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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금은 진흙속에서 그 빛을 잃지 않는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2년11월12일 12시51분    조회:6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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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름 : 김태근
   ㅡ 언론인 김태근씨의 사업실적을 그려본다.
 


       이야기 첫머리에서
 
   김태근선생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별반 많지 않을수 있겠지만 국제방송의 아나운서 "김태근" 하고 이름 석자를 대면 아는 사람들이 많을것이다. 더우기 그의 혁혁한 방송인 생애를 언급하면 사람들은 감탄을 더 금치못할것이다.
   1990년 베이징아시아게임 개막식과 페막식 그리고 롱구,배구 생방송으로 중국국제방송의 스포츠생방송중계의 서막을 열어놓은 김태근,
   제43회천진세계탁구선수권대회,2002년한일월드컵,14회부산아시아게임 ,베이징유니버시아드,대구유니버시아드,제15회도하아시아게임 등 중대행사에서 특파기자로 활약한 김태근,
   베이징세계녀성대회,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전국정협대회의 현장취재와 중계방송을 훌륭히 감당한 김태근이다.
   90년대에 진입하여 김태근씨는 국가급,국제급 론문을 수두룩히 펴내고 론리성이 강하고 실용성이 풍부한 저서 "현대 방송리론"을 출간하였다. "마지막 전쟁", "사랑을 그대 품안에", "추억" 등 수십집의 한국드라마를 중문으로 번역하여 중앙텔레비에서 방영했고 수십부의 중국 다큐멘터리를 한국어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뛰여난 실력을 인정받아 그는 국내 조선어방송계통에서 두번째로 방송지도(고수급)직함을 따냈다.
   "베이징의 한식점", "고향을 지켜 부유의 길로", "신년의 종소리" 등 수많은 작품들이 국가급,국제급 (한국KBS서울포라이드)상을  수상했다.
 
     인생의 전환
 
  력사는 지금으로부터 장장 40년전으로 거슬로 올라간다.
  1972년 5월 18일, 보기 드문 쾌청한 봄날이다. 해빛은 유난히 따사롭고 바람기 한점 없이 잠풍하다. 김태근씨는 농민들과 함께 성수나서 때이른 모내기를 하고있다. 그는 부지런히 모를 꽂으면서 열심히 "토끼전"을 엮어간다. 일터에 태근씨가 나타나기만 하면 사람들은 만담이나 옛말을 하라고 졸라대는것이 이 촌에서 관습으로 되였다. 책을 많이 보고 구변이 좋은 태근이였기에 사람들이 직접 보는듯이 형상성있게 구수하게 말을 엮기에 그가 있는 장소면 언제 조용한적 없고 항상 웃음소리로 환락에 젖군 한다.
   김태근씨의 옛말에 정신 펼려 모두들 일해도 힘든줄 모르는데 장흥공사 당위 김천수서기(중앙민족대 졸업)가 자전거를 타고오다가 입에 손나팔을 대고 소리쳤다.
   "태근이, 어서 이리 와!"
   평시에 먼 발치에서나 바라볼수 있던 공사당위서기의 부름에 태근이는 움쭐 일어섰다.
  "네? 저를요?"
  "그래. 북경국제방송국에 합격통지가 내렸다."
  아,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모춤을 쥔채 멍하니 제자리에 굳어져 있던 태근이는 순간 "와ㅡ"하는 환호소리에 펄쩍 제정신이 들었다.
  논판에서 춤판이 벌어졌다.

 

우리 마을에 경사 났네.
   개천에서 룡이 날은다.
  우리 태근이 북경 간다.
  얼시구 절시구 지화자 좋다.

