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창업의 길은 험난했지만 난 이겨냈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2년10월16일 09시27분    조회:6269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백춘희
대련 보방무역유한회사 백춘희사장의 창업이야기

(흑룡강신문=서울) 나춘봉 기자 = 성공한 사람들은 하나의 공동점을 갖고 있다. 그것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주먹구구로 사회 생활에 뛰어들어 거듭되는 도전을 이겨내고 현재 연 매출 400만 달러의 복장무역회사를 이끄는 백춘희(여, 36세)사장도 그런 ‘성공한 사람’중의 한 사람이다.

  “입사시 돈보다 전망을 보았다”

  1999년 요녕사범대학 경제관리 전공을 졸업하고 대련에 정착한 춘희씨는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친구들과 함께 IT회사를 차렸다. 허나 경험이 없고 자금, 인맥이 부족한 신출내기들이다 보니 회사는 2년 만에 아쉽게 문을 닫아야 했다. 이어서 월 노임 3000위안의 사무실 직원으로 취직했다가 너무나 기계적이고 안일한 삶이 싫어서 한달 만에 그만두었다.

  이런 경력이 있는 춘희씨에게 있어 호구책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뭔가를 이루어가는 멋진 삶을 살고 싶었다. 당시 무엇보다 자신의 진가를 보여줄 수 있는 몸에 맞는 ‘옷’을 찾는 것이 시급했다.

  그렇게 도전과 발전가능성이 있는 직장을 구하고 있던 중 ‘보방무역유한회사’ 설립을 준비하고 있던 한국인 사장을 만났다.

  “무역이 춘희씨의 적성에 맞는 것 같다. 몇 년 동안 같이 일하면 큰 성과를 거둘 것”이라며 한국인 사장은 입사를 종용했다.

  한국인 사장이 제시한 조건은 월 노임 800위안이었다. 당시 대련에 있는 한국회사 임금수준으로는 말도 안 되는 낮은 액수였지만 춘희씨는 단호하게 입사를 결정했다.

  그가 관심을 갖는 분야이고 또한 처음 세워지는 회사로서 백지에 뭔가를 하나하나 배워가며 그려갈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다.

  “말단에서 부사장으로.. 대가는 컸다”

  2003년 3월 무역회사에 첫 출근한 춘희씨는 여느 초임 회사원과 다름없이 커피를 타고 청소를 하며 일과를 시작했다.

  회사가 초창기이다 보니 할 일이 많았다. 한국사장은 솔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춘희씨를 전적으로 믿었다.

  사무실의 사소한 업무에서 재무, 세관업무, 인원선발까지 춘희씨가 참여하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관련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신인이 감당하기엔 업무량이 벅차기도 했지만 춘희씨는 스스로 묵묵히 감내했다. 일을 배우고 기반을 닦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마음가짐과 준비과정이 있었기에 훗날 춘희씨가 백사장으로 불릴 때 무역회사의 제반 운영과정을 속속히 들여다보며 각 부서 직원들을 여유 있게 컨트롤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신을 바쳐 일을 하고 있는 춘희씨의 노력과 상관없이 회사상황은 점점 어려워져만 갔다. 한국인 사장의 부적절한 인원관리로 회사 운영자금에는 큰 구멍이 생기게 되었다. 게다가 연약한 사장이 번마다 협력업체들이 동원한 폭력배들의 채무독촉과 무리한 갈취에 순순히 따르다 보니 회사는 도산 일보 직전에 이르렀다.

  그 때 폭력배들의 괴롭힘이 있을 때마다 한국인 사장은 방패막이로 춘희씨를 내세웠고 자신은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 “지금 그 상황을 떠올리면 너무 무섭다”는 춘희씨는 당시 겁도 없이 칼을 들이대는 폭력배들과 언쟁을 벌겨가며 협상을 했다.

