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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망도 후회도 없는 뿌듯한 삶
조글로미디어(ZOGLO) 2012년5월23일 09시46분    조회:5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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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김병민

연변대학 총장 김병민박사를 쓴다

연변일보 2012-5-23 9:12:17
 


김병민총장

1949년에 설립된 연변대학은 중국정부가 소수민족지역에 세운 최초의 종합대학이다. 그동안 10만여명의 국가 고급전문인력을 배출한 이 대학은 현재 "2.11"프로젝트 중점건설대학, 서부지역개발 중점대학, 길림성과 국가교육부가 공동으로 지원하는 중점건설대학으로 지정됐다.

러한 대학의 총장으로 임직한 학자형의 김병민박사는 총장직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내놓게 된다. 지난 2003년 1월에 임직한 이래의 과정을 되새기면서 김병민총장은 “그 어떤 원망도 후회도 없으며 우리 민족 대학을 위해 봉사해왔다는 이 하나만으로 뿌듯함을 느끼고 자족한다”고 말한다.

변대학에 몸을 맡겨서 근 35년. 연변대학 총장으로 10년, 속담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그동안 행정사업을 안하려고 사표까지 제기한적도 있었지만 지나온 10년을 돌이켜보면 현대적인 대학운영에 맞게 대학의 리념과 정신을 바꾸어온 10년이였고 새로운 캠퍼스를 건설하고 대학내 새로운 학술분위기를 형성하는 힘들지만 보람찬 10년이고 “강산이 변한 10년”이였기에 지금에 이르러서는 원망이나 후회보다는 뿌듯함이 밀려든다는것이다.

 

자그마한 꿈으로 맺어진 연변대학과의 인연

 

김병민총장의 고향은 흑룡강성 녕안현이다. 농촌에 있을 때부터 김병민총장한테는 하나의 자그마한 꿈이 있었다고 한다. 그 꿈은 바로 기자로 되는것. 신문통신도 발표하고 신문강습도 받은적 있는 그는 기자로 자기의 인생을 살아가고싶었다. 결국 그 자그마한 꿈을 위해 군부대에서 문서로 있다 다시 농촌으로 돌아온 김병민이라는 농촌청년은 1975년 이른 봄 연변대학에 한통의 편지를 쓰기에 이른다.

“편지를 써 보낸지 얼마 안되여 연변대학에서 공부하는것을 환영한다는 내용의 답장을 받았는데 지방정부의 추천을 받으라는것이였습니다.” 그 편지가 입학통지서가 아닌 한통의 답장편지였지만 그 답장편지를 받고 커다란 고무를 느낀다. 그 답장편지를 써 보낸 사람이 당시 연변대학 교무처 처장으로 계시던 박문일 전임 총장이라는, 소설이나 드라마 속의 이야기와 같은 사실은 20여년이 지난후에 밝혀진다.

당시 지방에서는 김병민을 대련경공업학원에 추천했는데 아마도 평소 글쓰기 열성자였고 신문통신도 쓴 경력자이고 신문사 편집기자 강습도 받은 경력때문이였는지 결국 김병민은 연변대학 조문학부에 입학하게 된다.

1978년 학교를 졸업한 김병민한테는 학교 공청단위원회 부서기로 가느냐 아니면 자치주당위 비서처로 가느냐 하는 선택이 놓여있었다. 김병민은 결국 정계입문보다도 학계를 선택했다. 졸업후 반년 뒤 중산대학에 가 중국문학을 연수하고 중국현대문학 석사연구생과목을 청강한다. 그러던중 그는 국가 교육부의 해외류학정책 특혜를 입는다. 당시 교육부는 전국적으로 300명을 선발해 국비로 외국류학을 보내게 되는데 그 300명중의 일원으로 된 김병민씨는 1982년에 김일성종합대학 박사원에 연구생으로 가 1985년에 문학준박사 학위를 따낸 뒤 다시 연변대학에서 1990년 6월 연변대학 최초로 박사학위를 따내게 된다.