  이 시각 태근씨는 산천이 떠나갈듯 막 환성이라도 지르기 싶었다. 매일과 같이 고락을 나누던 죽마고우의 딱친구들도 마치 자기일처럼 즐거워했다.
  5월 25일, 김태근씨는 고향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북경행 렬차에 몸을 실었다. 일매진 가로수를 뒤로 밀며 기차는 흰김을 뽑으며 지축을 울리며 줄기차게 내달리건만 태근씨는 오늘의 기차가 특별히 늦은것만 같았다.
   차창밖으로 청산록수를 물끄럼이 바라보는 태근씨의 눈가엔 저도 몰래 이슬이 맺힌다.량식창고에서 쌀마대를 메던 일,장백의 림해에서 목탄을 굽던 일,벌목장에서 아름드리나무를 메야 나르던 일들이 화면처럼 눈앞으로 흘러간다.
   지난해 여름이다. 태근씨가 백하발전소건설장에서 한창 일하고있을 때 안도현무장부의 최참모가 그를 찾았다.
   "태근이,중앙방송국에서 아나운서를 모집한단다. 만담이나 사회를 하는것처럼 한번 멋지게 해보렴."
  과연 꿈꾸는 사람한테 항상 기회가 주어지는 법이다. 장차 연극배우나 기자에 자기의 미래를 걸고있던 태근이로서 이는 얻기 힘든 절호의 기회였다.
  태근씨는 농민중대의 조선족젊은이들과 함께 시험장으로 달려 갔다. 연변 각지에서 모여온 천여명의 남녀청년들가운데서 확실히 목소리가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일차 시험에서 합격자명단에 들어 태근씨는 연변인민방송국에 가서 학습할수 있는 행운을 지니게 되였다.
  시험관으로는 중앙인민방송국의 김형직선생과 연변인민방송국의 박홍섭선생이였다. 박홍섭선생은 고맙게도 직접 방송을 지도해 주었다. 시험을 친후 상당한 기간 아무 소식이 없었다. 마치 한강에 돌을 던진격이였다. 그는 방송에 두었던 미련을 포기해 버렸다.
   호수처럼 잔잔하던 그의 가슴에 파문을 일게한것은 북경국제방송국 조선어조 김성철조장이 연변에 나온 때였다. 김성철조장은 김태근이를 포함하여 몇 사람을 개별적으로 만나보았다. 태근씨는 또다시 부풀어오르는 기대감을 안고 신문랑독을 부지런히 하면서 오늘까지 화술의 고삐를 단단히 쥐고있었다.
   "태근씨, 새로운 환경에서 우리 함께 잘해 보자구."
  이 소리에 태근씨는 깊은 명상에서 깨여났다. 연변방송국 방송원학습반에 함께 참가했고 국제방송국에 함께 입사하는 서창술씨였다. 두손을 맞잡고 결심을 다진 그들 둘은 38년간 얼굴을 맞대고 아나운서의 행로를 같이 걸어왔다.
 
