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항일유적지 답사 실기(10) 그 산 그 강은 기억하네...량기하, 그는 누구인가?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7월24일 08시14분    조회:659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항일유적지 답사 실기(10)

그 산 그 강은 기억하네

량기하, 그는 누구인가?
 

           김창영


  민박집에서 리진룡기념원으로 갈 때 전정혁 주임의 당부에 따라 모두들 행장을 챙겼는지라 리진룡기념원에서 이른 아침의 추모의식을 끝마치고 직접 전날 늦은 저녁을 먹은 식당으로 가서 아침식사를 한 후 갈 길을 다그쳤다. 청산구진에서 단통고속도로에 올라 50여킬로메터를 달려 환인현에 도착해서 길림성 집안으로 향하는 국도에 들어섰다. 하지만 우리의 목적지는 길림성 집안시가 아닌 료녕성 관전현 하로하조선족촌 련강촌이다. 련강촌은 하산 량기하의 순국지로 련강촌 뒤산에 모셔져 있는 량기하 석상을 참배하기 위해서다. 
 


  봉고차가 고속도로에서 내려 국도에 들어서자 전정혁 주임이 량기하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량기하는 한국 충남 논산군 두마면에서 태여났다. 호는 하산(荷山)이며, 별명은 인원, 임창주 등이 있다. 량기하는 1910년 8월 한국이 경술 국치로 주권이 상실되자 충청남도 공주 군수직을 내던지고 중국 길림성 류하현 삼원포로 망명하였다. 1919년 한국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를 무력으로 타도하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항일무장투쟁단체 조직에 착수하였고 의병 출신 애국지사들과 함께 대한독립단 결성에 참여하였다. 

  량기하는 대한독립단의 교통부장, 선전부장을 력임하면서 대한독립단 의용군을 한국에 파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본 군경 및 친일주구들을 처단하는 국내진공작전을 수행하였다. 

  1921년 4월 6일 상해림시정부의 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되여 상해로 갔으나 책상머리에 앉아 싸워서는 결코 독립을 쟁취할 수 없음을 고민하던 중 1923년 9월 대한통의부 의용군 제1중대장 백광운, 제2중대장 최석순, 제3중대장 최지풍, 제5중대장 김명봉 등이 대원 약 500여명을 이끌고 통의부를 탈퇴한 뒤 상해림시정부로 대표를 파견하여 관복군사령부를 계승한 림시정부 직속 통일 군정부의 수립을 요청하자 이를 기회 삼아 만주로 귀환하였다. 

  1924년 8월 환인현에서 김승학, 윤세용 등과 협력하여 림시정부 군무부 직속의 군사기구인 륙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를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재개한 한편 1926년 남만주 일대의 민족유일당으로 조선혁명당이 결성되고 그 당군으로 조선혁명군이 편성되자 이 두 조직에 가담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여 나갔다. 그리고 1927년 3월에는 참의부의 교육위원장 겸 제3행정구 위원장으로 선임되여 재만한인동포들에 대한 민족교육과 자치행정의 실현에 이바지하였다.  

  량기하는 1931년 12월 17일 신빈현에 있는 서세명의 집에서 개최된 조선혁명당, 조선혁명군, 국민부 간부 긴급 중대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회의에서 조선혁명당과 국민부를 단일 조직체로 만들어 림전태세를 갖추기로 결정하면서 이미 일본군에 피체된 현익철(玄益哲)의 후임으로 당 중앙집행위원장에 리호원(李浩源)을 선출하고 량기하를 정치부장에 선임하는 등 당과 군의 조직을 정비하고 임원을 개선하여 대일 투쟁력량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밀정들로부터 이같은 회의 사실을 탐지한 일제는 12월 19일 일경을 파견하여 회의장을 포위 습격하였다. 결과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리호원과 조선혁명군 사령관 김관웅, 국민부 공안부 집행위원장 리종건 등 주요 간부 10여명이 피체되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이른바 "신빈사변"이였다. 

