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대형련재] 《한락연을 추억하여》(15)우리 아버지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11월26일 08시31분    조회:235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 한건립 한건행

3년 자연재해가 갓 지난 설날이니 가능하게1962년 음력설 기간이였을 것이다. 이왕과 마찬가지로 염보항(阎宝航)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고소)께서는 어머니와 우리 남매를 그들의 집(북경 서편문 국무원 숙소)에 청해 함께 설을 쇠였다. 매년 이맘때는 우리가 가장 즐거운 날이였다. 큰아버지네 집은 따뜻한 온기로 흘러넘쳤고 큰아버지, 큰어머니와 함께 설을 쇠는 즐거움으로 가득차군 했다. 매번 밥을 먹고 나서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어머니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늘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지내던 옛일들을 이야기하군 했다. 재미 있는 부분을 이야기할 때면 로인들은 아이들처럼 천진하게 웃기도 했는데 로인들의 친밀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흔히 우리들에게 영향주기도 했다. 그 때 우리는 재미 있는 이야기를 듣기라도 하듯이 한쪽에 조용히 앉아 흥미진진하게 들었고 웃기는 대목에서는 따라 웃기도 하고 긴장한 부분에서는 따라 긴장해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식사를 한 후 큰아버지의 표정이 꽤 무거워보였다. 요긴한 일이 있으니 어머니와 상론해보자고 했다. 우스개를 잘하는 큰어머니도 사뭇 진지해보였다. 우리는 어른들이 중요한 일을 상론하려는 줄 알고 다른 방에 가서 놀려고 했다. 그런데 큰아버지는 “건립아, 가지 말고 너도 들어보아라.” 라고 말씀하시면서 “어느 날 주총리와 락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총리는 ‘너무 아깝다. 방법을 대서 그의 전기(传记)를 써보라’고 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였다.

그 때 나는 늘 전기의 주인공들은 우리와 아주 멀리 떨어져있다고 생각했다. 조야와 수라라든가 마트로솔프 같은 사람들처럼 말이다… 나는 매우 의아했지만 뜻밖에도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전기로 쓸 수 있다는 사실에 큰아버지에게 물었다. “우리 아버지의 전기를 쓰는 겁니까?” 큰아버지는 엄숙하게 우리와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렇단다. 네 아버지 전기를 쓰는 것은 우리 로세대들에게 있어서는 아주 좋은 추억이고 너희들에게 있어서는 기념이지. 너희들도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하니 후손들에게는 교육인 셈이다.” 큰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방안은 쥐죽은듯 조용했고 어머니는 고개를 푹 숙인채 쏘파에 앉아 있었다. 한참 지나서 어머니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옛날 일을 생각하면 너무나 괴롭습니다. 여러해 동안 나는 늘 자신을 애써 억제하면서 생각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물며 그의 사업은 극히 비밀로 되여있었고 그 또한 극히 엄격하게 비밀을 지키는 사람이였으니 당내의 허다한 일을 나는 몰라요, 그저 감각으로…” 큰아버지가 어머니의 말을 이어 “그렇소. 나도 눈을 감기만 하면 그의 락관적이고 견강한 모습이 떠오르는구만. 나는 항상 그가 아직 죽었다고 생각되지 않지만 이는 사실이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에 대한 리해와 감수를 써야 할 책임이 있소. 알지 못하는 일은 쓸 수 없소. 그와의 공동한 생활과 그의 습관, 그의 성격, 그가 사람과 일에 대한 태도, 그가 어떻게 하였으며 그가 말한 적이 있는 일과 그의 애호도 모두 쓸 수 있소. 그의 사업성질 때문에 한사람이 완정하고 준확하게 그를 쓸 수는 없겠지만 내가 몇사람 더 찾아 당의 활동, 당내 료해로 그를 쓰게 할테니 애 엄마는 생활각도로 그를 써보오. 우리는 꼭 방법을 대여 전기를 완수해야 하며 이는 그에 대한 가장 좋은 기념으로 될것이요…” 마지막에 어머니는 “그럼 써보지요.”라고 말했다. 큰아버지는 “급할 건 없소. 그러나 우리는 충분히 준비를 하고 가급적 완벽하고 정확하게 써야 할 것이요.”라고 말했다. 그 후 몇년 동안 매번 만날 때마다 큰아버지는 전기를 화제로 꺼내놓군 했다. 그러나 그 때 어머니가 4청 운동으로 가지 않으면, 큰아버지가 일이 다망했고 그 후에는 또 ‘문화대혁명’ 때문에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가 모두 박해받아 사망했고 어머니도 깊은 심연 속에서 헤여나오지 못했다.

