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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조선족력사(44)-제2차 반‘토벌’투쟁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6월6일 10시49분    조회: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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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보보점령’전술로 모조리 죽이고 불살라

유격대 적후서 일본군 위만군 습격 군수창고 소탕

소왕청작전

1933년 11월 17일, 일제는 60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보병, 포병, 항공대의 협동작전으로 소왕청유격근거지, 연길현 왕우구, 삼도만유격근거지, 훈춘현 대황구, 연통라자, 남구유격근거지를 불의에 포위공격해왔다. 일제의 토벌중점은 왕청유격근거지였다. 1,500여명의 일본군, 위만군, 자위단이 3개 방면으로 소왕청근거지를 향해 진격해왔다. 적기는 아군의 군정지도기관이 자리 잡고 있는 마촌과 리수구를 련거퍼 폭격하였다.

왕청유격대의 반‘토벌’투쟁의 총성은 뾰족산과 마반산에서부터 울렸다. 유격대와 적위대는 유리한 산세를 리용하여 적을 진지 가까이까지 끌어들여 매복전을 벌리기도 하였다. 적들은 뽀족산 앞자락에서 60메터 상거한 곳에까지 기여들었다.

“땅, 땅...”

유격대는 불의에 집중사격을 들이대는 한편 작탄세례, 돌세례를 안겨 달려드는 적들을 요정냈다. 경사가 급한 산벼랑으로 돌사태가 쏟아져내릴 때 전장을 들었다 놓는 벼락치듯한 소리와 포연을 방불케 하는 자욱한 먼지구름은 침략군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유격대의 드센 반격에 적군은 악착같이 달려들었으나 전초진지를 한걸음도 넘어서지 못하고 오히려 반대편 산기슭으로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제군경의 ‘토벌’에 불타고 있는 집들

그런데 이번엔 갑자기 등뒤로부터 우박같은 총탄이 쏟아졌다. 유격대원들은 미리 반대편 산 우에 매복해있었던 것이다. 배후의 공격까지 받은 적군은 10여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줄행랑을 놓고 말았다.

포수대로 조직된 수십개의 저격조는 유리한 지세를 리용하여 집요하게 달려드는 적을 쏘아눕혔고 부녀회원들은 주먹밥과 더운물을 이고 전호를 오르내렸다. 아이들은 북을 두드리고 나팔을 불면서 전투원들의 사기를 돋구어주었다.

마반산 쑥밭골 초소에서 적을 저격하던 방차대는 새벽부터 쑥밭골을 포위하고 달려드는 적들과 치렬하게 싸웠다. 귀틀집초소가 불에 타 허물어질 때까지 적의 진공을 7차례나 물리치면서 영용히 싸운 방차대원들중 총탄을 열세군데, 일곱군데, 세군데, 두군데 맞은 유격대원도 있었다. 그 후 왕청유격구 사람들은 그들을 이름 대신 ‘13련발’, ‘7련발’, ‘3련발’, ‘2련발’이라고 불렀다.

적의 대병력이 뾰족산과 마반산 진지에 련속 투입되자 유격대는 전면방어전으로부터 유인기만전술을 위주로 하는 신축자재한 기동과 적극적인 방어활동에 의한 소모전에로 이행하였다.

새로운 전술적 조치에 따라 유격대원들은 반군사조직 성원들과 함께 전초진지들에서 철수하여 유격구의 깊이에로 적을 끊임없이 유인하면서 매복전, 저격전, 숙영지습격전, 불무지작탄전 등의 천변만화한 전술로 적들을 피동에 몰아넣고 통쾌하게 때리였다.

불무지작탄전은 그 효률이 100%였다. 유격대는 진지를 옮길 때마다 다음 계선으로 철수하면서 불무지들에 작탄을 파묻게 하였다. 적들은 아군의 방어진을 차지하기 바쁘게 불무지 앞에 모여들어 언몸을 녹이군 하였다. 그럴 때마다 작탄이 폭발하면서 적들은 무리죽음을 당했다.

유격대는 적들의 숙영지에 대한 야간습격전도 자주 조직하였다. 2―3명이나 4―5명 규모로 무어진 습격조를 적진 속에 들여보내여 적군와해를 위한 삐라도 뿌리고 총도 몇발씩 쏘고 오게 하였다. 적의 천막이나 불무지 같은 곳에 총을 서너방만 갈겨도 온 숙영지가 수라장이 되군 하였다. 이런 야습은 하루밤 사이에도 세번, 네번, 지어는 다섯번씩 하는 때도 있었다. 적들은 온밤 잠을 자지 못하고 공포에 떨거나 저희들 끼리 헛총질을 해댔다.

