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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 《한락연을 추억하여》(16)신강 문화보물고의 새로운 발견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11월30일 07시56분    조회: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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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고창 구자 예술 탐고기

원래 변방 동포의 생활화를 묘사하기 위해 4월 중순에 적화에 도착해 다시 투루판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그런데 신강에 이르러 특히 고고창 유적이 있는 투루판 경내의 삼보에 도착하여 위대한 자연이 나에게 준 흥분과 여기저기 산재한 고적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고고창, 차사, 구자 등지의 유적지를 순례하기 시작하였으며 동시에 대담한 발굴작업과 고대벽화 모사작업을 진행하였다. 비록 두달 반 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투루판과 쿠차 부근의 두곳을 다니면서 발견한 모든 것은 신강은 ‘문화의 보물고’임에 손색이 없음을 충분히 증명하였다. 5월 7일에 투루판을 떠나 승경구에 도착하여 먼저 당조 때의 동굴식 사찰 몇 곳을 돌아보았는데 잔존하는 벽화의 색갈은 여전히 신선하였으며 도안의 변화도 돈황의 동굴에서 본 것과 달랐다. 승경구로부터 남쪽으로 15리를 가면 바로 고고창국 유적이다. 비록 하나의 페허였지만 성곽은 10리이고 성내에는 아직도 많은 허물어진 담벽이 있었는데 땅에서는 수시로 각종 고대 그림이 새겨진 벽돌과 도기 등 조각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시간의 제한과 개인의 능력, 재력의 제한으로 상요구, 목두구 등 지구의 동묘와 같은 부근의 각지에 분산되여있는 곳들을 더 이상 보지 않기로 결정하고 단도직입적인 작풍으로 삼보에 도착한 세번째 날부터 일군들을 고용하여 무덤을 파기 시작하였다.

한락연의 수채화작품 〈남편이 돌아와 식사하기를 기다리다〉(39.5cm × 29.5cm, 1945년)

고창성 동쪽, 동북쪽, 서북쪽의 고비에는 묘지가 매우 많은데 만약 처음으로 간 사람에게 안내자가 없다면 고비사막에 덮여있어 식별하기 어렵다. 나는 고창에 도착한 후 현지인들을 찾아다녔는데 주로 40년전에 독일 고찰대의 발굴작업을 도와준 로농들을 찾았다. 결과 그들의 가르침하에 적지 않은 묘지와 무덤을 파내는 방법을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이튿날 오전에 일군들을 고용하여 묘지를 찾기 위하여 10여개의 묘도 입구를 팠다.(매번 길이 5척, 깊이 3척까지 파면 왼쪽 벽에 한장의 묘지명이 끼여있었다. [묘도의 길이는 약 3장이며 주묘문으로 이어지고 깊이는 약 2자이다.] 네모로 된 벽돌에는 붉은색으로 사자의 성명, 적관, 년령, 관등 계급과 년, 월, 일이 씌여있었다.) 고창년호의 연창, 연화(연화 묘지는 평민의 묘지이기 때문에 흙 벽돌에는 사망 년, 월, 일과 이름외 략력이 없었다.) 및 당조의 정관, 건봉, 함형, 개요, 개원 등 8개였다. (한 묘는 부부가 함께 매장되여있었으므로 한 무덤에서 두개의 묘지명을 얻었다.) 이런 묘지를 확인한 후 즉시 고용인을 추가하여 부부묘를 파기 시작하였는데 묘도가 깊어서 오후 6시가 되여서야 묘문을 찾을 수 있었다. 묘동 안에 기여들어가니(묘 내부는 정방형이고 천정은 원형이였다.) 각양각색의 가는 비단으로 둘러싸인 관이 없는 남녀의 미이라 2구와 나무빗, 절반 썩은 편직물 뭉치, 별자리를 그린 비단, 나무패쪽 다수, 가는 나무막대기 등 (녀성 미이라는 머리가 없었고 모래가 동굴내에 흘러들었는데 묘동의 3분의 2가 잠길 깊이로 보아 도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밖에는 다른 순장물이 없었고 묘안의 남성 미이라는 신장이 7척이고 녀성 미이라는 5척 6센치메터였다. (3일내에 4개의 무덤을 발굴하여 미이라 5구를 얻었는데 그중 한구가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수염이 있었고 나머지 4구는 머리가 없는 녀성 미이라를 제외하고 3구의 모발 색상은 모두 갈색이였는데 묘지 비는 모두 한자로 되였다.)

