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성병원, 흑룡강성중일우호병원 부원장 김정석의학박사를 찾아
흑룡강성병원이라면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많을것이지만 1800여자리 침대, 3100여명 직원을 갖고있는 이 병원의 실무담당자가 조선족이라는 사실을 알고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것이다.
지난 12월 12일 할빈에서의 첫 취재에서 만난 흑룡강성병원 및 흑룡강성 중일우호병원 부원장이며 제1보통외과 주임인 김정석(金正锡, 58살)의학박사는 성급병원 실무담당을 책임진 부원장이라는데서가 아니라 의사로서 환자를 대하는 그의 마음가짐과 소신 그리고 따뜻한 마음에서 민족의 자부심과 함께 충분한 감동을 느낄수 있었다.
맨발의사로부터 높은 의덕, 의술을 갖춘 의학박사로
1973년부터 1975년까지 흑룡강성 아성현 아스하공사 성건대대위생소 맨발의사. 이는 김정석박사의 “룡강 10대 건강수호자(龙江十大健康卫士)” 등록표에 적혀있는, 처음으로 의사직업과 관계되는 사항이였다. 그러한 “맨발의사”가 한개 성급병원 부원장으로, 부원장에 앞서 높은 "의덕, 의술"을 갖춘 의학박사로 되기까지는 남들로서는 리해하기 힘들고 감내하기 힘든 각고의 노력이 밑받침되여있었다.
흑룡강성 아성 태생인 김정석박사는 중국에서 대학입시가 회복되면서 첫패로 할빈의과대학 의료학부에 입학하였으며 졸업후 1983년까지 11개월간 아성현병원 외과의사로 근무하다가 흑룡강성병원 제1보통외과 의사로 전근했다. 당시 흑룡강성병원은 중일우호병원으로 선정되여 일본과의 교류가 많았다. 이로 인해 1985년 그는 북경언어학원에 파견되여 1년간 일본어를 전공하게 된다.
세계 일류의 병원에 가 가장 선진적인 외과의료기술을 배워오기 위하여 김정석씨는 1989년 “사사카와의학장학금” 에 도전했다. “사사카와의학장학금”은 1986년 중국 위생부와 일본재단이 북경에서 10년을 기한으로 체결한 의학장학금 프로젝트이다. 김정석씨는 흑룡강성 차석의 성적으로 사사카와의학장학금 다섯번째 대상자로 선정되여 일본의 유명한 외과전문가인 도꾜대학 의학부 제1외과 모리오카 야스히코교수의 연구생으로 류학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박사공부를 하면서 그가 맡은 과제는 췌장암 발병과 관련된 과제였는데 적어서 4년 내지 6년 정도 걸려야 박사학위를 받을수 있었고 더우기는 도꾜대학에서 그처럼 거대한 연구과제를 단기류학생한테 주려고 안했다고 한다. 그 과제를 위해 김정석씨는 하루 24시간을 이틀 맞잡이로 쓰면서 연구를 통해 암증변이과정을 증실해내고 8개월이라는 시간에 모든 수치를 정리해냈다.
2년여의 노력을 들여 결국 1992년 김정석씨는 의학박사학위를 따냈는데 당시 16명 지원자가운데 한명의 일본인을 포함하여 단 2명만 합격되였다고 한다.
그의 피타는 노력끝에 이어진건 의학박사라는 학위뿐만아니였다. 잇달아 여러가지 유혹들이 그를 향해 손짓했다. 현지 의학분야 연구소들에서 취직을 요청해왔는가 하면 일본중의진흥학회에서는 고액의 월급으로 그를 초빙하려 했고 또 어떤 곳에서는 연구경비까지 약속하며 그를 유혹했다. 하지만 김정석씨가 생각한건 자신의 물질적인 부가 아니라 자기를 길러준 흑토의 고향인 흑룡강이였다. 게다가 농촌에서 맨말의사로 있으면서 백성들의 진료고충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그였다.그래서 토나미종합병원에서 일하면서 9개월간의 림상경험을 축적한 뒤 단연 귀국했다.
“사실 일본에 남았더라면 생활적으로는 부유했을지는 모르겠지만 필경은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흑토지를 잊을수 없었다.”
귀국후 국내 허다한 대학과 병원들에서 우월한 사업조건을 제시하며 그를 보고 손짓했는데 그중에는 절강대학, 북경협화병원, 중일우호병원 등 유명한 대학, 병원도 들어있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건 여전히 흑룡강성병원이였고 여전히 제1보통외과였다. 1998년에 제1보통외과 부주임이던 그는 특별연구원으로 선정되여 일본에 가 1년 정도 있게 되였는데 당시 병원측에서는 그가 돌아오지 않을것이라 생각하고 보통외과 주임 후임까지 물색해놓은 상황이였다. 하지만 그때에도 김정석씨는 흑룡강성병원을 선택했다.