‘문화대혁명’ 이후 아버지 생전의 전우, 친구, 학생 및 동북에서 당사연구를 하는 단위의 사람들 등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각도에서 아버지를 언급하면서 모두 책이나 화책, 영화, 드라마 같은 것을 만들어내야 한다고 제기하였다. 우리는 총리와 염백부(伯父)가 제일 먼저 제기한 생각이 조만간 실현될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은 다만 우리 가슴에 있는 아버지와 지난 수십년간 어머니와 큰아버지, 아저씨, 아줌마들이 들려준 사소한 기억들을 기술하여 후기 전기창작에 약간의 소재를 보태보려 한다.

건립이 3살이고 건행이 2살 나던 해에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건립만이 희미한 기억 속에 아버지와 몇몇 아저씨들이 큰 트럭에 물건을 싣고 있는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후에야 안 일이지만 그것은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신강 키질에 가기전이였다.

건립은 아빠가 또 먼길을 떠난다는 것을 느꼈기에 따라가겠다고 떼질을 썼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다. “네가 좀더 크면 꼭 데리고 갈게…” 건립이는 바라고 바라면서 다음번을 고대했지만 다음번은 영원히 다시 올 수 없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1949년말, 1950년초 어머니는 당조직의 배치에 따라 4살짜리와 5살짜리 두 아이와 갈아입을 옷들만 챙긴 채 아빠가 남겨놓은 그림들을 지니고 란주에서 귀양을 거쳐 광주(광주 부근인데 혜양인지 어디인지 기억나지 않음)에 외할머니를 만나러 갔다. 외할머니는 당시 한 료양원에 계셨다. 이 료양원에는 많은 아저씨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송엽장을 짚지 않으면 팔이나 머리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당시 우리는 이들이 새 중국의 해방을 위하여 남하한 부대의 부상 입은 영웅들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다만 그들이 모두 좋은 사람들인 줄은 알았다. 외할머니를 만나기전에 어머니는 우리에게 거듭 “외할머니께서 너희들 아버지에 대해 물으시면 ‘서북에서 혁명을 하신다’”고 말하라고 당부했다. 주변의 아저씨들도 “너희들 아버지는 누구지? 어디에 있지?” 하고 우스개소리로 묻군 했다. 그 때마다 우리는 “서북에서 혁명을 하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당시 우리는 서북이 어느 곳인지도 몰랐고 그저 란주만 알고 있었다. 혁명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더욱 몰랐으며 우리들이 영원히 아버지를 만나볼 수 없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가 대답하는 것을 본 후 아저씨들은 모두 매우 존경을 표시하면서 우리들을 더욱 잘 대해주었다. 당시 아직 어린 마음에도 우리는 ‘아버지는 꼭 매우 훌륭한 사람일거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1950년말에 북경에 도착한 후 1951년에 건립이가 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름을 사용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다른 사람들은 녀자애들이라면 건립의 립(立)자를 아름다울 려(丽)자로 쓰고 건(健)자도 건(建)자로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이름을 적군 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건립(健立)이라는 이름은 사내애들 이름같다고 말하군 했다. 우리가 이름을 잘못 쓸 때가 많았는데 그 때마다 어머니는 일일이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이름을 정확하게 고쳐놓군 했다. 동생 건행이가 소학교에 입학했을 때 한번은 자기 이름자를 간단하게 쓴다고 이름자의 획수를 절반만 써놓았는데 어머니가 엄격하게 타이르면서 이렇게 해선 절대 안된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너희들의 이름은 모두 너의 아버지께서 지어주신 이름인데 너희들이 태여난 후 너희들에게 무한한 희망을 기탁한 것이다. 너희들 아버지는 늘 어머니에게 이후 어떤 일이 있어도 자립해야 하며 자기에게 의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아버지는 서북에서 매우 명성이 있었지만 국민당에서 가만놔둘 리 없었고 수시로 생명의 위험이 있었다. 너희들의 이름자에 건강할 건자가 들어간 것은 너의 아버지가 어릴 때 생활이 어려워 건강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사업에서 정력이 넘치는 것 같지만 줄곧 몸에 병이 있었단다. 돌아가실 때에도 륵막염을 앓고 계셨단다.”하고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계속하여 “너희들 할아버지 일가족도 적들의 추격에 죽지 않으면 페병 때문에 사망했단다. 일본 사람들은 중국 사람을 ‘동아병부’라고 불렀는데 아버지는 너희들 세대는 건강하기를 바랐던 거란다. 그러니 너희들 이름자중의 건자는 건강할 건자이지 건립할 건자가 아니란다. 건립이는 1944년 항일전쟁시기에 태여났는데 일본이 중국의 령토를 강점했고 중국은 독립하지 못했다. 이외 동방례의 풍속에 보면 조선족의 낡은 관습 속에 녀자를 경시하면서 녀자는 독립할 수 없고 커서는 남편에 의지해야 한다고 했다. 때문에 아버지는 중국은 독립해야 하며 녀자애들도 독립정신이 있어야 하며 커서도 남편에게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너의 이름자에 립자를 넣으셨다.

