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채회장은 한국 서울에서 (주)성보피혁을 경영하다가 1994년 연길에 연변성보국제상무빌딩유한회사를 설립했다. 그로부터 그는 동족에 대한 뜨거운 정을 안고 불우의 어린이에게, 생활이 곤난한 사람들에게 아무런 바람이 없이 큰 도움을 주어 중국조선족사회의 기부천사로 인근에 소문이 나있고 어려운 사람들이 도움을 청할 때마다 발벗고 나서 열심히 도와주는 것을 천성으로 간직하는 한국인이다.
정영채 회장은 연변대학 이사회 이사이며 연변대학 객좌교수를 역임하고있다. 1996년 정영채회장은 길림성의 외국투자인중 처음으로 영주권을 받은 한국인이고 이듬해 연길시인민정부로부터 명예시민 칭호를 수여 받았으며 2005년에는 '길림성장백산우의상'을 수상하는 영예까지 지닌 고마운 한국인의 한 사람이다.
우연함이 만나게 해준 동포사회
1992년 4월, 서울엔 개나리가 만개하고 진달래 꽃이 봉우리를 터뜨린다.
서울 중앙대학교 총장, 관악구 국회의원을 지낸 임철순 씨의 소개로 중국 천진시정부 고위층에 있는 두 사람이 수행인원들을 동반해 한국에 와서 정영채회장이 경영하는 한국소재(주)성보피혁회사를 방문했다. 정영채회장이 만나보는 첫 중국인이었으며 금번의 만남이 연변에 자리잡게 한 계기로 되었다.
그해 5월, 정영채회장은 임철순 씨를 찾아가 중국 천진시를 방문하고 싶다는 의향을 밝혔다. 그의 소개로 텐진시를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되였다.
천진시는 동쪽으로 발해만을 끼고있고 서북쪽으로 중국의 수도 북경과 린접해 있는 해안도시로서 중국 화북지역의 공업중심지이자 상업중심지였다.
정영채회장은 천진을 방문하면서 기름가스와 해양자원이 특별히 풍부하며 공업기술기초도 중국내 몇 손가락안에 들고있는 도시임을 알게 되였으며 새로운 산업의 개발에 아주 유리한 지역임을 알게 되었다.그는 텐진시에 호감을 가지면서 한번 투자해 보려는 결심을 굳히게 되였다.
그러나 중국에 발을 들여 놓은 정영채회장은 조선족이 집결해있는 연변에 한번 가보고 싶었다. 연변의 환경은 어떠한지? 건설업은 어떠하고 사람들의 생활형편은 어떠한지? 모든것이 궁금했다.
1992년 여름 한국의 이홍수 씨의 소개로 정영채회장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인 연길에 도착했다.
연변 땅에 들어선 정영채회장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울렁거리며 눈물이 글썽해 났다. 산도 들도 물도 전혀 낯설지 않고 어쩐지 포근한 감이 들었다.
연길터미널에 첫발을 내려놓았을 때 그는 너무 놀랐다. 한글로 된 간판에 그만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는 간판을 둘러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너무나 감회가 깊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말이 통하기에 기분이 좋았다. 연길터미널에서 호텔로 가는 길에 여기 저기 엿보아도 한글로 된 간판이 마치 자기를 환영해 주는 것만 같았다.더우기 연길시의 영빈교를 지나면서 살펴보니 다리 양쪽에 물동이를 이고 있는 조선족여인의 조각상이 그렇게도 생생하게 조각돼 있었다. 그는 회사일로 세계 각지를 주름잡으면서 수많은 나라에 발자국을 찍어놓았지만 연변에서처럼 새로운 충격을 받아 본적은 없었다. 장기간에 걸친 외교단절로 중국을 못살 곳으로 알고있었던 자신이 가소롭기 그지없었고 증국 사람을 괴물인가 잘못 리해했던 자신이 너무나 우스깡스러웠다.
