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샅바끈 하나에 인생 건 씨름왕
조글로미디어(ZOGLO) 2011년12월26일 09시54분    조회:6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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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마동일

 

1962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10돐 기념운동대회에서 씨름1등을 하고 모교인 화룡고중 교문앞에서 황소고삐를 쥐고 포즈를 취했다.
 

“사람들은 아직도 나를 마장군이라 부른다” 

샅바끈 하나에 건 씨름왕 마동일의 인생


넘실거리는 구름관중들에 둘러쌓인 모래판우에서 건장한 사나이들이 서로의 샅바를 부여잡고 상대방의 허점을 노린다…이제는 추억의 한쪼각이 되여버린 진풍경. 한때 모래판을 호령했던 씨름왕 마동일선생을 일전 만나봤다. 화룡시내 모 다방에서 자리를 같이 한 마동일씨는 그 우람한 체양과는 달리 쑥스러운 기분이다. 솥뚜껑같이 큰 손으로 날렵하게 엽초를 굵게 말아문다.호함진 흰 담배연기가 세월의 자취가 남긴 그의 주름진 얼굴과 반백이 된 머리를 스쳐 위로 타래쳐오른다. 걸걸한 목소리,예지로 빛나는 두눈, 억센 손, 장대한 키꼴…정력과 힘이 넘쳐나는 그의 일신에서 아직도 격정시대의 그 장사의 호기를 보아낼수 있었다.     
 
편집자
 
  
“어릴 때 완전히 개구쟁이였습니다”
 
화룡시 서성진 룡포 8대(마가촌)의 한 농민가정에서 칠남매중 셋째(우로 누나 둘, 아래로 녀동생,남동생 셋)로 태여난 마동일은 어릴 때부터 물고기잡이에 정신이 팔려 공부에는 뒤전이였다. 마을 앞으로는 푸르른 해란강이 굽이쳐 흘렀다. 그때는 해란강에 물고기들도 많았다. 그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보를 집구석에 팽개치고 강가와 논판을 헤매며 낚시미끼로 쓸 새끼개구리잡이에 여념이 없었다.저녁이면 낮에 잡은 미끼를 달아 해란강에 줄낚시를 늘이고 신새벽에 나가 거두면 숱한 버들치가 주렁주렁 달려 푸들거렸고 이면수 한두마리쯤도 걸려나왔다. 거기에 해란강모래톱에서 즐기는 친구들과의 씨름판에까지 재미를 붙이다보니 숙제 한번 제대로 한적이 없었다. 당시 청명, 단오, 추석 등 명절때면 조선족들이 집거해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씨름경기를 벌려 명절의 분위기를 한껏 돋구었다. 어린 마동일은 씨름경기를 구경하면서 씨름에 깊은 흥취를 느꼈다. 하여 방과후 강변의 모래톱에서 벼짚으로 바오래기를 꽈서 샅바를 만들고는 친구들과 함께 씨름기교를 익히군 했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입학하여서부터 철이 들어 씨름, 배구, 스케트 등 여러가지 운동에 참가하면서도 공부에 전력하여 학급에서 내내 1등,  초중 3년간 련속 최우등을 하여 졸업시 현장상까지 수상하였다.

1958년부터 크고 작은 씨름판에서 마동일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는 선후로 공사씨름대회 1등, 전국소수민족경기 씨름 2등, 길림성국제씨름대회 1등을 하였다. 그후 그는 길림성국제씨름직업대, 돈화스케트훈련반, 룡정씨름훈련반에 참가하여 전문훈련을 받기도 했다. 

1962년 가을,  연길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10돐 기념 경기대회가 열렸다. 당시 고중 1학년생인 마동일은 화룡현청년배구대의 일원으로 이 경기대회에 참가하게 되였다. 그런데 집체씨름 성원이 5명이 되여야 출전자격을 갖게 되였는데 화룡팀의 씨름선수는 겨우 3명, 2명이 부족하였다. 하여 축구팀의 키퍼 한 사람과 배구대의 마동일이 씨름팀에 긴급 보충되였다.
 
