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락연의 유화작품 〈태양신〉키질석굴 벽화를 모사한 그림(53.5cm × 70.5cm, 1947년)
60년대초, 주은래 총리는 염보항 어르신에게 “《한락연전기》를 쓸 생각을 가져라”고 말씀하셨다. 염보항 어르신이 말씀하시길, “락연의 전기를 쓰는 것은 우리 로일대들에게는 그리움이고 그대들에게는 기념으로 남으며 후손들에게는 교육이 될 것입니다…”
부친은 1898년 12월 8일에 길림성 연변의 한 가난한 농민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일본제국주의가 중조 두 나라 인민을 억압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 이에 깊은 원한을 품게 되였으며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조선으로 하여금 독립하게 하려고 했다. 젊은 시절부터 반일투쟁 행렬에 동참하였으며 ‘3.13’ 운동에 참가하여 조선의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뛰여다녔다. 쏘련혁명의 성공은 그로 하여금 독립하려면, 해방하려면 10월혁명의 길을 걸어야 함을 굳게 믿도록 하였다. 그는 쏘련에 갔다가 다시 중국 상해로 돌아왔다. 1923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이로부터 그는 일생을 중국과 조선의 독립에, 반파쑈 투쟁에, 중국의 혁명사업에 바쳤으며 그의 한평생 시종 변하지 않는 위대한 공산주의사업에 바쳤다. 그는 전인류의 해방을 위하여, 전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평생을 분투하였다.
부친은 1919년에 조선민족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3.13’ 운동에 참가했다. 20년대에 동북에서 중국공산당 조직을 기획하고 건립하였다. 30년대에 프랑스에서 반파쑈투쟁에 참가하였다. 30년대 후반기부터 40년대초까지 국공합작 사업을 하였다. 40년대에 국민당 고위층 인사들의 통일전선사업을 하여 새 중국의 해방을 쟁취하였다. 이런 사업들은 모두 극히 비밀적인 것이였으며 수많은 경우 일방적인 단선 련계였다. 그들 그 세대 사람들은 모두 자각적으로 리상을 위하고 목표를 위했으며 활동 후 문자를 남기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헌신정신만 있고 개인득실은 념두에 두지도 않았다. 부친은 그의 회화예술과 고고학으로 중국 민족문화 유산을 보호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를 엄호로 하여 각종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였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일찍 희생되다 보니 해방을 기다리지 못했다. 해방 후 우리 나라는 또 여러가지 운동을 겪었다. 70년대초에 이르러서야 각지에서는 당의 력사 자료를 수집,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동북 각 성에서 수집한 초기 당건설 정황에 모두 그가 언급되였다. 그러나 구체적이고 자세한 상황은 수집하기 어려웠다. 많은 당사자들이 이미 세상을 떠났고 설령 살아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두 80~90세, 지어는 100세 고령이였다. 일부 세부적인 부분이 확실하지 않았다. 하여 진실하게, 전면적으로 부친의 일생을 반영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70년대초, 동북 《사회과학전선》에서 맨 처음으로 부친에 대해 체계적으로 쓰기로 결정하였다(그 후 1973년 제4기 《사회과학전선》에 부친의 특별란이 실렸다). 이 잡지사의 조쟁암동지는 북경에 와있으면서 한달 남짓한 시간을 들여 나의 어머니와 부친을 알고 있는 사람들과 상세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자녀들과 함께 북경도서관 간행물자료실, 백림사 북경도서관 잡지보관실에 가서 자료를 찾았다. 지금 발간된 1947년 《신강일보》, 감숙 《평화일보》에 실린 문장의 절대 대부분은 그 때 찾아낸 것이다. 또한 대다수가 그의 회화 및 고고학 사적이다. 그러나 시간 제한으로 계속 더 깊이 들어가지 못했다. 이후 조쟁암동지가 출국하면서 이 사에서는 또 장영동지를 파견하여 이 사업을 이어갔다. 80년대 초, 동북 각 성에서는 모두 부친 관련 일부 력사자료를 제출하였다. 80년대 중기에 중앙당학교의 최룡수교수(북경대학의 초빙교수이기도 했다)가 부친의 사적을 체계적으로 정리, 조사하고 고증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10여년간 그는 종래로 이를 중단한 적 없었으며 살아계신 부친의 친구들을 널리 방문하였다. 자료 하나를 얻기 위해 자체로 출장비를 지불하면서 동북으로 가서 직접 조사, 방문하기도 하였다. 한국에 가서 20년대 한국의 신문을 찾아 열람하기도 했다. 이 책중 1924년 조선 《동아일보》에 실린 아버지에 대한 한편의 소식이 바로 그가 한국에서 찾아낸 것이다. 아버지의90주기였던 1988년에 그는 당의 력사 자료를 수집하는 각도에서 한락연 유작전시회 개최를 제안했다. 