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창업의 길은 험난했지만 난 이겨냈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2년10월16일 09시27분    조회:6260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백춘희
대련 보방무역유한회사 백춘희사장의 창업이야기

(흑룡강신문=서울) 나춘봉 기자 = 성공한 사람들은 하나의 공동점을 갖고 있다. 그것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주먹구구로 사회 생활에 뛰어들어 거듭되는 도전을 이겨내고 현재 연 매출 400만 달러의 복장무역회사를 이끄는 백춘희(여, 36세)사장도 그런 ‘성공한 사람’중의 한 사람이다.

  “입사시 돈보다 전망을 보았다”

  1999년 요녕사범대학 경제관리 전공을 졸업하고 대련에 정착한 춘희씨는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친구들과 함께 IT회사를 차렸다. 허나 경험이 없고 자금, 인맥이 부족한 신출내기들이다 보니 회사는 2년 만에 아쉽게 문을 닫아야 했다. 이어서 월 노임 3000위안의 사무실 직원으로 취직했다가 너무나 기계적이고 안일한 삶이 싫어서 한달 만에 그만두었다.

  이런 경력이 있는 춘희씨에게 있어 호구책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뭔가를 이루어가는 멋진 삶을 살고 싶었다. 당시 무엇보다 자신의 진가를 보여줄 수 있는 몸에 맞는 ‘옷’을 찾는 것이 시급했다.

  그렇게 도전과 발전가능성이 있는 직장을 구하고 있던 중 ‘보방무역유한회사’ 설립을 준비하고 있던 한국인 사장을 만났다.

  “무역이 춘희씨의 적성에 맞는 것 같다. 몇 년 동안 같이 일하면 큰 성과를 거둘 것”이라며 한국인 사장은 입사를 종용했다.

  한국인 사장이 제시한 조건은 월 노임 800위안이었다. 당시 대련에 있는 한국회사 임금수준으로는 말도 안 되는 낮은 액수였지만 춘희씨는 단호하게 입사를 결정했다.

  그가 관심을 갖는 분야이고 또한 처음 세워지는 회사로서 백지에 뭔가를 하나하나 배워가며 그려갈 수 있다는 기대감이 컸다.

  “말단에서 부사장으로.. 대가는 컸다”

  2003년 3월 무역회사에 첫 출근한 춘희씨는 여느 초임 회사원과 다름없이 커피를 타고 청소를 하며 일과를 시작했다.

  회사가 초창기이다 보니 할 일이 많았다. 한국사장은 솔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춘희씨를 전적으로 믿었다.

  사무실의 사소한 업무에서 재무, 세관업무, 인원선발까지 춘희씨가 참여하지 않는 부분이 없었다. 관련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신인이 감당하기엔 업무량이 벅차기도 했지만 춘희씨는 스스로 묵묵히 감내했다. 일을 배우고 기반을 닦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마음가짐과 준비과정이 있었기에 훗날 춘희씨가 백사장으로 불릴 때 무역회사의 제반 운영과정을 속속히 들여다보며 각 부서 직원들을 여유 있게 컨트롤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신을 바쳐 일을 하고 있는 춘희씨의 노력과 상관없이 회사상황은 점점 어려워져만 갔다. 한국인 사장의 부적절한 인원관리로 회사 운영자금에는 큰 구멍이 생기게 되었다. 게다가 연약한 사장이 번마다 협력업체들이 동원한 폭력배들의 채무독촉과 무리한 갈취에 순순히 따르다 보니 회사는 도산 일보 직전에 이르렀다.

  그 때 폭력배들의 괴롭힘이 있을 때마다 한국인 사장은 방패막이로 춘희씨를 내세웠고 자신은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 “지금 그 상황을 떠올리면 너무 무섭다”는 춘희씨는 당시 겁도 없이 칼을 들이대는 폭력배들과 언쟁을 벌겨가며 협상을 했다.

  그리고 회사의 자금구멍을 메우기 위해 개인 돈을 돌려댔는데 그 액수가 나중에는 30만위안을 넘기게 되었다. 춘희씨는 “위급한 상황에 처한 회사를 살려야 나도 산다”는 일념뿐이었고 개인 득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춘희씨의 사력을 다 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영권과 관리권을 쥐고 있는 사장의 부실경영은 계속됐다. 게다가 부정을 일삼는 직원들의 가시돋힌 눈길이 춘희씨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 춘희씨는 회사에 이미 넣은 개인 돈을 포함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회사를 떠나기로 했다.

