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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74] 중국조선족 이주사(김춘선편3)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11월16일 08시17분    조회: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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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74](김춘선편3)

 

우리 중국조선족의 력사를 제대로 리해하려면 우선 우리 민족이 조선반도로부터 어떻게 중국에 이주해왔고 중국에 이주한 이후에 어떻게 하나의 소수민족으로 형성되였는가를 준확히 알아야만 중국조선족의 력사를 조선사도 아니고 한국사도 아닌 중국조선족의 소수민족사로 정확하게 리해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 중국조선족은 언제부터 조선반도로부터 중국으로 이주해 왔는가? 중국조선족의 선조들이 최초로 이주한 것은 17세기 초 후금군과의 전쟁에서 끌려온 포로들이 지금의 조선족들의 선조들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우리 조선족은 조선반도에서 하나의 근대민족으로 형성된 이후에 중국동북지역을 비롯한 중국경내 각 지역으로 이주해왔다고 볼 수 있다. 기실 이주사는 주관적인 것보다 객관적인 환경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조선반도에서 조선인들이 중국지역으로 이주한 것도 기실 당시 여러 가지 정치 경제적 여건과 객관적인 환경의 핍박으로 인해서 이주한 사례가 더 많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우리 조선족의 이주사는 크게 중국의 력사시기를 기준하여 나누어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크게는 청나라시기, 중화민국시기, 1931년 일제가 동북을 강점한 괴뢰만주국시기로 나누었고, 또 괴뢰만주국시기를(이 시기는 복잡한 일제의 식민지정책과 이민정책이 실행되였기 때문에) 1937년을 계기로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대개 4개 시기로 보고 있다.

우선 청나라시기의 이민을 보면 초기에는 전쟁포로로 끌려왔다. 이들의 력사를 보면 1980년대부터 시작한 민족성분조사에서 수많은 하북성, 료녕성, 길림성의 박씨들이 조선인으로 확인되였고, 그래서 정부에서는 1200여명의 박씨들에게 조선족이라는 민족성분을 인정하여주었다. 이렇게 초기의 이민은 전쟁으로 이루어졌으나 청나라시기 총체적인 이민은 수백년간에 걸쳐서 이루어진다. 청나라는 동북지역을 자기들 조상이 발상한 지역이라고 아주 신성스럽게 여기면서 봉금령을 내려 이 지역을 봉금지역으로 만들고 모든 백성들이 이 지역에서 살지 못하게 하였다. 이렇게 수백년간 동북지역은 봉금지역으로 방치되여 있었는데 이 시기에 조선의 북부지역에 살고 있던 백성들이 초기에는 생활난으로 인해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서 중국땅으로 이주하게 된다. 이런 이주는 수백년간에 거쳐 이루어지는데 우리는 이 시기를 범월시기라고 말한다. 범월이란 청나라에서 이 지대를 봉금했고 이 지대로 민간인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기에 조선인들은 두말할 것 없고 관내지역의 한족들과 북부의 몽골지역 사람들도 이 지역에 들어오지 못하였다. 이 봉금시기에 가만히 강을 넘어 들어온 사람들 그리고 들어와서 밭을 일구어 그곳에서 먹고 살고 생활했던 사람들을 우리는 범월시기, 혹은 봉금시기 이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료녕성 본계만족자치현 산성자향 박보촌(1980년대).