    돌이켜보기도 싫은 동년시절
 
  장백산 줄기 밑에 산 좋고 물맑고 인심후한   안도현 장흥촌이 자리잡고있다. 김태근씨는 이 고장에서 태여나 여기서 자라났다. 그의 성장기는 가난이란 두 글자가 그림자처럼 떨어질줄 몰랐다. 변변히 먹지도 입지도 못하는 기근속에서 그저 의지만은 키워냈다. 언제 책가방이 있겠는가? 어머니가 낡은 천을 잘라내여 책보를 만들어 주었다. 연필꽁다리도 손끝에 잡히지 않을 때까지 아껴 썼다.학교식당의 식비를 미처 대지못하면 그는 하루 두끼로 주린 배를 달래였다. 태근씨한테는 그래도 가난이 좋았다. 가난이 동력으로 되였다. 가난한 사람한테는 부자가 될 일과 분투할 일만 남았으니깐! 이처럼 눈물겨운 동년시절이였지만 총명하고 령리한  태근씨는 학습에서 출중했다. 하여 반주임의 칭찬은  물론 동네 어른들의 칭찬도 밥먹듯 했다.현성 중학교에 입학해서 학습에선 줄곧 반급 앞자리에서 달리였다. 그는 과외독서를 무척 즐겼다. 작문에서 선생님과 동학들로 하여금 혀끝을 차게 했다. 당시 태근씨의 어린 심령에 가난한 면모를 개변시키려는 웅심은 없었지만 그래도 농촌에 뿌리 박을 자기가 아님을 알고있었다.
   그는 "강철은 어떻게 단렸되였는가?" 소설에서 강철같은 의지를 련마했고 "삼국연의", "수호전"을 보면서 의리를 중히 여길줄 알았으며 "성냥파는 소녀"가 이어대는 성냥불을 빌어 책속의 소녀와 함께 미래에로의 꿈을 익혀갔으며 "뢰봉", "초유록"연극을 관람하면서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인생관을 키웠다. 그는 공기 좋고 경치 좋은 대자연속에서 만사를 잊고 마음을 비우고 묵묵히 자기의 앞날을 그려보았다.
   이처럼 한창 피여나는 화초에 폭설이 쏟은것은 바로 "문화혁명"이였다. 중학교를 미처 졸업하기 전에 공부할 기회를 잃었다. 도처에서 파벌싸움이 벌어졌다. 그럴 때면 태근씨는 집에 돌아가 책속에 파묻히군 했다. 학교에서 조직된 모택동사상선전대에서 공연을 할 때면 태근씨는 조선족의 전통종목인 "재담", "삼로인" 같은데서 천재적인 기질을 발휘했으며 선전대 사회는 당연히 김태근씨였다.
  학교가 문을 닫고 학생들이 농촌으로 하향했다. 그도 고향에 돌아와 호미자루를 쥐였다. 그러면서 마을의 방송소에 달려가 무보수로 "기자",겸 "방송원"으로 일해 주었다. 이것이 그의 언론인으로 발족시킨 받침돌이 되였으며 아나운서로 된 결정적인 인소가 아닌가 싶다.
 
     "남이 씹어준 떡은 맛이 없다."
 
  중국국제방송국은 세계를 상대로 40여개 외국어로 방송하는 세계 최대의 국제방송국이다. 외국어방송은 당연히 대학생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조선어부에도 쟁쟁한 학력의 어른들이 대다수다. 하지만 먹물을 크게 적시지 못한 태근씨에게 있어서 모든것은 령으로부터 시작해야 했다. "둔한 새가 먼저 난다"고 그는 방송훈련을 다그치는 한편 시간만 나면 북경도서관을 제집처럼 생각했고 여기 저기서 책을 빌려다 목마른 사람이 물마시듯 탐독했다.중요한 부분은 꼭 메모하군 했는데 이렇게 메모한 필기장이 열권도 훨씬 넘는다. 중앙민족대학에 들어가 강의를 듣고 연변대학 통신학부의 졸업장을 받아안았으며 국가의 파견을 받고 평양김일성종합대학에 가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다. 그야말로 그의 사전에는 피로와 간고하다는 단어가 있을수 없다.
  "남이 씹어준 떡은 제 맛이 나지 않는다." 이는 "초유록"연극에서 란고현 당위서기 초유록이 늘 입에 담고있는 말이다. 무슨 일이나 제일선에 나가 조사하고 실천하는 초유록의 사업작풍을 여실히 반영한것이다.
   국제방송국에 입사하여 아나운서로 일하는 기간 태근씨는 이 말을 수없이 마음속으로 반복하며 자신을 채찍질 하였다. 피타는 노력으로 태근씨는 "입만 열면 그대로 문장이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1990년 베이징아시아게임에서 국제방송국 조선어부에서는 개막,페막식,축구,배구,롱구 실황중계방송을 하려는 대담한 구상을 내왔다. 이리하여 아나운서 중 선배인 윤봉현선생이 축구실황을 맡고 김태근씨가 개막식, 페막식 그리고 배구,롱구실황을 맡게 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조선중앙방송의 리상벽선생은 실황록음테이프를 보내 왔고 한국KBS방송의 박광희부장은 관련서적을 부쳐왔다.수개월간의 실전훈련을 거치고 또 여러 사람들의 뜨거운 마음에 받들려 베이징아시아게임의 각종 스포츠중계방송을 원만히 마치여 아시아게임조직위원회로부터 우수상을 받았다.
   "떡은 내가 직접 씹어보고 맛을 알아내련다." 태근씨는 제맛나는 방송을 위해 모든것을 자신이 직접 해나갔다. 방송초기에 모방이란 어쩔수 없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이 씹어준 떡맛이다. 꼭 김태근의 방송풍격을 모색하고 살려야만이 방송에서 비전을 가져올수 있다. 방송에서 도전과 비전이 없다면 방송의 생명력을 상실한다고 생각하는 김태근이였다. 그의 방송에서 제일 고귀한 점이아라면 바로 친절성이다. 부드럽고 귀맛을 돋구어주는 그의 목소리는 청취자들로 하여금 더없이 편안하게 해준다.
   태근씨는 특집프로의 원고제작으로부터 관련 인터뷰섭외에 이르기까지 대담히 구상하고 직접 자신이 맡아 했다.2002년 새해맞이 특집프로에서 한국의 최진희가수의 노래에 앞서 전화인터뷰를 했다. 사전의 조률을 거쳐 아주 자연스럽게 밀착된 인터뷰로 하여 방송국임직원들의 경복을 받게 되였고 해내외 청취자들의 좋은 반향을 보였다. 그는 이런 형식으로 한국 유명한 가수 조용필과도 두번이나 전화인터뷰를 진행하였다.
 
