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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영 - 음악의 길은 영원하리라
조글로미디어(ZOGLO) 2011년12월26일 09시22분    조회:8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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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강철산

연길시제2고급중학교 음악교원 강철산의 이야기


      소학교시절부터 노래를 배우면서 아련하게 가수를 꿈꾸어오던 어린 소년은 중학교시절에 기타에 흠뻑 빠졌다가 고중에 진학한후에는 손풍금을 배워가지고 음악학원에 입학했고 졸업후에는 음악교원으로 되였다. 비록 교원생활 10여년이 흐른 뒤에야 창작을 시작하였지만 벌써 200여수의 노래를 창작하였고 그중에서 60여수를 발표했으며 작년에는 《도영가요작곡집》DVD 음반을 내놓았다. 그가 바로 현재 중국음악가협회 회원이며 중국음악가협회 연변분회 리사, 연변생태문화예술협회 리사인 연길시제2고급중학교 음악교원 강철산(예명: 도영)선생이다.
      강철산은 1967년 3월 21일에 왕청현 배초구진에서 태여났다. 개인사업을 하는 아버지,  교원이였던 어머니 그리고 귀여운 녀동생까지 오붓한 가정에서 행복한 동년을 보냈다.
      7살에 어머니가 출근하던 배초구제2소학교에 입학한 강철산은 음감이 좋은 어머니를 닮아서인지 노래를 아주 잘 불러 음악선생님의 맘에 쏙 들었다. 노래를 즐긴 어머니는 강철산을 음악선생님으로부터 개별지도를 받게 하였다. 당시에 그는 학교선전대의 대표로 왕청현학교문예콩클에 참가하여 독창, 남녀 2인창으로 2등상, 우수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교내예술절에서 독창으로 우수상을 타기도 했다. 그때는 노래를 배우는 시간이 제일 즐거웠고 노래를 부를 때가 제일 행복했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왕청현 배초구중학교에 입학한 강철산은 중학교에서도 학교선전대의 일원으로 활약하면서 음악교원으로부터 개별지도를 받았다. 그러면서 앞으로 성악을 전공하여 가수로 되고싶다는 야무진 꿈을 갖게 되였다. 다른 애들이 사춘기로 방황할 때에도 그는 오로지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연변예술학교에 붙으려고 부지런히 노래실력을 다졌다. 하지만 2학년 후학기에 본 예술학교 전업시험에서 아쉽게 락방되였고 가수의 꿈은 여지없이 부서졌다.
      그러자 어머니께서 기운이 싹 빠진 아들의 어깨를 다독이며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었다.
      “예술학교 성악반에 붙지 못했다고 음악을 포기할것까지는 없는것 같구나. 네게 음악적감각은 있으니 악기로 새로운 도전을 해보는것이 어떻니?”
      그러지 않아도 음악을 놓고싶지 않았던 강철산한테 어머니의 말씀은 가물에 단비와도 같았다. 마침 강철산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악기가 있었는데 바로 기타였다. 그가 기타를 좋아하게 된데는 그럴만한 리유가 있었다. 왕청현에 있는 외가집에 놀러갈 때마다 뒤집 삼촌이 밤이면 문앞에 앉아 기타를 쳤는데 그 기타소리가 너무 듣기 좋아서 반했던것이다. 그는 어머니를 졸라 38원을 주고 기타를 샀다. 당시 38원이면 어머니의 한달로임이였다. 처음으로 자신의 악기를 가지게 된 강철산은 너무 좋았다. 그는 한달음에 외가집으로 달려가 뒤집 삼촌을 찾아 가르침을 부탁했다. 그런데 사실 그 삼촌도 체계적으로 배운것이 아니였기에 다른 사람한테 배워주기에는 무리였다.  
      집으로 돌아온 강철산은 자습하려고 낑낑 애써보았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기타를 체계적으로 배우고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던 강철산은 왕청현문화관에서 사업하는 이모부를 통해 왕청현문공단의 기타수였던 김기철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우게 되였다. 하여 강철산은 일주일에 두번씩 왕청현에 가서 김기철선생으로부터 기타를 배우고 숙제를 받아와서는 열심히 치군 하였다. 처음으로 치다보니 그 소리가 듣기 좋을리 없었다. 하여 가족들은 의견이 많았다. 특히 재미있는 향항무술련속극을 방송하는 시간에는 소리를 들을수 없다며 아예 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럴 때면 강철산은 밖에 나가서 련습하군 하였다. 사실 기타를 배우기전에 그도 TV련속극을 하루도 빠짐없이 보았지만 기타를 배우고나서부터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기타를 손에서 놓을줄 몰랐다.
