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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 장백산기슭에서의 전투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8월23일 08시11분    조회: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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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무쌍한 6사 전사들 림기응변 신출귀몰하면서

곰골, 홍두산전투 벌려 일제의 ‘동기대토벌’ 분쇄

일제는 림강, 장백현에서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의 련속되는 타격을 받게 되자 창황히 병력을 집중하여 ‘동기토벌’을 감행, 장백현에서 활동하고 있는 제2군 제6사를 포위섬멸하려고 망상했다. 이것을 간파한 아군은 대부대 활동과 소부대 활동을 적절히 배합하면서 유인매복전과 불의의 습격전, 철벽의 방어전 그리고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의 대오를 토막내여 소멸하는 전법 등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전술을 활용하여 적들을 반격했다. 적들이 ‘토벌’을 강화하면 할수록 아군은 밀림 속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면서 적들을 골탕 먹였다. 그중에서도 곰골전투는 밀영에 대한 적들의 기습소탕전을 앞질러 좌절시킨 방어전투의 전범이였다.

곰골에서의 격전

적들의 ‘동기토벌’이 시작되자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 제6사 사장 김일성은 부대의 주력을 거느리고 주로 곰골밀영쪽에서 활약했다. 그러던 어느날, 밀영을 탐지하고 있는 농민옷차림의 밀정 두놈을 붙잡았다. 밀정들은 아군의 정확한 위치를 알아낸 후 산밑 ‘토벌대’에 신호를 보낼 임무를 맡고 있었다. 밀정의 진술에 의하면 적들은 일만합동 ‘토벌대’를 편성하고 있었는데 그중 한 부대는 이도강을 떠나 곧바로 곰골로 밀려오고 있었으며 다른 한 부대는 16도구의 마가자 서북쪽을 거쳐 밀영으로 접근하고 있는데 자기들이 약속된 신호를 보내면 공격을 개시하게 된다는 것이였다. 이 ‘토벌’을 위해 회령에 있는 비행기까지 동원하기로 되어 있었다.

보천보경찰관주재소의 포대.

형세는 급박했으나 적들의 포위환은 아직 완전히 형성되여 있지 않고 있었다. 아군은 적들이 수색을 벌리면서 밀영으로 조여들고 있는 형편에서 밀영 근처의 유리한 지대에서 적을 친 후 슬쩍 빠져나갔다가 되돌아가는 적을 삼개골 지대에서 밤을 리용하여 한번 더 때리기로 작전을 짰다.

곰골의 남쪽은 깊은 골짜기로 이루어져있었다. 적의 주력이 들어오게 되여있는 골에는 잘룩한 병모가지처럼 묘하게 생긴 곳이 있었다. 이 골의 량쪽 비탈은 날렵한 산짐승들조차도 발붙이기 힘든 벼랑이였다. 적들을 좁은 홈통 속에 몰아넣고 족치기에는 둘도 없는 유리한 지형이였다. 사장 김일성은 2련과 4련을 동북쪽 고지에 매복시키고 골안 깊은 곳에 허위진지를 만들게 했다. 그리고 몇명 대원을 거기에 배치하여 마치 주력이 그곳에 있는 것처럼 불도 피우고 소리도 내게 했다. 배치가 완료되자 이번에는 유인조를 파견하여 적진에 들어가 밤새껏 소란을 피우다가 날이 밝으면 대부대가 움직인 것처럼 흔적을 내면서 철수하도록 명령했다.

날이 어슬어슬해질 때 유인조는 적진으로 들어갔다. 유인조는 적들을 아군의 주력이 배치되여있는 곳으로 끌어오려고 골바닥에 대부대가 지나간 듯이 무질서한 발자국을 내면서 허위진지쪽으로 올라갔다. 잠시후에 그쪽 산비탈에서는 여러 개의 우등불 연기가 솟구쳐오르고 떠들썩한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유인조의 꼬리를 물고 골 안에 들어선 적들은 우등불을 피워놓고 법석대는 허위진지쪽에 신경을 모으면서 공격대기를 했다. 적의 척후대는 기마대렬이였다. 잠시 한자리에 몰켜서 골안쪽의 허위진지를 살펴보며 쑥덕거리던 기마척후대의 일행중에서 기병 3명이 골짜기 아래쪽으로 내달려갔다.