  그리고 회사의 자금구멍을 메우기 위해 개인 돈을 돌려댔는데 그 액수가 나중에는 30만위안을 넘기게 되었다. 춘희씨는 “위급한 상황에 처한 회사를 살려야 나도 산다”는 일념뿐이었고 개인 득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춘희씨의 사력을 다 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영권과 관리권을 쥐고 있는 사장의 부실경영은 계속됐다. 게다가 부정을 일삼는 직원들의 가시돋힌 눈길이 춘희씨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춘희씨는 회사에 이미 넣은 개인 돈을 포함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회사를 떠나기로 했다.

  사직하고 집에서 지낸 지 일주일 만에 회사직원들이 느닷없이 찾아왔다. 폭력배들이 찾아와 직원들을 감금해 놓고 돈을 내라며 엄포를 놓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춘희씨는 한걸음에 달려갔다. 문제를 해결한 춘희씨를 한국사장이 간곡히 만류했다. 지금까지 사장지시에 따라 일만 해온 춘희씨에게 부사장의 직함과 함께 직원관리를 비롯한 부사장으로서의 실권을 주겠다고 했다. 너무나 많은 심혈을 기울인 회사이고 그 만큼 애착이 컸던 춘희씨는 이튿날 부사장 취임식을 통해 회사에 복귀했다.

  “직원들은 내 가족, 내가 지킨다”

  2005년 한국사장은 “한국에 들어가 오다를 따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도주하다 싶이 중국을 떠났다.

  춘희씨가 건네받은 건 근 20만위안에 가까운 채무와 10여명의 직원이 전부였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업무거래가 있던 바이어들도 쏙쏙 빠져나갔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빨 뺌을 해야 하는 기막힌 상황이었다. 허나 사장이 된 춘희씨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회사를 믿고 따라온 직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울러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하든 내 손으로 꼭 이 회사를 살려 내 직원들을 지켜내겠다는 오기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치밀고 올라왔다.

  백사장은 재정적으로 정말 힘든 상황이었지만 친지들의 돈을 돌려서라도 우선 직원들의 노임을 지급하면서 직원들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부지런히 바이어들을 찾아 다니며 업무를 주문했다.

  백사장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오다가 생기기 시작했고 일부 바이어는 여러 고객에게 나누어주던 오다를 백사장 한 사람에게 몰려주기 시작했다.

  회사는 2006년, 2007년의 진통기와 2008년의 IMF를 이겨내며 2009년에 들어서서는 차츰 제 궤도를 찾고 안정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물곤 그 과정에 바이어에게 돈을 사기 당하고 직원들의 배신을 당한 등 불상사가 있긴 했지만 백 기관장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보방호’ 무역선의 넓은 바다로 향한 항행을 막지 못했다.

  회사가 첩첩 난관을 이겨내고 욱일승천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백사장이 사심을 버리고 회사를 집처럼, 함께 동고동락한 직원들을 가족처럼 아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2009년부터 회사에 남은 10여명의 직원이 지금까지 백사장을 믿고 따르고 있다.

  “보방의 직원들은 사장님 말씀만 나오면 눈에서 빛이 날 정도 자랑스러워 하고 있어요. 정말 좋은 직원들을 두었어요.”

  백사장은 주변으로부터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일에는 에누리 없지만 사람을 대함에 있어 더 없이 인간적인 백사장의 인격매력이 가져온 결과이기도 하다.

  건강검진, 년말 보너스, 연례여행 등 인센티브는 물론 야근이 있을 땐 직접 삼계탕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함께 사우나에 가서 피로를 풀어주기도 했다.

  장사를 함에 있어 푼돈을 아끼는 백사장이지만 직원들의 적절한 요구에는 호방하게 호주머니를 풀면서 직원들을 정으로 대했다.

  “이 회사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요. 보다 높은 노임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하는 회사도 있지만 500~1000원의 차이 때문에 이 회사를 떠나고 싶진 않아요. “

  직원들이 늘 하는 말이다.