      쇠공이도 갈면 바늘이 된다고 매일 짬만 나면 갈고닦은 강철산의 기타수준은 눈에 띄게 진보했다. 하여 그는 중학생때 벌써 왕청현문예경연대회에서 배초구진출연팀의 기타반주를 하기도 하였고 전 성 문예콩클에 연변출연팀의 기타반주를 맡아 호평을 받기도 했다. 당시 주군중에술관의 주최로 출연진을 선발해 련습을 하였는데 강철산은 출연자들중에서 제일 어렸다.
      초중을 졸업하고 고중에 진학할 때 이미 자습할수 있는 실력을 갖추게 된 강철산은 여러가지 기타서적들을 사가지고 독학을 시작했다. 그러던중 옆집 형님이 한국KBS방송국에 자신의 사연을 적어보내고 한국가요집을 선물받은것을 보고는 그 형님한테 한국기타교본을 얻어달라고 졸랐다. 하루는 옆집 형님과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한국KBS방송국에 편지를 썼다. 그 내용인즉 기타를 배우고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연변예술학교에 기타전업이 없기에 우리글로 된 기타교본이 없어 애로사항이 많다는 사실과 KBS방송국에서 도와주었으면 고맙겠다는 내용이였다. 행운스럽게도 그 편지를 받은 한국KBS방송국에서 정말로 기타교본을 보내주었는데 련습곡부터 독주곡까지 구전하게 있는 아주 선진적인 교본이였다. 그 책만 떼면 상당한 실력을 갖출수 있었다. 강철산은 그 책을 첫페지부터 마지막 페지까지 보고 또 보고 련습하고 또 련습하여 책이 닳아떨어질 정도까지 되였다. 그뿐만아니라 누가 기타를 잘 친다는 소리를 들으면 찾아가서 배우고 서로 시합을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기타련습을 하면서 한편으로 예술학교시험을 볼 준비를 단단히 하였는데 유감스럽게도 예술학교에서 기타전업을 모집하지 않아 부득불 포기할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좌절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 당시 할빈시조선족예술단에서 배우들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응시하였으나 1명밖에 모집하기 않아 결국 마지막 관문에서 탈락되여 다시 한번 실패의 고배를 마시게 되였다.
      강철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학입시까지 1년반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 지금처럼 음악을 해서는 성공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자신의 진로를 두고 고민하고있을 때 또 엄마가 보귀한 말씀을 해주었다.
      “예술학교에 가려면 건반악기를 배우는게 좋겠다. 넌 음악에 기초가 좋으니 건반악기도 금방 배울수 있을거야. 손풍금을 배워보지 않겠니?”
      엄마의 말씀에 도리가 있다고 생각한 강철산은 예술학교 진학을 목표로 손풍금을 배우리라 작심했다. 그런데 당시 손풍금이 어찌나 비쌌는지 중고도 500원이 넘어서 살 형편이 못되였다. 보다못해 친구가 자기 삼촌집에 문화대혁명때 손풍금이 있는데 이발이 몇개 빠져나갔다면서 그런거라도 필요하면 갖다쓰라고 했다. 한시가 급했던 강철산은 찬밥, 더운밥 가릴 형편이 못되였다. 그는 얼싸좋다고 이발빠진 공짜손풍금을 빌려다가 이발을 맞추어넣고 배초구진문화소의 리종택소장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손풍금에 대한 지식을 간단히 배워준 리종택소장은 강철산을 연변예술학원의 손풍금교원인 강광훈선생한테 소개해주었다.
