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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81)제79장 장춘해방전역에서의 조선퇀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5월7일 09시54분    조회: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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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일발의 시각 적을 막아나선 ‘조선퇀’

170여명 장병 목숨 바쳐 적진에 붉은기를

격변시대

1946년 새해 첫날, 연변행정독찰전원공사 전원 관선정은 신년사를 발표하였다. 관선정은 신년사에서 “인민정권의 령도하에 광범한 군중을 단합시켜 신생의 정권을 보위하고 공고히 하여야 한다. 일만 잔여세력을 소멸하고 생산을 발전시키면서 연변을 건설하는 것이 당면의 급선무이다. 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중한(中韩) 민족의 단결이 우선 필요하다. 중한 민족의 단결이 없다면 새로운 연변 건설은 불가능하다. 신생의 민주정권은 민족평등의 원칙에 따라 조선민족으로 하여금 정치, 경제, 문화 면에서 해방과 발전의 권리를 향유하게 해야 하며 민족의 언어문자, 풍속습관, 종교신앙 등도 모두 존중을 받게 하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새해 첫날, 연변군분구 사령원 강신태도 〈우리가 건설하는 군대는 인민의 자제병이다〉는 제목의 문장을 발표하였다. 강신태는 연변군분구의 모든 장병들은 전심전력으로 인민의 리익을 위해 복무해야 하며 적대세력을 소멸하고 인민의 정권을 공고히 해야 한다고 호소하면서 “인민은 자신의 자제병을 옹호하고 인민의 자제병들은 인민 속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강조하여 지적했다.

1945년 10월 30일에 설립되였던 동북인민자치군은 1946년 1월 4일, 중공중앙의 지시에 좇아 동북민주련군(총사령 림표, 정위 팽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월 21일부터 23일까지 길림성공작위원회는 해룡에서 당, 정, 군 주요 책임자 회의를 소집, 중공길림성공작위원회를 중공료길성위로 할 데 관한 중공중앙 동북국의 지시 정신을 전달했다. 료길성위 아래에 길림, 길동, 통화, 료북 등 4개의 분성위를 두었다. 2월 27일 중공길료성위에서는 당천제를 연변에 파견하여 중공연변지방위원회를 중공길동분성위로 개칭할 데 관한 동북국의 지시 정신을 전달, 당천제가 분성위 서기를 맡고 옹문도가 부서기를 맡았다. 분성위는 연길, 화룡, 왕청, 훈춘, 돈화, 액목, 안도, 교하 등 8개 현의 당사업을 관할했다. 이에 따라 길림군구도 길료군구로 개칭(사령원 주보중)하게 되였고 연변군분구도 동북민주련군 길동군부로 이름을 바꾸게 되였다. 강신태가 여전히 사령원을 맡고 당천제가 정위(겸)를 맡았다. 군분구 산하에 두개 려를 두었는데 제1려 려장은 강신태(겸), 정위는 당천제(겸)가 맡았다. 아래에 3개 퇀을 두었다. 제1퇀 퇀장은 남창수, 병력은 3,000여명 되였다. 제2려 려장은 등극명, 정위는 애극복이였다. 제4퇀 퇀장은 증도, 제5퇀 퇀장은 최희봉, 제6퇀 퇀장은 김동파, 포퇀 퇀장은 김철이였다. 병력 역시 3,000여명이였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박일우가 지대장을 맡고 아래에 제1총대, 제2총대, 왕청지대, 화룡지대를 두었다.

1월 10일, 중공대표와 국민당대표는 ‘정전협정’을 정식 달성하고 동시에 정전명령을 내려 13일 밤부터 군사행동을 정지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정전협정에 ‘동북을 제외한다’는 것을 견지했다. 아울러 미국의 의도에 따라 비밀리에 명령을 내려 군대를 동북에 이동하여 전략요지를 점령하게 했다. 이에 중공중앙에서는 국민당이 동북 문제에 관한 담판을 거절하는 것과 관련하여 림표, 팽진에게 “국민당이 의연히 우리와 동북 문제에 관한 담판을 거절하며 동북에서의 우리의 위치를 승인하지 않을 경우 무력적인 해결방침을 포기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동북국에서는 즉시 적들이 진공할 경우 견결히 격파할 조치를 취했다.