건행이의 행자는 ‘언필신 행필과(言必信,行必果)’를 뜻하는데 행은 전진함을 뜻하고 걷는 사람은 모두 떳떳이 서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너희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으로 보면 너희들에 대한 무한한 희망을 기탁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너희들이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의 뜻처럼 살아가길 바란다…”고 말씀하셨다.

그 후부터 우리는 다시는 이름을 틀리게 쓰지 않았다. 매번 다른 사람이 잘못 쓰면 모두 시정해주었으며 건행도 일처리에서 참답고 진지할 것을 자신에게 엄격히 요구하였다. 10여년 전에 신분증을 발급하였는데 우리 신분증의 건(健)자가 모두 亻획이 적히지 않았다. 아버지와 친분 있던 한 아주머니는 “그래서는 안된다. 획수를 빠뜨려서는 안된다. 이건 너희들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신분증을 고치기란 정말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다년간의 노력을 거쳐 끝내 착오를 시정하였다. 지금은 이름을 쓸 때마다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아버지가 지은 이름은 우리의 일생과 함께 하고 있으며 정직하고 책임감이 있고 분투하는 사람, 자립하는 사람, 쓸모 있는 사람이 되라고 우리를 채찍질하고 있다.

우리가 다니는 학교는 기숙제학교였다. 토요일이 되면 다른 아이들은 모두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중을 왔다. 어떤 동학들의 집에서는 자동차를 가지고 마중오기도 했다. 학교에 돌아오면 동학들은 모두 집에 가서 아빠가 어떻고 어머니가 어떻고 하면서 즐겁게 떠들었고 맛 있는 먹거리들도 많이 가져오군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영원히 어머니 혼자만이 우리를 데리러 왔고 우리와 함께 공공뻐스를 탄 채 집으로 돌아오군 했다… 그 때마다 우리는 우리에게 아빠가 없다는 사실을 의식하군 했다. 우리는 동학들과 아빠를 자랑할 수는 없었지만 아빠가 매우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만은 느끼고 있었다. 어머니는 늘 우리와 아버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일을 착실하게 하지 않고 대충대충 할 때면 어머니는 너희들의 아버지는 일할 때 계획적이고 목적성이 있으며 성실한 사람이였다고 말씀하시군 했다.