“언제 1등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막상 대화가 본격적으로 당년의 씨름을 놓고 오가자 마동일씨는 애초의 어색함이 가뭇없이 사라지고 저으기 흥분되여 이야기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때 화룡의 집체씨름은 등수에 오르지 못하였다. 개인씨름이 시작되자 의외로 림시로 씨름팀에 보충된 마동일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거침없이 결승까지 올랐다. 하지만 결승전에서 그가 맞다들 선수들은 씨름소 22마리를 탔다는 왕청의 김창록,  룡정씨름훈련반에서 마동일을 가르치던 지도스승 지창운, 소문난 씨름군인 안도의 김봉남,   준결승 소조 1등으로 올라온 훈춘의 학생씨름군 리성기 등 9명… 실로 만만치 않은 적수들이였다.

마동일이 김창록을 곱재비로 넘겨뜨리고 관중들의 박수를 받으며 돌아선다. 이번에는 지창운과 맞붙는다. 관중들은 설레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처음 맞섰다. 그런데 그들은 사제지간이다. 지창운은 마동일이 룡정씨름훈련반때의 스승이였다. 그래서 선생은 이번 대회 어간에도 학생에게 힘을 모두어 한순간에 폭파시키기에 힘쓰라고 수차 일렀고 학생은 이 말을 아주 소중히 기억하고있었다. 첫판에 선생이 이기더니만 이번에는 학생이 이겼다. 3판 2승이라 이제 한판은? 그런데 선생의 손안걸이에 걸려 학생이 밑에 쓰러진다. 학생이 땅에 닿는 몸을 홀연히 춰올렸으니 관중의 손에는 진땀이 쥐여졌다.  심판원은 호각을 불면서 두팔을 펴고 락판이라고 한다. 이번에는 학생이 선생을 배접이로 “엑”   하고 쓰러눕히려다가 두 몸이 땅이 꺼지도록 모래판을 울렸다.  주심은 가불가를 말 못하고 부심들을 모이라 손짓하였다. 또 락판이라 아뢰자 수만명의 관중은 그제야 한숨을 쉬며 박수를 친다. 두번이나 락판이고 또 맞붙었는데 주석대에서 총심판장이 달려와서 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학생이 넙적 안걸이를 걸고 부서져라 틀어대는데 오히려 뻗치는 선생의 장단지에서 힘줄이 터질듯 두드러질뿐 좀체로 꺾이우지 않을것 같더니만 두 장사가 한쪽으로 쏠리며 쓰러진다. 또 락판이다. 그 다음에도 락판, 락판을 련속 네번을 하고 끝내 마동일이 이겼다.
 
시상식에서 주덕해가 친히 황소고삐를 넘겨줘
 
마동일이 1등을 하였다. 고중 1학년생 마동일이 용약 전 주 씨름 1등. 시상식에서 주덕해동지가 “동일아, 장하다”고 칭찬하면서 친히 황소고삐를 넘겨주고 마동일의 손을 잡고 운동장을 한바퀴 돌면서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답례하게 하였다. 마동일은 그때를 회억하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그땐 대단했지. 내가 마을어구에 들어서자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내 팔다리를 만져보고 란리법석이였네.”

화룡에 도착하니 5리가 넘는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며 그를 환영했다고 한다.

아들이 상으로 타온 황소는 아버지가 잠간 애지중지 키우다가 여건이 마땅치 않아 서성종자공장에 종자소로 보내게 됐다. 그때 당시 돈으로 1400원을 받았다.  그 돈으로 마동일은 고중, 대학을 다녔고 동생들 뒤바라지, 집안살림에 보탰다.

그후 마동일은 고중을 졸업하고 1964년 연변대학 정치학부에 입학했다. 문화대혁명때문에 1970년 뒤늦게야 대학을 졸업한 마동일은 길림성 서란광무국에 배치받았다. 거기서 마동일은 갱속에서 11년 탄광일을 하고 나중에 광무국공회에서 사업하였다.
 
“사람들은 아직도 저를 마장군이라 부릅니다”
 
서란현 평안공사가 근무지인 마동일은 기차로 매일 70여리 되는 길을 통근해왔다.

갱내의 고된 로동속에서도 마동일은 항상 말수가 적고 일을 잘해 인기가 많았다. 1.8메터의 키꼴에 100킬로그람의 몸무게를 가진 마동일은 100킬로그람 되는 쌀마대를 한쪽팔에 1개씩 둘쳐메고 다녀 주위사람들을 경악시킨건 물론, 갱속에서도 남들은 둘이서 맞들어도 힘들다는 30킬로그람이 넘는 돌을 애들이 소꿉장난하듯 다뤄 갱속에서도 그는 단연 최고의 힘장수로 불리웠다.