3월 중순, 박락권은 명령에 의해 연변경비 제1려 제1퇀을 이끌고 장춘 지구로 들어가 부대를 동북민주련군 동남종대 제75퇀으로 개편하고 장춘해방전역에 참가할 준비를 했다.

박락권과 ‘조선퇀’

1946년 4월에 있었던 제1차 장춘해방전투는 항일전쟁승리 후 아군이 처음으로 대도시를 공격 점령한 전투로서 동북해방전쟁사에서 빛나는 한페지를 엮어놓았다. 바로 이 전투에서 박락권 퇀장, 고생호 퇀장을 비롯한 용감한 조선민족 전사들이 슬기롭게 싸워 기개를 떨쳤다.

동남종대 제24려 려장이였던 하경적은 〈제1차 장춘해방전투에서의 ‘조선퇀’〉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동남종대는 제24려 제70퇀, 제25려 제75퇀으로 구성되였는데 그 가운데서 제75퇀은 전부 조선민족으로 조직되였다. 하기에 그 때 우리는 이 퇀을 습관적으로 ‘조선퇀’이라고 불렀다. 박락권 퇀장은 동북항일련군에서 주보중 사령원의 부관으로 있었고 그 후에는 쏘련 원동방면군 보병 제88려 제4영 제7련에서 중위 소대장으로 있었으며 1945년 9월에 항일련군 선견대의 일원으로 연길에 이르러 ‘조선퇀’을 조직하였다는 것이다. 28살인 그는 키가 작달막하고 얼굴이 동그스름했는데 퍼그나 다부져보였다. 그는 한어가 류창했다. 결혼한 지 몇달 밖에 안되지만 안해와 갈라져 부대를 거느리고 이번 전투에 참가한 사실은 나와 곁의 전우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조선퇀’은 갓 성립되였기에 신병들이 많았다. 그러나 참군한 후 정치교육을 잘 받았기에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4월 14일 날 밝을 무렵, 각 종대는 장춘 교외의 적군을 향해 진공을 개시했다. 오전에 국민당은 쏘련 군대로부터 정식으로 장춘을 넘겨받았다. 점심때 쏘련 군대를 태운 마지막 렬차가 장춘을 떠났다. 오후 2시, 위만 길림성 대리주석 왕빈화와 제4종대 사령 겸 장춘위수사령인 진가정을 우두머리로 한 국민당 군정요인들이 시교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총포성 속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을 때 아군 전사들은 파죽지세로 시 주변의 적군들을 섬멸하고 있었다.

‘조선퇀’은 남령의 초가와붕 일대에서 출발하여 조가산정수(净水)공장에 있는 적들을 공격했다. 적들은 아군의 공격에 겁을 집어먹고 눈 먼 총 몇방을 쏘아대고는 시내로 도망쳤다.

동남종대는 다른 종대와 함께 시구역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조선퇀’과 제71퇀은 몇시간 동안의 간고한 전투를 거쳐 오전 10시 좌우에 선후로 공업학교, 농학원, 리과원을 점령했다. 그런데 ‘조선퇀’은 쓰딸린거리를 따라 북쪽을 향해 진군하다가 대륙과학원(지금의 장춘응용과학연구소)을 지키고 있는 적들의 완강한 저격을 받게 되였다.

쓰딸린거리는 남쪽의 남령으로부터 북쪽의 역전까지 남북으로 시내 중심을 꿰뚫은 큰 거리로서 길이가 5키로메터나 되고 길 량켠에 고층건물이 즐비하게 늘어섰는데 적군은 건물마다에 숱한 또치까를 구축하고 거리에 장애물을 겹겹이 설치해놓았다. 대륙과학원은 쓰딸린거리 남단 서쪽켠에 있었다. 반지하실까지 6층으로 된 이 청사는 모두 화강암으로 지은 것으로서 적들이 장춘을 고수하는 남단의 가장 주요한 방어거점이였다. 적들은 증원된 한개 련을 주둔시키고 정문과 지붕에 모래마대로 퇴적식 방어진지를 만들고 창문마다에 각종 화력을 배치해놓았다. 청사 앞에는 록시를 박고 철조망을 늘여놓았다.