아버지가 어릴 때 할어버지께서는 아버지가 그림 그리는 것을 반대하면서 그림을 그려서는 밥벌이를 못한다고 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아버지는 혼자서 묘지에 달려가 같은 그림을 그리고 또 그리면서 만족스러울 때까지 그림을 반복해서 그렸다고 한다. 아버지는 자신에 대해 추호의 소홀함도 용서하지 않았다. 조금만 소홀해도 걷잡을 수 없는 손실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아버지의 지하공작 성질과도 관계되긴 하지만 아버지의 일처리에서의 진지한 태도를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잘못을 용감하게 시인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넘어지면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애가 넘어지면 어른들이 달려가 어루만지고 달래는 것을 찬성하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우리는 어려서부터 자빠지거나 쓰러져도 모두 스스로 일어섰다. 몸에 묻은 먼지를 털고 인차 일어섰으며 혹시 누가 볼가봐 창피해하기도 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자립해야 하고 자기가 한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다른 동학들이 집에서 맛 있는 음식을 많이 가져왔을 때 우리에게 그런 것이 없어도 어머니가 애들 둘을 키우면서 조련치 않다는 것과 여유돈이 없어 맛나는 음식을 사줄 수 없다는 것도 리해했으며 부러운 마음을 억눌렀다. 어머니는 늘 우리에게 아버지가 프랑스에서 고학하던 때의 간고한 생활을 이야기하군 했다. 아버지가 프랑스에 있을 때 양복 한벌과 셔츠 한벌만 있었는데 매일 저녁 셔츠를 깨끗이 빨고 새벽에 반 쯤 마르게 되면 베개 밑에 겹쳐 눌렀다가 이튿날 단정히 차려입고 집문을 나섰다고 했다.

물질적 조건은 남보다 못했지만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남들보다 뭐든지 더 잘하고 뛰여나게 잘할 것을 요구하였다. 어떤 사람은 좋은 옷은 있지만 공부도 못하고 사람 됨됨이도 안되는데 무엇이 좋은가? 때문에 우리는 더는 동학들과 비교하지 않았고 최선을 다해 공부를 잘했다. 어릴 때 옷 하나만 입었고 바지가 짧아지면 이어서 입었어도 우리는 원망하지 않았다. 생활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늘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어려움이 있으면 될수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자기에게 없을지언정 다른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가 우리에게 이야기 하나를 해주었다. 아버지와 갓 결혼했을 때 일인데 아버지는 늘 집에 있는 물건들을 아저씨, 아줌마들에게 선물하군 하였다. 한번은 아저씨 한분이 오셨는데 떠날 때가 되자 그 아저씨에게 물건을 준외에도 돈까지 주라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어머니는 며칠간 쓸 생활비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그에게 주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에 불만족해하면서 “좀더 가져오라.”고 하셨다.