"환자의 요구가 바로 의사의 책임"
"환자의 요구가 바로 의사의 책임이다. 환자에 대한 사망위협을 줄이기 위해서는 의사로서의 책임감은 우리로 하여금 높은 의료기술을 갖추고 모든 위험에 대처할것을 요구하고있다." 김정석박사가 자주 하는 말이다.
의료관리, 회진, 병실순시, 수술, 질병사례분석, 학술회의참가…김정석주임의 일과는 항상 빼곡하게 적혀있고 빠듯하게 이어지고있다. 하루 정상수면시간을 자본적이 별로 없다. 야밤삼경이라도 전화벨이 울리면 환자구급에 나선다.
"흑룡강성병원의 전반 의료사업을 책임지고있는 김정석부원장은 평소 사업에 참답고 부지런하며 의술, 의덕, 의풍이 높은것으로 소문났다. " 흑룡강성병원 관진화서기가 한 말이다. 이 말이 흑룡강성병원 지도층의 한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김정석박사의 치료를 직접 받았거나 그같은 치료를 직접 지켜보고 느껴온 가족들의 말은 그같은 사실을 더욱더 립증해주고있다.
“김정석부원장이 관리하는 제1보통외과는 의사로부터 간호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책임심이 강하다. 한번은 밤중 11시—12시경에 수술이 끝났었는데 이튿날 아침도 거른채 환자를 보러 온 김정석의사를 보았고 자기 돈을 팔아 환자에게 통조림 등을 사주는것을 보기도 했다. 우리한테 이러한 의사가 있다는것은 우리 사회의 복이라고 말할수 있다.”
김정석의사는 “높은 의술을 갖추었을뿐만아니라 숭고한 의덕을 갖추었으며 정직하고 태도가 상냥해 정말로 환자나 가족들이 신뢰할수 있는 훌륭한 의사였다.”
“그는 부원장으로 승진했지만 조금도 틀을 차리지 않았으며 여전히 상냥한 태도로 환자들을 대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이러한 훌륭한 의사를 바라는것이다.”
지난 2002년 11월의 어느날, 김정석박사는 초청에 의해 할빈시 한 대형병원의 합동진찰에 참가하게 되였다. 환자는 이춘시에서 온 당시 43살의 고헌장이라는 사람이였는데 뇌출혈로 당지 병원에서 뇌수술과 위절제수술까지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수술후 8일째 되는 날 출혈이 심각하여 할빈시의 모 대형병원에 긴급 후송되여 재차 수술치료를 받았는데 탈수, 산중독, 빈혈, 중도복강감염, 십이지장 봉합부위루출 등 여러가지 합병증으로 생명이 경각을 다투고있었으며 병원측에서는 가족에 후사까지 준비하라고 할 정도였다. 당시 환자측에서는 “환자의 구급치료를 위해 이미 26만원을 썼는데 만약 20만원을 더 쓴다면 환자를 구할수 있는가”고, 도대체 얼마만큼 가망이 있는건가고 물어왔다. 김정석박사는 “의사로서 실날같은 희망이 있다면 마땅히 백퍼센트 노력해 치료할것”이라며 “만약 전력을 다한다면 희망이 없는것은 아니다”고 하였다. 그런데 김정석박사가 말한 "실날같은 희망"에 큰 기대를 품은 환자가족은 사흘간의 수소문끝에 환자를 김정석의사가 주임으로 있는 제1보통외과에 무작정 이송해왔다.
"병원마다 치료할 가망도, 가치도 없다면서 돌려보내는데 환자를 그대로 두는게 달갑지 않거니와 포기할 생각도 없습니다. 당신은 실오리 같은 가망이라도 있다면 노력할것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환자안해의 눈물어린 하소연과 생사를 다투고있는 환자와 가슴을 졸이고있는 가족을 생각하고는 즉시 입원수속을 밟고 전문치료에 돌입했다. 매일 3~4차의 다른 수술때문에 지치고 힘든 몸이였지만 김정석의사는 고헌장의 병세와 치료실태를 매일 같이 파악했으며 상황이 심각해지자 아예 환자의 구급실과 10메터도 안되는 사무실에 “입주”했는데 그렇게 걸린 시간이 48일이였다.
고헌장환자를 치료하는 나날들은 김정석과 그의 제1보통외과팀이 한 환자의 생명여부에 도전장을 내걸고 싸워온 나날들이였다. 쇼크—구급, 재차 쇼크—재차 구급… 그런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걸린 시간이 적지 않게 3개월, 사망판결을 받았던 고헌장환자는 끝내 치료를 마치고 퇴원하게 되였다. 너무나도 감동된 가족들은 수차 두툼한 돈뭉치도 건넸지만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것이 의사의 천직”인 김정석의사는 일일히 거절했다.오히려 한해 뒤 이춘에 합동진찰을 간 기회에 고헌장환자를 만나보고 어려운 살림에 보태라고 500원을 건네주기도 했다.