      이렇게 되여 강철산은 체면을 무릅쓰고 배초구쌀 20근을 갖고 갓 결혼한 강광훈선생의 신혼집에 주숙하면서 손풍금을 배우게 되였다. 강광훈선생은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가 기특하여 학비도 받지 않고 진지하게 가르쳐주었다. 한달간 선생님집에 얹혀있다가 세집을 맡고 나간 강철산은 강광훈선생한테서 1년남짓이 손풍금 배웠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대학입시준비를 하는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대학입시를 앞두고 하루는 강광훈선생이 강철산을 불러놓고 “내 생각에는 네가 길림대학 예술학원에 지원하는것이 좋을듯싶구나”하면서 “넌 어떻게 생각하니?”하고 물었다. 강철산은 선생님의 권유대로 길림대학 예술학원을 지원하게 되였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고 강철산의 피타는 노력은 결실을 보았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장춘에 있는 길림대학 예술학원 음악교육학부에 입학하였다. 원래 음악기초가 든든하여 학교에 입학하여서는 별 애로사항이 없었다. 학교에서 손풍금을 잘 치는 학생들한테 피아노를 배울수 있는 기회를 주어 강철산은 1년간 피아노를 배울수 있는 행운을 가지게 되였다. 거기에 그가 붙은 음악교육학부는 음악교원양성이 위주였기에 배우는 범위가 아주 넓었는바 성악, 편곡, 작곡 등 여러가지 방면의 지식들을 골고루 접할수 있다. 그중에서 강철산은 창작과 지휘에 특별히 관심이 많았다. 하여 학교수업시간에 배우는 외에도 창작과 지휘에 대해 많이 자습하면서 모르는것이 있으면 교수님들을 찾아서 개별지도를 받았다. 그때 작곡가로 되고싶다기보다는 취미로 배운 작곡, 지휘 지식들이 후날 그가 작곡하는데 좋은 밑거름이 되였다.
      4년간의 대학생활을 마친 강철산은 1986년에 연길시제2고급중학교에 음악교원으로 배치받았다. 그는 학생들한테 음악수업을 해주는 한편 학교 악대, 합창대를 조직해 다채로운 활동들을 조직했으며 음악적재질이 보이는 학생들을 상급학교에 진학하게끔 도와주었다.
      지금까지 강철산의 도움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은 수십명에 달한다. 김설련학생은 음악적으로 좋은 조건을 가지고있었지만 집형편이 너무 어려웠다. 부모가 리혼한후 친척집에 얹혀살게 된 설련은 집이 수상시장부근에 있었지만 교통비를 절약하려고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날씨가 따뜻하면 그래도 운동삼아 걷는다지만 추운 겨울에 날마다 걷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설련은 배움에 의지가 강한 소녀였다. 점심 사먹을 돈이 없는 설련은 점심마다 음악교원인 강철산을 찾아와서 피아노련습실 열쇠를 달라고 했다. 점심식사에 대해 물으면 “요즘 살까기를 한다”고 대답하군 하였다. 후에 설련의 형편을 알게 된 강철산은 점심때마다 피아노련습실로 맛있는 음식을 배달시켜주었다. 또 배움의 열정이 식지 않게 힘을 북돋아주었고 상급학교에 진학할수 있도록 음악지식도 열심히 가르쳤다. 후에 설련이는 천진음악학원 성악학부에 입하였다. 설련이는 자신이 대학교에 가게 된것은 강철산선생님의 도움과 갈라놓을수 없다면서 방학때마다 찾아와서 인사를 드리군 하였다.
      설련이와 반대로 리철학생네 집은 아주 부유했다. 어려서부터 여러 방면으로 부족함이 없이 자란 리철은 예술에 소질이 있었지만 여러가지 음악을 접하면서 정신이 분산되여있었다. 리철이 벨칸토창법에 소질이 있다고 판단한 강철산은 그의 마음을 바로잡아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리철은 현대음악, 밴드음악, 힙합 등에 더욱 관심이 많아서 선생님의 타이름을 좀처럼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강철산은 리철의 부모를 찾아서 리철의 정황을 말해주고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설명해주었다. 또 담임선생한테도 리철을 설복해달라고 부탁했고 심지어 연변예술학원의 교원을 청해 리철과 한자리에 앉아 음악에 대해 담론하면서 리철의 생각을 바로잡아주기에 노력했다. 결국 리철은 제때에 마음을 다잡았고 후에 심양예술학원에 입학하여 성악학부에서 벨칸토를 전공하게 되였다.