반시간쯤 지나 기마척후대는 보병종대를 뱀꼬리처럼 기다랗게 달고 다시 골 안에 나타났다. 그들이 바로 조선주둔군 함흥 20사단의 패거리들이였다. 정안군 장교들은 말을 얻어타지 못한 채 졸개들과 함께 도보로 오고 있었다. 적부대의 뒤꼬리에는 박격포를 분해하여 기르마에 얹은 대오가 뒤따랐다. 다른 골짜기로도 적들이 기여들었다. 포위환을 형성하려는 시도가 뻔했다. 아군은 100여명 뿐인데 비해 적은 500명도 더 되였다.

“땅!”

공격의 신호총소리가 터지자 포위해있던 아군은 맹렬한 사격을 들이댔다. 공격 개시 신호를 기다리던 적들은 순식간에 풍지박산이 되고 말았다. 적들의 포는 폭탄을 장탄한 채 전장에 나딩굴었다. 한바탕 타격을 가한 후 아군은 어둠을 타서 슬쩍 전장에서 빠져나갔다.

아군의 공격, 눈코뜰새 없는 추격, 사나운 추위 등으로 시달릴대로 시달린 적들은 날 밝기를 기다리기 위해 으슥한 곳에다 숙영지를 마련했다. 이것을 정찰해낸 아군은 적 숙영지 야습을 주도했다. 야습에는 많은 병력이 필요 없었다. 한개 패의 병력으로 무어진 습격조가 어둠을 타 적의 숙영지로 은밀히 접근해갔다. 습격조는 보초병을 사로잡아 숙영지 내막을 알아냈다. 일본 군대가 숙영지 복판을 차지하고 위만군이 그 두리에 잠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짐군으로 끌려간 백성들이 맨 바깥쪽에 총알받이로 배치되여 있었다.

습격대원들은 적 순찰병으로 가장하고 3명씩 나누어 조를 형성한 후 미리 알아낸 군호로 적들을 기만하면서 보초선을 무사히 통과하여 숙영지 한복판까지 들어갔다. 일본군들은 천막 안에서 젖은 신발들을 우등불가에 걸어놓고 혼곤히 잠자고 있었다. 눈앞의 적들을 향해 습격조원들은 마음 놓고 사격을 들이댔다.

총소리에 놀라 깨여난 적들은 신발도 찾아 신을 새 없이 헤덤벼쳤다. 적아를 가리지 못한 적들은 저들끼리 향방 없이 마구 쏴갈기기도 하였다. 숙영지는 벌둥지를 쑤셔놓은 것처럼 발칵 뒤집히였다. 혼란한 틈을 타 습격조원들은 감쪽같이 빠져나왔다. 적들은 저들끼리 밤새껏 총격전을 벌려 무리죽음을 냈다. 어떤 놈들은 신발도 외투도 찾아 신지 못하고 간신히 도망치긴 했지만 동북 림해의 11월 강추위에 거의다 얼어죽고 말았다.

홍두산전투와 도천리전투

횡산에서 1937년의 음력설을 보낸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 제6사 사장 김일성은 일부 장병들을 거느리고 홍두산 밀영으로 돌아왔다. 아직 행장도 풀지 않고 있는 판인데 망원초쪽에서 갑작스럽게 총성이 울려왔다. 적들이 쳐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정황은 아주 긴박했고 형세는 아군에게 매우 불리했다. 아군의 병력이란 기관총반과 리두수네 련의 대원 몇명 뿐이였다. 반면 적의 병력은 아군의 몇배나 더 되였다. 그런데다가 망원초에서 적을 발견하였을 때에는 적들이 이미 망원초 고지에 거의다 접근하고 있을 때였다. 아군은 완전히 적들의 제압군 내에 들어와 버리고 말았다.

김일성의 명령에 따라 전투원들은 재빨리 남쪽 릉선을 차지했다. 김일성은 리두수 련장에게 지시하여 망원초의 대원들을 철수시키고 적들에게 길을 열어주도록 했다. 그리고 철수하는 망원초의 대원들로 하여금 반드시 적들이 눈에 뜨이게 칼 릉선을 타고 내려오게 하였다. 망원초로 통하는 칼릉선은 한발자국이라도 헛디디면 깊은 골짜기의 눈 속에 굴러떨어져 파묻힐 수 있는 외통길이였다.