김일룡동지도 회화미술 각도에서 유작전시회 개최를 제안했다. 1988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인 사마의 · 애매티(司马义•艾买提)의 배려 아래, 부주임 황광학의 직접적인 지도 아래, 국가민족사무위원회의 주최로 ‘한락연 탄신 90주년 유작전시회’가 개최됐다. 이번 그림전시회는 광범한 인민들로 하여금 여러해 동안 쌓여있었던 부친의 그림을 볼 수 있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림 전시회를 통해 부친의 옛친구인 양공소, 여극견과 련계가 닿으면서 30년대말 부친이 진남전선에 가서 통일전선 사업을 했던 상세한 정황들을 명확히 료해하게 되였다. 또 부친의 프랑스에서의 옛친구인 온붕구선생과 련계되여 항일전쟁 초기 부친의 프랑스에서의 일부 정황들을 료해할 수 있었다. 더욱 기쁜 일은 그림전 개막을 앞두고 80고령의 최순희로인은 한락연이 곧 한광우라는 것을 확인했고 부친께서 1919년에 연변에서 ‘3.13’ 운동을 령도한 정황들을 회고했다. 또 최순희로인을 통해 여러해 동안 흩어져있던 한국에 살고 있는 큰언니 한인숙을 찾게 되면서 우리 자녀들은 몇십년 동안 갈라졌다가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되였다. 최순희로인과 1988년 그림전시회를 위해 로고를 아끼지 않고 노력한 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이번 그림전시회가 끝난 후 부친의 많은 옛친구들은 혁명적 격정과 두터운 우의를 안고 예전에 그들이 함께 분투했던, 그리고 감격적이고도 눈물겨웠던 글들을 써냈다. 이 글들을 썼던 로인들중 어떤 분은 다 써내고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떴다. 르위 ·엘리(路易·艾黎)선생의 경우 병으로 사망하기전까지 나의 모친을 만나기만 하면 부친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하였다. 자신이 직접 손으로 쓰기가 불편했던 그가 구술을 하고 어머니더러 기록하게 하였으며 나중에 그가 수정했다. 부친이 세상을 뜨고 1987년 말에 엘리 로인이 세상을 뜨기까지 40여년이 흘렀지만 이 수십년 동안 그는 사업이 매우 다망함에도 불구하고 한순간도 그의 옛 전우이자 옛친구인 한락연을 잊지 않았다. 이 글들의 진귀함은 자명한 일이다. 오늘 우리는 여기서 함께 이 글들을 회상하면서 발간한다.
1993년 10월, 중한 량국 수교 1주년에 즈음하여 한국 KBS방송국과 중국미술관은 공동으로 한국 서울에서 ‘조선족 천재화가 한락연 유작전시회’를 열었다. 이번 전시회는 한국에서 아주 큰 돌풍을 불러일으켰다. 부친은 작고한 지 반세기가 지난 후 또 한번 중한 량국의 친선 및 문화교류를 위해 기여하셨다. 아울러 이번 전시회를 위해 많은 로고와 노력을 기울인 국내외 인사들과LG회사에도 감사를 드린다.
1993년 11월부터 12월까지, 또 중국미술관에서 서울미술전 귀국 전시회를 열었다. 이 그림전은 중국미술관에서 근 한달 동안 전시되였다. 미술관에서 소장한 그림개인전 가운데서 전시 기간이 가장 긴 그림전으로 되였으며 그림전시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부친의 탄신 100주년을 앞두고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 리덕수는 다음과 같이 제기하였다. 한락연을 기념하고 그의 혁명정신과 애국주의 정신을 발양하며 통일전선 사업을 잘함과 더불어 민족단결을 촉진하는 것은 당면에 있어서 적극적인 의의를 가지고 있다. 민족사무위원회 선전사 방학춘 사장이 직접 배치하여 회고록을 한권 내기로 했다. 전국정협 부주석인 조남기는 몸소 책의 제목을 써주었으며 또한 이 책을 잘 펴낼 데 관해 많은 보귀한 지도성 의견을 제기하였다. 하명안선생은 이 책과 부친의 탄생 100주년 기념을 위해 많은 사업을 하였다. 《인민화보》 잡지사의 리직간부 고진선생은 대량의 자료사진을 복제하였다. 문경재선생 일가는 묵묵히 많은 일들을 했다. 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온붕구 아저씨는 병중에서도 여러번 전화를 걸어와 회고록과100주년 기념 관련 일을 물었다. 그는 “락연이는 혁명을 위하여 많은 사업을 하였다. 묵묵히 세상을 떠나서는 안된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 활동을 주최하고, 책을 내지 않으면 너무 아쉬운 일이다…”고 말했다. 이 책은 또 구금 아저씨 및 나와 건행의 많은 친구들과 동료들의 관심과 배려를 받았다. 이 책을 잘 출판하기 위해 민족출판사의 동지들이 간고한 로동을 바쳤다. 30여년간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계속한 진실한 자료수집을 거쳐 많은 사람들은 당년 부친의 고고학 연구처럼 그의 정신으로 그와 그들 그 세대의 모든 일들을 발굴하였으며 비로소 이 책을 낼 수 있었다. 책에 불가피하게 많은 부족점과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으므로 여러분들이 보충과 수정을 제기해주기 바란다.
삼가 이 책을 부친과 함께 싸웠던 전우, 친구와 후손들에게 바친다. 동시에 광범한 독자들로 하여금 혁명 선배들의 간고분투 정신을 알게 하였다. 삼가 주은래 총리, 염보항 어르신, 부친―한락연 및 그 세대의 엘리트들을 위로하면서 삼가 이 책을 드린다.
―딸 한건립
1998년 10월 28일
(끝)
/편역: 《길림신문》 김가혜기자
/사진: 민족출판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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