변대학 조문학부 교수, 박사생지도교원, 학부장, 교무처 처장, 사범학원 원장 겸 총장조리, 부총장, 총장, 이는 김병민총장의 임직경력이다. 몇 년간의 행정사업을 한 자신을 두고 김병민총장은 스스로 “반쪽학자”라고도 말한다. 그래서 한국 저명한 국문학자 서울대학의 조동일교수를 만났을 때 반쪽학자라는 스스로의 평가에 대해 “민족대학을 위해 봉사해왔다는 하나만으로 뿌듯한 일이 아니겠느냐” 했다며 돌이켜보면 변화된 연변대학의 리념과 정신, 학교풍모 그리고 학술분위기앞에서는 그 어떤 원망도 후회도 사라지고 뿌듯함과 자족만 남는다고 말한다.

 


박사학위를 수여받은 뒤 고 정판룡교수(좌)와 함께

 

현대대학의 리념과 건학사상 제기

 

병민총장이 임직기간 추진한 사업과 성과는 현대대학에 맞는 새로운 학교리념의 제기, 대학을 인재양성, 과학연구, 사회봉사가 서로 어우르고 받쳐주는 대학으로 변신, 연변대학의 제2차 창업으로 불릴만큼 거대한 프로젝트인 연변대학 통합캠퍼스 신축 등 크게 세가지로 꼽을수 있다.

일류의 현대대학은 반드시 과학적인 정신과 인문정신을 토대로 해야 한다”는게 김병민총장이 임직하면서 제기한 말이다. 김총장은 연변대학 운영 력사와 전통을 총화한데 토대하여 “진실·선행·융합”이라는 교훈(校训)을 새롭게 내놓은데 이어 “다원화 교육을 강화하여 다문화적인 자질을 갖춘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자”는 건학특색 및 “변연각성의식을 갖추고 교수의 질을 근본으로 삼으며 특색을 뚜렷이 하고 학술로 학교를 꾸리자”는 건학리념을 제기하고 이를 구체적인 학교운영가운데서 실천해왔다.

김병민총장은 “대학은 사회의 량심이며 교수들은 대학을 움직이는 령혼이고 주체이다”며 “대학교 교수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신성함을 지켜나가는게 바람직하며 학생들을 사랑하면서 모든 지식을 전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랑과 헌신”이라는 교육리념도 내놓았다. 남들한테 이처럼 요구했을뿐만아니라 스스로부터 솔선적으로 이를 실천해 나갔다. 선후로 조선현대문학, 조선—한국당대문학, 조선현대문학비평사 등 과목의 교수를 담당하면서 박사, 석사 연구생 지도교원으로서 15명의 석사연구생, 13명의 박사연구생을 양성하였으며 그가 지도한 박사론문 한편이 전국 100편 우수박사론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교수, 과학연구 1선에서 교수,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이들의 일상을 료해하고 실제 문제를 해결했는데 자기의 길림성 특별초빙교수 장려금중에서 10만원을 내여 경제사정이 힘든 학생들을 도와주었으며 학생들을 대상한 장학금을 힘써 쟁취하였다. 최근 3년간 인입한 50여종 국내외 민간후원 장학금을 포함해 학교 장학금종류는 106가지에 달한다고 한다.

김병민총장은 연변대학과 국제와의 접목을 적극 추진해왔다. 현재 학교에는 11개 나라에서 초빙한 100여명 외국인교수들이 학교 교수 및 과학연구에 투입되고있으며 외국류학생수도 700명 가량에 이르는것으로 알려지고있다. 2006년 연변대학은 한국 충북대학에 “공자학원”을 설립한데 이어 외국 교육재단과 문화기구와 공동으로 연변대학에 “아시아연구쎈터”와 “세종학당”을 설립함으로써 중화문화를 전파하고 국내 한국학연구 중심과 기지를 확립하는데 조건을 마련해놓았다. 현재 적지 않은 한족학생들이 세종학당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고있다.