밀강 5도구에서 6사 장병들과 함께 있는 김일성(중간에 앉은 사람)

망원초의 전사들은 과연 적들을 칼 릉선으로 유인하는데 성공했다. 적들은 자석을 따르는 쇠붙이처럼 망원초의 아군 전사들의 뒤를 꼭 물고 칼 릉선에 올라섰다. 홍두산 남쪽 릉선에 매복하고 있던 아군은 기다싶이 하면서 가파른 릉선에 매달려있는 적들을 손금 보듯 내려다보면서 경기관총을 휘둘렀다. 불의의 사격을 받은 적들은 퇴각한다는 것이 릉선 아래 골바닥에 갇혀버렸다. 골짜기에 갇힌 적들은 이번엔 남쪽 릉선을 오르려 했으나 남쪽 릉선 비탈은 얼음강판이였기에 아군의 진지로 근본 접근할 수 없었다. 적들은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여버렸다. 그번 전투에서 적들은 거의 전멸되다 싶이 했지만 아군은 단 한명의 부상자를 냈을 뿐이였다.

홍두산전투 후 6사 주력은 장백현 하강구쪽으로 내려갔다. 이때 적들은 다시 대병력을 긁어모아 항일련군을 찾아 대대적인 수색전을 펼치고 있었다. 아군의 주력부대가 하강구 방향으로 움직인 것은 적들의 력량을 분산시켜놓고 혼란을 조성한 다음 적의 ‘동기토벌’을 결정적으로 분쇄하기 위해서였다. 겨우내 항일련군을 뒤쫓아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허탕만 치던 적들도 6사 주력부대를 찾아 헤매다가 지금 도천리 부근에 주둔하고 있었다.

요방자에서 도천리나 최령감골로 가려면 봇나무, 자작나무, 가시나무와 키가 넘는 갈대며 새초풀들이 얼기설기 뒤엉킨 무연한 15키로메터의 소로길을 지나야 하였다. 만약 이 길로 적들을 끌어들이기만 하면 적들은 외줄로 행군할 수 밖에 없게 되므로 아군은 진대통이 가로놓인 요소요소에 매복해있다가 손쉽게 적들을 토막쳐 족칠수 있을 것이였다.

유인조는 적들이 나타나자 그 선두대렬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가한 후 재빨리 몸을 피하여 가시덤불 등판으로 사라져버렸다. 거기에 복병이 있는줄도 모르고 적들은 아군의 그림자를 뒤쫓아 무작정 가시덤불밭으로 뛰여들었다. 적들에게 있어서 가시덤불은 가시철조망과 다를바 없는 장애물이 아닐 수 없었다. 가시덤불의 성화 때문에 적들의 대오는 토막토막 끊어졌다. 숨어있던 매복조 성원들은 토막난 적 대렬을 향해 사정없는 사격을 가했다. 수백명의 적들은 아군의 토막치기 전술에 걸려들어 올리뛰고 내리뛰고 하면서 갈팡질팡할 뿐 어쩌지 못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기진맥진한 적들은 공포를 껴안은 채 도천리마을로 철퇴하고 말았다.

도천리마을의 항일련군 지하조직에서는 ‘공비군’을 소멸하러 온 장병들을 위로한다면서 닭도 잡고 쌀을 찧어 떡도 만들면서 일부러 저녁식사를 늦잡아놓았다. 결국 패배의 수치도 모르고 만포식한 적들이 한밤중이 되어서야 마을을 떠나게 되였다.

마을 앞 큰길 좌우에는 벌써 항일련군 전사들이 매복해 있었다. 이런 줄도 모르고 늑장을 부리면서 지나가던 적들은 갑자기 터지는 수류탄과 씽씽 날아드는 총알의 세례를 톡톡히 받지 않으면 안되였다. 매복전에 걸려든 적들은 완전히 괴멸되고 말았다. 새초가 깔린 등판에 적의 주검이 한벌 널려있었다. 아군은 시체들에서 총만 벗겨가지고 유유히 철수하였다.

이 시체들을 실어 나르느라고 적들은 24대의 소발구를 동원했다고 한다. 그 소발구 하나에 주검 9구씩 싣고 십삼도구까지 날라갔다고 하니 이날 황천객이 된 적들은 200명도 더 될 것이였다.

적들의 ‘동기토벌’에 맞서 아군은 몇백차의 전투를 벌리면서 끝내 ‘토벌’을 분쇄했다. 항일련군의 련전련승으로 하여 장백땅은 완전히 항일련군의 세상이 되고 말았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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