19세기 중엽부터 조선인들이 대량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 시기를 이민실변시기의 이주라고 한다. 이 시기에는 수백명, 수천명 지어는 수만명이 이주해 들어온다. 이 시기 왜 이렇게 많이 들어올 수 있었느냐 하면 19세기 중엽부터 청나라가 외국렬강들의 침입을 받으면서 동북변강이 위험했고 또 재정적으로 국가경제가 지탱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동북지역에 대한 봉금을 해제하는 방법으로 로씨야의 동북으로의 침입을 방지하고 동북변강을 지키며 또 동북지역에 사람들을 이주시켜 이 지역에서 농업에 종사하게 하여 당지 군인들과 백성들이 자체로 살 수 있는 경제적여건을 마련하기 위하여 이민실변정책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청정부는 1880년대부터 초간국, 월강국을 꾸려서 관내지역 한족들의 이주를 환영했다. 그러나 여러가지 교통상의 여건으로 동북평야까지(돈화, 교하지역)는 산동, 하북의 한족 이주민들이 대량 이주하였으나 할바령과 로야령을 넘어서 이 연변지역에는 대량 들어올 수 없었다. 그리하여 연변지역의 개간에 있어서 청나라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서 초기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의 건너편에 있던 조선인들의 월경을 엄격히 통제하였으나 그 이후에는 로동력을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북부지역의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넘어 연변땅에 와서 개간하는 것을 허락하면서 19세기 말에 이 지역에 대량의 조선인들이 이주, 정착하게 되였다. 그 사람들이 바로 연변지역의 조선족사회를 형성하면서 지금 우리 조선족의 이주의 첫 고봉기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범월시기 혹은 봉금시기와 이민실변시기는 청나라시기 조선족이주의 두개 시기로 볼 수 있다.

박보촌로인활동실 박씨 조상 사진.

1910년에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 조선은 망국으로 치닫게 된다. 일제는 조선을 강점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식민회사를 통하여 정책적으로 많은 토지를 략탈함으로써 수많은 조선농민들이 토지를 잃고 류랑자로 거리에 나앉게 만들었다. 이러한 실정에서 수많은 조선농민들은 살길을 찾아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서 대량 동북지구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것을 이주기에서 세번째 단계라고 볼 수 있다. 1910년대에는 약 20여만의 조선인들이 동북지구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후 매년 약 2만여명의 이주민들이 동북으로 들어왔는데 그래서 1920년대에는 40만명, 1931년 일제가 동북지역을 강점한 그 시기에 와서는 이미 60여만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동북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료녕성 영구시 개현 진툰진 박가구촌.

박가구촌 박금안 가족사진.

그 후 1932년에 일제는 동북을 강점하고 장춘(신경)에 위만주국을 건립하였다. 그리고 만주국을 토대로 중국대륙을 침략하는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1932년부터 1937년까지 이른바 ‘로구교사건을 일으켜 중국침략을 전면적으로 추진하기전까지의 그 시기는 조선과 동북이 모두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대체로 자유이민의 형식으로 조선인들을 이 지역에로 이주시켰다.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고 중국대륙 침략전쟁을 추진하면서 그들의 이민정책은 처음에는 식민회사를 통해 일본인들을 동북에 이주시킨 후 동북지역에서 토지를 조차하여 그 토지를 일본인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동북지역도 점차 조선과 같은 그러한 식민지로 전락시키려 시도한 바가 있다. 그러나 일본이민과 중국국민들간의 경제적마찰, 민족적충돌 등 원인으로 일제의 초기 이민정책은 실패하게 되였다. 그 후 일본은 이민정책을 바꾸어 환위이민을 실시하는데 환위이민이란 위치(이주지역)를 바꾸어 이민을 시킨다는 것인데 초기 일본인들을 직접 동북에 이주시키려던 계획을 바꾸어 일본인들을 기후도 좋고 농사도 잘되는 조선반도 남반부지구에 대량 이주시키고 식민지회사를 통해 략탈한 대량의 토지를 일본인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수많은 일본이민들이 동북이 아닌 조선으로 이주하였던 것이다. 일제는 그렇게 토지를 잃은 조선농민들을 유혹하여 동북은 어떻게 좋고 토지가 어떻게 비옥하고 하는 등 기편적인 선전수단을 동원하여 많은 조선인들을 자유이민의 형식으로 동북에 보내는데 성공하였다. 1930년대까지 일제는 이런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와같이 1930년대는 일제가 이른바 이주를 제한하지도 장려하지도 않는 방이민기였다. 그러나 계획적으로 암암리에 혹은 각종 심리전을 통해 조선인들을 지속적으로 동북에 보내는 정책을 추진해왔던 것이다. 1930년대 항일련군을 소멸한다는 그런 주지에서 추진했던 집단부락건설도 일제의 식민회사의 이민정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만선척식주식유한회사에서 편찬한 <연길현이민입식 개황>.

