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음악인생 60여년 노래 500여수 펴내
조글로미디어(ZOGLO) 2012년3월31일 20시13분    조회:597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동희철
겨레의 감동을 불러일으킨 음악인생
음악인생 60여년에 노래 500여수 펴낸 동희철선생을 찾아서

  60여년전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직전부터 음악교원사업에 종사하면서 수많은 음악인재를 양성하고 수많은 명곡들을 지어 세인을 감화시켜 존경을 받는 음악인이 있다. 바로 연변인민방송국에서 음악부 주임사업을 하다가 정년퇴직한 동희철선생이다. 지난 27일 오후, 동희철선생을 만난 곳은 주직속로간부활동중심이다. 1989년에 퇴직한후로 동희철선생은 매일 오후면 활동중심을 찾아 두세시간씩 운동을 해온 덕에 건강에는 별 탈이 없다고 말했다. 올해 85세인 동희철선생은 기자에게 작곡가로 성장하게 된 지난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28년 5월 21일, 8남매중의 둘째아들인 동희철선생은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남산동에서 태여났고 1934년 가을 부모와 함께 중국에로 이주해왔다.

  어린시절, 체육에 소질을 보여주었던 동희철선생은 체육선생으로부터 앞으로 체육교원이 되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1944년 사도학교에 입학한 동희철선생은 음악에 귀를 열었고 시간만 나면 발풍금을 련습했다. 그의 모습이 음악계몽선생인 문하연선생의 눈길을 끌었다. 하루는 문하연선생이 동희철을 불러놓고 학교의 유일한 피아노열쇠를 건네주면서 틈을 타서 꾸준히 련습하라고 했단다. 음악인으로 성장할 싹수가 보였나보다. 문하연선생은 또 동희철을 학교취주악대에 소개해줬다. 이때부터 동희철은 바리톤이라는 악기를 접했다.

  1946년 7월 3일, 동희철선생은 3학년이 되는 여름방학에 중국인민해방군 길동보안군 정치부 문공단에 참가해 바리톤연주를 했다. 문공단은 낮에는 백성들을 위해 문예공연을 하고 저녁이면 전선의 군대를 위한 위문공연을 조직하며 한밤중이면 서너명으로 된 연주대는 선전위원과 함께 그 지역의 국민당주둔지앞까지 심입해 중국공산당의 포로정책을 설명했다고 한다. 그는 이를 함화공작이라고 한다. 쓸쓸한 음악을 많이 연주했는데 미국민요 “달밤에”가 가장 대표적이다. 이튿날이 돼서 십여명의 국민당 병사들이 선전위원이 설명했던 로선을 따라 중국공산당후방에 찾아왔더라면서 “명곡앞에서는 총 든 적들도 무력해진다”고 말했다.

  “바리톤은 중음악기로 악대에서 선률을 끌고가는 역할을 한다. 현학으로 말하자면 첼로와 비슷하다”며 동희철선생은 바리톤은 나중에 그의 작곡생애에서 선률을 작성하는데 큰 도움이 되였다고 말했다.

  1948년 동북전쟁이 끝나면서 길동보안군 정치부 문공대는 연변문공단으로 개명하며 지방문예단체로 활동을 펼쳐왔다. 문공단은 실내공연에 필요되는 관악대, 현악대를 설립하고 실외연주를 위주로 하는 취주악대를 없앴다. 그때부터 동희철선생도 그때부터 바리톤을 그만두고 손풍금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연변문공단은 나중에 연변가무단으로 개칭했고 지금도 연변, 나아가 중국조선족가무예술의 대표로 활약을 돋보이고있다.

