우 큰 착오이다.”고 종자운을 비판했다. 그후 종자운도 공청단만주성위에 편지를 보내여 위증민을 비판, “그들은 고려동지들을 완전히 체포하고 해결하려고 하며 그렇지 않으면 모두 무조건적으로 사업을 정지시키려고 계획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6월 17일, 동만공산당과 공청단 특위가 제출한 보고서는 민생단이 “우리의 령도기관을 민생단의 기관으로 만들려 한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줄곧 지금에 이르기까지 민생단의 문건을 발견하지 못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반‘민생단’투쟁에서 매우 적극적이던 공청단동만특위 서기이며 제2군 제1퇀 정치위원인 주소동마저도 공청단성위에 보내는 편지(10월 23일)에서 “만약 동만에 그렇게 많은 민생단이 있다면 이 몇년간의 영용한 반일투쟁은 계속될 수 없었고 우리의 인민혁명군은 일찍 일제한테 가서 변절하였을 것이며 진작 폭동이 일어나 령도자로 있는 몇명의 중국인을 죽여버리고 투항하러 갔을 것이다.”고 지적하였다.

1935년 5월, 쏘련으로 떠난 중공동만특위 서기 위증민은 그해 12월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민생단들이 가끔 유격구에서 도망쳐 일본제국주의한테 가서 투항하지만 일제도 그들을 완전히 믿지 않는다(아주 적은 민생단의 령수들만 믿고 하층군중은 믿지 않는다). 일제가 그들을 붙잡으면 마찬가지로 고문하고 도살하기 때문에 유격구에서 도망쳐간 민생단 성원들이 매우 적었다...”고 했다.

하여 반‘민생단’투쟁 후기에는 민생단공술이 있어도 무조건적으로 체포하지 않았고 소위의 교육해석작업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으며 마치 대오내에 민생단이 없어진 것처럼 되였다.

1935년 9월, 라자구유격구의 포기와 10월 서남부 처창즈유격구의 포기를 최후로 동만의 원래의 항일유격근거지는 전부 소실되였고 인민혁명군 제2군은 두갈래로 나뉘여 북만과 남만으로 진출하게 됨으로써 반‘민생단’투쟁은 객관조건상 사그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1936년 2월, 공산국제 주재 중공대표단에 반‘민생단’투쟁 등 동만문제를 회보하고 공산국제 제7차대표대회의 정신과 중공대표단의 만주 및 동만에 대한 새로운 지시를 가지고 위증민이 동북으로 돌아오게 되였다. 위증민은 “민생단문제에 있어서 동만 각 유격구에 민생단이 그와 같이 많았다는 것을 부인하고 만약 그와 같이 많았다면 유격구와 인민군대를 지금까지 유지하지 못하였을 것이니 지금 신임하고 사용하라.”는 지시를 전달, 이 전달을 듣고 조선인들 마음속에 쌓여있던 공포는 해소되였다.

1936년 3월초, 동만특위와 제2군은 안도현 미혼진에서 위증민의 주최하에 령도간부회의를 열고 중공중앙의 ‘8.1선언’과 공산국제 주재 중공대표단의 지시정신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을 동북항일련군 제2군으로 개편하였으며 제3사를 새롭게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미혼진회의’ 직후에 신편 제3사단의 사단장 김일성 등은 무송현 마안산에 이르러 그곳에서 감시, 개조받고 있던 민생단혐의자 100여명에게 완전 무죄를 선포하고 그들 전부를 제3사단 부대에 편입시켰다. 이때 이들 혐의자들의 자백서, 심문서 등을 모두 깨끗이 불태워버렸는데 이는 반‘민생단’투쟁의 최후종결을 선고한 것으로 된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18
  • 1966년 이른 봄 어느날, 도문시 외사과의 주동현 과장과 시인사국책임자로 기억되는 남현후씨가 나를 찾아왔다. 그때 나는 왕청현 석현진 수남대대 7대(달라자) 정치대장과 공청단 지부서기를 담임했었다.     손님들이 나를 찾아 온 사연이다.   ㅡ 우리가 달라자에 훌륭한 농업기술원을 소개 할터니...