일제가 추진하던 이같은 정책은 1937년 일제가 본격적으로 중국대륙을 침략하는 이 시점에 와서 새로운 형태로 변하였다. 수많은 인력이 필요하고 많은 량식이 필요하며 동북지역이 확실히 일본제국주의가 중국대륙을 침략하는 후방기지 역할을 하려면 반드시 이 지역에 많은 군사기지와 농업기지가 구축되여야 했던 것이다. 이런 기지에서 우선 필요한 것은 수많은 인력이다. 그러나 그 전시기의 정책으로는 이러한 인력문제를 해결하는데 여러가지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실정에서 일제는 새로운 이민계획을 작성하는데 그것이 바로 집단이민과 개척이민이다. 집단이민은 1936년에 계획하여 1937년에 본격적으로 추진된다. 집단이민은 아예 일본정부의 직접적인 사촉하에 식민회사를 내세워서 동북지역에 있던 만척회사와 손잡고 동북과 조선에 만선척식주식회사와 선만척식주식회사 등 두개의 큰 회사를 세우고 이 회사를 통하여 집단적으로 한개 마을 혹은 수백명, 수천명의 이주민들을 모집하여 동북지역에 이주시켰다. 1937년도부터는 일년에 몇만명 정도가 아닌 몇십만명씩 이주시키는 그런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1937년부터 태평양전쟁이 발생한 1941년까지, 1942년부터 일제가 멸망한 1945년까지의 이주상황을 살펴보면 그 짧은 시간내에 백여만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이 동북지역으로 이주하게 된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이시기 조선족의 이주는 대체로 집단이민 혹은 개척이민으로 요약할 수 있다.

개척이민 즉 개척단을 한개 마을공동체로 구성해서 보내는데 그 단장은 대체로 일본인이였고 대개 일본인 단장의 이름으로 개척단마을의 이름을 명명하게 되는데 평화시기에는 개척단이 전부 농사에 투입되고 유사시에는 전부가 무장을 들고 전장에 돌입할 수 있는 이런 군사훈련을 받았다. 개척단은 거의 제2선 군사부대라고도 말할 수 있고 예비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왕청현전각루로 이동하는 조선인집단이민 행렬.

이와같이 중국의 조선족이주사는 매개 력사시기에 따라서 부동한 형태로 이주하게 되는데 일제가 멸망하고 우리가 광복하는 그 시점에 이르러서 동북지역에만 해도 조선인들이 216만명에 달했다. 광복직후 많은 조선인들이 귀국하였지만 동북땅을 자기의 제2고향으로 생각하고 계속 남아서 중국국적에 가입한 조선인은 114만명에 달했다. 바로 이 114만명이 우리 지금의 중국조선족의 최초의 공동체라 볼수 있다.

다음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는 단일민족으로 형성된 이후에 중국땅에 이주해왔는데 중국동북지구에 온 다음 기타 민족과 같이 동북땅을 개척하고 건설하고 보위하면서 동북땅을 제2의 고향으로 가꾸어왔다는 점이다. 사실적으로 이 땅을 우리 고향이 아닌 자기 조국으로 생각하면서 지금 근 2백만에 달하는 조선족들이 중국땅에서 당당한 주인공으로 살아가고 있다.