  해외 특파기자,언론인 업그레이드
 
   30여년의 방송인 년륜에 만족하지 않는 김태근씨는 2002년에 해외특파원으로 서울에 파견되였다.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 독립적인 사업은 그의 인생에 또 새로운 장을 펼치였다."중국기자"로서 언제나 어디서나 일체 언행은 단한번의 실수와 흐트러짐이 없이 한국인들한테 본을 보여주어야 했다.그는 회의장소나 술장소라 해도 마음의 탕개를 늦춘적 없고 자신을 단속하였다.허지만 손발이 묶이여 일하는 김태근이 아니다. 서울에서도 그는 한국의 방송기자들을 따라 배워 현지뉴스를 리포터쟝르로 전해주었으며 지어는 중요사건에 대한 론설까지도 달아 방송의 특색을 살렸다. 또한 아나운서와 특파기자간 대담형식으로 진행하여 예상외로 좋은 효과를 보았다. 특파기자로서 중요사건,중요한 행사의 현장에서의  취재는 태근씨의 제일 선택이였다. 중국민항기 추락사건,한국대구지하철 참사,로무현대통령 취임식현장,로무현대통령 탄핵, 수입쌀 반대 농민 집회...모든것은 현장리포터로 전달했다. 특히 대구지하철참사사건 뉴스는 중앙텔레비,상해동방방송, 북경방송 등 국내의 거의 모든 매체들에서 김태근씨의 기사를 퍼갔다.
   방송기자로서 단순히 한가지 형식에만 만족한다면 진전이 없다. 김태근씨의 다양한 쟝르의 글은 언론인의 품위를 보여주고 방송을 다양하고 재미있게 만들어 주었다. 국제방송에서 수년간 연출이자 담당편집인 "청취자의 벗"프로는 조선과 한국, 그리고 국내외 청취자들간의 친선의 다리로 되였다. 지금도 그는 일본, 한국 등 여러나라 청취자들로부터 찬양의 편지나 전화를 수없이 받군 한다.그가 서울에 진출했다는 소식을 알게 된 한국청취자클럽에서는 태근씨한테 감사패를 증정하기도 했다.매번 이럴 때면 태근씨는 태여난 자신이 자랑스럽고 또 아나운서로 된 자호감으로 가슴 뿌듯해나군 한다.
   김태근씨의 취재상황과 외사활동의 내역을 살펴보면 더없이 화려하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한다.
   중국 조자양총리의 조선대표단 접견시 통역,전국 리서환 정협주석 조선대표단 접견시 통역,만리 전국인대위원장 조선대표단 접견시 통역을 감당했다. 1984년 중국방송학자 신분으로 조선을 방문하여 김일성주석이 마련한 연회에 초대되여 그와 건배를 했으며 2002년 청와대에서 한국 김대중대통령을 취재했으며 2004년 청와대에서 한국 로무현대통령을 취재했으며 2004년 대통령당선직전인 서울시장 리명박을 취재하였다. 이러한 굵직굵직한 취재와 외사행사에서 김태근씨는 평소에 다지고 다져온 출중한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였다.
 