  신빈회의에 참석했다 탈출한 량기하는 량세봉, 고이허 등과 국민부의 조직 재정비에 착수했다. 량기하가 국민부 중앙집행위원장을 맡고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은 고이허,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은 량세봉이 맡아 조직을 재건하면서 항일무장투쟁을 재개했다. 


  1932년 2월 량기하는 관전현 사도구에 주둔하고 있었다. 일본 경찰은 밀정을 렴탐을 통해 량기하 부대가 사도구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받고 평북 초산경찰과 위만군을 동원해 공격해왔다. 량기하와 조선혁명군은 화력과 수적 렬세에도 불구하고 적들과 격전을 벌였지만 기관총과 박격포를 앞세우고 공격해오는 왜경의 화력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이틀 동안 전투를 벌이던 량기하는 혁명군 가족들을 안전하게 후퇴시킨 뒤 마지막까지 싸우다가 혁명군 부하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지금껏 하로하조선족향 련강촌을 여러번 지나가면서도 량기하 석상을 찾아뵙지 못한 자신이 부끄러운 생각이 갈마드는 가운데 봉고차는 환인현 사첨자진(沙尖子鎭) 사첨자촌에서 국도를 벗어나 혼강을 가로막은 혼강땜 우를 거쳐 관전현 하로하조선족 경내에 들어섰다. 이곳에서 련강촌까지는 20킬로메터 될가 말가 하나 산길이 좁고 재 두개를 톱아야 하기에 빨리 달릴 수 없다. 그런대로 30분 쯤 달렸을가? 련강촌 길목에 도착하니 안상경 소장 다큐팀이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안상경 소장 다큐팀은 우리처럼 환인현 경내에 들어서지 않고 청산구진에서 직접 보달원진을 거쳐 하로하를 잇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련강촌 사도구는 혼강이 마을 앞으로 흐르고 강 건너편으로 환인현 로흑산이 높이 솟아있는 작을 마을이다. 일행은 자연 산세를 파괴하지 않고 지은 집들 사이로 낸 길을 걸어서 량기하와 조선혁명군이 주둔하였던 유적지를 향해 올라갔다. 미리 련락을 받은 증지(曾志. 한족)가 일행을 반겼다. 전정혁 주임은 증지의 외할아버지가 량기하와 같이 항일을 했으며 증지의 외할아버지가 그 당시 살았던 집터가 량기하 묘지가 가는 길 옆에 아직 남아있다고 소개했다. 증지는 현재 외할아버지가 살던 집터에서 썩 아래인 위치에 새집을 짓고 지금껏 생활하며 집에서 약 30여메터 떨어진 산중턱에 모셔져 있는 량기하 석상을 돌보고 있었다. 

  2003년 량하산장학회에 세운 석상 정면에는"항일명장 하산량기하 (1878-1932)" 란 아홉글자와 량기하의 생사년도,  뒤면에 량기하의 생애를 적어넣었다. 일행은 석상 앞에서 량기하장군을 향해 묵념을 올렸다. 전정혁 주임이 일행에게 석상 건립 배경을 이야기하는 사이 나는 량기하장군 석상 위치에서 산 우로 20여메터 떨어진 곳에 비석이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올라갔다. 비석은 1994년 관전만족자치현 민족사무위원회와 사지(史志)판공실에서 세운 것이였다. 비석 상단에 가로 "하산기비(荷山記碑)"란 네 글자, 아래에 "1932년 2월 10일, 조선혁명당 정치부 책임자이며 조선혁명군 총사령, 독립운동가인 하산 량기하가 이곳에서 일본 군경의 습격을 받고 싸우다가 불행히 희생되였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전정혁 주임은 량기하 기념 석상 위치에서 서쪽으로 600여터 더 올라가면 지금까지 증씨네가 보살펴 온 량기하 묘지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묘지까지 올라가는데만 40여분 시간이 걸리는 지라 빠듯한 일정 땜에 이번 걸음에 묘지까지 답사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일행은 아쉬움을 다음 기회에 달래기로 하고 산을 내렸다.  