  백사장은 이처럼 든든한 직원들을 후방에 두었기에 하루가 멀게 미얀마, 태국, 일본, 한국 등 외국을 나들며 보방의 미래를 넓혀가고 있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孫文 만난 뒤 중국공산당 입당 사해에 도착한 그는 프랑스조계지에 있던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하지만 당시 임시정부는 재정형편이 취약해 그의 생계를 해결해 줄 수 없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그는 당시 조선인들이 주로 취직하던 전차회사의 차장노릇을 하면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이때 그는 어릴 때 잠시 접어두었...
  • 2005-11-04
  • [원제:동포 1.5세 여성 미 해군 부대장 `우뚝'''' ] 미군 태평양함대 사령부의 인사지원부대(PSA)장이 동포 1.5세 이연미(40. 미국명 앤리 쿠베라) 중령인 것으로 밝혀져 화제가 되고 있다. 30일 미주중앙일보에 따르면 5세 때 가족과 함께 미국에 이민한 이 중령은 뉴저 지에서 중.고교를 마친 뒤 버지니아대 국제관계학을...
  • 2005-11-04
  • 조국독립을 위해 고향을 떠나다 1898년 중국용정에서 태어난 한낙언은 어릴 적부터 남다르게 그림에 재간이 있었다.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유민이 되어 조국을 떠난 가난한 조선인가정에서 태어난 그가 체계적인 그림공부를 할 기회를 갖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이었을 것이다. 그가 아홉 살 되던 해에 부친이 병으로 돌아가...
  • 2005-11-03
  • 본사소식(윤선일)" 최근 단동출입경 검험검역국에서 료해한데 따르면 10월에 들어서면서 단동랑두항구로 무연탄을 싣고 입항하는 조선 화물선이 부쩍 늘고 있다. 해당인사의 소개에 의하면 10월부터 겨울 난방기에 들어서고 국내 화력발전소에서 대량의 석탄을 수요로 하며 질 좋은 조선의 무연탄이 중국에서 각광을 받으면...
  • 2005-11-02
  • 흑룡강동원상업무역유한회사 —망규동원화원주점 개업 선언 본사소식( 기자 최계철) 조선족청년기업가 박광종(39세)이 이끄는 흑룡강동원(同源)상업무역유한회사는 상업,무역, 부동산업을 병진시켜 창업 12년만에 총자산 1억 2000만원에 7개 자회사를 둔 그룹으로 급부상했다. 이 회사 산하 흑룡강 망규화원주점이 10월...
  • 2005-11-02
  • 1947년 비행기 추락사고 국공내전이 한창이던 1947년 7월 30일, 실크로드에 세워진 도시 우루무치를 떠나 란저우로 향하던 국민당소속 257호 비행기가 자위관상공에서 악천후를 만나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광활한 중국대륙의 오지에서 일어난 추락 사고는 자칫 긴박한 내전 상황 속에서 중국인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영...
  • 2005-11-02
  • 클린턴과 골프 친 뒤 성금 50만불 쾌척 '1,000만달러의 소녀' 미셸 위(위성미)가 지난 31일(한국시간)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의 서던하일랜즈골프클럽에서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골프 회동을 가졌다. 미셸 위와 클린턴 전 대통령의 이 날 골프 만남은 프로 전향 때 발표한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자 돕기 성금 5...
  • 2005-11-02
  • 붓으로 새로운 세상을 굼꾸다 총이 아닌 붓으로 새로운 세상을 그려보자고 했다는 한낙연. 최용수교수도 한낙연이 중국에 알려진 것에 비해 정작 조국인 한국에서는 그를 너무나도 모르고 있다면서 안타까워했다. 하긴 그런 인물이 어디 한둘이랴. 널리 알려진 스타에만 초점을 맞추는 세상 탓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아무도...
  • 2005-11-01
  • [원제:홍광정신 실천으로 조선족 명예 찾겠다 ]  “한국정부에 리홍광장군의 명예회복을 수차례 요구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반응이 없다.”  지린성 반석시 홍광중 교장을 역임한 이주산(李柱山·72)선생은 오랫동안 항일운동가 리홍광장군을 연구해온 인물. 아마도 중국 동북지방에서 그 만큼 리홍광장군에 대해 잘 알...
  • 2005-10-31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