화력을 집중하여 적들을 압도한 후 공격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였다. 박락권은 이 임무를 제1영에 맡겼다. 오후 2시, 제1영 영장 김윤배는 기관총수들에게 명령을 내려 적들의 화점에 집중사격을 퍼붓게 했다. 적들도 완강히 반격했다. 쌍방은 몇분 동안 불질을 하였지만 아군은 높은 위치를 차지한 적들의 화력을 압도할 수가 없었다. 폭파조 전사들은 기관총과 수류탄의 엄호를 받으며 청사를 향해 포복전진하였으나 적들의 화력이 너무도 맹렬하여 어떤 전사들은 길에 쓰러지고 어떤 전사들은 록시 뒤에 몸을 숨기고 머리도 들지 못하다가 그대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사령부에서는 포 몇문을 대륙과학원에 돌렸다. 청사 지붕과 청사 앞 장애물들은 아군의 포격에 의해 마구 짓부셔졌다. 때를 같이하여 기관총도 분노의 불길을 토했다. 아군의 드센 화력에 적들의 화점은 하나하나 벙어리로 되여갔다. 이윽하여 “꽝” 하는 폭음과 함께 대륙과학원청사에 불이 달렸다. 시기가 되였음을 직감한 박락권은 “돌격!” 하고 큰소리로 웨치면서 전사들을 이끌고 적진을 향해 진격해 들어갔다.

이 때 한 전사가 뒹굴기도 하고 기기도 하며 청사 앞의 또치까에 접근하여 폭파약꾸레미의 도화선에 불을 달아놓고 다시 뒹굴어 돌아왔다.

“꽝!” 하는 굉음과 함께 또치까가 하늘로 날아가버렸다. 전사들은 폭파소리와 함께 맹호마냥 청사 앞 또치까를 뛰여넘은 후 쏜살같이 청사 안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청사의 불길이 세차게 타올라 적들은 부득불 아래층으로 몰려들었다. 청사에 들어간 제1영 전사들은 도망치려는 적들과 맞다들어 치렬한 육박전을 벌렸다. 살아남은 적들은 “총을 바치면 죽이지 않는다!”는 소리를 진작 기다렸다는듯이 앞다투어 총을 내던지고 투항했다. 몇놈이 뒤울안으로 해서 도망친외 나머지는 전부 포로되였다.

제1영이 대류과학원을 공격하고 있을 때 제2영 영장 전룡화는 전사들을 거느리고 대륙과학원 맞은켠에 있는 법정대학 청사를 공격하고 있었다. 한시간 남짓한 치렬한 전투를 거쳐 한개 련의 적들을 전부 섬멸하였다.

전투는 끝났으나 전사들은 또 다른 전투― ‘불끄기전투’에 투신했다. 한편으로는 널려있는 귀중한 의기와 자료들, 그리고 진렬되여있는 범, 곰, 꽃사슴, 고래 등 진귀한 동물표본들을 날라내느라고 야단법석을 치고 있었다. 불길이 더 세차게 타올라 천장에서 큰 불꽃들이 사정없이 쏟아져내렸다. 그러나 전사들은 계속하여 귀중품을 끄집어냈다.

170여명 조선민족 장병 장렬히 희생

16일, 날이 밝기전에 종대의 각 퇀은 벌써 전투구역에 들어섰다. ‘조선퇀’은 계속하여 쓰딸린거리를 따라 시중심으로 진공하라는 전투명령을 받았다.

‘조선퇀’은 두시간의 격전을 거쳐 의과대학 청사를 점령하고 점심에 홍인광장(지금의 해방광장) 남쪽까지 쳐들어갔다. 홍인광장은 쓰딸린거리와 홍인대로(지금의 해방대로)의 교차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장춘시구역의 한개 중요한 교통요지였다. 광장 서북쪽에 3층으로 된 ‘만자회’청사가 솟아있는데 이는 위만주국시기 종교적 색채를 띤 자선기구였다. 3층으로 된 견고한 청사는 풍격이 독특했고 거리를 향한 쪽으로 든든한 담장이 둘러있었다. 청사 안에서도 각 통로들을 제압할 수 있었기에 적들은 여기를 한개 중요한 거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아군은 먼저 광장 남측의 건축물들을 점령하여 반달형으로 ‘만자회’를 포위한 다음 야음을 타 쳐들어가기로 작전을 짰다. 전사들은 피로를 잊고 마른 음식에 랭수 몇모금 마시고는 즉시 행동에 옮겼다. 광장의 서남측과 동남측 층집들이 인차 아군의 손에 들어오게 되였다.