18일에 투루판에 돌아와 19일에 성서쪽으로 25리 떨어진 얄내자구(얄호)에 가서 옛 차사국의 유지를 둘러보았는데 그 곳에도 하나의 커다란 페묘지와 여전히 벽화를 보존하고 있는 몇개의 묘동이 있었다. 시간, 능력과 재력의 제한으로 한번 관찰하는 것으로 앞으로 연구의 준비로 삼았다.

20일 투루판을 떠나 곧추 쿠차로 가는 도중에도 매우 많은 고성 유적을 보았는데 그중 가장 크고 고고방면에 매우 전도가 있는 것은 언기 부근의 40리성과 서북 산중의 동굴식사원(투루판 부근)의 언기 및 쿠차 부근은 40~50년전에 이미 영국, 독일, 로씨야, 일본 및 프랑스 고고대가 발굴하여 력사문화가치가 많은 물건들을 가져갔다. 그러나 그들이 가져간 것은 제한된 수량이며 더욱 많은 보물은 아직도 지하에 묻혀있다.

쿠차에 도착한 후 먼저 위간하 하류에 갔다. ‘구무투라’ 동묘는 모두 강변 모래언덕에 있었는데 여러해 동안 비바람의 침습과 강물의 충격 그리고 외국 사람들의 발굴을 거쳐 고적이 많지 않았으나 그 우에 씌여져있는 한자와 화풍을 보면 모두 당나라 초기 이전의 한족 승려들의 작품이였다. 특히 비선 등은 돈황 동묘속 비선과 서로 닮았음을 증거로 할 수 있는데 애석하게도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구무투라동묘를 본 후에 비록 쿠차 부근의 부동한 방향의 다섯개 산속에 적지 않은 동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연구에 집중하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쿠차에서 200리 떨어진 키질로 곧추 향했다. 그 곳은 고대 불교의 중심지로 지금의 도로와 20리 떨어져있다. 붉은색 돌산을 마주하고 위간하의 고요를 따라 북쪽으로 높이가 50~60메터 되고 길이가 6~7리 되는 사암우에 분포되였는데 지금도 250여동(회교가 이곳에 온 지 이미 천여년이 된다)이 있으며 그중 50~60동은 여전히 벽화가 잔존해있다. 벽화는 그 색채가 새롭고 구도가 정교하며 화풍이 독특한데 모두 인도의 수다라풍과 근사하다. 그러나 하곡을 따라 한승동 묘소가 있는 위간하 하류 구무투라로 가면 겨우 30리 밖에 안된다.

한락연의 수채화작품 〈물을 이다〉(49cm × 32cm, 1945년)

그 50여개 동묘벽화 가운데서 개인의 천박한 식견으로도 화면의 색조, 부동한 구도와 화풍 및 그 통형동묘 천정 우에 그린 우주도의 진화에 근거하여 상, 중, 하 3기로 나눌 수 있었다. 그 때의 문화 진도로 말하면 3기의 변화와 진보과정은 적어도 500년 내지 1,000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런데 회교가 그 지대로 온 것은 약 1,100년 좌우였으므로 우리는 이런 동묘의 건축, 벽화 등의 시작과 완성기는 기원전부터 시작하여 기원 5세기까지 사이의 작품이라고 대담하게 말할 수 있다.

제1기, 즉 전기의 작품이다. 대부분은 리상적인 표현에 속하기 때문에 그들이 그린 벽화에서 묘사한 방법은 주관적인 견해를 중심으로 하였다. 따라서 또한 근대 서양화의 신파작품과 흡사하다.(근대 서양화의 신파작풍은 19세기부터 성행해온 고고학 및 발굴작업 과정에서 얻은 고대작품이 유럽 사회에 출판된 후 그 영향을 받고 변화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내용과 표현방식에서의 기교는 통일되고 조화되였다.

제2기, 즉 중기작품이다. 화면에서는 여전히 리상을 표현하지만 그러나 이미 표현방식상의 기교, 색조의 변화와 광선의 작용에 주의를 돌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화면이 초기보다는 균형적이고 조화롭고 생동하다.