김병민총장은 대학의 3대 요소는 인재양성, 과학연구, 사회봉사라고 말한다. “인재양성은 그중의 핵심이고 교수활동은 과학연구를 안받침하는 지레대 역할을 하며 바꾸어 과학연구는 또 인재양성을 안받침하고 사회봉사를 뒤받침한다”고 말한다. 과학연구 실력이 대학의 경쟁력을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라고 생각한 김병민총장은 임직한 뒤 교수평가제도, 과학연구 평가제도, 교육봉사 평가제도 등 세가지 평가제도를 실시하고 구체적인 실천에 옮겼는데 초기 불합격률이 60%를 넘겼다고 한다. 김총장은 “불합격일 경우 수당금이 없게 된다”며 “연변대학의 실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조치로 인해 2003년 이래 연변대학의 과학연구경비, 연구 성과는 다섯배 정도 제고되였고 국가자연과학기금 프로젝트는 7배 늘어났으며 미국 과학인용색인인 SCI(科学引文索引)에 편입된 론문이 300여편으로 10배 정도 늘어나고 중문과학인용색인인 CSSCI 수록론문도 10배 증가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연변대학은 길림성내 종합평가순위 6위에서 2007년 이래 3위로 인상되였고 과학연구 실력이나 연구항목도 앞자리를 차지하고있다.

구실력증가는 결과적으로 사회봉사를 활성화시켰다. 그동안 연변대학은 자치주정부와 주내 각 현시, 길림오동약업그룹, 연변림업그룹, 화룡그룹과 전면합작에 관한 기틀협의를 체결하였고 두만강지역개발 및 “장길도”선도지역건설에도 적극 나섰다. 2006년부터 2011년까지 학교에서 감당한 국가 중대, 중점 과학연구프로젝트는 420가지에 달했고 기업을 위한 100여가지 기술개조를 완성했으며 과학연구성과 30여가지를 생산으로 전환하였고 “두만강포럼”, “장백산포럼” 등 다양한 고차원국제학술회의를 통해 연변의 경제건설과 사회발전을 위한 컨설팅역할을 발휘했다.

박사학위 수여점도 급격히 늘어났다. 그동안 연변대학은 6개의 1급 박사학위수여 학과(50여개 2급 학과 박사학위권 포함), 24개 1급 석사학위수여학과(140개 2급학과 석사학위수여권 포함), 11개 학과학위 석사점 신청에 성공했고 교육부 인문사회 과학 중점연구기지로 조선—한국연구쎈터, 교육부 장백산생물기능 분자연구 중점실험실 길림성동물유전자 중점실험실 등 길림성 및 부급이상 연구기지 9개, 국가특색학과 7개, 길림성 특색학과 15개, 국가급 정품과목 2개를 쟁취하였다고 한다. 또한 2003년 이래 60여개 학과전업이 유명대학과 합작파트너를 이루었고 745명 교원이 국내외 중점대학에서 학위공부를 하거나 방문학자, 연수를 했으며 419명 박사를 인입, 그 과정에 과학연구경비와 안착비 2000여만원을 투입했다고 한다. 학교에서 인입한 “장강학자(长江学者)”도 2명 된다. 이를 통해 연변대학 각 학과의 전반적인 실력이 대폭 향상되였다는게 김병민총장의 견해다.

 

합캠퍼스 프로젝트로 연변대학 완전 변모

 

난 2011년 5월 13일 연변대학은 통합캠퍼스 신축캠퍼스확장공사 준공식을 가졌다. 토지징용면적이 57.36만평방메터, 건축면적이 37.5만평방메터 되는 통합캠퍼스가 신축됨에 따라 이곳저곳 널려있던 의학부, 농학원, 예술학원, 간호학원 등이 연변대학 의학부, 연변대학 농학원, 연변대학 예술학원답게 한자리에 모였다.