연변 땅엔 똑같은 언어, 똑같은 문자, 똑같은 생활습관을 가진 동족이 살고있는 것으로 하여 그는 가슴이 뿌듯해 났다. 신문사, 방송국, 조선족학교 더우기 연변대학까지 있는 것으로 하여 그는 마치 대낮에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정영채회장은 연변사람들이 아직 어렵게 생활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생활이 어렵지만 그들은 정이 찰찰 넘치는 것 같았다.가난하면서도 더없이 순진한 동족들을 위하여 자기의 자그마한 힘이라도 보태주고 싶은 충동이 뇌리를 강하게 쳤다. 여직 사회를 위해 별로 한일이 없기에 연변에서 연변사람들과 함께 여생을 값지게 보내려는 생각이 마치 홰불이 되여 삶의 앞길을 비춰주는것 같았다.
(바로 여기다. 여생을 연변에서 이들과 함께 하리라! 이제야 뜻깊은 일을 해보려던 야망을 실현할 복지의 땅을 바로 찾았구나.)
정영채회장은 오스트랄리아 시드니에 이민 가려던 생각도, 천진에 투자하려던 결심도, 북경 모피공장과 합자하려던 생각도 모두 접어놓고 새로운 선택을 정했다.
1994년 4월 초 정영채회장은 무작정 연변으로 왔다.연변을 위해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 정열을 불사르고 싶었다.
뜨거운 마음과 따뜻한 손길
정영채회장은 신문이나 텔레비죤을 통해 사회를 위해 훌륭한 일들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을 보고 한없이 부러웠고 더없이 돋보였다. 자기가 지나온 길을 돌이켜 보면 너무나 평범하고 보잘 것 없는 것 같아 괴로웠다.
(한 인간으로 태여나 자기 하나만이 아닌 내 주위사람들과 내 이웃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또 사람사는 보람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일이 나의 꿈이다.)
일찍 1970년 정영채회장은 좋은 일을 해보려는 큰맘을 먹고 여러 친구들을 모아 어려운 학생들을 돕자는 뜻을 모았다. 누구는 학용품을, 누구는 약품을, 정영채 자신은 등록금을 대기로 했다. 평생 처음 겪는 보람이고 기쁨이었다.
정영채회장은 로동자들을 무척 사랑하고 아꼈다. 그들이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성보빌딩을 건축할 때 하루는 밤 깊도록 세멘트가루를 뒤집어쓰고 일하는 그들의 모습이 안쓰러워 그는 연길시 골목마다 뒤지며 3천여개의 삶은 계란을 사다가 시공로동자들을 대접했다.그후부터 매일 저녁 5천여개 계란을 사다 삶아주었고 한달에 돼지 두 마리씩 사다가 먹였다.음력설에 중국 강소성에 집을 둔 시공로동자들의 집을 찾아가 위문했고 그 많은 노동자 집에 벽시계 하나씩 걸어주었다. 그리고 손목시계며 옷들을 나누어 주었다. 그래도 더 주고 싶어서 돼지 10마리를 잡아서 각 집에 나누어 주다 보니 연길로 올 때 그만 여비가 모자라 승용차편으로 26시간, 배로 17시간, 기차로 10시간의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허지만 마음만은 홀가분했다. 이에 감동된 로동자들은 자기 고장의 특산물을 선물로 정회장한테 주었다.
1997년 초봄 정영채회장은 연변의 로일대 문화인들, 기자, 가수, 간호원, 의사 등 18명을 한국관광을 시켰는데 비행기표와 호텔비를 전부 한국 측에서 부담하게 조치했다.
1998년 음력설에 연길시에 성보호텔이 개업한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주위 친지들의 알선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돕기 위해 성보상인들과 함께 연길시 개발단지 동쪽켠에 있는 마을에 많은 물건을 전달했다.