      이렇게 하루하루 음악교육사업을 충실히 하고있을 때 역시 교원사업을 한적이 있는 김득진, 정근포, 성기화 선생님들이 자신들의 경험에 비추어 “평생 음악교원사업을 하고나면 퇴직후 조금은 허전할것이다”면서 “자기 작품을 남기는게 좋겠다”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선배님들의 말씀에 도리가 있다고 생각한 강철산은 창작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1997년, 강철산은 처녀작으로 《내 집이 제일 좋아》(김동호 작사)를 창작, 발표했는데 연변가무단의 최향란가수가 불러 연변방송에서 매주일가로 방송되였다. 그후 그는 해마다 여러편의 작품을 창작, 발표하였다. 이외에 론문도 부지런히 썼는데 그가 1997년에 쓴 론문 《노래기교에 대한 탐색(歌唱技巧的探索)》은 국가교육부로부터 “전국자질교육발전과학연구성과” 1등상을 수상하였다.
      강철산이 “도영”이라는 예명을 갖게 된데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류학을 가서 더 깊이있게 음악을 배워보고싶었던 그는 편지거래로 가깝게 지냈던 한국 서울음악대학 국악과 과장 강사준교수한테 요청해달라는  부탁편지를 썼다. 그러자 강사준교수는 “출근하고있는 학교측의 추천서를 보내오면 류학요청서류들을 보내주겠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학교측에서 류학을 보낼 형편이 되지 못했고 그도 결국에는 류학을 포기할수밖에 없었다. 비록 류학은 못가더라고 한번은 꼭 한국에 가보고싶었던 강철산은 무작정 한국으로 갔다. 한국에서 강사준교수를 만나 그동안 음악서적들을 보내주어서 감사하다는 인사도 드리고 또 창작얘기를 비롯한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얘기도중 강사준교수가 “강철산이라는 이름이 예술과는 거리가 멀어보인다”면서 “앞으로 계속 창작활동을 하려면 예명을 짓는게 좋겠다”고 건의했다. 그래서 “그럼 어떤 예명이 좋을가”하고 토론하던 끝에 강사준교수가 “음악의 길이 영원하라”는 뜻으로 “도영”이라는 맘에 쏙 드는 예명을 추천해주었다. 그때로부터 강철산은 “도영”이라는 예명으로 창작활동에 참가했다.
      강철산은 선후로 200여수의 가요를 창작하여 60여수의 작품을 연변TV방송채널, 연변라지오방송, 《예술세계》잡지 등에 발표하였다. 그가 작곡한 《이슬》(황장석 작사), 《사랑이 샘솟는 집》(김득만 작사, 렴수원 노래)은 연변라지오방송에 매주일가로 방송되였고 《밤눈 소야곡》(김욱 작사, 최향란 노래)은 연변TV방송채널에서 매주일가로 방송되였으며 《미련의 한잔술》(김계월 작사, 박연 노래)은 흑룡강방송국에서 매주일가로 전파를 탔고 《인정많은 어머니》와 《사랑이 샘 솟는 집》은 연변생태문화예술절공연을 통해 방송되였다.
      강철산은 연변음악가협회에서 주최한 전 주 제1기 “진달래컵”에서는 노래 《우리 사랑》(김대현 작사, 김선희 노래)으로 우수상을 수상했고 전 주 제2기 “진달래컵”에서는 노래 《인정많은 어머니》로 2등상을 수상했으며 전 주 제3기 “진달래컵”에서는 노래 《손잡아주리》(최영자 작사,  김지협 노래)로 3등상을 수상했다.
      강철산은 3년이란 시간에 알심들여 제작한 음반을 2010년에 발표하였는데 15수의 노래가 수록되여있다. 거기에는 유명한 성악가 김영철교수와 합작한 작품 《보람찬 길》, 유명한 성악가 최경호가수와 합작한 《아쉬운 사연》도 수록되여있다. 또 수록곡중의 《아버지》(허도 작사)는 금년에 중앙인민방송채널에서 중문으로 번역되여 방송전파를 탔다.
      2009년도에 이미 중국음악가명인록에 음악교육가로 기재된 강철산이 지금까지 이룬 성과도 주렁지지만 앞으로의 계획은 더욱 야심차다. 우선은 초심을 잃지 않고 현재 맡고있는 교육사업을 충실히 하여 학교의 음악활동을 더 활발히 조직하며 음악인재를 놓치지 않고 상급학교에 수송하는것이다. 다음은 음악창작에 심혈을 기울여 보다 대중성을 띤 노래를 창작하는것이다. 이 또한 그가 끝까지 이어갈 과업이기도 하다. 드높은 정열을 음악전수와 음악창작에 쏟는 강철산의 음악의 길은 영원하리라고 믿어의심치 않는다.

연변라지오TV신문   최설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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