어머니가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다행히 그 아저씨가 괜찮다고 사양하면서 급급히 가버렸기에 난처함을 피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저씨가 간 후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돈이 조금 밖에 남지 않았고 결혼할 때 선물받은 은그릇까지 다 팔았는데 이후 어떻게 생활하겠는가고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웃으면서 “나는 한끼를 먹으면 다음끼는 무얼 먹을지 모르는 사람” 이라면서 어머니에게 한 처녀애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더란다. 20년대, 아버지가 상해에 계실 때 당금 설을 쇨 무렵이 되였는데 한 동지가 과자 한봉지를 보내왔다. 아버지는 과자 속에 든 쪽지를 꺼내여 보고는 인차 쪽지를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나서 이 과자만 있으면 그래도 설은 쇨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때 평소 늘 놀러 오군 하던 이웃집 처녀애가 놀러 왔다. 애가 떠날 때 곧 설을 쇠는 마당에 줄 것도 없고 처녀애네 생활도 구차한지라 과자를 선물로 주었다. 처녀애는 기쁘게 과자를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그 때 어떻게 설을 쇴는지 아는가고 물었다. 어머니가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아버지는 계속해서 설 쇠는 이틀간은 물 한주전자를 메고 야외에 나가 그림 그리기를 했다고 말씀하셨다. 배고프면 물 두어모금 마시면서 이튿날 오후가 되기까지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였다. 그러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걸음에 삼륜차부 하나가 구운 떡을 먹고 있길래 그림과 구운 떡을 바꿔먹자고 제의했다고 한다. 삼륜차부가 “그림을 잘 그렸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림을 팔 수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망설이자 아버지께서는 “이 그림을 팔면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다. 설 쇠고 나서 가서 팔아보라. 팔지 못하면 나를 찾아오라. 이건 나의 주소이다.”라고 말하고 주소를 남겨주었다고 한다. 삼륜차부는 망설이다가 결국은 그림을 받아들었고 아버지에게 구운떡 두개를 주었다고 한다. 후에 삼륜차부는 그림을 팔아 많은 돈을 받았으며 그 후 아버지와 삼륜차부는 친구로 되였다고 한다. 또한 아버지가 금후 삼륜차부들 속에서 혁명사업을 펼쳐나가는 데 좋은 기초를 마련할 수 있게 되였다고 한다.

이야기를 마친 후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우리 집에 찾아온 것은 모두 매우 어렵기 때문이오. 손을 내밀지 않아도 리해해주어야 하며 곤난을 제기했다면 부득이한 경우일 터이니 더욱 도와주어야 하오. 그들은 방법이 없어도 나는 방법이 있지 않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무슨 방법이 있냐고 물었더니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또 그림을 팔 수 있으니 어떤 곤난이라도 극복할 수 있지…” 그 때부터 어머니는 늘 남을 도와주군 했다. 해방 후 우리 집은 생활이 곤난하였다. 이전에 민정부문에서 해마다 등기표를 발급하면서 혁명렬사 가족들에게 어떤 곤난이 있는가, 보조해주겠다고 했는데 어머니는 종래로 가정의 곤난을 제기하지 않았다. 우리는 소학교부터 대학까지 아무런 보조도 신청하지 않았으며 어려움이 있으면 자체로 극복하군 하였다. 그러나 친구나 동학들이 집에 찾아와 어려움을 말하기만 하면 어머니는 아낌없이 도와나섰으며 자기가 없을지언정 타인을 우선 도와나섰다.

나의 많은 친구와 동학들은 한건립이네 집에 가면 자기 집에 온 것 같다고 말하군 했다… 우리가 소학교 2―3학년 때 어머니는 아버지의 그림을 전부 무상으로 국가에 기증하였다. 그 때는 그림에 대해 잘 알지 못하였고 그림이 아까운지, 응당 기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후에 우리가 좀 성장했을 때 어머니는 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아버지가 세상 뜨신 후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명망 있는 사람, 심지어 대화가들까지 찾아와서 그림을 찾았고 사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림의 가치를 알고 있었고 한락연의 일생은 모두 인민과 독립운동을 위한 분투와 국가를 위한 일생이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내가 혼자서 너희 둘을 거느리고 힘들었지만 나는 그래도 염보항 큰아버지와 상의하고 큰아버지가 총리에게 알려 아버지의 그림을 전부 국가에 기증하였다. 너희들도 이제 크면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우리는 아주 어려운 생활을 해왔지만 어머니의 처사는 옳았다. 지금 어머니는 비록 돌아가셨지만 아버지의 유작 기념전시도 보지 못했지만 우리는 시종 어머니를 리해하고 있다. 우리 어머니는 위대한 어머니일 뿐 아니라 아버지의 가장 훌륭한 동반자였으며 아버지를 가장 잘 리해하는 사람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보살펴주었는데 그들은 모두 경앙과 깊은 그리움을 안고 아버지를 이야기했다. 그들 가운데는 염보항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소자원아저씨, 고숭민큰아버지, 우의부큰아버지, 성성큰아버지, 황저, 반결자, 로소비, 진천 그리고 또 루이 · 애리 등이 있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의 전우, 친구, 학생이였으며 모두 중국의 해방에 기여한 사람들이며 소속되여있는 업종에서 성과를 올렸으며 모두 걸출한 사람들이다. 그중 몇가지 사례만 써볼가 한다.