  사직하고 집에서 지낸 지 일주일 만에 회사직원들이 느닷없이 찾아왔다. 폭력배들이 찾아와 직원들을 감금해 놓고 돈을 내라며 엄포를 놓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춘희씨는 한걸음에 달려갔다. 문제를 해결한 춘희씨를 한국사장이 간곡히 만류했다. 지금까지 사장지시에 따라 일만 해온 춘희씨에게 부사장의 직함과 함께 직원관리를 비롯한 부사장으로서의 실권을 주겠다고 했다. 너무나 많은 심혈을 기울인 회사이고 그 만큼 애착이 컸던 춘희씨는 이튿날 부사장 취임식을 통해 회사에 복귀했다.

  “직원들은 내 가족, 내가 지킨다”

  2005년 한국사장은 “한국에 들어가 오다를 따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도주하다 싶이 중국을 떠났다.

  춘희씨가 건네받은 건 근 20만위안에 가까운 채무와 10여명의 직원이 전부였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업무거래가 있던 바이어들도 쏙쏙 빠져나갔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빨 뺌을 해야 하는 기막힌 상황이었다. 허나 사장이 된 춘희씨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회사를 믿고 따라온 직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울러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하든 내 손으로 꼭 이 회사를 살려 내 직원들을 지켜내겠다는 오기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치밀고 올라왔다.

  백사장은 재정적으로 정말 힘든 상황이었지만 친지들의 돈을 돌려서라도 우선 직원들의 노임을 지급하면서 직원들을 안심시켰다. 그리고 부지런히 바이어들을 찾아 다니며 업무를 주문했다.

  백사장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오다가 생기기 시작했고 일부 바이어는 여러 고객에게 나누어주던 오다를 백사장 한 사람에게 몰려주기 시작했다.

  회사는 2006년, 2007년의 진통기와 2008년의 IMF를 이겨내며 2009년에 들어서서는 차츰 제 궤도를 찾고 안정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물곤 그 과정에 바이어에게 돈을 사기 당하고 직원들의 배신을 당한 등 불상사가 있긴 했지만 백 기관장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보방호’ 무역선의 넓은 바다로 향한 항행을 막지 못했다.

  회사가 첩첩 난관을 이겨내고 욱일승천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백사장이 사심을 버리고 회사를 집처럼, 함께 동고동락한 직원들을 가족처럼 아낀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2009년부터 회사에 남은 10여명의 직원이 지금까지 백사장을 믿고 따르고 있다.

  “보방의 직원들은 사장님 말씀만 나오면 눈에서 빛이 날 정도 자랑스러워 하고 있어요. 정말 좋은 직원들을 두었어요.”

  백사장은 주변으로부터 이런 말을 자주 듣는다. 일에는 에누리 없지만 사람을 대함에 있어 더 없이 인간적인 백사장의 인격매력이 가져온 결과이기도 하다.

  건강검진, 년말 보너스, 연례여행 등 인센티브는 물론 야근이 있을 땐 직접 삼계탕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함께 사우나에 가서 피로를 풀어주기도 했다.

  장사를 함에 있어 푼돈을 아끼는 백사장이지만 직원들의 적절한 요구에는 호방하게 호주머니를 풀면서 직원들을 정으로 대했다.

  “이 회사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요. 보다 높은 노임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하는 회사도 있지만 500~1000원의 차이 때문에 이 회사를 떠나고 싶진 않아요. “

  직원들이 늘 하는 말이다.