제3기는 바로 말기의 작품이다. 화면설계에서의 현실 의의, 복잡한 구조, 색상의 화려함과 선의 세련됨과 생동성으로 예술작품의 최고 단계에 이르렀으며 동묘 장식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런 작품에서 당시 불교가 교의를 확대하기 위해 예술가를 육성하고 제고시키는 데 열중했다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건축예술과 도안화는 종류가 많고 풍격이 달라 나로 하여금 동묘건축 발전사의 오랜 력사를 느끼게 하였다. 내지의 사묘 뿐만 아니라 돈황 천불동에서도 이와 류사한 작품을 볼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1,000~2000년 동안 장기간 비바람과 지진의 침습을 거치고 우상을 반대하는 회교도들이 신강의 각 지역을 점령한 후의 파괴와 외국인들의 도굴 등을 거쳐 현존한 것은 전문가들이 연구할 때의 참고용 밖에 안된다.

고창으로부터 얄내자구 고 차사국 동묘와 쿠차 위간하변의 동묘에는 모두 한족 승려들이 개방한 동묘가 있는데 벽화의 화풍 및 한자로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작품기교는 돈황석굴의 작품보다 정교하고 강력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키질 천불동의 작품에서 보여준 타민족 정서와 다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불교가 신강에 금방 들어왔을 때를 짐작할 수 있는바 한족 승려들의 회화기교는 그리 고명하지 못하지만 이미 종족 문화의 풍격을 충분히 발휘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 간단하고 거친 작품들은 돈황 전기의 작품이라는 것을 의심할 바 없다.

이상의 비교된 판단을 제외하고 키질동묘와 돈황석굴의 작품에서는 또 민족성과 민족문화 형식이 불가분리적이고 초기 불교의 성행기 불교 신도들의 자신감과 락관적인 태도, 불교가 한족 지구에 들어간 후 정숙하고 장엄한 데로부터 점차 용속화되는 현상 등을 보아낼 수 있다. 례컨대 돈황석굴은 6조 때부터 청나라까지 모두 일부 작품을 창작하였는데 이는 불교예술의 일대 집성으로 되였지만 작품의 힘 있고 품격이 높음은 북위와 당나라 초기의 작품에서만 볼 수 있다. 성당시기는 모든 벽화에서 화면 구조와 색채면에서 웅장하고 화려하여 한족 불교예술의 형태를 확정하였으나 인물의 표정은 키질천불동 작품의 변화가 많고 생동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공양인상은 키질천불동과 돈황천불동에 모두 있다. 석실 공양인상은 대부분 동굴 문을 들어가서 좌우벽 하단에서 시작하여 사면의 돌벽까지 펼쳐지나 구조, 번호, 복장, 면모와 회화기교면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키질벽화의 공양인상은 돈황석굴처럼 남녀 신도들이 얼굴 부위에 별 표정 없이 좌우로 갈라져 단조롭게 서있지 않고 공양인의 사적이 한장면, 한장면씩 살아 움직이는듯 굴안 석벽 하단의 2메터 되는 네모꼴 안에 묘사되여있다.

동시에 화면 속 인물의 동작형태에서 생동감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얼굴표정에서도 생동감 있고 락관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거의 모든 화면에 나오는 인물복장을 보면 흑인을 제외한 많은 사람들은 인도 및 아랍 및 희랍인들이다. 당시 불교를 열렬히 신앙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릉라주단를 걸치고 목에 보석꿰미 목걸이를 걸치고 손가락에 보석반지와 경호인원들을 이끌고 다녔다. 화면에서는 평민을 보기가 힘들다. 만약 간단한 옷차림을 한 사람이 있다면 소수의 로동인민에 지나지 않는다.

총적으로 이번의 짧디짧은 두달 사이에 고성을 순례하면서 고분을 발굴하고 동묘벽화를 모사하는 사업을 통해 신강은 고대 동서 문화 교류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한족 문화가 신강 인민에게 영향을 준 년대가 매우 오래 됐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때문에 신강은 고고학 사업에서 중대한 전망을 가지고 있다고 단정 짓는다. 인류의 문화와 동서 문화의 교류사를 증명하고 한부의 정확한 신강사를 쓰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특히 문화계에서는 계획적이고 대규모적인 고고학 사업을 하루속히 전개하여야 할 것이다.

(1946년 7월 18일,19일 《신강일보》에서)

/번역: 《길림신문》 김태국기자

/사진: 민족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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