  • 2022-05-29
  • 이는 20세기 50년대말 혹은 60년대초 음력설에 연길시에서 찍은 귀중한 사진이다. 이 사진 속 중산복 차림에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넘긴 남성은 중공연변조선족자치주 제1임 주당위 서기이며 주장인 주덕해(본명: 오기섭)이고 옆에는 그의 부인과 네 자녀이다.   오영채(뒤줄 중간), 오양청(앞줄 왼쪽 첫번째)   ...
  • 2022-05-26
  • 한진(韩震, 1900-1936)은 1900년에 서울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중학시절에 진보단체인 ‘반일애국기독교청년회’에 참가했고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 1928년에 반일투쟁에 참가하기 위하여 가족의 반대도 무릅쓰고 길림성 반석현에 와서 반일단체를 찾았다. 그는 반석현의 초석산소학교에서 교사로...
  • 2022-02-18
  • 리송파(李松波, 1904-1935)는 일명 최송파라고도 하며 1904년에 반석현 역마박자(驿马泊子)의 한 빈곤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1930년 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그해 8월에 중공반석중심현위에서 조직한 특무대에 가입하여 당의 주장을 선전하고 감조감식 등 투쟁에 적극 참가했으며 1931년에는 특무대 대장을 맡게...
  • 2022-02-18
  • 4 알고 보면 김순희는 룡정 동흥중학교 재학시절에 연해주에서 온 안정로를 알고 있었다. 1932년 봄 안정로는 공청단평강구위 서기직을 맡고 룡정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김순희는 안정로를 통하여 약수동이 중공평강구위와 중공화룡현위의 소재지이며 동북에서 첫 인민정권 쏘베트가 선 고장이란 것을 알게 되였다. 또한 약...
  • 2021-12-13
  • 1 지난 세기 30년대 항일의 봉화가 드세게 타오른 연변 화룡땅에는 연변의 첫 녀성 당지부 서기이며 동북 경내의 첫 녀성 당지부 서기인 홍혜순과 이름난 혁명가인 그의 남편 소성규가 활동하고 있었다. 소성규는 물론 홍혜순의 최후와 희생이 그 시절 《동아일보》에 실리기도 했다. 1931년 1월 14일자 《동아일보》 제7면...
  • 2021-11-15
  • 1 1930년 중국공산당 동만특별지부가 지도한 연변 ‘5.30’폭동의 총책임자는 김근이고 실제 총지휘자는 김철(金哲, 1902ㅡ1930)이다. 김철은 일명 김창호(金昌昊)라고도 하는데 1902년 태생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그의 고향이 어디고 가정형편은 어떠하고 어느 학교를 다녔으며 초기투쟁은 어디에서 나섰는지 ...
  • 2021-08-23
  • 한청(1912-1996), 성은 신(慎)이고 이름은 익성이다. 혁명사업의 수요에 따라 이름을 선후로 신해룡, 장원복, 고바야시 신사부로(小林慎三郎), 신억 등으로 고치였고 8.15광복후 한청(韩青)이라고 고친 후 계속 그 이름을 썼다.   한청은 1912년 12월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모동리 무월동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
  • 2021-08-11
  • 이날은 중화민족의 력사에서 휘황찬란한 날이다. 2021년 7월 1일,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정확한 중국공산당이 창건 100돐을 맞이했다! 100년 전의 7월에 중국공산당이 창건되였다. 이때부터 갖은 시련을 겪어온 중화민족은 궐기, 부흥의 길에 올랐고 이때부터 수많은 중화의 아들딸은 견정한 신앙, 앞길을 밝혀주는 등불, 전...