날이 차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이 때라고 생각한 박락권 퇀장은 진공명령을 내렸다. 아군의 불벼락이 삽시에 ‘만자희’에 쏟아졌다. 폭파조의 전사들은 지형을 교모하게 리용하면서 때로는 기여서, 때로는 달려서 재빨리 광장을 꿰뚫고 청사 앞 담장에 접근해갔다. 폭파소리가 몇번 나더니 담장이 날아나고 대문 안의 화구가 벙어리로 되였다. 잇달아 박락권 퇀장은 친히 돌격조를 지휘하여 청사로 돌격해 들어갔다.

교활한 적 지휘관은 부하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하려고 집안의 책상, 걸상들을 몽땅 층계 입구에 쌓아놓았다. 그것은 아군의 진공에도 큰 장애가 되였다. 박락권 퇀장은 즉시 일부 전사들에게 밖에 나가 우층으로 올라가서 적을 족치라고 명령했다. 진퇴량난에 빠진 적들은 고스란히 두손을 들고 투항하고 말았다.

대동광장(지금의 인민광장)은 장춘시 중심이였다. 거기엔 위만 시정부, 위만 경찰국, 위만 방송국, 위만 은행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광장 서북쪽에 자리 잡은 중앙은행 청사가 제일 웅위로왔는데 회색 화강암 벽에 철문이 달려있었다. 보기에도 견고한 건물이였다. 그 안엔 4,000여명 적군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군구 사령부에서는 협동작전하여 먼저 시정부, 경찰국, 방송국을 탈취한 다음 은행을 고립시키고 나중에 병력을 집중하여 공격하라고 명령하였다.

4월 18일 낡이 밝을 무렵, 돌연 신호탄이 날아오르면서 회색 하늘을 갈라놓았다. 삽시에 귀를 째는 듯한 총포소리가 려명의 적막을 깨뜨렸다. 맹렬한 포화는 층집들에 집중되였다. 동남종대는 쓰딸린거리, 민강로, 장춘거리에서 동시에 진공을 발동하였다. ‘조선퇀’은 종대의 주공부대로서 위만 시정부 청사를 공격하는 중임을 맡았다.

점심때 쯤 되여 ‘조선퇀’은 시정부 청사에 맹렬한 공격을 들이댔다. 전사들은 비발처럼 쏟아지는 적탄을 무릅쓰고 돌격하였다. 맹렬한 포화에 시정부 청사에는 불이 달렸다. 바람이 불자 불은 갈수록 세차게 타올라 적들은 부득불 청사를 버리고 도망치지 않으면 안되였다. 오후 2시 좌우에 ‘조선퇀’은 위만 시정부 청사를 탈취하였다.

오후 4시, 세개 종대는 이미 중앙은행을 물샘틈없이 포위하였다. 적들은 독안에 든 쥐가 되고 말았다. 5시에 총공격이 시작되였다. 세개 종대의 포화는 사정없이 은행청사 지붕과 청사 앞 방어선에 쏟아져내렸다. 적들은 미친듯이 반격을 시작하였다. 아군이 점령한 집벽에 탄알이 폭우처럼 쏟아졌고 폭파에 날아간 유리쪼각들이 전사들의 몸에 마구 들씌워졌다. 벽은 벌둥지마냥 구멍이 펑펑 뚫렸다. 아군 돌격대가 돌격하였으나 적들의 화력이 너무도 거세여 광장을 지나갈 수가 없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아군은 포병위치를 옮겨 단거리 포격을 들이댔다. 포탄이 청사에 어김없이 날아들자 적들은 갈팡질팡하였다. 포알 몇발이 창문으로 날아들어갔다. 온 청사에 불이 달리자 적들은 당황해서 반격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 기회를 타서 세개 종대는 새로운 공격을 들이댔다.