료녕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18
  • 1966년 이른 봄 어느날, 도문시 외사과의 주동현 과장과 시인사국책임자로 기억되는 남현후씨가 나를 찾아왔다. 그때 나는 왕청현 석현진 수남대대 7대(달라자) 정치대장과 공청단 지부서기를 담임했었다.     손님들이 나를 찾아 온 사연이다.   ㅡ 우리가 달라자에 훌륭한 농업기술원을 소개 할터니...
  • 2022-05-29
  • 이는 20세기 50년대말 혹은 60년대초 음력설에 연길시에서 찍은 귀중한 사진이다. 이 사진 속 중산복 차림에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넘긴 남성은 중공연변조선족자치주 제1임 주당위 서기이며 주장인 주덕해(본명: 오기섭)이고 옆에는 그의 부인과 네 자녀이다.   오영채(뒤줄 중간), 오양청(앞줄 왼쪽 첫번째)   ...
  • 2022-05-26
  • 한진(韩震, 1900-1936)은 1900년에 서울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여났다. 중학시절에 진보단체인 ‘반일애국기독교청년회’에 참가했고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 1928년에 반일투쟁에 참가하기 위하여 가족의 반대도 무릅쓰고 길림성 반석현에 와서 반일단체를 찾았다. 그는 반석현의 초석산소학교에서 교사로...
  • 2022-02-18
  • 리송파(李松波, 1904-1935)는 일명 최송파라고도 하며 1904년에 반석현 역마박자(驿马泊子)의 한 빈곤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1930년 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그해 8월에 중공반석중심현위에서 조직한 특무대에 가입하여 당의 주장을 선전하고 감조감식 등 투쟁에 적극 참가했으며 1931년에는 특무대 대장을 맡게...
  • 2022-02-18
  • 4 알고 보면 김순희는 룡정 동흥중학교 재학시절에 연해주에서 온 안정로를 알고 있었다. 1932년 봄 안정로는 공청단평강구위 서기직을 맡고 룡정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김순희는 안정로를 통하여 약수동이 중공평강구위와 중공화룡현위의 소재지이며 동북에서 첫 인민정권 쏘베트가 선 고장이란 것을 알게 되였다. 또한 약...
  • 2021-12-13
  • 1 지난 세기 30년대 항일의 봉화가 드세게 타오른 연변 화룡땅에는 연변의 첫 녀성 당지부 서기이며 동북 경내의 첫 녀성 당지부 서기인 홍혜순과 이름난 혁명가인 그의 남편 소성규가 활동하고 있었다. 소성규는 물론 홍혜순의 최후와 희생이 그 시절 《동아일보》에 실리기도 했다. 1931년 1월 14일자 《동아일보》 제7면...
  • 2021-11-15
  • 1 1930년 중국공산당 동만특별지부가 지도한 연변 ‘5.30’폭동의 총책임자는 김근이고 실제 총지휘자는 김철(金哲, 1902ㅡ1930)이다. 김철은 일명 김창호(金昌昊)라고도 하는데 1902년 태생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그의 고향이 어디고 가정형편은 어떠하고 어느 학교를 다녔으며 초기투쟁은 어디에서 나섰는지 ...
  • 2021-08-23
  • 한청(1912-1996), 성은 신(慎)이고 이름은 익성이다. 혁명사업의 수요에 따라 이름을 선후로 신해룡, 장원복, 고바야시 신사부로(小林慎三郎), 신억 등으로 고치였고 8.15광복후 한청(韩青)이라고 고친 후 계속 그 이름을 썼다.   한청은 1912년 12월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모동리 무월동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
  • 2021-08-11
  • 이날은 중화민족의 력사에서 휘황찬란한 날이다. 2021년 7월 1일, 위대하고 영광스럽고 정확한 중국공산당이 창건 100돐을 맞이했다! 100년 전의 7월에 중국공산당이 창건되였다. 이때부터 갖은 시련을 겪어온 중화민족은 궐기, 부흥의 길에 올랐고 이때부터 수많은 중화의 아들딸은 견정한 신앙, 앞길을 밝혀주는 등불, 전...
