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인생을 녹여 연극을 만들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2년5월30일 16시14분    조회:5664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허동활
살아있는 전설
인생을 녹여 연극을 만든 허동활선생
 

허동활선생은 연변의 연극사에서 영원히 지지 않는 저녁노을로 불리우고있다. 연극사업에 평생을 몸담고 배우로부터 연출, 연출로부터 단장에 이르기까지 중국조선족의 연극과 맥박을 함께 해온 허동활선생이 걸어온 연극인생을 더듬어본다.

연극과의 인연
허동활선생은 1925년 3월, 연길현(지금의 룡정시) 조양천진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어린 시절 그는 성격이 명랑하고 호기심 많고 마을에서는 재롱을 잘 피우는 장난꾸러기였다. 이렇듯 천진란만하던 남아가 연극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된데는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한다.

허동활선생이 열세살되던 해, 조선의 류랑극단이 마을에 왔다. 어느집 울안에 막을 치고 극을 놀게 되였는데 표 살 돈이 없고 또 조무래기들은 관람불허라 가만히 마당극 지붕에 기여올라가 배를 지붕에 딱 붙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연극을 다 보았다고 한다. 그것이 발각되여 이튿날 선생님한테 정갱이에 굴뱀이 가도록 회초리맛을 톡톡히 보았지만 연극을 사랑하는 마음은 굽히지 않았다.  1946년 일본 도꾜 고학까지 마친 허동활선생은 조양촌 허촌마을에 야학선생으로 활약, 해방을 맞아 첫 음력설을 즐겁게 쇠기 위해 학생들은 설맞이 오락모임을 가지자고 졸랐다. 소년시절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였다. 그는 밤을 패가며 연극대본을 만들어놓았는데 제목은 《해방의 종소리》였다. 허동활선생은 극에서 주역을 맡았고 무대장치 연출까지 맡아보았다. 마을의 남녀로소가 자신의 기쁨을 담아낸 연극을 보면서 손바닥이 아프도록 박수를 쳐댔다. 허촌마을에서 재미있는 연극을 놀았다는 소문이 퍼지자 허동활선생은 조양구 문예선전대의 배우로 뽑혔고 나중에는 연변문공단에 출근하게 되였다. 허동활선생의 연극인생은 이렇게 이렇게 시작되였다.

힘든 연극생애에서 보람을 느껴
“처음에는 흥취로 출발해서 연극이라는것을 했는데 연극을 하다보니 점차점으로 연극에 푹 빠져버렸는데 연극을 알게 되면서부터 연극은 고된 작업임을 실감하게 되였습니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실패’는 있어도 ‘포기’란 없습니다.”

연극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재미로 시작했다가 연극에 푹 빠져 살아오기까지 허동활선생의 노력은 불철주야 멈출줄 몰랐다.

연극 《백절불굴》에서의 주인공 역, 《춘향전》에서의 리몽룡, 《심청전》에서의 심봉사, 《붉은 바위》에서의 허운봉, 《장백의 아들》에서의 박철 등 굵직굵직한 프로에서 주인공 역을 담당하면서 허선생은 참으로 많은 땀을 흘렸다. 심봉사역을 신통히 해내기 위해서 지팽이에 몸을 실은채 눈을 감고 극단에서 집까지 집에서부터 극단까지 밤길을 수없이 더듬으며 맹인의 세계를 체험했으며 항일영웅 박철의 영용불굴의 의지를 페부로 체험하기 위해 20여근 나마되는 철쇠를 발목에 채운채 껍질이 벗겨지고 피가 터지도록 걸어보면서 박철의 혁명정신의 세계를 각색하였다. 또 이몽룡의 대사를 시를 읊조리듯이 훌륭하게 해내기 위해 열번, 스무번의 연습을 달갑게 자진했으며 허운봉의 바위같은 사나이의 기백을 형상화하기 위해 가물거리는 초불을 지켜보면서 눈기운을 키우기도 했다. 이런 프로정신으로 각색한 인물들의 형상은 지금도 그 시대를 함께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이처럼 지극한 정성으로 형상해낸 백절불굴의 주인공역이 허동활선생으로 하여금 연극인생에서 자신의 재질을 충분히 과시하고 인정을 받는 첫 전환점으로 주역에로 통하는 길을 열어주게 했고 《춘향전》에서의 리몽룡은 그로 하여금 전국연극예술절에서 3등상을 받아오는 영예를 지니게 했으며 성공한 연극인으로 통하는 터널을 뚫어주었다.

배우로부터 연출에로   
변화무쌍한 시대의 변화와 함께 허동활선생은 사업의 수요로 배우로부터 연출로 변신하는 운명을 맞이했다. 연극을 자기의 생명처럼 사랑한 허동활선생은 들끓는 열정으로 연극에 혼신을 다했다. 번역장막극《뻐꾹새는 운다》로 시작하여 《잘 가라 꽃사슴아》, 《눈속에 핀 꽃》, 아동극 《우리 학교 철남이》 등 장막극 26부, 《량식》, 《새 조수》 《백절불굴》, 본보기극 편단 《홍등기》 등 20여편의 단막극과 본보기극 편단의 연출을 맡아 연출가로서 자기만의 독특한 풍격을 확립하였다.