합캠퍼스 신축공정을 두고 김병민총장은 “통합캠퍼스 신축공사는 연변대학의 제2차 창업이라고 말할수 있는 거대한 공사”라고 말한다. 새로운 연변대학 캠퍼스를 시찰한 자치주 리룡희주장 역시 “주덕해가 연변대학을 창건했다면 신축캠퍼스공정은 연변대학의 재건으로 불릴만 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만큼 통합캠퍼스공정은 건설규모나 자금투입이나 공정량에서 볼 때 거대한 공정이였고 “민족교육의 력사를 새로 써가는 위대한 세기적인 공정”이였다.

통합캠퍼스를 신축하는 과정에 토지징용, 건설비용 등 어려움도 있었지만 김병민총장으로서는 다른 어려움이 더 있었다. “장시기동안 살아오던 마을을 떠나는 사람”의 심정처럼 이미 정이 들대로 든 기존의 캠퍼스를 “버린다”는게 쉽게 납득될수 있는 일이 아니였고 가슴 아픈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유세”도 적지 않게 했고 뒤소리도 적지 않게 들었다. 하지만 연변대학의 장원한 미래를 위해서는, 국가 “211프로젝트”학교라는 이름에 부응하는 민족특색이 뚜렷한 현대적인 연변대학을 위해서는 그러한 아픔은 감내해야 했다.

격적으로 지도부의 인식통일로부터 교내외의 지지, 상급 지도부문의 지지와 비준, 통합계획서의 작성, 부지징용, 원유자산매각, 38동이나 되는 청사건설, 11억원이나 넘는 건설자금조달 등에 들어갔는데 애로사항과 넘어야 할 담이 많고도 많았다.그런 어려움을 떨쳐나간데는 각급 정부 지도자들과 부문들 그리고 사회 각 계층의 지원과 뜨거운 숨결이 큰 힘으로 작용했다고 한다.연변대학 동문들의 노력도 상상을 초월했다. 또한 교육기금회와 학우회를 설립하여 국내외모금활동을 본격적으로 벌려 1억원이상 모금하였고 거액의 국무원과 성정부의 지원자금을 이끌어냈다.

이 모든 사람들의 지지와 후원, 도움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연변대학 새 캠퍼스는 불가능했다고 말하는 김병민총장, 학교 건설후 대출자금 상환이라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올해안이면 대부분의 건설부채가 상환될수 있다고 한다.

현임 총장의 사명감이라고 할가 “후임에게 절대 부담을 안겨줄수 없다”는 김병민총장. “연변대학 장기발전전략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추진해야 할 일이였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다시는 벌리기 싫을만큼 힘든 사업이였다”고 말한다. 실제 새 캠퍼스를 건설하는 과정에 쓰러져 두달간 병원에 입원했고 실면증에 시달려 7년 동안 수면제를 복용하면서 지탱해온 김병민총장은 하도 자금조달이 어려워 꿈에 “조페공장”을 꾸려 수억의 인민페를 찍어냈다며 유머하게 꿈이야기도 한다.
 


김병민총장이 아시아에서 외국인 최초로 한국 "용재"학술상을 수여받았다.

 

원망도 후회도 없는 뿌듯한 삶을 살며

 

병민총장을 쓰려면 단재 신채호선생을 빼놓을수 없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류학하는 기간 김병민총장은 평양의 인민대학습당에서 신채호 선생의 미발표 유고(遺稿)를 발견하게 된다. 원래부터 신채호문학에 관심을 갖고있었던 김병민총장으로서는 “보물을 만난셈”이였다. 복사가 안 되니 매일 같이 인민대학습당에 가 손가락이 터질 정도로 유고를 필사했다. 류학시절, 학위론문을 출간한데 이어 “신채호문학연구”란 저서를 집필, 귀국한 뒤 김병민총장은 학술저서 “신채호문학연구”와 “신채호문학유고선집”을 출간했다. 이로 인해 김병민총장은 신채호에 대해 가장 먼저 체계적으로 연구한 사람으로 불리운다. 1988년 중국에서 출간된 “신채호문학연구”는 한국에서 출간되여 한국학계에서 비상한 반향을 일으켰으며 신채호문학연구의 권위학자로 인정받고있다. 그후 신채호평전을 내려 했으나 총장에 취임하면서 마무리를 못하고있다.