‘조선퇀’이 청사와의 거리가 20~30메터 되는 곳까지 전진했을 때였다. 갑자기 은행의 몇개 철문이 열리더니 천여명 되는 적들이 물밀듯 몰려나와 동남 방향으로 몰려갔다. 사태는 매우 위급했다. 만약 적들을 막지 못하면 후방에 있는 천명이나 되는 포로들과 산처럼 무져놓은 탄알이 반격의 력량으로 될 터인즉 그 후과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이 위기일발의 시각, 무리 지어 나오는 적들 앞을 용감한 ‘조선퇀’ 장병들이 막아나섰다. 앞장에 선 퇀장 박락권은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날창을 적의 가슴에 박았다. 치렬한 육박전이 벌어졌다.

이 기회에 서남종대, 동북종대, 동남종대의 제70퇀은 각각 서, 북, 동 3면으로부터 포위를 돌파하려는 적들에게 측면 공격을 들이대여 적의 허리를 끊어놓았다. 앞의 적들은 아군에 포위되고 뒤의 적들은 은행 청사에 도로 기여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은행 안의 독전대에게 가로막혀 진퇴량난에 빠졌다. 이에 아군은 정치공세를 들이댔다.

“총을 바치면 죽이지 않고 포로를 우대한다!”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어떤 적들은 무기를 놓고 아군 켠으로 달려왔다.

적들은 투항을 알리는 백기를 흔들고야 말았다. 퇀장 박락권은 놈들의 투항을 접수하려고 씩씩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교활한 적 한놈이 날창으로 박락권 퇀장의 가슴을 찔렀다. 그 때 박락권의 나이는 28세였다. 부퇀장 고생호도 적의 날창에 배를 찔리워 피를 너무 많이 흘린 탓에 장렬히 희생되였다.

중앙은행 청사 우에 드디여 붉은기가 꽂혔다. 아군에 의해 은행이 점령된 것이다. 이번 장춘해방전역에서 아군은 적 2,500여명을 살상하고 만 4,000여명을 포로했다. 그만큼 대가도 컸다. ‘조선퇀’은 장병 170여명을 잃었다. 전역이 끝난 후 제75퇀은 구태시에서 잠시 휴식정돈하고 연변으로 개선했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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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군사법정 옛터 진열관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긴 권덕원.          조선족 이야기 백년사          (흑룡강신문=하얼빈) "지금까지 취재하러 왔던 언론사가 50여개 되는 데요…" 권덕원(權德源)은 문서철에 보관한 신문 지상의 기사를 일행에...
  • 2016-06-25
  • 1. “외삼촌의 행적을 알아봐 줄 수 있을까요?”   문득 딩동 하고 벨이 짧게 울렸다. 짧은 메시지가 폰의 화면에 뜨고 있었다. 군인이었던 외삼촌 행적을 함께 알아봐 줄 수 없겠는가 하는 문의 내용이었다. 메시지를 보낸 주인은 북경의 박씨 성의 지인이었다. 취재차로 대륙의 조선인 노병(老兵)을 만나...
  • 2016-06-20
  •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결론부터 쓴다면 양산(梁山)에는 무덤 귀신만 있었다. 양산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무덤이었다. 그러나 양산에 도착하면서 눈앞에 언뜻 떠오른 것은 웬 풍만한 여인이었다. 택시기사가 말하는 산의 이름은 그대로 여인을 연상...
  • 2016-06-17
  •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땅의 이름은 무심코 생긴 게 아니다. 설화 같은 이야기가 담겨 있고 나침반처럼 위치를 나타내며 또 거울처럼 모양을 흉내 낸다.한양(漢陽)은 "놈을 기르다"는 뜻의 한양(漢養)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실은 한강(漢江)의 북쪽에...
  • 2016-06-03
  • 조선반도의 삼국승려와 대륙고찰 이야기        (흑룡강신문=하얼빈) 옛말에 "잉어가 용문을 뛰어넘으면 용이 된다"고 했다. 그럼 인간이 용문을 건너면 뭐가 될까?…"그거야 두발로 건너보면 금방 알거 아니겠어요?"   솔직히 그래서 옛날부터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했을지 모...
  • 2016-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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