  백사장은 이처럼 든든한 직원들을 후방에 두었기에 하루가 멀게 미얀마, 태국, 일본, 한국 등 외국을 나들며 보방의 미래를 넓혀가고 있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560
  • 진달래랭면 총경리 허미화 향후에도 서비스업으로 성공할터 청도시성양구에는 많은 한식점과 조선족음식점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은 택시기사들마저 알아주는 명소로 되였다. 길림성돈화시 역전 앞에서 랭면집을 경영했던 엄마 지부전의 영향으로 허미화(79년생)총경리는 어려서부터 음식업에 대해 남다른 감정을 갖게 되였...
  • 2011-11-01
  • [길림신문 2011-10-28  장춘영 기자]  조선족의 전통복식문화를 리드해가는 연길시성월민족복장공장 공장장 최월옥 최월옥(崔月玉)프로필 1947년 8월 룡정 동불사 출생 1967년-1984년 룡정현 동불사진 동불남촌 부녀대장, 부녀주임 1984년-1990년 연길시서시장 개체호, 북청당지부 선전위원 1991년-현재 연길시...
  • 2011-10-28
  • 세계경제인대회 준비하는 옥타 말레이시아 지회     “동남아의 허브인 말레이시아는 특성상 컨벤션이 자주 열리는 편이죠. 하지만 이번처럼 규모가 큰 행사는 처음이예요. 말레이시아 내에서도 관심들이 아주 높습니다” 이순구 말레이시아 지회장은 세계경제인대회 준비가 한창인 지난 28일 재외동포...
  • 2011-10-17
  • [흑룡강신문사 2011-10-13 길림성특파원 윤운걸]   -중국연변조선족전통음식협회 회장 김순옥을 찾아서 김순옥(金顺玉)프로필       1980년 7월-1984년 9월 연변대학 법률학부 법학사 1984년 7월-1986년 9월 상해 화동정법대학원 헌법학 전공 1984년 7월-2003년 2월 연변조선족자치주 법...
  • 2011-10-14
  • -글로벌한민족녀성경제인련합회 김순자리사장을 만나 [길림신문 2011-10-11 장춘영 기자]글로벌한민족녀성경제인련합회 김순자리사장 한민족녀성경제인들의 위상을 세계적차원으로 부상시키기 위해 자신의 힘과 에너지를 아낌없이 쏟고있는 조선족녀성기업인이 있다. 그가 바로 글로벌한민족녀성경제인련합회의 김순자리사...
  • 2011-10-11
  • [길림신문 2011-10-09 전춘봉 기자]○ 연길진달래민족음식유한책임회사 최기옥리사장을 만나 연변의 수부 연길시 도심에 자리잡은 연길진달래민족음식유한책임회사(이하 진달래회사로 략칭)는 20여년의 력사를 자랑하는 음식업계의 굴지 기업으로 국내외에 명성이 자자하다.특히 이 회사의 브랜드 음식인 《진달래 랭면》은...
  • 2011-10-10
  • [인터넷료녕신문 2011-09-27 리덕권 기자]  흑룡강성 오상시 시골출신인 최영복(1953년 생)씨는 자신의 총명과 지혜, 그리고 특수인연으로 자기의 운명을 바꾼 인물이다.   1970년 초중도 마치지 못하고 귀향한채 호미자루를 잡았던 그는 열심히 노력하여 생산대의 출납, 기공원, 회계에서 공청단 서기직을...
  • 2011-10-08
  • 재한조선족 상인 김영복사장의 이야기   (흑룡강신문=서울 2011-09-01)라춘봉 특파원=“재한 조선족들은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3D업종에서 염가의 노동력을 판다”는 인식이 한국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 내려 있지만 특유의 센스와 지혜로 성공적인 상인으로 주목 받는 조선족들이 늘고 있다. 한국에서 음식점, ...
  • 2011-09-01
  • 조선족출신의, 하나은행 구로동 지점의 김순연대리가 중국인전용창구를 전담하며 최선을 다해 실적을 높인데서 은행 내부는 물론, 중국인(동포포함)고객들의 칭찬을 자자히 받고 있다. 중국 흑룡강 할빈 출생인 김순연 대리는 목단강사범학교를 졸업하고 2000년에 부로를 따라 모국에 온 후 2004년에 하나은...
  • 2011-08-31
  • [료녕조선문보 2011-08-23 김창영 기자] 참다운 인맥으로 쌓아올린 성공의 금자탑 료녕성 철령방정종이박스유한책임회사 오광훈리사장을 만나본다 오광훈리사장 오광훈(吴光勋) 프로필 1969년 1월 13일 철령시 출생 1987년 9월-1991년 7월 대련리공대학 1991년 10월-1996년 8월 철령시 은주구민정국 1996년 8월-1997년 4월 ...
  • 2011-08-23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