그러나 적들의 전술도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유격구로 쳐들어왔다가도 공격이 좌절되면 그 날로 되돌아가는 종전의 피스톤식 ‘토벌’이 아니라 공격이 실패해도 물러가지 않고 도달한 계선에 그대로 주저앉아 숙영하면서 한걸음한걸음 전진하여 차지한 지대를 공고히 해가는 ‘보보점령’의 전술로 리행하였다.

일본군의 포화에 재더미가 된 소왕청을 뒤에 두고 주민들은 십리평으로 피난하였다. 적들은 유격대에 검질기게 달라붙어 장기전을 시도하는 한편 남녀로소 가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족족 죽였다.

한달가량 소왕청 반‘토벌’전투를 진행하면서 유격대는 적군 200여명을 소멸하였다. 그러나 그동안 항일군민 1000여명이 죽었다. 거기에다 반‘민생단’투쟁까지 겹치여 유격근거지는 인심이 황황해졌고 공산당과 유격대의 력량이 엄중히 쇠퇴되였다.

력량을 보존하기 위하여 중공왕청현위는 소왕청유격구를 버리기로 결정하였다. 1934년 1월의 어느 날 밤, 항일군민들은 적들의 방위가 허술한 서대파와 쟈피거우를 돌파구로 하여 포위망을 뚫은 후 대황구와 요영구항일유격근거지로 전이했다.

적아간의 공방전이 가렬하게 진행되던 어느 날 유격대 정위 김일성의 “방어에만 매달리지 말고 적의 뒤통수도 쳐야 한다.”는 건의하에 유격대는 두패로 나뉘여 작전하게 되였다. 한패는 최춘국의 지휘하에 십리평을 지키고 다른 한패는 김일성의 지휘하에 적구로 나갔다.

2월 중순, ‘토벌’대는 십리평항일유격근거지를 거듭 진공하였다. 중공동만특위 서기 동장영과 특위기관은 부분적 유격대과 군중들과 함께 십리평 묘구의 대북구일대로 전이했다. 3월 21일, 적군이 포위해왔다. 적들의 포위를 돌파하는 전투에서 중병으로 시달리고 있던 동장영은 설상가상으로 중상을 입었다.

조선족녀전사 최금숙(왕청현부녀회 주임)은 비발치는 탄우 속에서 동장영을 업고 포위를 뚫으려 했다. 그러나 중상을 입어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동장영은 최금숙에게 업힌 채 희생되고 최금숙도 적탄을 맞고 장렬히 전사했다.

적들의 등뒤를 들부시다

김일성의 지휘하에 유격대 한개 편대는 밤 어둠을 타 배밀이로 적의 포위망을 뚫고 적후방으로 깊이 들어갔다. 예견 대로 적후방은 오히려 텅 비여 있었다. 그 때를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3권)에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맨처음 친 것이 량수천자의 적이였다. 우리의 벼락같은 기습에 위만군과 자위단이 녹아나고 일본령사관 경찰병영이 완전히 점령되였다. 량수천자에서 적후교란전의 첫 총성을 울린 우리는 멀리로 사라지는 척하다가 제자리에 돌아앉아 신남구라는 곳에서 이동하는 적자동차수송대를 습격소탕하고 많은 밀가루와 군수물자를 로획하였다.

우리는 신남구에서 멀리 떨어진 북봉오동의 산악지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쭉 빠져나가 새 전투를 준비하였다. 1934년 2월 16일 밤, 북봉오동의 위만군과 경찰, 자위단원들은 모두 우리 부대에 의해 살상포로되였다.

북봉오동에서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고 북고려령을 넘어 사동방향에 진출한 우리 부대는 동골에 있는 삼림경찰대를 공격하여 병영의 적들을 모조리 사살하거나 생포하였다.

적의 동기 ‘토벌’을 분쇄하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최후의 싸움은 도문―목단강 사이의 철길을 끼고 있는 주요 군사요충지 대두천에서 벌어졌다. 적 ‘토벌대’로 변장한 유격대는 100여리의 험산준령을 강행군으로 단숨에 돌파한 다음 3개 조로 나뉘여 대두천의 경찰서와 자위단실을 습격하고 군수창고에 불을 질렀다.