  "성 쌓고 남은 돌도 제위치면 빛을 발사해!"
 
 보통 사람들은 정년퇴직을 하면 "성 쌓고 남은 돌"이라 하며 맥을 버린다. 이는 겉보다 속이 먼저 늙어지는 표현이다. 김태근씨는 2010년 12월 31일, 39년 세월을 함께 해온 중국국제방송국에서 정년퇴직을 했다. 그는 "성 쌓고 남은 돌일지라도 적당한 위치에서 빛을 발산할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말할 뿐만아니라 이렇게 실천하고있다.인민일보가 서울에서 "한국어판"을 창설하는 기간 서울특파기자로 잇던 태근씨는 인민일보 서보강가자를 알게 되였다. 서로간 정보를 주고 받으며 익숙해 졌다.그의 소개로 태근씨는 퇴직하자 바람으로 인민일보 한국대표처에 초빙받아 한국어판 편집국장의 중임을 떠메게 되였다. 인민일보 해외판 본사에서는 김태근씨의 품덕과 풍부한 언론인 경력 그리고 번역실력을 인정하고 한국에서의 인민일보 한국어판 출간중임을 확실하게 맡겨버렸다. 퇴직후에 할일이 있다는 자체가 안위이고 보람이다. 태근씨를 놓고 보아도 퇴직은 결코 생활의 종점인것이 아니라 생활의 전환점이며 새 새활의 시작이라 할수 있다.
  김태근씨가 지금 책임지고 발행하는 인민일보 한국어판은 서울에서 이미 100기까지 성과적으로 발행되였다. 이 신문은 한국의 정부요해부문과 중국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모든 사업가, 직장인, 국민들한테서 사랑을 받는 신문으로 거듭나고있다.
 
   맺는 말
 
  김태근- 그는 친구들과의 우정을 더없이 돈독히 하면서 사업에서 놀라운 업적을 쌓았다. 그의 혁혁한 방송생애를 돌이켜 보면 이 글의 제목이 명실상부라고 저마다 머리를 끄덕이리라 믿어진다.
  명지한 사람은 항상 자신의 지성을 숨기기 위해 노력한다. 대저 깊은 곳에서 흐르는 물은 요란치 않고 꽉 찬 수레는 덜렁거리지 않는 법이다. 명망이 있는 언론인으로서의 김태근씨는 항상 자신을 과대하지 않고 품위를 낮추고있다. 그의 취재나 외사활동의 거사에 대해 지어 절친한 사이의 친구들도 모르고있었다. 겸허한 김태근씨가 내뿜는 향기야말로 경박한 사람보다 백배의 가치를 느끼게 한다.
  진주와 보석은 아무곳에서나 눈부신 빛을 잃지 않고 그 고귀한 기질은 영원히 변함이 없는 법이다. 김태근씨야말로 진흙속에서도 빛을 발사하는 순금 같은 존재이다. 언제나 빛을 잃지 않는 순금의 정신을 본받아 김태근씨는 지칠줄 모르는 정열로 혼신을 불태우고있으며 아름다운 무지개를 당겨다 자신의 여생을 화려하게 장식해가고있다
 
김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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