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정직과 정열로 수놓은 무용인생
조글로미디어(ZOGLO) 2012년12월13일 16시01분    조회:482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인물이름 : 최미선
정직과 정열로 수놓은 무용인생
 

点击浏览下一页

 

변대학 예술학원 무용학부에서 본과생들과 연구생들에게 조선민족무용과 무용연구방법론 등 과목을 가르치고있는 최미선교수는 중국의 최고무용명문학부인 북경무용학원의 객원교수이기도 하다. 별로 해놓은 일도 없어 쑥스럽다고 하면서 극구 취재를 사양하는 최미선교수와의 인터뷰는 지인을 통해서야 어렵사리 이루어졌다.

최미선교수는 자신은 인간의 덕목을 그 어떤 기술보다 우위로 본다고 하면서 취재내내 인간이 갖추어야 할 덕목에 대해 많은 비중을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의 이러한 세계관은 스승이셨던 박용원선생님의 준절한 가르침과 갈라놓을수 없다.

1956년에 왕청현에서 출생한 최미선교수는 1972년 10월에 “10년 동란”후 첫 패로 연변예술학교 무용학부에 입학하여 무용인생의 스타트를 뗐다. 1975년에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뒤 4년간 화룡현문공단에서 무용배우로 활약하다가 모교로 돌아와 교편을 잡으면서 박용원선생님에게서 우리 민족 무용의 진수를 전수받기 시작했다.

‘평생 중국조선족무용에 헌신하라’는 선생님의 준절한이름이 평생 저를 ‘괴롭히면서’ 제가 앞으로 나갈수 있는 동력이 되였습니다. 선생님의 제자를 자식처럼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씨와 성실성을 바탕으로 하는 철두철미한 장인정신이 바로 나의 무용인생의 버팀목이 되였습니다.”

미선교수는 박용원선생의 문하에서 조선족무용의 고유의 률동과 숨결을 탐구하는데 많은 시간과 정력을 투자하였다. 성공의 초석은 언제나 땀과 노력으로 다져지는 법이다. 그의 성과는 단계별로 무용표현, 무용창작과 무용교수에서 낱낱이 구현된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초까지 최미선교수는 무용표현에서 유독 뛰여난 실력을 남김없이 보여주었다. 1980년, 전국 제1회 무용콩클에서 표현 3등상을 수상하기 시작하여 1982년, 1983년에는 연변청년무용콩클에서 련속 2년간 표현 1등상을 수상하였으며 1990년에는 동북3성군분구 무용콩클에서 표현 1등상을 수상하였다. 이 시기 그는 일본, 미국, 한국 등 나라의 요청으로 조선족무용을 선보여 관중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미선교수는 배움을 인생의 락으로 생각하고 배움의 고삐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1998년에 한국 세종대학에서 석사학위를, 2004년에 한국 명지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동안 갈고 닦은 재질이 무용창작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1998년부터 시작된 무용창작은 2006년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였다. 이해부터 그는 1년에 평균 4, 5편의 무용작품을 쏟아냈다. 2006년 무용시 “천년아리랑”중의 “북춤”은 전국소수민족무용콩클에서 우수종목상을, 2009년, 무용 “희나리”는 전국 “제자”컵 무용콩클에서 표현 2등상과 창작 3등상을 수상하였으며 2009년 국경절에는 문화부의 초청으로 국경 60돐 “부흥의 길” 창작소조에 편입되여 국가문화부로부터 영예증서를 발급받았다. 2011년에는 30회 TV드라마 “장백산 아래 나의 집”에서 무용안무를 맡아 우리 무용의 아름다운 가락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최미선교수는 지금까지 300여명에 달하는 제자들을 양성하였는데 적지 않은 제자들이 대학과 문예단체들에서 두각을 내밀고있다. 그중 굵직굵직한 국가급상을 수차 수상한 남성군무 “서혼”을 창작한 연변가무단의 안무가 김희는 최미선교수의 수제자이기도 하다.