해마다 열리는 길림성, 흑룡강성의 조선족씨름경기에서 가장 돋보이는건 단연 마동일이였다. 그는 출전하는 경기마다 우승을 싹쓸이해가군 했다. 연변과 동북3성에서 “조선족씨름왕”  마동일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하여 나름 씨름이나 좀 한다는 조선족씨름군들이 늘 서란광무국으로 찾아와 맞대결을 펼쳐보고서는 그를 스승으로 모실 정도였다. 그때 사람들은 그를 “마장군”이라고 불렀다. 그를 “마장군”이라고 부르는데는 또 다른 리유가 있었다. 주량을 여쭤보자 억대우 같은 사나이는 수줍은듯 호탕하게 웃는다. 그리고 솥뚜껑 같은 손으로 연신 손사래를 친다.  그러면서도 “그때는 힘이면 힘, 술이면 술 나를 당할자가 없었다니까” 라며 그때 그 시절의 에피소드를 꺼내놓는다.

그가 서란광무국에 있을 때 길림성탄광계통 배구경기가 있었다. 그날 60도가 넘는 술을 일곱사발이나 마시고도 마동일은 아무렇지도 않은듯 술에 취한 관계자를 업고 초대소까지 데려다줬다고 한다.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이 광경에 입을 떡 하니 벌릴수밖에 없었다.

마동일선생은 왕년의 “마장군”답게 지금까지 병치레라곤 한적 없다. 점적주사도 이날 이때까지 맞아본적이 없으며 고작 어쩌다가 감기약 같은 상비약을 한두번 먹는게 전부다.
 
“나이 들수록 더 그리워지는것이 고향이였습니다”
 
마동일은 우람진 체격과는 달리 성품이 너그럽고 온순하며 착하여 누구와 한번 싸운적도 없었다. 불평없이 맡은바 일을 꾸준히 하였을뿐만아니라 경기대회때면 선수, 심판원, 조직자로 분주히 돌아쳐야 했다. 그러면서도 하루 일과가 끝나 저녁녘이 되면 고향 연변이 사무치게 그리워지군 했다. 부모형제가 그립고 정든 고향산천이 그리웠다. 힘장사인 억센 사나이도 고향이 그리워 잠 못 이룬 밤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고향인 연변에 돌아가 민족 교육과 체육 사업을 발전시키고싶었다. 마침 그때 사촌동생이 화룡현의 책임자로 있어 무난히 좋은 직장으로 전근, 자기의 타고난 재질과 우월한 배경으로 일장월취, 크게 성공할수도 있었다. 

마동일은 어느 한번 조직에 정식으로 “연변전근”을 제출하였다. 하지만 인재를 아끼고 운동을 중시하는 광무국지도부에서는 대내외에 소문 짜하고 일 잘하며 심성이 착하고 운동 잘하는 “마장군”을 놓을리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연변전근”을 접을수밖에 없었다.  

1983년,  43세 나이로 마동일은 길림지구소수민족경기대회 1등으로 씨름판 퇴진을 선포, 후로는 심판원, 조직자의 신분으로 배구, 씨름 경기에 뻔질나게 나타났다. 
“나이 들수록 더 그리워지는것이 고향이였습니다. 천리타향에서 기차의 고동소리만 들어도, 하늘을 나는 새들을 바라보면서도 문뜩문뜩 떠오르는것이 고향생각이였고 부모형제 생각이였습니다. 실로 한시도 고향을 잊은적이 없었습니다.” 

1992년 5월 정년퇴직하자바람으로 마동일선생은 일가식솔을 거느리고 22년만에 고향 연변으로 돌아왔다.

인터뷰를 마무릴즈음 마동일선생은 부채 같은 커다란 손을 쫙 펴보이며 “70을 넘겼지만 나는 마음만큼은 참 젊다. 더 늙기전에 익혀온 씨름기술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싶다. 그래서인지 내 손이 샅바를 잡고싶다고 먼저 신호를 보내온다”라며 익살스럽고 재치있게 소박한 꿈을 내비쳤다. 

연변일보 리영수 신연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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