소자원아저씨는 늘 우리에게 말했다. “너의 아버지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떳떳이 자기의 길을 걸어나간 사람이였다…” 진천아저씨는 아버지의 학생이였다. 그는 아버지의 조수로 아버지와 함께 키질에 갔다. 진천아저씨는 줄곧 아버지의 전기 한권을 쓰려고 생각했고 아버지의 조각상을 만들고 싶어했다. 그러나 미처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국제 벗인 루이 · 애리는 1938년에 아버지와 만났고 1987년에 세상을 떴는데 나의 아버지, 어머니와 깊은 우정을 맺었다. 어릴 때 기억인데 진천아저씨는 길에서 엄마와 함께 걸어가는 건행에게 “너의 아빠는 영웅이다.”라고 하시면서 엄지손가락을 내민 적이 있다. 그 후 매번 만날 때마다 그는 깊은 감정을 담아 아버지를 이야기하군 했다. 그는 한락연은 견강한 혁명가이며 백프로 혁명가이며 그 다음에라야 그의 예술이라고 말했다. 그는 줄곧 자기가 알고 있는 한락연에 대해 글을 쓰려고 했으며 사망하기전 글쓰기가 어렵게 되자 어머니를 찾아 본인이 구술하고 어머니더러 기록하게 했으며 그것을 다시 수개하여 문장 한편을 남겼다. 그는 또 아버지의 력사 인증과 아버지에 대한 불후의 평가를 혁명감정으로 충만된 편지 한통에 남기기도 했다.

아버지는 일찍 우리를 떠났고 우리에게 아무런 물질적 재부도 남겨주지 못했으며 남아있는 100여점의 그림도 어머니께서 모두 국가에 기증하셨다. 그러나 아버지의 그림, 이야기, 사람 됨됨이, 정신은 우리의 성장과 함께 해왔으며 우리의 일생을 고무했다. 아버지, 우리는 언제나 당신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탄생 100주년에 즈음하여 쓴 글)

한건립(1944년― ): 한락연의 딸. 1967년에 북경림학원을 졸업하고 선후로 당산 백각장화학비료공장, 북경서광화학공장, 북경리화측험중심, 북경외국써비스그룹 본사에서 사업했다. 공정사이며 1984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 1999년에 정년퇴직했다.

한건행(1945―2011년): 한락연의 아들. 북경사범체육학교를 졸업하고 선후하여 북경 화원촌중학교, 옥연담중학교, 제11회 아시안게임 조직위원회, 국가체육총국 신문업총사에서 사업했다. 정년퇴직 후 중국올림픽문화촉진회 판공실 부주임으로 있었다. 2011년 7월에 병으로 사망했다.