정영채회장은 민생에 관심두는 것이 기업인의 으뜸가는 마음가짐이고 기업에서 얻는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기업인의 기본 경영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성보라는 회사는 화합으로 부를 창출하며 나눔과 기쁨을 함께하는 세상을 만들어 사회의 좋은 평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정영채회장은 연변인민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저그만한 좋은 일이라도 연변사회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불우아이, 곤난한 가정을 도와줄 뿐만아니라 성보상인들의 곤난도 자기일처럼 돌봐 주엇다.성보에 점포를 임대하고 구두를 경영하는 김씨라는 청년이 있었다. 너무 일에 충실하고 성보일에 발벗고 나서는 그를 말없이 지켜봐 오던 정영채회장은 누구나 눈독을 들이는 금방을 그가 경영하도록 인도해 주었다. 그는 보증금도 없이 웃돈 7ㅡ80여만원을 더해 가게를 임대해 주었고 현금으로 거래되는 금제품을 후불제로 거래할 수 있게 성보가 담보하고 금방을 경영하도록 도와주었다. 그 청년은 부자로 되였다.
연변성보는 해마다 여러차례 상인들을 동원하여 연길시, 도문시, 화룡, 룡정 등지의 고아원, 료양원에 숱한 물자를 보내 주었는데 이렇게 나간 금익이 무려 1천만원을 웃돈다.
성보상인들은 부를 창조해 사회에 환원하라는 정영채회장의 리념을 받아들이면서 삶의 가치를 알게 되었고 베풀줄 아는 경영인으로 성장했다며 즐거워하고 있으며 비록 장사군이라 하지만 자기들에게도 나름대로 인생을 살아가는 징표가 있고 인생의 즐거움이 따로 있다고 자부심을 털어놓는다.
정영채회장은 남의 신세를 하나 졌으면 곱절로 갚아주는 위인이다.연변조선족당위 위생실의 김원장이 몇번인가 정영채회장을 면비로 치료해 준 적이 있다해서 김원장을 한국에 초청해 주었고 왕복비행기표와 한국의 체류비용을 전담했다.1994년 서시장 남쪽켠에 초라한 아파트 1층에 치과진료소를 하던 허원장한테서 이발을 치료받은 적이 있어 고마운 마음으로 허원장을 한국 관악구에 있는 "남선생치과"에 40일간 연수 기회를 마련해 주었고 치과 전문가들을 만나게 해주었다.
면목을 모르는 연변의 김씨라는 분이 찾아와 체류기간을 연장해 달라고 어려운 부탁을 할 때도 그는 목동출입국관리사무소까지 찾아가 애써 연기수속을 해 주었다. 한번은 목단강의 이씨라는 청년이 찾아와서 불법체류로 500만(한화)원을 벌금을 하게 되는데 벌금을 적게 낼 방법이 없겠는가고 사정하였다. 알고보니 그 청년은 건설공사장에서 일하다가 떨어져 옆구리와 머리를 상해 병원에 입원했었다. 헌데 사장이 돈이 없어 치료비는 고사하고 밀린 월급도 주지 못한 상황이엿다. 누군가 정영채회장을 찾아가면 꼭 도와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염치불구하고 찾아왔다고 경위를 설명했다. 정영채회장의 도움으로 그 청년은 한화30만원의 과태료만 지불하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정영채회장이 수백명의 중국 동포를 초청했지만 불법체류자가 한 사람도 생기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였다.이렇게 남을 도와주다 보니 빌려주고 받지 못한 돈이 400만원이나 된다. 이런 손해를 보았지만 정영채회장은 "인생은 만남이고 좋은 만남은 축복이고 변화의 기회이며 좋은 만남이야말로 비전을 가져온다"고 말하고있다.
2005년 초봄의 어느날 연길시모아산에 오르니 몇 명 아주머니들이 정영채회장을 알아보고 "저분이 연변사람들에게 좋은 일을 많이 하는 한국사람이다."라고 하면서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후 한번은 룡정시 백금이라는 고장에 갔는데 거기 사람들도 신문과 텔레비에서 많이 보았다면서 인사를 했다. 길건너편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마저 모여와서 반갑게 인사하는 것이었다.이럴 때마다 그는 삶의 보람을 느꼈으며 연변사회에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해야겠다는 결심을 내리군 한다.자기가 연변 땅에 와서 하늘을 쳐다보고 땅을 굽어보아도 “한점의 부끄러움 없이 살아왔다”는 자부심으로 하여 그는 더 젊어지는 것 같았다.