연변대학 설립이래 최초의 박사인 김병민총장. 학계에서는 그를 “조선—한국문학연구와 중조문학 비교 문학의 대표적학자”라고 칭한다. 연변대학의 조선—한국문학연구와 중조(한) 비교문학연구는 국내의 최정상이며 국외에서도 확고한 학문적지위를 인정받고있다. 김병민총장은 국가중점학과인 조선언어문학학과를 리드해가고있다. 김병민총장은 신채호문학연구와 “조선조시기 북학파문학연구”를 위주로 하고있는데 이 책자는 이미 재판에 들어갔다.

총장은 총장으로 부임한 뒤 각종 일로 바삐 돌아쳐야 하는 상황에서도 80여편의 학술론문, 60여편의 평론과 수필을 발표했다. 그중 40편이 중국어로 《문학평론》(文学评论), 《외국문학》(外国文学), 《비교문학》(比较文学), 《외국문학연구》(外国文学研究),《사회과학전선》(社会科学战线), 《신화문적》(新华文摘), 《사회과학문적》(社会科学文摘)등 정상급 학술지에 발표되였다. 출간된 도서는 10여권에 달하며 여러 도서가 중문, 조문, 영문, 일어로 출간되기도 했다. 그는 또 국가와 성, 부급 과학연구 프로젝트 16가지를 완성하였고 현재 교육부 및 국제합작 프로젝트 6가지가 실시중이다.

동안 번중한 학교운영때문에 가족, 동창, 친구들을 “등한시했다”며 미안한 마음도 없지 않다. 또 행정사업을 맡으면서 자신을 “반쪽학자”라고 평가하는 김병민총장. 스스로에도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퇴임후면 지나간 시기 학술저서를 정리하고 즐겁게 독서하고 론문집필과 더불어 평론과 수필을 쓰면서 즐겁게 완전한 학자의 길을 가고싶다고 한다. “신채호평전”도 계획중이다.

연변대학에서 공부하고 연변대학에서 가르치고 연변대학 총장까지 된 김병민. 그는 자신이 여기까지 오는데 도움을 주었던 모든 분들이 고맙게 느껴졌고 연변대학이라는 플랫폼이 스스로를 이 자리에 있게 했다며 항상 연변대학이 고맙게 느껴지진다고 한다. 그래서 인생의 귀속 역시 연변대학이라고 말한다.

국무원 정부특수수당금획득, 전국 우수류학귀국인원, 길림성특등로력모범, 아시아인 최초로 한국 “용재학술상” 수상, 국가급 우수교수성과 2등상 수상, 길림성 우수교수성과 1등상, 길림성사회과학 우수성과 1등상, 길림성 교재 1등상 등 각종 장려 17차 획득, 일본 히로사끼대학, 한국 원광대학교, 한국교원대학교에서 명예박사를 수여받았다.국무원 학과평의소조 성원, 길림성 특별초빙교수, 제10기, 11기 전국인대 대표, 교육부 과학기술위원회 관리학부 학부위원,중국조선―한국문학연구회 회장, 중국 조선—한국문학연구회 회장 , 길림성비교문학연구회 회장, 길림성사회과학련합회 부주석 등 사회직무도 굵직한 김병민총장, 총장자리에서 물러난 뒤면 조용히 그동안 못다 한 학술활동에 필력을 기울일 생각이다.

글/사진 전윤길 허연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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