처음에는 연출이라는 낯선 직업이 서두가 잘 잡히지 않았지만 허동활선생은 끊임없이 고민하고 서책을 뒤지면서 햇내기연출가의 열정을 불살렸다.

작품에 대한 침투와 극중 인물에 대한 세부적인 분석이 결핍한 상황에서 허동활선생은 문제의 발원지를 찾아가며 생활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의 끈질긴 탐구와 고심한 연구로 작품 《광활한 천지》가 허동활선생의 연출생애에 멋진 한페지를 남겼다.

“연극창조에 있어서 힘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특히 배우와의 작업과정에서 모순이 있을 때 가장 힘듭니다. 배우의 창조가 연출가한테 마음들지 않고 연출가의 계발이 배우에게 접수되지 않을 때 이 매듭을 풀어가는것이 연출가의 몫이자 고민입니다.”

배우의 리해정도의 차이, 리론접수력의 차이로 수차 계발을 줘야 접수할수 있었는데 그나마 무대에 오르면 또 표현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또한 배우들과의 거리단축이 어려우며 지어는 연습하다가 중지하기도 했다. 그래서 허동활선생은 배우들한테 배우들에게 숙제를 내주기도 했다.

허동활선생은 한 선배가 한 “연출가는 배우의 오늘을 책임지는게 아니라 래일을 책임져야 한다.”는 이 말을 참 좋아했다. 그러면서 늘 하는 구두어가 연출가는 배우한테 배역만 배워주는게 아니라 수양, 리론, 예술구도, 직업의식 등 경쟁의식을 심어주어 경쟁이 심한 사회에서 굴하지 않고 나아가게 해야 한다는것이였다.

“배우에게 가장 고민거리가 될수 있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를 연출가는 늘 생각해야 합니다. 고민을 해결할수 있는 그런 감정의 열쇠를 잘 찾아서 배우에게 준다고 한다면 배우는 그것을 받아가지고 자기 창조를 잘 할수 있거든요. 배우의 개성과 생활경력에 맞게끔 배우를 잘 인도해야지 기계적으로 똑같이 인도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2007년 중국연극 100주년 기념좌담회에서 허동활(좌 2) 방미선이 중국연극예술가칭호를 받았다.(자료사진)
 
리더의 책임을 다하며
1960년 허동활선생은 연변연극단의 부단장으로, 1982년에는 연변연극단의 단장으로 임명되였다. 단장시기 허동활선생은 연극사업에서의 비교적 성숙한 시기를 맞이했다. 배우시기 허동활선생은 극속에서 모든 행복을 느낄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단장이 된후에는 과연 어떤 감수를 받게 되였을가?

단장은 극단의 호주와 마찬가지인데 그 당시 한 100여명 되는 그런 사람들을 이끌다보니 힘들었고 처음엔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단장공작을 잘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행정공작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극단의 설비와 공연무대는 아주 헐망했다고 한다. 허동활선생은 사처로 다니면서 설비개량비용을 해결하였고 무대를 개량하는 작업에 직접 참여했다.

민족의 창작작품을 만들기 위해 그는 직접 작가를 방문하고 창작회의를 열어서 작품을 선정하고 지어는 함께 수개하면서 차츰차츰 창작작품 공연회수를 늘리게 하였다. 허동활선생의 대담한 결책과 지도하에  연변연극단은 점차 민족 실정에 알맞는 많은 작품들을 내놓게 되였고 메마르던 연극문화가 차츰 꽃을 피우게 했다. 당시 창작작품의 주제가 정확히 농촌실정에 알맞는 극이였고 당시 농민들의 심정을 담은 극이였던지 많은 관중들의 호평을 받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허동활선생이 단장직을 맡은후 연변연극단은 련속 8년간이나 길림성 모범연극단으로 뽑혔고 허동활선생도 길림성운영회 대표, 성당대표,  전국문학 예술계대표, 주정협 위원 등 많은 영예를 받아안았다. 허동활선생은 이렇듯 척박하던 연변연극계의 불모지에 새로운 희망을 개척하며 시대의 사명감을 갖고 한생을 달려왔다.

걸어온 연극인의 삶이 슬픔과 아픈 추억보다는 기쁨과 행복, 유쾌한 추억이 더 많은 허동활선생은 백세에 가까운 황혼이지만 지금도 가끔씩 눈을 감고 조선족연극의 미래를 그려보기도 한다. 연극을 위해서 더 건강하게 오래 살고싶다고 말하는 허동활선생, 말의 무게와 책임을 본인 스스로 잘 알고있는 진정한 이 시대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사진설명
허동활선생의 문집
허동활 방미선 중국연극예술가칭호를
《장백의 아들》, 《광활한 천지》
 
 
허동활 략력
1925년 3월, 연길현(지금의 룡정시) 출생
1946년 일본 도꾜 고학 졸업
1960년 연변연극단의 부단장
1982년 연변연극단의 단장
 
연극 《백절불굴》에서의 주인공 역, 《춘향전》에서의 이몽룡, 《심청전》에서의 심봉사, 《붉은 바위》에서의 허운봉, 《장백의 아들》에서의 박철역을.
번역장막극《뻐꾹새는 운다》로 시작하여 《잘 가라 꽃사슴아》, 《눈속에 핀 꽃》, 아동극 《우리 학교 철남이》 등 장막극 26부, 《량식》, 《새 조수》 《백절불굴》, 본보기극 편단 《홍등기》 등 20여편의 단막극과 본보기극 편단의 연출을...
 