찍 길림성 제8기 인민대표(1993년), 중국부녀 제7차 전국대표대회 부녀대표로 당선되고 현재 연변민간문가협회 부주석, 연변무형문화유산전문가소조 성원으로 활약하고있는 최미선교수는 무용을 자신의 분신으로 삼고 교수와 학술연구 및 창작에서 자신의 열과 성을 다하고있다.

연변일보 김인덕 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624
  •  돈이란 벌줄도 알아야지만... 료녕신성그룹 표성룡회장의 경영리념 인생추구료녕신성그룹 회장, 료녕성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 중국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단 집행회장 표성룡(58)씨는 1980년대초반, 20대에 사업의 스타트를 떼서부터 지금까지 30여년간 산전수전을 겪으며 창업의 터전을 굳건히 닦아 현재 그룹산...
  • 2010-01-12
  • 갈길이 멀고 험난해도세상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태도는 누구나 각각이다. 혹자는 돈방석을 깔고앉아 안락하게 살아가길 원하고 혹자는 자신이 하고싶은 일에 환장(?)해서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꾸준히 앞만 보고 내달린다. 이 글에 소개하고자 하는 연변가무단의 김홍도가수가 바로 후자에 속하는 인물이다. 어려서부...
  • 2010-01-12
  • 한 녀배우의 얻은것과 잃은것 ㅡ연변가무단 연극배우 윤향화에 대한 이야기 “어려서부터 소망했던 배우의 길을 걸으면서 정면인물역, 반면인물역은 물론 처녀역에서부터 60대 할머니의 역에 이르기까지 다면수로 활약해온 지난 17년을 돌이켜볼 때 얻은것도 많고 잃은것도 많다. 얻은것은 미소하나마 잘 하지도 ...
  • 2010-01-10
  • 연변의 아들 조선족혁명선구자 연변조선족자치주 제1임 주장 주덕해 주덕해는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이며 우수한 민족간부이다. 걸출한 조선족정치활동가인 그는 당과 인민에 충직한 공산주의전사이다. 이는 1982년 9월 연변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30주년을 경축할 당시 중공중앙총서기인 호요방이 연변력사에...
  • 2010-01-08
  • 한국 오성그룹 강호사장.  한국에서 휘날리는 오성 붉은기수원시 “오성그룹” 강호사장의 일기에서1949년 10월 1일은 중국역사의 한 페이지를 여는 날이였다. 이날 웅장하고도 장엄한 천안문성루에서 모택동주석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전 세계에 알렸다. 그 후로 중국정부는 수많은 파란곡절을 겪...
  • 2010-01-04
  • 동심에서 울고웃으며 20년 연길시새싹유치원 송해선교원의 사업담평범한 일상을 소중히 여기면서 20여년간 시종일관하게 유아교육사업을 사랑해 온 교원이 있는데 그가 바로 연길시새싹유치원 송해선교원이다. 송해선교원은 아이들을 포옹해주고 사랑을 주는 엄마의 모습과 따스한 마음가짐으로 매일 아침 이슬과도 같...
  • 2010-01-04
  • 한국음식점 운영 김미자씨 “중국 오지에 한국음식 전할래요”[쿠키 사회] 중국 소수민족 가운데 조선족은 특히 부지런하고 억척스러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이난성(海南省)에서 한국음식점 ‘한강정’을 5곳이나 운영하는 김미자 씨도 그 가운데 한사람이다. 그는 중국 최대 휴양지인 하이난성 하이...
  • 2009-12-30
  • [공화국창립60돐 기념 특별기획 60주년에 만나본 60인] -기획보도(18) 우주연구서 획기적 돌파 가져온 조선족과학자 중국달탐사공정 부총설계사, 중국과학원  유일한 조선족원사 강경산 만나본다 길림조선문보 장춘영기자/인민넷 김홍화기자...
  • 2009-12-29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