번역: 《길림신문》 안상근 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72
  •    중국 전역을 종횡하는 철도망에는 ‘모택동호’, ‘주은래호’와 나란히 국내 3대 ‘위인호’ 대렬에 이름 올린, 할빈기무단에서 탄생한 ‘주덕호’기관차가 있다. 7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주덕호’기관차는 여전히 북경-할빈 려객운수 철도로선에서 달리고...
  • 2021-04-14
  • 연변 도문시에 위치한 마반촌산성유적이 지난 2월 25일 ‘2020년도 전국 10대 고고학 발견' 본선 명단에 진출한 데 이어 4월 13일 드디여 20개 본선지가운데서 투표방식으로 최종 평심을 통과하고 ‘2020년도 전국 10대 고고학 발견'에 선정됐다.     마반촌산성유적(자료사진) 이번 도문 마반...
  • 2021-04-13
  • 룡정에서 동남쪽으로 륙도하를 거슬러 5리가량 올라 가면 합성리마을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 동산 산기슭에는‘3.13 ' 반일 시위에서 수난 당한 14명 렬사들이 잠들어 있다. 1919년 3월 13일, 룡정에서 일어난 반일 군중운동은 조선족이 거주하는 지구에서 반일투쟁을 벌리기 위한 사상 및 조직적 기초를 닦아 놓았...
  • 2021-04-12
  • 청명이 며칠 앞으로 다가오고 있지만 호남성 봉황현 알라영진의 동북적 조선족렬사 최호생의 묘지에는 지금까지 성묘를 다녀간 가족이 없다. 최호생 렬사의 가족의 행방이 최근 언론의 관심을 받고 있다. 봉황현 알라영진 천암촌의 산에 최호생 렬사의 묘비가 세워져있다. 비문에는 ‘최호생 렬사. 1929년 출생. 동북...
  • 2021-04-08
  • 청명날 렬사릉원에서 93세 로인을 우연히 만나 영웅 형님의 이야기를 듣다 올해의 청명은 무엇인가 통한 하루였다. 날씨도 통하고 인연도 통한 것 같다. 전날까지 으르렁대던 6, 7급 광풍은 언제 그랬냐 싶게 꼬리를 내리고 하늘을 덮었던&nb...
  • 2021-04-07
  • ‘산마다 진달래요, 촌마다 렬사기념비라네’ 35년 전, 저명한 시인 하경지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찾았을 때 감개무량해하면서 이러한 시구를 남겼다. 이 붉은색의 열토(热土) 우에 자리잡은 현성이 바로 왕청이다. 이른 봄의 산언덕에서 아른거리는 진달래꽃 꽃봉오리들은 마치 한 로인과 109개 렬사기념...
  • 2021-04-07
  •   안중근 순국 111주년 추모활동에서 안중근의사를 기리는 발언을 경청하고 있는 참석자들. 지난 3월 26일 대련안중근연구회에서 주최하고 대련조선족문학회, 대련금보신구조선족문화촉진회에서 협조한 항일투사 ‘안중근 순국 111주년 추모활동’이 료녕성 대련시에서 있었다. 대련안중근연구회, 조선족문...
  • 2021-03-31
  • 우리 민족의 무명영웅들-121 룡정시 덕신향 금곡촌 원 혁명렬사기념비. 2021년 1월 25일 안인학 촬영. 1 새해 2021년 1월 23일, 생면부지의 안인학씨로부터 위챗 가입 신청을 받았다. 연변일보에 련재중인 룡정시 금곡 촌출신 손원금 항일렬사 전기를 보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에 위챗 가입을 수락했더니 룡정시라지오텔...
  • 2021-02-20
  • 코로나19로 북경 조선족사회의 예정되였던 행사들이 취소된 가운데 재북경 조선족대학생력사동아리 학생들이 일전 '우리 력사를 기억하자'는 취지로 온라인행사를 진행했다.     조선족 이민사를 주제로 한 이번 행사는 중앙민족대학 리준걸의 '리씨조선 이민력사와 중국조선족 이민 배경과 과정...
  • 2021-02-05
  • [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5) ○ 김 동 수 초혼(初婚) 한락연은 1917년(19살)에 한마을 처녀 최신애와 결혼하였다. 당시 조혼이 류행이던 상황을 고려하면 19세면 결코 어리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2년 후인 1919년에 그들 사이에서 딸 인숙이가 태여났다. 피도 채 마르기전에 한락연이 그들 모녀를 떠났으니 장녀 ...
  • 2021-02-03