연변위성TV (두만강프로)










파일 [ 2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조선족 출신 초교 이중언어강사 김영남씨 대구 팔달초등학교에서 중국 출신 이중언어 강사 김영남(29`여) 씨가 학생들에게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팔달초교 제공   (흑룡강신문=하얼빈) 하얼빈의 조선족 출신인 김영남(29`여) 씨는 지난달부터 팔달초등학교에서 교단에 서고 있다. 한국 대구시교육청에서 ...
  • 2012-05-03
  • 100세 맞은 안 의사 5촌 조카며느리 안로길씨 독립운동 증빙 자료 없어… 현재 성금으로 생계 이어… "생전에 열사관 만들고 싶어" 지난달 24일 안중근 의사의 5촌 조카며느리 안로길씨가 100세를 맞았다. 이날 안씨가 거주하는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하얼빈(哈爾濱)시의 작은 아파트에서는 하얼빈 한국인회...
  • 2012-04-27
  • 《기억속의 60년》-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60주년 특별기획(12) ―중국조선족 대중가요의 참신한 변화를 시도해 온 작사가 석화선생을 만나   우리 둘이 정답게 손에 손잡고 높은 산 험한 봉을 맞받아가면 칼벼랑은 비켜서고 넓은 길 펼쳐지리 아, 사랑은 용감히  아름다운 처녀야 사랑은 용감히 &n...
  • 2012-04-27
  • 단편영화 《먼 곳은 어디에》 촬영을 지도하고있는 김혁감독. 북경의 3월은 바야흐로 신록의 푸른빛을 대지에 물들이기 시작하였다. 수도 북경의 신흥문화관광점으로 부상한 《798》의 유룬스당대예술중심촬영장에서 20대 조선족영화감독 김혁(金赫,29세)은 한창 《먼 곳은 어디에》라는 단편영화를 촬영하고있었다....
  • 2012-04-26
  • 성공가도 달리는 조선족 3세 이야기   '창미달'의 김창호리사장   (흑룡강신문=청도) 리수봉 박영만 기자 = 청도창미달전기유한회사는 오락게임기리모콘을 사출하여 일본에 수출하는데 년간 1700만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굴지기업이다.   창성번영을 의미하는 자신의 이름 중간글자 창(昌)자와 아름다운 제...
  • 2012-04-23
  • 연변해천국제여행사 총경리 노학수   (흑룡강신문=연변) 김명록지사장 = 연변해천국제여행사가 지난 3월 2일에 고고성을 울렸다. 전신은 연변해협국제여행사 하남분공사이다.   "백지장 한장의 두께와 같은 선택의 차이라도 결과는 판판 다르다. 일단 자기의 선택이 정확하다고 인정된다면 두말없이 밀고나가야 성공 한...
  • 2012-04-23
  •   샤타로 기록한 이민사, 렌즈에 담아 십여년   집단이주사 다큐멘터리사진작가 리광평선생 인터뷰   7개 현(시), 34개 향(진), 94개 마을… 500여명 이주민 취재 민족사에 가장 비참했던 강제 집단이주사… 왜 증발했나?   글 사진: 신철국 박군걸 기자 “리광평”. 초면에 스쳐...
  • 2012-04-23
  •  “내가 하는 일, 우려란 없다”    -- 연길은포유한회사 리사장 박련순 인터뷰   사진 박군걸  글 한뫼       한곳 우물만을 파라는 말이 있다. “지지이항”(持之以恒)으로 해석할 수 있다. 꾸준히 한 곬으로 흘러들어가라는 말이다. 사람의 정력과 시간과 ...
  • 2012-04-05
  • 한국시장? 내 무대는 중국대륙 연변주 민족기업으로 선정 한국시장 눈길 돌릴 생각 없어 최고급 제품은 조선 수출   밭고랑을 타고 세계를 내다본다는 말이 있다. 편벽한 오지에 살면서도 천하에 뜻을 두고 있다는 것으로 풀이할수 있겠다. 지난 주 만난 최경심(崔琼心) 사장이 떠오른다. 허름한 회사건물, 온전한 간...
  • 2012-04-05
  • 이향란(왼쪽) 동사장과 신화춘(오른쪽) 총경리가 의료기 도입식 날 후희민 교수와 기념사진을 남겼다   (흑룡강신문=칭다오) 김명숙 기자 = 지난 3월 17일, 공군칭다오요양원 강복치료센터내에 "무통증 척추 감압치료중심"을 설립하는 의식이 진행되었다. 이와 함께 1대당 300여만 위안에 달하는 미국제 스파인매드척추감...
  • 2012-04-05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