  • 2021-07-01
  • 중화민족 대가정의 일원으로 조선족은 중국공산당의 정확한 지도하에 항일전쟁, 해방전쟁, 항미원조전쟁을 거치며 초기 중국공산당원들인 한락연, 양림, 리홍광, 리복림, 마덕산, 배치운, 서광해 등을 필두로 수많은 렬사들이 귀중한 생명을 바쳤다. 사회주의 건설시기에도 주덕해, 조남기, 리민, 문정일, 리영태, 김인섭,...
  • 2021-05-27
  •  류옥하(한락연의 부인) 내가 보유하고 있는 락연의 유작중 한두폭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가 1944년부터 1947년까지 서북지역에서 창작한 작품이다. 우리는 1944년에 란주에 도착했다. 그 해에 그린 그림은 란주와 란주 부근의 풍경과 인민생활이 위주다. 1945년 봄에 그는 청해 탑이사를 방문했고 탑이사에서 ...
  • 2020-11-10
  • ▨ 류옥하(한락연의 부인) 락연은 배우기를 좋아했고 그림을 좋아했다 락연은 나에게 그는 동북의 연변 룡정에서 태여났고 어릴 적에 생활이 매우 가난했다고 말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아버지는 그림에서 곡식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림을 배우지 못하게 했다. 그는 할 수 없이 마을 외...
  • 2020-11-09
  • ▨ 사효명(史晓明) 세상에 둘도 없는 키질석굴은 신강 배성현 키질향 동남으로 약 8키로메터 떨어진 명옥타걸산의 깎아지른듯한 절벽에 있다. 현재 236개 동굴에 번호가 매겨져있다. 동굴내 벽면에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이른 불교벽화 예술이 약 4,000평방메터의 면적으로 보존되여있는데 그 년대는 대략 기원 3세기에서 ...
  • 2020-10-27
  • 반춘방의 아들 이종화는 전 북경 인민무장경찰부대 문공단 악대 대장으로 음악인이고 군관이다 “오막살이 우리 집에 새 아침 왔다네” 솔직히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노래를 즐겼는데 이 때문에 뜻밖에도 군복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 노래는 마치 오색구름처럼 그...
  • 2020-10-20
  • 민족의 숙망 실현, 주덕해 자치구 제1임 서기로 당선 수천만 인파 거리에 떨쳐나서 북장고 울리며 환호 국경 첫돐에 드리는 겨레의 선물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이 어제 같은데 벌써 국경 첫돐을 맞이하게 되였다. 당과 정부에서는 전국의 소수민족 대표와 소수민족문공단 배우들을 북경에 초청하여 함께 명절을 쇠도록 마련...
  • 2020-09-08
  • 9월 1일, 이름난 항일민족영웅이며 동북항일련군 주요 창건자와 지도자인 양정우 장군 순국전 전투 서류가 최초로 공포되였다. 서류는 희생되기전 100여일간 양정우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일본군, 위만군 경찰들과 벌린 47차의 전투 과정을 진실하게 기록함으로써 동북항일련군 연구에 참신한 자료를 제공했다. 길림성서류관...
  • 2020-09-07
  • 신문 창간 출판물 간행해 공산당 로선 방침 정책 선전 예술일군들 국경 1주년에 북경서 공연 관중들의 절찬을 도서간행물 출판 사업 1945년 8월, 쏘련홍군과 항일련군이 연변에 진주하자 괴뢰만주국의 간도성공서와 모든 기관들이 재빨리 와해되여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은 일본침략자들의 기반 밑에서 해방되였다. 우리 민...
  • 2020-08-27
  • 조선민족 유지인사들 민족대학 세우려고 동분서주 《연변일보》 연변인민방송국 민족언어로 출판 방송 연변대학 창립 동북이 해방되자 우리 민족들은 자기 민족 대학을 세우려는 열의로 들끓었다. 1948년 12월, 연변전원공서 전원 림춘추는 이러한 민족의 념원을 안고 길림성민족사업좌담회에 참가하여 연변에 조선민족대학...
  • 2020-08-03
‹처음  이전 1 2 3 4 5 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