  그러나 동희철선생은 연변문공단에서 손풍금수로 계속하지 못하고 조직의 요구에 따라 짧은 교원생애를 맞았다. 1950년 9월, 연변의 첫 고중인 연변제1고중(현재 룡정고중)이 설립되였다. 당시 연변문공단에서 유일한 사도학교출신인 동희철선생은 조직의 배치에 따라 연변제1고중에서 음악교원으로 있게 되였고 1952년에는 한어사범학교에서 음악교원으로 있게 되였으며 1954년에는 연변제2고중(현재 연변1중)에서 음악교원으로 있다가 1956년 3월에 연변인민방송국 음악편집으로 전근해갔다.

  4년여간의 교원생애에서 동희철선생은 학생들을 조직해 학교에서 악대를 조직해 공연에 참가했고 “녀성행진곡”, “까치가 짖네”, “춘경준비”, “귀향병과 처녀”, “고향산기슭에서” 등 곡들을 창작해냈고 연변인민방송국 음악편집, 음악부 조장, 주임을 력임하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설해 조선족음악을 널리 홍보했으며 50년대 중기부터 60년대까지는 작곡생애의 전성기로 수많은 작품을 내놓았다.

  60여년의 음악생애에 동희철선생은 선후로 500여수의 가요를 창작했고 《고향산기슭에서》, 《배움터의 멜로디》, 《사랑의 메아리》, 《인생반려(김경석과 공저)》 등 작곡집도 펴냈다.

  안국민선생은 동희철선생의 음악작품은 서정가곡의 선률이 류창하고 사람들의 입에 쉽게 오르며 깊은 철리성, 사상성, 예술성이 보여지며 조선민족의 풍격이 뚜렷하다고 지적한바 있다. 이는 동희철선생이 길동사도학교시절에 처음으로 접한 바리톤, 국민당주둔지에 찾아가 연주하던 시절 그리고 음악교원으로 있으면서 학생들을 조직해 다양한 음악활동을 펼치던 시절 그리고 연변방송국에 있던 시절, 이 모든것들이 그의 체구속에서 되새김질되면서 수많은 명곡들이 만들어진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자치주 창립 60돐을 맞으면서 동희철선생은 음악인의 사명감과 자부심으로 곡 한편을 써냈고 이미 김응준시인에게 보내 곡을 붙여달라고 했단다.

연변일보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문화현장, 오늘은 대외경제무역대학의 교수이며 중국 조선족문단의 이름난 수필가이신 서영빈선생님을 모시고 중, 한 양국 수필문학의 현황과 전망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아래는 그 인터뷰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적습니다. [img count='1' width=350' img] 기: 안녕하세요? 서: 안녕하세요, 저는 대외경제무역대학 한국...
  • 2005-08-29
  • 사회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오랫동안 번역사업에 종사해왔고 최근에 중한 실용번역사전을 펴낸 중국 민족번역국의 전홍열 교수를 모셨습니다. 녜, 반갑습니다. 전홍열: 반갑습니다. 사회자: 지금까지 번역사업에 종사해온 년한이 어떻게 됩니까? 전홍열: 지금까지 30년정도로 번여사업에 종사해왔습니다. 사회자:...
  • 2005-08-29
  • 중국 100대 명교수의 한사람-채미화 교수 인터뷰 정리 내용- 중국 100대 명교수의 한사람으로 불리우는 연변대학 조문학부 채미화 학부장, 교사생활에 종사한지도 어언 22년이다. 채미화 학부장을 만나 그녀가 그동안 걸어온 길들에 대해 알아본다. 기자(이하 기로 약칭):22년간 교사사업에 몸담아 오면서 그동안 걸어온 길...
  • 2005-08-29
  • 료녕성 심양시 소가툰구 신흥촌은 현재 1200여호(그중 호적을 갖고있는 호수가 820호이고 동북3성 각지에서 모여온 류동호수가 450여호)에 총인구 4000여명이 모여살고있는 조선족마을입니다. 지금 조선족사회는 일대 변혁의 소용돌이속에서 생존과 발전을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많은 조선족학교들이 페교되고...
  • 2005-08-28
‹처음  이전 358 359 360 361 362 363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