왕청현 태양툰에 도착한 집단이주민들이 로천에서 밥을 짓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중국조선족은 상술한 력사시기를 거치면서 중국에서 당당한 하나의 소수민족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사회가 직면한 과제는 아주 많다. 우선 계획경제체제하에서는 중국의 민족정책이 민족구역자치이기 때문에 구역자치구역내에서는 민족평등 정책이 철저히 실시되였다. 즉 연변지역은 조선족자치주, 몽골지역은 내몽골자치구 이렇게 민족구역자치를 실행했기 때문에 자치구역내에서는 철저하게 자치제도의 보호를 받으면서 민족언어, 민족문화, 민족력사 등 모든 것을 기타 민족과 똑같게 향유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민족은 정체성을 확보하고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킬 수가 있었다. 그런데 개혁개방이후 우리의 조선족사회가 당면한 과제는 자치구역 즉 조선족들이 집중적으로 살고 있던 연변(길림)과 흑룡강, 료녕의 많은 조선족집거 현 혹은 향진들이 점차적으로 소실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소실된 첫째 문제는 본구역을 떠나서 많은 조선족들이 해외로 진출했거나 중국의 대도시로 진출하면서 농경문화를 중심으로 형성되였던 조선족사회가 산업화시기에 들어와서 적극적으로 성시에 진출하고 공업에 진출하여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집거지를 형성하면서 과거의 터전이였던 고향을 떠났기 때문이다. 개혁개방시기 조선족들 뿐만 아니라 중국의 기타 민족도 농촌으로부터 성시로 들어가는 이런 문제가 존재하였고 자녀교육문제도 존재하며 여러가지 문제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개혁개방시기에 우리민족공동체를 어떻게 보존하느냐 하는 문제는 별도의 문제이다. 민족의 공동체 문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민족의 정체성 확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은 어떻게 확보해야 되느냐 이것이 제일 중요하다. 이 민족정체성은 하나의 혈통이라 해서 영원히 보존 발전되는 것이 아니다. 기실 민족의 속성에서 혈통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화이다. 간단히 보면 중국의 한족들은 염제, 황제의 후손들이라고 말하는데 기실 염제, 황제의 후손들이 이 넓은 땅에서 수천년의 력사를 경과하면서 하나의 민족으로 형성될 수 있은 것은 단순히 염제와 황제의 피를 물려받아서 형성된 것은 절대 아니다. 그들 수많은 부족들이 하나의 큰 민족정체성을 확보하면서 한족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된 제일 중요한 요소가 바로 문화이다. 바로 문자이다. 만약 중국에 갑골문과 같은 문자가 없었고 이런 문자문화가 없었으면 수많은 민족들이 한족으로 융합될 수가 없다. 혈통보다 문화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특히 유태인들은 나치스 독일의 게르만민족의 처참한 탄압을 겪으면서 민족의 멸망위기에 도달하였지만 그들이 지금까지도 나라를 재건하고 발전시켜 세계 인류력사에 공헌할 수 있은 것은 그들이 우수한 문화를 지켰고 그 문화를 토대로 정체성을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우선 정부에서 구역자치라는 이 제도를 더 완벽화시켜서 모든 소수민족이 중국의 그 어느 지역에 가서도 동등한 민족의 권리를 향유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조선족들도 자각적으로 혹은 우리 조선족 공동체의 주관적인 노력으로 우리민족 언어를 보존하고 발전시켜야 우리민족 정체성을 보존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 중국조선족은 주류문화를 적극적으로 흡수하는 추세이다. 그러나 주류문화를 흡수하고 주류문화에 더 적극 참여한다 해서 우리 자신의 문화를 몰라도 된다는 이러한 생각은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고 본다. 지금은 세계화, 다문화를 제창한다. 금후 발전추세도 다문화이다. 절대 하나의 문화로 통합되거나 흡수되는 문제가 아니다. 중화민족의 우수한 문화는 한족의 문화만 가지고 절대 이룰 수 없다. 중화민족의 우수한 문화는 수많은 소수민족과 한족의 주류문화가 합치면서 이루어져야만 찬란한 문화를 형성할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중화문화의 찬란한 문화는 여러 소수민족들이 독자적인 문화를 지속적으로 진일보 발전시켜야만 더 완미해질수 있지 않겠느냐 생각한다.

길림신문 글 구성: 김태국

영상 사진: 김성걸 김파 정현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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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룡정《3.13》기념사업회 리광평회장에 따르면 룡정시에서는 《3.13반일운동》 96주년을 맞으며 추모제, 기념좌담회, 《3.13》반일운동유적지답사 등 기념계렬활동을 조직하게 된다. 3월 13일 오전 10시부터 룡정시 《3.13》반일의사릉에서 진행되는 추모제 행사에는 룡정시 당위와 정부, 심양한국총령사관, 룡정《3.13》기...
  • 2015-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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