  • 2021-07-01
  • 중화민족 대가정의 일원으로 조선족은 중국공산당의 정확한 지도하에 항일전쟁, 해방전쟁, 항미원조전쟁을 거치며 초기 중국공산당원들인 한락연, 양림, 리홍광, 리복림, 마덕산, 배치운, 서광해 등을 필두로 수많은 렬사들이 귀중한 생명을 바쳤다. 사회주의 건설시기에도 주덕해, 조남기, 리민, 문정일, 리영태, 김인섭,...
  • 2021-05-27
  •  류옥하(한락연의 부인) 내가 보유하고 있는 락연의 유작중 한두폭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가 1944년부터 1947년까지 서북지역에서 창작한 작품이다. 우리는 1944년에 란주에 도착했다. 그 해에 그린 그림은 란주와 란주 부근의 풍경과 인민생활이 위주다. 1945년 봄에 그는 청해 탑이사를 방문했고 탑이사에서 ...
  • 2020-11-10
  • ▨ 류옥하(한락연의 부인) 락연은 배우기를 좋아했고 그림을 좋아했다 락연은 나에게 그는 동북의 연변 룡정에서 태여났고 어릴 적에 생활이 매우 가난했다고 말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아버지는 그림에서 곡식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림을 배우지 못하게 했다. 그는 할 수 없이 마을 외...
  • 2020-11-09
  • ▨ 사효명(史晓明) 세상에 둘도 없는 키질석굴은 신강 배성현 키질향 동남으로 약 8키로메터 떨어진 명옥타걸산의 깎아지른듯한 절벽에 있다. 현재 236개 동굴에 번호가 매겨져있다. 동굴내 벽면에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이른 불교벽화 예술이 약 4,000평방메터의 면적으로 보존되여있는데 그 년대는 대략 기원 3세기에서 ...
  • 2020-10-27
  • 반춘방의 아들 이종화는 전 북경 인민무장경찰부대 문공단 악대 대장으로 음악인이고 군관이다 “오막살이 우리 집에 새 아침 왔다네” 솔직히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노래를 즐겼는데 이 때문에 뜻밖에도 군복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노래는 마치 오색구름처럼 그...
  • 2020-10-20
  • 민족의 숙망 실현, 주덕해 자치구 제1임 서기로 당선 수천만 인파 거리에 떨쳐나서 북장고 울리며 환호 국경 첫돐에 드리는 겨레의 선물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이 어제 같은데 벌써 국경 첫돐을 맞이하게 되였다. 당과 정부에서는 전국의 소수민족 대표와 소수민족문공단 배우들을 북경에 초청하여 함께 명절을 쇠도록 마련...
  • 2020-09-08
  • 9월 1일, 이름난 항일민족영웅이며 동북항일련군 주요 창건자와 지도자인 양정우 장군 순국전 전투 서류가 최초로 공포되였다. 서류는 희생되기전 100여일간 양정우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일본군, 위만군 경찰들과 벌린 47차의 전투 과정을 진실하게 기록함으로써 동북항일련군 연구에 참신한 자료를 제공했다. 길림성서류관...
  • 2020-09-07
  • 신문 창간 출판물 간행해 공산당 로선 방침 정책 선전 예술일군들 국경 1주년에 북경서 공연 관중들의 절찬을 도서간행물 출판 사업 1945년 8월, 쏘련홍군과 항일련군이 연변에 진주하자 괴뢰만주국의 간도성공서와 모든 기관들이 재빨리 와해되여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은 일본침략자들의 기반 밑에서 해방되였다. 우리 민...
  • 2020-08-27
  • 조선민족 유지인사들 민족대학 세우려고 동분서주 《연변일보》 연변인민방송국 민족언어로 출판 방송 연변대학 창립 동북이 해방되자 우리 민족들은 자기 민족 대학을 세우려는 열의로 들끓었다. 1948년 12월, 연변전원공서 전원 림춘추는 이러한 민족의 념원을 안고 길림성민족사업좌담회에 참가하여 연변에 조선민족대학...
  • 2020-08-03
‹처음  이전 1 2 3 4 5 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