  • [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4) ○ 김 동 수 ‘3.13’에서 날개를 1919년은 다사다난한 해였다. 1919년 3월 1일 조선반도에서 ‘3.1’운동이 노도와 같이 폭발하였고 뒤이어 중국땅 룡정에서 ‘3.13’반일시위가 봄우뢰와 같이 울려퍼졌으며 북경에서는 ‘5.4’운동이 폭풍우...
  • 2021-02-03
  •   도문시 마반촌산성유적지가 ‘2020년도 전국 10대 고고학 발견’ 예선에 입선됐다. 지난 11일, ‘2020년도 전국 10대 고고학 발견’ 평의활동이 가동됐다. 전국적으로 도합 31개 유적지가 이번 예선에 입선된 가운데 20개 유적지가 본선에 진출하게 된다. 본선 진출은 중국문물신문사 전국십대...
  • 2021-01-22
  • [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3) ○ 김동수   한락연사진(한락연의 딸 한건립 제공) 2. 동란의 년대 동북의 겨울철은 춥기가 장난이 아니다. 박달나무 윙윙 소리내 울고 얼음장이 쩡쩡 갈라터지고 살을 에이는듯한 북풍은 눈보라를 휘몰아 마을과 올망졸망 들어앉은 초가집들을 덮친다. 그 속에서도 사람들은 부단...
  • 2021-01-19
  • 1908년 룡정 전경,멀리 비암산이 보인다.(차광범 제공) 1. 뿌리깊은 룡정 우리가 동북아의 끝없이 망망한 푸른림해와 높고 낮은 산발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젖줄기처럼 뻗고 뻗은 크고 작은 강들과 무연히 펼쳐진 일망무제한 평야와 옹기종기 들어앉은 촌락들과 도시들을 바라보노라면 부지중 대자연의 거대한 위력과 ...
  • 2021-01-18
  • 룡정시가지 해란강과 륙도하의 합수목에 세워진 락연공원 ○ 김동수 프롤로그 불사조(不死鸟)는 애급 신화에 나오는 령조(灵鸟)로서 상서로운 새이다. 그리스어로 피닉스(phoenix)라고 해서 고대 애급의 상상의 신조(神鸟)였다. 우리말로는 영원히 죽지 않는 새를 상징한다. 혁명가, 예술가, ‘비단의 길’ 문화...
  • 2021-01-07
  • 한락연의 유화작품 〈태양신〉키질석굴 벽화를 모사한 그림(53.5cm × 70.5cm, 1947년) 60년대초, 주은래 총리는 염보항 어르신에게 “《한락연전기》를 쓸 생각을 가져라”고 말씀하셨다. 염보항 어르신이 말씀하시길, “락연의 전기를 쓰는 것은 우리 로일대들에게는 그리움이고 그대들에게는 기념으...
  • 2020-12-29
  • 1924년 1월 25일, 한국 《동아일보》는 〈미술계의 두 수재〉라는 제목으로 한락연이 우수한 성적으로 상해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소식을 게재했다. ▨ 최룡수 (1) 5월은 백화가 만발하는 계절이라 북경의 곳곳에는 꽃향기가 가득하였다. 수도공항 대기청은 봄기운이 완연하고 사람들로 북적인다. 5월 12일 오후, 일본 항공...
  • 2020-12-25
  •   2014년 민정부에서 한락연에게 발급한 렬사증명서.   ▨ 륙기청 성세재의 철막이 신강을 떠나면서 신강은 중국의 자유구역으로 다시 설정되였고 문화인들도 점차 이 새로운 부락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중 화가들중에서 제일 먼저 해당 부락으로 들어간 것은 한락연으로부터 시작되였다. 하여 신강미술을 읽...
  • 2020-12-15
  • ‘중공 동만특위 기념관’설립 준비판공실에 따르면 연변주 및 연길시에서 련합으로 기획건설중인 ‘중공 동만특위 기념관’(잠정 명칭)이 전사회를 대상으로 관련 혁명 문사자료, 항전 유물, 민속 옛 물건들을 모집하고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우리 나라에서 이름있는 로혁명근거지인바 동...
  • 2020-12-09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77](김춘선편6) 우리 조선족사거나 연변지방사를 보면 하나의 독특한 특색이 있다. 누구나 다 알고 정부에서도 승인하는 것인 데 그것이 바로 1980년대 문화부 부장이며 시인인 하경지가 연변을 시찰하고 남긴 유명한 시구이다. 즉 “산마...
  • 2020-12-06
‹처음  이전 1 2 3 4 5 6 7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