당지 병원에서는 생존가망이 없다는 판단까지 내린 환자를 치료한 사례, 다른 병원에서 오진 및 착오적인 수술로 상태가 악화된 4명 환자를 수술해 건강을 되찾게 한 사례,이런한 사례는 수두룩 하다.
“외과의사로서 마땅히 새로운 수술방식을 끊임없이 탐구하여 더욱 많은 환자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본다.” 이에 따라 김정석의사는 1993년 귀국후 림상1선에서 분전하면서 류학을 통해 배운 선진적인 기술을 수술에 응용하였다. 국내 최초“십이지장이두부보류절제술(保留十二指肠胰头部切除术)”을 시작하였고 흑룡강성 최초이자 유일하게 위후벽췌장단절삽입식문합수술(胃后壁胰腺断端嵌入式吻合手术)을 실시하였는데 성공률이 100%에 달한다고 한다.
“하루 평균 3—4차의 수술을 할 정도였고 가장 길게는 한차례 수술이 11시간 반 걸린적도 있다”는 김정석박사, 수술에 녹초가 될 정도였지만 수술뒤 꼭 환자를 찾아 수술상황을 체크해야 시름놓는다. 그한테는 휴식일에는 수술하지 않는다는 법이 없다. 지난 2008년 흑룡강성병원 실무담당 부원장으로 승진한 뒤에도 비록 이전보다는 수술차수가 조금 적어졌지만 여전히 수술은 계속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그가 한 수술차수만 1만여차에 달한다.
“수많은 영예는 나에 대한 격려이고 훌륭한 의덕, 의술, 의풍은 백성들의 바람”
김정석박사는 부원장으로 승진한 뒤 “권력”보다 “책임”이 더 많아졌다. 사스, 문천대지진, 동계아시안게임 등 대형사건때마다 의료지원을 담당했고 또 흑룡강성 3급갑등병원으로서 대응지원하고있는 현급병원을 위해 뛰여다녀야 했다.
“남을 보고 잘하라고 요구하기에 앞서 스스로가 잘해 본을 보여주어야 한다.”이는 김정석부원장이 늘 하는 말이고 실천해온 행동이였다. 그래서 기층병원을 돕는데 앞장서고 있을뿐만아니라 각 과, 실 담당자들한테 솔선수범할것을 요구해 나서고 있다.
김정석박사가 거절한 “사례금”만 해도 1년에 차수로 수백차, 돈액수로는 수십만원이 넘는다. 대신 그가 환자들한테 지불한 돈이 얼마인지 모른다. 자기가 직접 목숨을 구해준 환자에게 치료비를 지불해주고 려비가 없게 되자 1000원을 건네준 사실, 환자가족을 대신해 통조림을 사준다거나 생활이 어려운 환자들을 만나면 서슴없이 호주머니를 털어 려비를 대주거나 약비를 지불해주거나… 이러한 일들은 그한테 너무나도 일상화되여있었다. 남들이 김정석박사를 높이 사는건 단지 높은 의술뿐이 아니였다. 바로 이같은 고상한 의덕이 안받침되여있었기 때문이였다.
높은 의술과 함께 숭고한 의덕, 의풍으로 김정석부원장은 수차 흑룡강성 직속기관 우수공산당원, 의료계통 기준병주임, 흑룡강성로력모범, 흑룡강성 제5회 우수한 충복 등 영예는 물론 전국 5.1로력훈장, 전국 10대 우수의사, 전국의약위생계통 선진개인, 전국우수당원기준병, 전국의덕기준병, 사사카와의학장학금프로젝트 우수귀국연수생상, 귀국인원 보국상 등 영예를 받아안았다.
그는 또 보통외과 림상과학연구사업에 종사한 26년래 국제간행물에 발표한 13편의 론문을 포함해 도합 60여편의 학술론문을 발표하였으며 중국학자로는 유일하게 일본에서 출판된 "췌장병학" 81명 편자중의 일원으로 되기도 하였다.
취재중 경하할 소식이 전해졌다. 김정석부원장이 흑룡강성 27만명 의료위생계통 일군가운데의 유일한 한명으로 이제 곧 있게 될 중국공산당 제18차 대표대회 흑룡강성 대표로 추천받은것, 이는 흑룡강성병원 설립 53년 력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김정석부원장은 권력이나 물질적인 부나 명예보다 의사라는 직업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게 나름대로의 소망이였다.
“의사로서 최대의 소망은 세계 선진적인 외과수술기술을 습득하고 외과수술난제를 부단히 연구, 탐구함으로써 최대한 환자들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것이다.” 어찌보면 이는 훌륭한 의덕, 의술을 바라는 백성들의 바램이였을것이다.
연변일보 전윤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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