이 전투가 있은 후부터 적들은 유격구를 조이고 있던 포위망을 해제하고 90여일전의 출발지점으로 퇴각하였다.

기타 유격구에서의 반‘토벌’전

연길현유격구는 대부분이 야산지대여서 적들에게 쉽게 로출될 불리한 형편에 있었다. 일제는 “연길현 공비소굴을 완전히 소멸한다”고 장담하면서 포위공격해왔다.

적들은 연길현 팔구와 왕우구 등 유격근거지에 이르자 야포와 박격포 사격의 엄호를 받으며 유격대를 공격했다. 부암에서 벌어진 첫날 전투에서 유격대의 명사수들은 적 50여명을 사살했지만 철퇴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적들은 유격대와 군중들이 집중되여있는 사방대를 향해 병력을 집중하여 공격해왔다. 적들은 사방대의 관문인 작살바위유격대 진지를 맹포격하면서 아군의 방어선을 뚫으려 들었다. 작살바위를 지켜선 유격대원들은 적을 근거지에 접근시켜놓은 후 맹사격을 들이대 쓸어눕히기도 하고 바위돌을 굴려 대갈통을 박살내기도 하면서 하루 동안이나 고수했다.

1933년 12월 24일부터 1934년 2월 21일까지 연길현유격대 주력은 연길현 삼도만유격근거지 일대에서 적들과 격렬한 반‘토벌’전을 벌리였다. 1934년 2월초 연길현경찰국장 및 경찰대 대장이 령솔하는 300여명 적들은 유격근거지를 향해 대거 진공했다. 삼도만유격근거지 군민들은 련속 14일간 적과 23차 교전하여 150여명을 섬멸하였다. 3월 29일, 김순덕과 왕덕태, 남창익 등이 인솔하는 유격대는 연길현 팔도구의 삼상촌과 장재촌 사이에 매복하여있다가 ‘토벌’하러 오는 팔도구 경찰대와 자위대를 공격하여 경찰순경부장을 비롯한 일본군 몇명을 격살, ‘토벌’을 격퇴시켰다. 같은 달, 연길현유격대 한개 지대는 삼도만 소묘구에서 ‘토벌’대 15명을 사살하고 총 13자루를 로획했다.

유격대는 근거지보위전투를 벌리는 동시에 부분적 병력을 적후에 파견하여 적 병영과 군사요새를 습격하였다. 1934년초, 연길현유격대 한 부대는 로동자들의 배합하에 일제가 강점하고 있는 천보산동은광에 쳐들어가 대량의 탄약과 광산경비대의 총을 로획했다.

화룡현유격근거지의 군민들도 주동적으로 출격하여 일본군을 쳐부셔 기타 유격근거지 군민들의 반‘토벌’전을 유력하게 지원했다. 유격대 대장 차룡덕은 유격대를 이끌어 삼도구의 일본경찰대를 주동적으로 습격하여 30여명을 격살했다. 유격대는 또 청두골에서 매복전을 벌려 일본수비대를 공격, 군용자동차를 훼멸시키고 30여명을 격살했다.

훈춘현유격대도 대황구와 소오도구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려 50여명을 살상했다. 그러나 유격근거지내에서 반‘민생단’투쟁을 벌려 많은 령도간부와 전사들을 의심하고 처결하는 바람에 유격대의 사기가 저락되고 인심이 황황하여 반‘토벌’전에서 작전을 순조롭게 조직할 수 없어서 중대한 손실을 보기도 했다.

1934년 봄, 동만 4개 현의 유격근거지 군민들은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발휘하여 적들의 ‘토벌’과 맞섰다. 근거지의 군중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물심량면으로 유격대를 지원하였다. ‘토벌’군이 쳐들어와 무차별 학살과 방화를 했으나 군중들은 추호도 굴하지 않고 불탄 집터에 불도 꺼지기전에 다시 집을 지었다. 적들이 소각하면 짓고 또 짓고 하여 심지어 한 집터 우에 서른두번이나 집을 짓기까지 하면서 유격대와 혼연일체가 되여 근거지를 보위하면서 ‘포위토벌’을 분쇄했다. 이번 반‘포위토벌’을 통하여 유격대와 공산당조직은 더욱 장대해졌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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