성보장학재단 구성
연변성보는 "화합으로 부를 창조하며 나눔과 기쁨을 함께 한다"는 경영리념을 창출하고 그 이념에 따라 상업을 운영하고 있으면 사회에 유익한 공익사업을 펼쳐나가고있다.
2002년 3월에 연변대학 성보연구생장학회를 설립하고 해마다 30여명 연구생(석사,박사)들에게 5만위안의 장학금을 발급하기 시작하여 5년동안에 150명의 학생들에게 25만원의 장학금을 발급하였다.
대학생장학금을 규범화,체계적으로 만들기 위해 2007년 2월 12일 정영채를 회장으로 안려영,김성순을 부회장으로 한 연변성보장학재단을 발족시켰다. 이 장학재단은 연변지구 교육사업발전을 위하여 연변성보와 성보상인들이 자원적으로 출자하여 설립한 비영리성기업문화봉사단체이다. 장학재단을 설립함으로서 연변성보상인들이 교육을 관심하고 어려운 학생들에게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보내주는 고상한 정신면모를 보여주었다.그래서 성보장학재단은 조화롭고 안정한 연변을 건설하기 위한 사랑의 마음 전달하는 무대이기도 하다. 성보장학재단 장학금에는 연변대학연구생원에 설립한 연구생장학금,연변대학경제관리학원에 설립한 성보대학생장학금, 연변1중,연변2중(한족중학교)에 설립한 성보고중생장학금 세가지로 나뉘어 있다.
연변대학성보장학금과 성보장학재단은 11년간 이미 120만원에 달하는 장학금을 발급하였다.
정영채회장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만이 아니고 성보회사가 존재하고 연변대학이 존재하고 성보상인들의 열정적인 후원이 식지 않는 한 연변성보장학재단은 영원히 존재할 것이며 더욱 씩씩한 강세로 발전될 것이라고 뜻을 밝히고있다.
여생을 시들지 않게
정영채회장은 80고령에 올랐지만 그의 왕성한 정력과 엄밀한 사유, 그리고 사업에 대한 욕망과 공명정대한 인품은 전혀 변함이 없다.
정영채회장은 기업이란 사장은 혼자서 운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직원들과 더불어 함께 운영해야만 살아나갈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할 뿐 만아니라 이렇게 실천하고있다.
정영채회장은 성보상인들한테 "첫째 신용을 지켜야 하고 둘째 겸양한 마음으로 노력해야 하며 셋째 베풀면서 얻는 사람이 돼야 하며 넷째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여야 한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하고 있다.그는 자기 사업을 지지해주는 연변정부에 항상 고마운 마음이고 연변성보를 일궈 세우기 위해 초기부터 분투한 유공자들을 잊지 않으며 항상 뒤심이 되여주는 상보상인들에게 고개숙여 뜨거운 인사를 올리다고 말하고있다.
정영채회장은 연변성보를 동북아물류시장의 주역으로 부상시키기 위해 오늘도 래일도 불면불휴의 노력을 아끼지 않고 풍요로운 미래를 위해 매진하고있다.
취재를 마치면서 정영채 회장은 “연변에 발을 들여놓을 때만 해도 조선족학교들이 도처에 있었는데 지금은 엄청나게 줄어들어 참으로 고민스럽다”고 하면서 학생원천이 없어 조선족학교가 줄어들어 안타까움을 금치못하고있다.
옛 성현의 말에 “범사에 감사하라”고, 연변의 조선족 동포들, 아니 제반 연변인민들은 정영채 회장의 기부문화에 절때로 잊지 않을 것이며 또 잊을 수도 없을 것이다.
흑룡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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